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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작품 수필과 꽁트 |
가을의 단상
고민자
‧바다
산엔 가을이 풍성합니다. 허나 바다엔 가을이 없습니다. 바다는 짙푸르고 넓은 가슴으로 하늘을 안고 태양을 키우며, 가을을 익게 합니다. 그래서 가을엔 산이 더 좋습니다.
산정에서 바다를 냐려다 보고 있으면, 바다는 산을 향해 자꾸 헤엄쳐 오려고 몸부림치다가 길게 누운 모래톱에 부딪쳐 몸을 돌려 다시 망망대해로 돌아갑니다.
바다는 우주를 안고 너울너울 춤추려고 합니다. 푸른 물감 더욱 진하게 풀어 흩뿌리고 가을을 외면합니다. 그래서 바다는 영원한가 봅니다.
‧빨래를 널면서
하늘이 푸르고 투명하여 눈이 부시다. 그하늘을 이고 빨래를 넌다.
몇 십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하는 일상생활인데 내가 널고 있는 빨랫가지들은 세월따라 많이도 변했다.
서툰 신접살림 시절. 기대와 실망 속에서 아웅다웅하며 살 땐, 그와 나의 웃음 사이에 뽀얗고 너울대는 기저귀들이 앙징스럽고 예쁜 아가의 옷들과 함께 바람에 하늘거렸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옷들도 커갔다. 양말짝이 많아지면서 나의 삶의 고뇌도 늘어갔고,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학교로 몰려가면서 나도 초등 학교로, 중학교로 잰 발걸음을 옮겨야 했으며, 아이들이 세상을 배우며 진학의 고민에 힘겨워 할 때 나의 주름살도 깊이 패였다.
이제 아이들으 옷가지가 우리 부부의 옷보다 더 크고 길어져 내 검었던 머리카락이 흰머리카락으로 휩싸이니 아이들은 저마다의 생활을 찾아 도심으로 나가고 난 오늘도 정성스레 빨래를 넌다.
고추잠자리가 빨랫줄에 앉아 함께 가을을 말린다.
‧산사에서
“나무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 . ”
백팔번뇌 염주에 담아 한알한알 돌리면서 업장소멸 기도합니다.
자신을 태워 불을 밝히는 촛불처럼 몸과 마음 보두 그리움에 불태우던 시절, 언제나 당신은 먼 산사에서 청정도량 돌며, 목탁소리, 바람소리 담아 가을을 가장 먼저 내게 보여주곤 하였습니다.
촛불자락에 비추는 당신의 그림자라도 꿈에서 지켜볼 수 있을까, 난 외로운 가을밤을 편지지에 담곤 했습니다.
해묵은 편지 뭉치 속에서 나온 빛바랜 단풍잎들, 그 잎새를 들여다보니 우리들의 스러져간 젊은 날들이 보입니다.
해맑은 가을 하늘이 보입니다.
부처님 전에 밝히던 촛불과 향내음 속에 묵묵히 녹아 들던 당신의 마음이 느껴집니다.
차디찬 새벽 법당에서 산 그림자 벗하며 기도하고 책과 씨름하던 당신의 의지가 오늘의 보람이 되어 우리 가정을 지켜줍니다. 그러기에 오늘은 당신 대신 내가 부처님께 합장합니다.
“나무 관세음보살”
‧여행
들국화 무리가 지천으로 피어 가을 들녘을 장식하고 코스모스꽃이 실바람에 몸을 흔들며 손짓하는 곳에 당신의 마음 잔잔히 피어올라 나를 감싸주고 그 속에선 우린 미래를 꿈꾸던 여인들이더이다.
오랫만에 가을 속을 달렸습니다.
호수인냥 푸른 하늘 품으로 마음은 빠져들고 그 깊은 푸름 속에 찌든 삶의 찌거기를 씻었습니다. 강줄기 저만치에 날개 퍼덕이며 어디론가 몰려가는 듯한 갈대의 행렬을 쫓아 나도 마음 자락 펄럭이며 함께 달려갔습니다.
여행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대하는 기대와 옛정을 만나는 반가움으로 마음 설레이게 합니다.
멀리 보이는 산들이 가을로 물들어 너무도 아름답습니다. 능선 따라 계곡을 돌며 파도치는 단풍의 행렬 속으로 나도 파묻히고 싶습니다. 그 속에서 손이 시리 도록 맑은 계곡물에 목을 축이고 예쁜 단풍잎배 띄워 함께 흘러가고 싶습니다.
내 나이 벌써 오십 고개를 넘어 가을 나무들처럼 세월의 뙤약볕에 물들고 언젠가는 한 이파리의 낙엽이 되어 한줌 흙으로 돌아갈 몸.
이 길 끝간 곳에서 아직 나를 반겨주실 어머님. 뵐 때마다 너무도 작아지시고 가벼워지시는 모습. 아직까지도 내 가정만을 위하여 살고 있는게 가슴 저려오고 죄스러워집니다.
어머니.
간 여정을 끝내고 주저앉아 버리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세상이어서 내 삶을 좀더 풍성하게 추수하기 위해, 앞으론 이웃과 함께 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동해‧‧‧ 그리고 나
권현순
나는 서울에서 강릉가는 밤우등 고속 버스가 생긴 다음부터 꼭 그것을 타고 강릉까지 가 보고 싶었다.
학창 시절 청량리역에서 저녁 여섯시에 출발하는 영동선을 타고, 때로는 얘기가 통하는 친구와 밤새 이야기하며 가기도 했고 때로는 혼자 책을 읽다가 잠도 자다가 생각에 잠기기도 하며 열 두 시간을 달려 어느덧 동해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일출의 그 화려한 향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무슨 소원을 빌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지금의 내 소원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드디어 강릉을 거쳐 주문진까지 낚시하는 남편을 따라 밤 열 한시 삼십분에 출발하는 우등 고속 버스를 탈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동해가 좋아서 강릉 처녀랑 결혼했다는, 지금은 머리 희끗한 사람과 옛날처럼 밤새 이야기하며 새벽에 도착하면 여전히 반겨 줄 그 해돋이의 향연을 보리라고.
그러나 버스가 출발하자마자 바쁜 용무에 지친 일과 탓인지 모두 다 잠이 들어 조용했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얘기를 하지 말아야 했다. 침침한 불빛에서는 책을 읽을 수도 없어서 우리도 잠잘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경포대에 숙소를 정하고 모래밭에서 낚시줄을 던질 때면 나는 그 모래 속에 숨어있는 조개껍질을 찾아 모으고, 바위 위에 서 있으면 나는 바위틈에서 홍합이랑 이름 모를 조개를 따기도 했다.
그 때가 마침 한여름이면, 고무 튜브를 타고 묶어 논 밧줄을 잡고 가끔 쉬면서 ‘오리 바위’까지 갔다 오기도 하고 모터 보트를 타고 ‘십리 바위’를 돌아오기도 했다.
또 어느 날 경포 호수에서 붕어랑 피래미를 낚으면 너무 아름다워 가슴 벅차오르는 호숫가를 걷다가, 달리다가 돌을 던지기도 하고 달그락거리는 마차를 타고 호수를 한 바퀴 돌아 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호수에 중장비 기계가 보이며 경치를 망쳐 놓더니 낚시가 금지되었다. 준설 작업을 잘못해서 바닷물이 호수로 역류되어 고기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 호수의 물이 신음하듯 아픈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두 번 휴게소에 들러서 새벽 네 시쯤 주문진에 도착했다. 새벽 공기는 상큼했고 벌써 바닷 냄새가 묻어 오는 듯했다. 서둘러서 주문진 항으로 갔다. 아직 어두워서 우뚝우뚝 선 부둣가의 큰 건물들과 정박해 있는 커다란 배에 부딛쳐서 철썩이는 파도 소리는 으스스 무서운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러나 비릿한 해초 냄새와 바닷물 냄새는 어김없는 고향 냄새이고 동해의 물 냄새다.
어두운 길을 잘도 가는 남편 뒤를 졸졸 따라 부둣가 끝에서 짐을 풀고 낚시 채비를 한다.
‘오호라!’ 지금부터는 완전히 내 시간이고 이 바다는 온통 다 내 것이다.
날이 차츰 밝아지면서 묶여 있던 배 주인들이 나와 묶인 줄을 풀고 하나씩 하나씩 출조를 한다. 남편과 아내와 아들, 이렇게 나가는 조그만 배부터 장정들 여러 명이 함께 타는 커다란 배까지 어느 사이에 부두가 텅 비었다.
이제서야 주위를 둘러 보니 우리 뒤에 아까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던 큰 건물에 ‘할복장’이라고 커다랗게 써 있다. 어째 무시무시한 생각이 든다. 하필이면 할복장이라니, 일본 무사들이 할복 자결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소름이 쪽 돋는다. 뒤로 돌아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아하!’하는 탄성이 저절로 나오며 정말 산같이 많은 냉동 오징어를 할복하고 있었다. 바닷물로 녹여가며 몇몇 아주머니들이 오징어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손질하고 있었다. 낚시 미끼로 쓰려고 오징어 내장을 조금만 얻으려 했더니 한웅큼 집어 준다.
포구 한 쪽으로 (어떤 포구에는 양쪽으로) 길게 방파제가 있고 그 끝쯤에는 동해가 있다.
<방파제라면 ‘Breakwater'보다 'Breakware'가 더 적당한 것 같고 등대는 'Lighthouse'보다 'Pharos'가 더 시적이다. >
방파제 양옆에는 어느 곳에나 네 방향으로 돌출된 거대한 콘크리트 덩이들이 쌓여 있는데 이것들이 또 나를 항상 위협한다. 어쩌다 들여다 보기라도 하면 그 사이사이로 바닷물이 들어왔다가 나가곤 하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다. 금방 발이 빠져 그 속으로 떨어질 것만 같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덩이들을 요리조리 밟으며 뜨는 해를 맞이하기 위해 방파제 끝 등대까지 가서 가장자리에 앉는다.
벌써 바다는 상기되어 있고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태양은 수평선을 뚫고 튀어 오른다.
밤새 오징어잡이 하던 배는 강한 힘으로 바다를 제압하는 이 광경을 배경으로 하고 안식처로 돌아오고 있다.
어김없는 대자연의 향연에 숙연해지며 한없이 작아지는 내 자신이 보잘것 없는 티끌만 같다.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심지어 사물들까지도 내 곁을 떠나지 말고 늘 함께 있게 해 달라는 소박하지만 그러나 어쩌면 너무나 욕심꾸러기인 그 소원을 오늘 아침 바다는 너그럽게 들어 줄 것이다.
한사람 한사람 떠올리며 이 시간만은 완전히 제삼자가 되어 바라보는 내 눈에는 무척 사랑스럽고 대견하고 훌륭하다.
이른 아침을 준비하러 나온 갈매기가 물을 차고 오르는 바다는 정말로 많은 색깔을 하고 있다.
내가 화가가 아닌 것이 다행스러울 만큼 무슨 색으로 이 물을 다 그릴 수 있을까, 이 냄새를 다 나타낼 수 있을까. <몇년 전 딸과 함께 ‘니스’ 해변의 조약돌을 주우며 ‘지중해 물맛도 짜구나!’ 바닷물을 찍어 맛보며 바라보던 지중해 물빛도, 모래를 사 와서 만들었다는 와이키키 해변의 볼을 스치는 밤바람과 칼레일 맛도, 현란한 열대어 무리와 함께 수영하다가 젤리피쉬(해파리) 떼가 몰려와 사람을 문다는 방송에 아쉬워 하며 모두 철수했던 ‘허나우마베이’. 금문교를 지나며 바라보던 미국 서해안의 태평양 물빛도, 멀리 volcano를 바라보며 필리핀의 화산재로 된 돌섞인 모래밭, 홍콩에서 마카오 사이, 영국에서 유럽 대륙을 오가는 훼리호 상에서 바라보던 물보라를 일으키던 바다. > 그 어느 바다보다도 동해 물빛은 아기자기하고 오묘하다.
산이 아름다워서 그 산을 두르고 있는 물이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죽은 다음 이 바다에 뿌려지겠다고 장난처럼 말해 주변 사람들이 서운해 하는 것을 보곤 했다. 그렇지만 그 말은 장난이 아니고 어쩌면 진심이다. 그래야 영원히 살 것 같아 파도처럼 수평선처럼 영원히 남을 수 있을 것이다. 말없는 스승처럼 부지런함도 겸손합도 가르쳐 주고 변함없는 끈기와 인내도 손수 보여 준다.
동해가 서해나 남해보다 더 친근감이 드는 것은 꼭 고향 때문은 아닌 것 같다.
밤일을 한 고깃배들이 하나씩 둘씩 돌아온다.
마치 나도 경매꾼이나 된 것처럼 사람들이 몰려가는 곳에 함께 묻어가면, 풍성한 고기잡이에 신나는 몸짓으로 잡아온 갖가지 생선들이 종류별로 나열된다. 정말로 이 때는 바다가 위대해 보인다. 아니 어부들이 위대해 보인다.
물 좋은 생선을 사서 가지고 간 Ice Box를 채우는 일은 내 몫이다. 낯익은 수협 공판장 아저씨들이 미소를 보내 준다. 이렇게 가지고 돌아온 생선이 다 없어질 때까지 우리집 식탁에서는 동해의 바닷 바람에 묻어 오는 물 냄새를 계속 맡을 수 있다.
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기억들이 있다. 경포에서는 ‘동해횟집’, ‘강문횟집’의 모듬회와 매운탕을 기억하고, 삼척 정라항에서는 곰칙국 맛을 잊을 수 없다. 동해(뮥호)항의 새우구이와 조개탕을, 사천항에서의 문어 볶음, 주문진에서는 가리비 구이와 게찜이 일품이다.
올 여름 휴가는 태백산의 녹음을 뚫고 붓자욱처럼 산뜻하게 그어진 계곡 사잇길로 한 여름 체온을 식히며, 산 속 경치에 놀래며 행복해 하였다. 영월을 거쳐 태백(황지)의 폐광 흔적과 광부들의 삶의 흔적을 보며 도계 삼척을 거쳐 도착한 곳 ‘한재밑 해수욕장’은 정말 한적해서 머리까지 맑게 씻어낼 수 있었다.
돌아올 때에는 대관령을 넘으며 약속이나 한 것처럼 강릉 시내가 보이는 곳에서 멈추어 선다.
저기가 경포 호수, 그 건너의 바다, 이쪽은 시내고 복판즘에 친정 어머니 모습을 그려보고, 다음으로 강릉 비행장을 확인한다. 군복무하고 있는 아들의 씩 웃는 모습도 그려보며 서울로 향한다.
다음 우리의 행선지는 삼척보다 더 남쪽 ‘장호항’이다.
나무 아래서
김수완
가끔 아주 싱거운 상상을 한다. 가령 모든 나뭇잎이 녹색이 아니라면, 혹은 끝없이 푸른 저 하늘이 한점의 구름도 거느림없이 마냥 푸르기만 하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권태를 견디어 낼 수 있을까. 창조자께서는 우리의 염려를 헤아리시어 알맞은 구름과 녹색의 조화를 주셨음인가 보다. 어느 초여름날 도심의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기에 무료하던 나는 흥미로운 발견을 하였다.
즉 나무는 그것을 바라보는 눈의 위치에 따라 전혀 색다른 언어를 우리에게 건넨다는 사실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볼 때의 나무 숲이 무리를 이루어 수런수런거리는 모습이거나 저만치 옆에서 바라다보는 그것이 도열(堵列)하는 軍團의 모습으로 늠름한 것이었음과 달리 나무 아래에서 곧잘 위를 쳐다볼 때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더욱이 초여름의 계절에는 고운 신록의 잎새들이 ( )인 듯 하면서도 그 갈피갈피 마다에 푸른 하늘을 끼워 투명한 이파리 층을 이루어 내고 소소로이 바람이 스칠 때의 몸짓은 마치도 천상의 말을 들려주려는 듯 하느적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 날의 감동 이후나는 가끔 나무 아래에서 위를 쳐다보며 혼자 즐거워한다. 그것은 삶의 권태를 잠시 잊게 해 주기도 하고 힘차게 뻗어나간 줄기에 붙은 오밀조밀한 가지들의 엮어진 슬기를 배우게 해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 곳에서는 신비로운 속살거림이 무수히 쏟아져 내리기 때문이다.
巨木은 巨木대로 幼木은 幼木대로의 언어가 있고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의 노래가 있다.
인생에 있어 청춘을 신록에 비유하거나 동절기의 ?木을 고난의 모습으로 비유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가을의 나뭇잎보다 아름다운 인생은 없다고 했다던가. 아마도 생을 완성함이 그처럼 빛나기를 소망하는 뜻에서일 것이다.
그러기에 거목 앞에서는 삶의 경륜과 忍苦에의 경외심을 幼木에게서는 한없이 뻗쳐 오르려는 욕망같은 것을 느끼게 되는가 보다.
나도 어느 곁에 知天命의 地에 서서 가끔은 끄잘데 없는 망념에 젖어 보기도 하지만 넉넉한 잎새들을 지니고 큰 삶을 살아가는 나무 아래에서 풋풋한 줄기 사이로 비쳐진 하늘을 쳐다보노라면 오늘도 그냥 또 즐겁다.
소나무처럼
김영기(강고 4회)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있다.
봄비는 출발, 새 생명을 뜻하고 가을비는 결실과 정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내가 벌써 가을비에 이미를 두는 나이가 됐나 보다. 하기야 자식이 대학생들이고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은 나이니까 당연하겠지.
올해엔 무엇을 했는지, 지난 세월 동안 무엇을 했는지 촉촉한 커피향 속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또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뜻있는 인생인지 생각해 본다.
뭐 잘난 것도, 잘한 것도 없는 소시민이지만 그래도 남에게 폐는 끼치지 않은것 같다.
강원도 진부 두메 산골에서 태어나 바위 밑 늙은 부처의 심정은 있었나 보다. 너그럽게 사는 사람 치고 금전적으로 잘 사는 사람은 없지만 정신적으로는 부자로 살지 않는가. 나는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부자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이런 생각은 참으로 자유로운 마음을 갖게 한다.
어린 팍창시절 우리는 살을 에는 대관령 바람을 이기며 성장했다. 키가 넘치도록 퍼붓는 눈 속을 걸어다녔다. 요즈음 아이들 같으면 자동차 없이 엄도도 못낼 그런 환경 속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 덕분에 모진 세파를 맨주먹으로 헤쳐 오지 않았는가?
내 고향 강릉의 소나무를 보라. 장설이 빠져도 끄떡하지 않는다. 지붕이 날아가도록 강풍이 불어제껴도 제자리를 지킨다. 솔잎혹파리가 전국을 휩쓸어도 그 푸름을 잃지 않는다. 이 얼마나 장한가?
뿐만 아니라 기암괴석의 그 작은 틈바구니에 뿌리를 내리고 마딜게 마딜게 자라는 작은 소나무를 보라. 생명에 대한 외경심마저 느낀다.
나는 그런 소나무처럼 살아온 듯하고. 또 그렇게 살고 싶다. 지금 흙냄새 하나 맡을 수 없는 서울,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 속인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마음은 항상 저 푸른 고향, 살아 있는 강릉에 두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도 벼텨 나가기가 힘들 것이다.
마음 속에 자라는 소나무도 이젠 제법 컸다. 이놈들이 내 마음의 그 소나무처럼 커야 하는데 남들 눈에는 어떤지 모르겠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털은 비단이라는 말처럼 되지는 말아야 될텐데. . . . .
올 겨울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애들과 함께 고향에 다녀와야겠다.
명정도 휴가도 아닌, 여행하는 기분으로 훌쩍 다녀올 것이다.
백설이 천지를 뷰간케 못하는 속에 홀로 푸른 그 소나무를 보러 가야지. 낙락장송 몇 그루를 점찍어 두었다. 너는 저 소나무, 너는 이 소나무라고 일러주면서 이 애비의 마음 속에도 그렇게 자리잡고 있다고 말해 줘야겠다. 온 세상이 눈 덮인 그 소나무숲이다.
은은한 커피향 사이로 가을비가 내린다. (*)
나의 미니 회고록
김영채
1994년 9월 1일!
이 날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보람있고 뜻있는 날로 기억된다.
초등 학교 교장으로 임명한다는 대통령의 임용장을 전수받은 날이었기 때문이다. 전수식이 끝나고 학교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차창을 스치는 풍경을 내다보노라니 만감이 교차하여 하염없는 상념에 잠겨들었다.
약관 열아홉의 나이로 교직에 발을 디딘지 어언 33년, 밀리고 밀리는 생활 소에서 연륜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쌓여 왔나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도 코페리니쿠스의 대전환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23년 전, S시 Y초등 학교에서 7년 동안이나 근무하다가 승진의 꿈을 안고 K군 민통선 북방 우리 나라 최북단 학교인 M초등 학교에 희망하여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 때 나이 설흔 두 살이었다.
우리 집사람은 스물일곱의 나이였고 이제 몇 달 후면 아기 엄마가 될 딸 아이는 네 살, 장남은 한 살짜리 젖먹이였으니까 그 저항은 어떠했는지 가히 상상이나 하겠는가!
대남 방송은 가까이에서 크게 들리고 밤 9시면 통금에 소등하여야 하는 긴장감이 감도는 접적지구에 누가 감히 가겠다고 선뜻 나서겠는가!
“부와 명예는 동시에 잡을 수가 없소. 우리는 부와 거리가 먼 것 같으니까 명예를 위하여 어려 움을 참아봅시다. ”
나의 간곡한 설득과 아련하나마 승진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이 작용하였는지 집사람의 결단이 마침내 내려졌고 그로 인하여 나의 뜻은 그 때부터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집사람의 용기있는 결단에 힙입어 삼륜차에 이삿짐을 싣고 북쪽을 향하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기만 했다.
앞으로 10년 후면 교감 부인이 된다고 설득하였는데 누가 앞일을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K군에서의 생활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고 교직의 꿈은 영글어 갔다.
나를 「땀흘리는 사람」으로 만드는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K학교에서 있었던 일이다. 특활부서 중 탁구부를 맡게 되어 아이들과 같이 특활 시간이 될 때마다 공을 치게 되니 다른 선생님들보다 똑딱볼일망정 내 탁구 실력이 제일 나은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교장 선생님께서는 져도 좋으니 아이들을 지도해서 가을에 있을 평가전에 참가해 보라는 것이었다.
기가막힐 노릇이었다. 지도 기술은 전혀 없고, 평가전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실려고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 길이 없었으며, 지도 기술을 배울래야 재원이 없었다.
지금 같았으면 아마 못한다고 했을게 틀림없고 그랬었더라면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었을 거라는 생각도 가끔 해보곤 한다.
교장의 명령이라 안 하겠다는 말은 못 하고 그 똑딱볼을 열심히 지도하면서 재원을 물색해 본 결과 한 사람의 기능인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K교대를 졸업하고 발령을 기다리는 사람이었는데 학창 시절 학교 대표선수로 활약한 실력있는 사람이었다.
며칠 동안 오후 시간을 이용하여 선수들에게 기술 지도를 하도록 부탁하였고, 나는 지도하는 모습을 보며 그의 지도 기술을 보고 배우는 정도였다. 그렇게 하여 얻어진 쥐꼬리만한 기술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지도하였고 노력과 시간의 흐름 속에 나의 지도 기술도 향상되었으며 선수들의 실력도 향상되어갔다.
그 해 군대회에서는 보기좋게 미끄러졌으나 그 다음 해부터는 줄곧 군대표가 되어 도대회에 출전하게 되었고 그 결과 D교에 재직하고 있는 B교사와 함께 본 군이 도소년체전에서 여러번 탁구부 종합우승을 차지하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초등 학교 선수의 경기력은 지도 교사의 신념에 비례한다는 것을 스스로 체험한 한 사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전국소년체육대회에 출전하였던 선수도 여러 명 배출하였는데 그 아이들이 벌써 서른을 넘기고 있으니 어찌 인생 무상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 때 고생하던 아이들 중에는 S대학교, 공군사관학교, K대학 등 이름있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름대로 좋은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운동(엘리트 체육)을 하면 공부를 못한다는 편견은 그야말로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힘주어 주장하고 싶다.
초등 학교 시절에 하는 운동은 인내와 끈기와 좌절과 승리감을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권장할만 하다 하겠다.
방학이면 의례히 합숙 훈련을 실시하였고 야간에도 시간나는 대로 운동 지도에 힘쓰는 한편 개인 성장을 위한 자기연찬에도 게을리하지 않아 운동 지도나 개인 성장쪽에서도 비교적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어 교직 사회에서 ‘열심히 하는 사람’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내가 속한 집단에서 좋은 평가를 받게 된데에도 내 스스로의 노력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우리 집사람의 내조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다.
젊은 나이에 벽지 생활을 자청한 일이며 선수들의 식사 제공은 물론 좌절과 실의에 빠졌을 때의 다독거림 등은 나를 무척이나 신나게 해 주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1983년 3월, 마흔두 살의 나이에 교감으로 승진하여 사람과의 약속을 지켰고 마당쇠(체육지도교사)도 승진할 수 있다는 운동장에서 뛰고 있는 많은 젊은 교사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교감으로 승진한 후에도 마지막 투혼을 불사르기 위하여 3년여의 각고 끝에 도대회에서 다시 우승하였고 그 우승은 평생을 두고 기억할만한 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후 교육전문직으로 전직하여 8년여 동안의 장학사 생활은 여러 교육 동지와 선후배님을 가까이에서 만날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기회였으므로 나는 그 기간을 무척이나 소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 쉰세 살의 젊은 교장으로 승진하여 육영사업을 위한 단위 학교의 장으로서 지도성을 우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 섰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젊은 교사들의 동일시의 대상으로서 손색없는 학교 행정을 펼쳐 나갈 수 있을지 조금은 두려운 마음이 든다.
끝으로 후배 장학사 C씨가 들려준 말을 소개해 보려고 한다.
“우리 군의 K교장은 교장으로 임용된지 1년이 되는 시점에서 위암 선고를 받아 지금 S병원에서 치료 중이나 조기에 발견하여 정상인과 다를 바 없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동일시의 대상인 사람 은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나 봅니다. ” 라고 하여 한바탕 웃음을 자아냈다고 한다.
美國 肉類 産業 旅行記
김종훈
旅行이란 限定된 空間에서 日常을 行하는 人間에게 良識의 범위를 넓혀주는 놀라운 方式의 교육일진데, 더욱이 業務와 關聯된 것이고 보면 더욱 절실히 體感하고 體得할 수밖에 없었다.
美國 肉類 輸出協會 초청의 12박 13일 간에 걸친 旅程은 WASHINGTON D. C에서의 총회 참석을 시발로 하여, 평화스러운 광활한 牧場地帶와 소들을 비육시키는 FEED-LOT과 I. B. P. EXCEL 같은 세계 1위급 도축 공장의 현장을 보았을 때 우선 방대한 시설 규모와 1일 30, 000두의 도축 및 가공능력에 놀랐고, 또한 SKYLARK MEATS 같은 최신 시설의 가공품 생산 공장에 이르기까지 어느 현장이나 그런 시설들을 뒷받쳐 주고 있는 MAN POWER 역시 대단한 것이었고, 이 모두가 미국의 육류 산업 구조를 한눈에 엮어볼 수 있었다.
코로라도 주의 DENVER에서 텍사스주의 AMARILLO까지 이어지는 목장지대는 신의 축복을 독차지라도 하듯 광활한 대지는 말로만 듣던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으로 이어졌다.
목장 지대는 원래 황폐화 하기 쉽고, 농사 짓기에는 경제성이 적은 열악한 땅들이었으나, 소들을 키움으로써 얻어지게 되는 노페물들이 퇴비가 되어 비옥한 토양으로 일구게 된다.
자연적으로 초지가 조성되어 경제적으로 건강한 소가 자라게 되는 이치였지만, 그것은 신이 주신 그대로가 아닌 그들 노력의 대가임을 깨달아야 했다.
통제가 불가능할 듯한 거대한 영토 위에 여러 민족이 뒤엉키어 금방이라도 헝클어질 듯한 겉으로 보이는 미국은 조금만이라도 안으로 들여다보면 이렇게 기본적인 것을 중요시 여기고 실행에 옮기는 힘에 있지 않나 생각하게 했다.
미국에는 약 1억마리의 소들을 키우고 있다고 했다. 원래 약 1억 5천만 마리에서 5천만 마리를 줄였어도 육류 생산량에는 변화가 없다고 한다. 이는 84여종에 이르는 소의 종자들을 개량하고 육질을 품질 위주로 지향하여 경영의 합리화를 이룩한 것이라고 보았다.
1994년에는 3, 300만 두를 도축하였는데 그 중에 90% 이상이 GRAIN FED (곡물 비육)이고 도축된 등급이 CHOICE 44% SELECT 11% 등으로 57% 이상이 고급육으로 등급 판정을 받았다는 것을 볼 때, 또한 옥수수 사료 9kg을 먹여서 BEEF(고기) 1kg을 생산한다고 하니 미국의 농산물 생산 역시 천문학적인 것이다.
목축 산업이 농업과 공업 분야와도 조화를 이루게 하고 품질 향상을 시켜 생산성에도 기여한, 경제 전반에 걸친 운영의 묘가 아닐 수 없었다. 미국이 최고급 품질 쇠고기 생산의 축산 선진국이 된 것은 결코 어느 개인의 손재주나 최신 기계 설비에 의한 물리적인 힘만이 아니라, 기본 바탕을 중요시 한, 각 분야마다 철저한 전문화와 공동협력체제를 구축한 완전한 산업 구조의 형성인 것이다.
어느 곳을 가나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그들, 기다림은 그들의 여유고 희망인 것 같았다. 대도시나 지방의 소도시를 가나 어느 건물이거나 펄럭이는 대형 성조기들, 세계 어느 나라 국민이나 자기 나라 國旗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들의 國家에 대한 자긍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번 여행길엔 유난히도 많은 대형 성조기가 펄럭거렸다.
I. B. P 본사의 대형 성조기 게양대를 보고, 아! 그것은 國旗가 아니고 商品이요, 國家가 세일즈맨인 것이다. 진정 자기 것을(나라)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최고의 품질을 생산할 수 있다는 단순한 진리를 나는 이번 여행의 소득이 단순한 진리로 귀결 되었다.
영화 AIRPORT를 촬영하였다는 MINNEAPOLIS CITY 6월초의 하늘은 내가 코흘리개 시절 강릉의 안목바다 하늘처럼 어느 추상화가가 그려낸 한 폭의 그림 같아서 지워지지 않고 또한 세계에서 두 번째 크다는 SHOPPING MALL을 갔을 때 거대한 산업 구조를 뒷받혀 주고 있는 유통 시장의 규모도 부러웠다.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무료한 끝에 장사꾼 기질로 꿈같은 야무진 공상을 그려 보았다. 내 고향 강원도 대관령에서부터 정선, 고한, 태백까지 미국의 목장 지대인 Clolrado와 Nebraska처럼 축산 단지와 생산 공장까지 만들면 세계 10대 축산국으로도 도약할 수 있겠다.
고랭지라 기후 조건도 똑같아 폐광촌의 인력도 충분하고 동해 항구를 이용하여 신속하게 수출도 할 수 있고 나는 강릉에다 동양에서 제일 큰 Shopping mall을 세워서 일본 사람들 쇼핑 관광객 유치하여 강원도 쇠고기는 물론 고랭지 배추까지 팔아먹으면 되겠고, 고속 전철 개통되면 서울에서도 올 터이고,
자, 지금부터 명성 콘도 김철호 꼬셔서 폐광촌에 가지노 하겠다는 돈 갖고 길을 바꾸자. 이번 여행은 허망한 꿈도 꾸게 되었고,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고 우선은 귀국하는데로 태극기 큰 것으로 새로 사서 우리집 대문에 매일 게양해야겠다고 마음 먹게된 여행길이었다.
(저자 약력)
‧강릉 사범 부속 초등 학교 1회 졸업
‧강릉 사범 병설 중학교 16회 졸업
‧강릉 고등학교 2회 졸업
‧고려 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주식회사 COFA 무역 대표이사 (현)
‧주소:자택 - 서울 관악구 남현동 1053-10 삼독 빌라 101호(전화:523-6632)
사무실 - 서울 강남구 역삼동 702-13 성지하이츠 918호(전화:565-5411)
일자산(一字山)에서
김학순
내가 산행을 좋아하는 습관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정확히 말하기는 힘들다. 좋아한다기 보다는 산에 의지하며 살기 위해 산을 찾는다고 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 산의 품에 안기면 웬지 모르게 포근하고 싱그럽고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요즘은 저녁 10시경 잠이 들고 새벽 4시경 깨어난다. 그 사이는 완전히 숙면 상태다. 어느 날 아내가 철야 예배에서 돌아와 보니 문을 잠근 채 자고 있어 깨우다 못해 교회에서 자고 온 때도 있을 정도다.
처음 새벽 산행을 시작할 때는 잠든 아내가 깰까 봐 살그머니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주워 들고 마루에서 준비 운동을 하고 일자산에 올라갔으나, 이제는 아내와 함께 오른다. 아내의 속도에 맞추다 보니 운동량은 좀 부족한 것 같으나 외로운 느낌이 안 들어 좋다. 한 두 시간을 걸어서 등에 땀이 조금 날 듯하면 내가 좋아하는 자리에서 국민 체조를 2회 연속하고 돌아와 출근 준비를 한다.
일자산은 서울 남동쪽에 위치한 강동구 둔촌동과 하남시 서부면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200미터 정도 되는 산이다. 오리나무, 소나무, 떡갈나무 등이 아카시아나무와 어울려 숲이 형성되었지만 점차 아카시아나무만이 세력을 넓혀가고 있다. 산세는 부드럽고 밋밋하여 가벼운 산행을 하기에 좋다. 그래서 중년층, 장년층, 노년층과 더불어 주말이면 가족 단위로 즐겨 찾는다.
이른 봄 찔레나무 잎이 돋아날 무렵부터 활기를 찾기 시작해서 아카시아꽃이 만개하여 풍성해진 산 전체가 바람에 일렁일 때면 등산 인파와 꽃향이 넘쳐 산이 터질 것 같다.
밤 그림자를 밀어내고 새벽을 여는 사람들의 모습도 가지가지다. 야호! 소리치며 정적을 깨는 사람, 혼자 흥얼대며 걷는 사람, 정상에 모여서 정담을 나누는 사람, 모두가 한결같이 즐거운 표정으로 여명을 맞으며 하루를 연다. 누가 정해 준 것도 아닌데 항상 자기 코스에 따라 운동하고 일정한 자리에서 몸을 풀고 돌아간다.
무더운 여름, 아카시아나무 밑 벤치에 누워 보라. 파아란 하늘 깊숙이 날으는 연초록의 부드러운 수없는 날개짓, 날개짓들. 아카시아는 바람에 나플대는 이파리가 깨끗하고 부드러워 한결 좋다. 그러나 비바람이 지나간 자리엔 전흔의 상처인 양 곳곳에 뿌리 채 뽑혀 길을 막는다. 금세 옆으로 새 길이 나고 또 얼마 있으면 누군가 톱으로 베어내고 원 길을 뚫어 놓는다. 해마다 아카시아나무는 수없이 쓰러져도 금세 빈 곳에 삭을 틔워 메운다. 마치 6‧25 직후 폐허된 이 땅에 산고도 감내하며 자손을 퍼뜨리고 풍요로운 강토를 일구던 우리 어머니들의 부드럽고 끈질긴 모습 같아 더욱 정이 간다.
가을이면 오리나무, 떡갈나무 단풍이 수수롭고 밤, 도토리 주우며 향수에 젖을 수 있어 좋고, 겨울이면 한적한 설경을 만끽하며 눈길을 걸을 땐 한 길 가량 쌓이던 눈덮인 고향이 떠오른다.
나는 어릴 적 밤나무, 감나무, 소나무 어우러진 강릉시 변두리에서 10여리 길을 통학했다. 낮은 산들이 늘어 서 ㅇ/ㅅ어 아늑한 마을 산 중턱에는 아람드리 적송들이 솔바람을 타고 싱그러운 숨결을 뿜어대고 있었고, 집 주위에는 빠알갛고 마알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리고 밤송이 속에서 영글어가는 토실한 밤알과 함께 가을은 익어가고 나의 마음도 자연을 닮아가고 있었다.
뒷산 꼭대기엔 묘지가 하나 있었다. 묘지 주변에 융단처럼 부드럽고 포근하게 깔려진 잔디밭은 나의 요람이었고 꿈의 생산지였다. 멀리 태백산맥이 병풍처럼 팔을 벌리고 둘러 서 있었고, 타 ㄱ트인 동편엔 동해바다가 출렁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남대천이 흘렀고 기적 소리와 함께 남쪽 굴을 향해 달리는 기차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꿈을 실어 보내곤 했었다.
휴일이면 소를 산 중턱에 풀어 놓고 우리들은 감자서리, 콩서리를 해 먹으며 놀다 저녁 놀을이 질 때면 딸랑딸랑 소방울 율리며 집으로 돌아온곤 했던 산이다.
지금도 고향에 가면 그 동산에 올라가 보지만 나무가 높이 자가 시가지는 보이지 않고 잔디밭에서 잠자던 추억들이 새록새록 깨어나 그리움만 사무친다. 그 때 함께 놀던 친구들은 지금즘 무얼 하고 있을까?
청년 시절에는 주로 산골에서 교직 생활을 했다. 순진하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들과 함께 어울리던 곳엔 항상 맑은 개울이 말을 가로 질러 흐르고, 산비탈의 산초와 머루 다래랑 함께 나도 남을 위해 뭔가 해 보겠다는 마음이 여물어 가고 있었다.
“선생님, 마중가게 조퇴 좀 해 주세요. ” 산을 넘어 70여리, 무거운 짐을 이고, 지고 넘어 오는 억센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 후 나는 도시에서 숱한 사람들과 얽혀 생활하며 가슴 속엔 허무만 쌓인 채 항상 비틀거리고 있었다.
내 일생의 후반부는 일자산에서 출발한다. 매일 일과도 일자산에서 생각을 얻고, 주말마다 찾는 높은 산 등성도 일자산에서 충전된 기력으로 오른다. 일자산은 매일 같은 코스를 반복해서 힘을 기르고 있지만 주말 산행은 가급적 다른 산을 택한다.
한라산과 백두산에 올라가 보라. 백롭담과 천지에서 피어나는 뽀얀 안개와 하얀 구름에 감추었다 내미는 청순한 자태에서 백의 민족의 정기를 뿜어대고 있지 않은가.
백두대간의 힘찬 맥박 속에서 설악산의 기암절경과 지리산의 웅장함이 솟구치고, 수없이 봉긋봉긋 솟아난 육산과 암산들이 계절 따라 형형색색으로 변화하며 밀려오는 산맥을 따라 걷노라면 나는 산의 오묘한 섭리에 취해 휘청거리는, 자만한 오욕도 버린 흡사 나약한 한 마리의 산짐승이어라.
대부분의 주위 사람들은 날 보고 도시의 큰 학교에서 좀더 화려하게 학교를 경영해 보라고 권한다. 권위와 명예와 금욕은 한낱 오염된 휴지 조각에 불과한 것. 사랑의 옷깃이 스치는 곳에 소담스러운 교육의 보람이 넘친다는 신념으로 산골로 향하리라.
청솔 푸른 가지를 스치는 바람 소리의 축복을 받으며 태어난 내 육신의 경건히 산을 맞이하고 내 영혼도 산에서 살리라.
강릉 단오의 추억
심 봉 자
나는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전근을 자주 다니어서 두어살 때 강릉을 떠났다. 부산 대구를 거쳐 서울에서 덕수국민학교 3학년 재학중 다시 아버지를 따라 강릉으로 가게 되었다. 꾸불꾸불 험한 대관령 길이 나에게는 무섭게 다가와 눈을 감고 있었다. 어머니가 저기가 강릉이란다 하며 손가락으로 가르치는 곳에 시선이 머물렀을 때 거기에는 저 멀리 아련히 푸른 바닷가 보이고 남대천 물줄기가 다소곳이 다가오고 마을과 마을의 소나무 숲과 기와집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고향을 찾아간다는 설레임보다 익숙한 서울생활을 뒤로하고 낯선 곳으로 간다는 착잡한 심정에 반갑기보다는 낯설기만 했다. 요즈음 느끼는 멋진 한폭의 산수화 같은 고향의 아름다움은 전혀 없었고 다만 덤덤히 저기가 강릉이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강릉에 와서 강릉 국민학교에 들어가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선생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즐거운 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초여름이던가. 나는 새옷을 입고 (어머니는 새옷을 입어야 된다고 하셨다) 할머니를 따라 남대천 단오 구경을 갔다. 강릉에 오기 전에는 <단오>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나에게 신기하고 경이로운 풍경이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 써커스단의 나팔소리가 들리고 울굿불굿한 옷을 입고 굿판이 벌어지고 그네뛰기 먹거리판 등 모두가 신기하고 새로운 풍경이었다. 나는 할머니 손을 잡고 사람들 틈새에서 난생 처음으로 경이롭고 신비스러운 단오절 구경을 화려하게 보았다.
지금의 롯데월드 어드벤쳐나 용인 자연농원의 화려하고 경이로운 풍경을 처음 찾았을 때의 아이들 느낌이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보고 실소를 금치 못한다만 그때의 그 만대천 단오구경은 잊을 수가 없다.
그 중에서도 나의 흥미를 가장 끈 것은 써커스 구경이었다. 입구에서 왔다갔다 하던 난장이가 공연 중에는 무대 위에 올라 코믹한 연기로 폭소를 자아낸다. 간이 조마조마하다. 심장이 오그러드는 듯한 공중곡예. 뼈마디가 없이 자유자재로 온 몸이 휘어지는 곡마단의 소녀들이 한없이 아름답고 경이로웠다. 식초를 많이 먹으면 몸이 유연해진다고 해서 나도 그때는 아홉 살이었는데 그때의 그 환상적인 모습이 지금도 눈 앞에서 아른거린다.
그 다음으로 볼거리는 그네뛰기였다. 출렁이는 기다란 그네줄에 매달려 높이 차고 오르며 <춘천이요>, <서울이요>하며 외칠 때는 시원함도 느꼈지만 저러다가 떨어지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많았다. 어린 마음에도 이왕이면 치맛자락을 여미고 타면 더 멋져보였을텐데 하는 아쉬움도 가졌지만 그때의 그 그네뛰기 묘기는 신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던 굿판도 기억에 남는다. 무녀들의 이상하게 꼬아올린 머리모양, 울긋불긋한 몸차림 껑충껑충 뛰는 춤사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주술적인 방언 사투리. 약간 섬뜩한 기분도 들고하여 더 볼 수 없었던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한없이 할머니를 졸라 그 자리를 떴던 생각이 난다.
나는 집에 와서도 그 난장이의 폭소작전과 줄타는 소녀와 그네뛰는 뒷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다시 찾아갔던 감격의 단오구경을 잊을 수가 없다. 그 후에도 그 후에도 초등학교 때는 늘 갔었다.
그러나 사범병설병설중학교에 진학하면서는 단 한 번도 갈 수 없었다.
지금은 강릉 단오제가 전국적으로 관심을 모으는 축제가 되고 또 우리의 전통 문화로서 지방문화의 꽃으로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나는 그때의 그 강릉 단오제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언제쯤 다시 그 친구들과 함께 대관령 서낭당의 산신굿판도 보고 남대천 강둑을 거닐면서 단오구경도 하고 싶다.
<약력>
강릉여고 재경 동창회 부회장
국제 아트플라워 회원
주소 : 서울 중랑구 면목1동 89-63 433-2885
나를 초대한 아이다 미유끼 여사의
멋과 눈물의 뉘앙스
심 봉 자
인품 (멋진 老婦人)
평양에서 의사생활을 하시던 아버님을 따라 한국에서 12살까지 지내다 도일하신 후 20대 초반에 외교관과 결혼하여 동양인에 대한 편견이 심한 구미쪽 미국과 영국을 시작으로 외교관 부인 역할을 하면서 많은 노력과 인내 성실한 자세로 그들의 동양인에 대한 멸시감을 호감으로 바꾸어 놓았다.
예컨대 첫 근무지인 시키고에 부임했을 때 첫 난관은 집을 얻는 문제였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임대를 거부하는 건물주에게 간곡히 부탁하고 사정하여 겨우 승낙을 얻어 편견을 바꾸기 위해 집을 아름답게 꾸미고 잘 관리하여 미국인의 인식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다른 나라로 가게 되었을 때 독신인 주인을 위해 집을 말끔히 치우고 비어있는 냉장고 안에 정성들여 만든 음식 등을 가득 채워 놓았다. 감동한 건물주는 동양의 젊은 부인을 꼭 안아 주면서 감사를 표시했다.
이러한 어려움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면서 남편을 따라 수십여 국가의 외교관 부인 역할을 하면서 프랑스 정부의 문화 훈장을 비롯한 세계 16개국의 훈장을 받으셨고 유럽 귀족들의 매너를 가르치는 “데임 살롱”을 수료하신 만 93세의 우아한 국제 매너의 권위자이시며 세계적인 “아트 플라워” 디자이너시다. 아트 플라워는 이 분이 창시자이시다.
93세의 노부인이지만 아직도 깔끔함과 우아함을 지니고 계신 이분은 이금도 동경에서 “국제 매너스쿨”을 운영하시고 “아트 플라워” 작품활동과 후진 양성에 꽉 짜여진 바쁜 일정을 보내고 계신다.
세계 여러나라에 순회 전시회도 개최하셨으며 모나코에서 전시회를 가졌을 때 고 그레이스 케리 왕비는 이이다 미유끼 여사의 아름다운 꽃과 어울릴 수 있는 드레스가 어떤 것일까 고심한 끝에 검정색을 선택하여 꽃과 왕비가 함께 돋보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서울에서 한시간 동안 강의를 하실 때의 모습은 지금도 강하게 남아있다. 노구에 서 계시는 것이 민망하여 앉으셔서 말씀해 달라고 권유했으나 한시간여 동안 한점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강의를 하시던 모습에 놀라 건강의 비결을 여주었더니 불쾌한 일을 빨리 잊으려고 노력하신다며 마음을 비우고 열심히 사는 길이 건강을 지키는 비결이라고 하셨다.
서울에서 보인 눈물
물론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분들이 계시지만 내가 직접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고 이분이 한국을 방문하신 동안 또 우리가 동경에 초대받아 가 있던 동안 옆에서 지켜보고 대화를 나누었기에 이분을 모델로 한 점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적지않은 아쉬움은 있다.
그러나 일본인이라도 배울점이 있다면 기꺼이 받아들여 우리를 발전시켜 나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성실한 삶을 살아온 인생의 선배로서의 같은 여성. 민족적인 감정이 배제된 일본인이라기보다 가까운 이웃을 본다는 순수한 인간적인 시각에서 느낀 바를 진솔히 말하고 싶을 뿐이다.
서울에 오시던 날 처음 한국음식을 대접하는 자리에 한복을 입은 우리들에게 한복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시며 동경에 초대할 때는 꼭 한복을 가져와 한복의 멋을 보여달라고 즉석에서 초청 제의까지 하셨다.
서울의 발전상을 둘러보신 후에야 과거 평양에서 어린시절을 잠깐 보냈음을 고백하시면서 진작 한국을 다녀갈걸 하시면서 회한의 눈물을 몇 번 보이시던 모습에서 그동안 묻어두었던 속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어린시절 강하게 남아있던 부정적인 모습이 각인되어 가장 가까운 이웃이지만 먼 외국은 많이 왕래하시면서 가까운 외국 한국은 오시고 싶지 않은, 아니 잊고 싶은 나라였으리라. 이렇게 발전했으리라 상상도 못하셨던 것 같다. 공항에서부터 시내로 오시는 동안 계속 감탄을 하시며 외형뿐 아니라 과거 평양시절에 접해보지 못했던 한국의 전통음식. 우아한 한복 등은 이분이 그동안 한국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이분으로서는 좀 더 젊은 나이에 깨달았더라면 하는 후회와 아쉬움의 눈물이 아니었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모습을 모면서 아직도 일본에는 이런 편견을 가진 일본인이 얼마나 많을까? 좀더 많은 민간교류가 이루어져야겠다는 생각도 해 보았다.
동경에서 보인 눈물
이분은 내면뿐 아니라 외모에도 세심한 신경을 쓰신다. 단정한 머리모양. 깔끔한 옷차림. 조용조용히 말씀하시는 태도. 완벽한 매너. 그러한 모습을 뵈면서 어떻게 곱게 늙어가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 주셨다.
이번 동경 방문때에도 이분의 배려는 한치의 빈틈도 없이 완벽했다. 나리따공항에서 바로 그분 댁으로 갔을 때 온통 꽃으로 장식된 거실에 프랑스식, 일본식, 또 우리를 위해 인절미, 김치, 나물 등 한식가지 손수 장만하시어 기모노를 입힌 젊은 제자들을 데리고 손수 써빙까지 하시며 극진히 대접해 주셔서 우리를 감동케 하시더니 호텔에 도착했을 때에는 우리보다 한발 앞서 오셔서 맞아주셨고 룸마다(2人:일행 17명) 꽃을 꽂아놓고 여러 가지 과일까지 배려해 놓으시고 손수 구은 케이크도 작은 상자에 담아 간식으로 들라며 주시고 가셨다.
다음날 오꾸라 호텔 초대 만찬장에 모두 한복을 입고 도착하니 연회장 입구에 “한국 귀부인 환영 연회장”이라는 문구가 우리를 맞아 다시 한 번 이분의 배려에 감동했고 와인에서부터 축하 케이크까지 모두 정성을 다한 만찬은 정말 여러번 경험하기 힘든 기회가 아니었나 생각되었다.
<약력>
강릉여고 재경 동창회 부회장
국제 아트플라워 회원
주소 : 서울 중랑구 면목1동 89-63 433-2885
그냥 걸었어
진장춘
‘그냥 걸었어’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다. 경쾌한 리듬에 두 연인이 등장하여 주고 받는 사연이 있어서 좋았고,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 봄직한 일이었기에 더욱 인기를 누렸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경험한 ‘그냥 걸었어’는 조금 다르다. 그냥 걷게 된 사연인즉 이러하다.
나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운동을 못해 왔다. 교직 생활을 하다 보니 아침 일찍 나가야 하고 퇴근하면 녹초가 되고, 집에서도 일을 해야 할 때가 많아서 특별히 짬을 내서 운동을 한다는 것이 호사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내 나름의 운동법을 모색하였다.
그 운동법이 ‘그냥 걸었어’다. 걷는 것은 가장 자연의 섭리에 맞는 운동이다. 그것도 특별히 시간을 내어 걷는 게 아니라 출퇴근 시간에 차를 두고 그냥 걷는 것이다. 집에서 직장인 학교까지 걸어서 3Km를 속보로 30분 정도 걷는 것이다. 하루 왕복으로 걷고, 일과중 다른 걸음까지 합치면 만보가 넘게 된다.
내가 ‘그냥 걸었어’를 하게 된 계기는 이렇다. 집이 가까워서 걸어다니나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한 후 걷기에는 다소 먼 길이라 승용차를 이용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그 후 몇 달만에 체중이 5Kg이나 늘더니 나중엔 8Kg이나 늘었다. 몸도 둔해지고 몸도 개운하지가 않았다. 체중 증가와 몸의 이상은 운동 부족에 원인이 있었다. 이거 안되겠구나 싶어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했지만 그게 오래 가지 못했다. 좀 바쁘면 거르기 일쑤였다. 일삼아 해야 하니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나는 걷기 운동을 하면서 생활 속에서 운동량을 더욱 늘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내 방 청소를 한다거나 아파트에서 되도록 엘리베이트를 타지 않고 7층까지 걸어서 다닌다. 그 후 운동 부족에서 해방되어 몸고 가뿐하고 정상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 여름 더위와 비 때문에 걷기를 게을리 했더니 다시 몸이 찌뿌둥하고 피로가 가시지 않았다. 다시 걷기 시작했더니 그 증상이 사라졌다.
나는 이 ‘그냥 걸었어’ 이후에 건강 증진의 효과뿐만 아니라 많은 어부지리를 보게 되었다. 기름값을 줄이고, 공해를 줄이고 교통 혼잡을 줄여서 국가에 애국하니 좋고, 좋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나는 걸으면서 거리 구경을 한다. 이따금 시장 옆의 노점상을 지나치며 호기심이 발동하여 가끔 싸구려 물건을 사와서 마누라에게 야단을 맞기도 한다. 노점상의 물건을 사면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즐긴다. 그것도 나의 삶에 좋은 체험이 된다.
이 걷는 코스를 세분하면 6개 정도가 된다. 생각할 일이 있으면 한적한 코스를 택한다. 걸으며 어떤 문제에 꼬똘하 생각하기도 한다. 생각하다 보면 가끔 좋은 아이디어나 문제의 해법을 발견하기도 한다.
나는 아침과 저녁 출퇴근하는 한 시간을 이용하여 걸으면서 나 혼자의 시간 속에서 여유와 삶의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다. 머리가 상쾌해진다.
동물은 특별히 운동을 하지 않는다. 먹이를 얻기 위하여 걷고 뛴다. 사는 것 자체가 곧 운동이지 사치스러운 운동은 모르지만 운동 부족을 느끼지 않는다. 농부들이나 육체 노동자들도 운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윤동을 유난히 강조하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일을 하는 화이트칼라들이다. 이들은 육체 노동을 싫어하는 데다 걷는 것 등 생활의 운동도 자동차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적인 건강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운동량이 부족한데다 필요 이상의 영양을 섭취하여 각종 질병의 위험에 빠진다.
만일 직장과 집 사이의 거리가 걷기에는 너무 멀어서 걷기 어렵거든 전철이나 버스를 타되 지금 내리는 정류장에서 몇 정거장쯤 앞서 미리 내려서 걸어 보면 건강과 여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느 퇴임 교육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말을 끝내려 한다.
“40년 동안 매일 새벽길을 걷고 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녔는데 그 오가는 하루 두 시간이야말로 나의 생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다.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 그 순간들을 통해 자신과 대면하고 세상과 사람들을 가까이서 바라볼 수 있어 행복했다. 퇴직하면 두려운 것은 그 길에서의 행복했던 시간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것이다. ”
論語有感
최규엽
꽤 오래 전의 일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길가에 있는 조그마한 古書店을 들리게 되었다. 곰팡이 냄새에 파묻혀 있는 그 곳의 책들은 학창 시절의 청계천 변 고서점에 대한 향수마저 지니고 있어서 더욱 발길을 붙잡는 듯했다. 한참 동안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이다가 東洋 古典 論語를 발견했다. 原文이 나오고 漢字에 대한 글 뜻풀이와 註解와 解說이 자세히 나와 있어 이 책을 책상머리에 놔두고 가끔 시간이 있을 때 혹은 세상의 번잡스러움을 잊고 싶을 때 짬짬이 책장을 펴 앍어 보리라 하고 아주 싼 값에 샀다.
그 얼마 후 책을 펼쳐 볼 기회가 있었다. 앞쪽의 論語解說부터 꼼꼼히 읽어 보리라던 결심은 금방 지루함에 밀려 그냥 건너 뛰기로 하고 제1편(學而)을 열었다. 첫 장의
「學而時習之 不亦?乎」
有朋 自袁方來 不易?乎
人不知而不溫 不易君子乎
는 고등 학교 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내용이라 쉽게 그 글뜻이 이해되어 엷은 미소 조차 입가에 흘리며 孔子의 ??을 조금이나마 가까이 느껴 보게 되는 것같이 기쁨을 맛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 분이 지나지 않아 다시 ?해한 구절과 낯익지 않은 한자가 나오게 되어 책장을 이리 저리 뒤적거리기만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책을 덮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상당한 시간 동안 책을 펴 볼 기회를 갖지 못하고 책의 존재마저 잊혀져 버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어느 날 마음 속에 그 책이 떠올랐다. 이해하지 못하는 구절을 이해하려고 애쓰기 보다는 쉽게 공감이 가고 그 글뜻을 알아 새길 수 있는 부분만을 골라 읽어 본다면 그래도 조금은 얻어낼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생겼다. 그래서 이번에는 통속 소설 읽듯이 책장을 뒤적거리며 몇몇 곳에 붉은 밑줄도 긋고 책갈피에 간지를 끼워 가며 계속 손 가까이 놔두고 멀리하지 않았다. 많은 날들이 지나 한 권의 통독이 웬만큼 되었을 즈음 그러나 머릿속에 남는 것은 오늘의 고대와 비교하여 ?縱적인 공감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不?怒 不??」
아침마다 펴보는 신문에서 그리고 수시로 방송되는 TV의 화면에서 느끼는 그 답답함이며 일상 생활에서 오는 그 많은 스트레스들을 안으로 안으로만 새기고 쌓아 두기에는 우리 인간의 용량이 너무 부족한 것이 아니런가.
眞理 속에서 안위하는 모습이 거룩해 보일 수는 있으며 그것이 참다운 지와 현이라 하더라도 어차피 생존은 경쟁이며 더욱이 치열한 국제간의 빼앗고 빼앗기는 무한한 경쟁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하여 자꾸만 영악해지는 현실에서 시대를 역류하여 ??? ??하고 ?????하는 안리한 자세는 사회는 무능이라 질타하지 않겠는지. 공자님께 가까이 하려던 한 문외한의 짧은 소견일 따름인 것인지.
오늘도 먼데 창문너머 하늘은 맑고 푸르다.
최길시(훈민정음 파일)
C형님에게
최상선
그러니, 그 때가 1983년 9월이었나 봅니다.
설악산 울산 바위 밑 호숫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마주 앉아 지난 날을 회상하고 삶에 지친 일상을 격려해 주시던 그 날을 잊을 수가 없어서 10년만에 이렇게 글을 써서 바람에 실어 형님에게 보냅니다.
그날 아침 화구를 챙겨서 속초 학사평을 가로 질러 울산 바위 쪽으로 우린 걸었습니다.
누정 다니는 관광찻길을 피해서 오솔길을 택한 것도 형님의 깊은 뜻이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형님은 저에게 좀더 새로운 풍광과 정경을 안내하여 창작에 보탬이 되게 하셨습니다.
들국화며 자운영이며 이름모를 들꽃과 억새풀이 춤추는 들길을 지나면서 풀섶에서 새어나오는 풀벌레 울음소리도 듣게 하셨습니다.
울산 바위 바로 밑 호숫가에 화구를 펴고 먼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여 주신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형님은 의아해 하셨습니다.
설악과 동해흫 번갈아 보며 형언키 어려운 광경에 황홀해 할 때 형님은 빙그레 웃으셨습니다.
깊은 호수 속에 잠긴 자신의 자태를 바라보고 동해를 안아 보려는 설악의 울산 바위를 10F 캔바스에 담는다고 정신없이 붓을 놀리다가 성철(性澈) 스님의 법어 생각이 났습니다.
‘산은 산 물은 물’ 있는 그대로 보고 즐기면 됐지 감히 붓을 들어 작은 화폭에 그려넣겠다는게야?
나 자신 우매한 행위를 비웃으며 형님과 한바탕 호방하게 웃지 않았습니까!
가을볕이 따가왔으나 해풍과 산바람이 스쳐가니 그저 신선이 된 기분으로 그리다 말다 하시면서 아름다움에 도취되고 형님의 온정에 취하여 흥분된 상태로 호수에 뛰어 들려는 것을 형님은 달래며 다독거려 주었습니다.
작품! 예술 작품!
얼마나 인위적인가 당장이라도 화구를 팽개치고 싶은 충동이었습니다.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고 형님과 마주 앉아서 인생이며 종교이며 철학이며를 논하며 해 저물기를 기다려 하산하지 않았습니까?
내 평생 가장 멋지고 보람있는 하루였습니다. 설악을 등에 지고 동해를 안고서 우주 한가운데를 나오는 착각에 빠졌던 그 날을 어찌 잊었겠습니까.
귀가길에 척산 온천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었던 일, 저녁에는 사모님게서 내어 온 산어루주를 마시며 가을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예술을 화제로 꽃을 피웠습니다.
형님, 그 날의 감격과 감사함을 잊은 적은 없었습니다.
10년 세월이 살같이 흘러갔지만 형님과 굳게 다짐한 그 맹세 고이 간직하고 열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설악산처럼 동해처럼 그렇게 살자고 하셨지요.
(저자 약력):원고 글씨를 잘 못 알아보겠어요!!
‧ 1937년생. 동국대학교 교육 대학원 미술교육 전공
‧ ?
감자밭에서
최영간
아침일을 서둘러 마치고 재 넘어 메네골 밭으로 가다.
모내기가 끝나가는 서지골은 이제 감자밭 김매기가 한창인 계절이다.
제 밥그릇도 미처 못 비우고 부랴부랴 따라 나선 누렁이가 윗 마을로 통하는 갈림길에서 갸우뚱 고개를 덮고 쳐다본다. 밭쪽을 가리키는 내 고개짓에 꼬리를 바짝 세우며 휙, 숲을 가로 질러 먼저 넘어가 버리다. 놈의 달리는 밭길이 다복솔을 건드려서일까. 그리 멀지 않은 소나무 가지에서 꾀꼬리 한 마리가 푸드득, 높은 가지로 옮겨 깃든다.
아마 새벽녘, “갔다 올께요. 올까? 요기요기요. ” 혼자 묻고 대답하고 한참 부지럼을 떨던 놈인가 보다.
감자꽃 피는 요즘의 서지골은 날마다 새 소리가 늘어간다. 새벽 여는 일을 독차지하던 뒤안 대숲의 까치들은 제 몫을 며칠전부터 말 배우는 어린 아이 같은 꾀꼬리에게 넘겨 주더니 오늘은 “휘이익 쉬이” 휘파랑새가 먼 산 뻐꾸기와 함께 새벽을 일깨웠다.
농사일이 서툰 주인 덕(?)에 잡초는 이미 다보록하게 감자 포기를 웃돌고 있었다. 우선 호미로 풀을 뽑기 시작했다. 생각대로 싸움은 쉽지 않았다. 이른 봄부터 낸 퇴비 기운을 이게 웬 떡이냐는 듯 마음놓고 빨아올린 힘좋은 뿌리는 이미 내겐 섣부른 상대가 아니었다.
등을 두드리며 앉았다 일어섰다 수없이 자세를 바꿔가며 겨우 한 고랑을 끝내고 돌아보니 이런 낭패란, 서로 얼기설기 서려 있던 풀뿌리가 뽑혀 나간 탓일까 온당히 서 있는 포기는 드문하고 거반의 포기들은 비틀거리며 쓰러지고 있지 않은가. 야~ 이래서 북이라는 것을 주어야겠구나. 이번엔 자루가 긴 삽괭이로 허리도 펼겸 선 채로 민골의 흙을 도독히 긁어 올려주었다. 그제야 포기들은 나란히 줄을 서며 감자골로 살아났다. (남들도 다들 이런 식으로 할까?) 아무리 궁리를 해 봐도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한 고랑을 제대로 베자면 두번 씩이나 오고 가야 한단 말인가.
원체 사래가 긴 탓일까. 벌써 금게랍을 씹은 듯 입안이 쓰디 쓰게 말라 든다. 남은 밭이 끝도 한도 없는 막막한 바다처럼 앞을 가로 막는다. 그래도 물러 설 수는 없는 일. 밭메는 일에 이나마의 엄두도 못 내는 식구들에게 부린 호기도 호기려니와 잡초 서슬에서 벗어나 좋아라 나풀대는 감자잎을 보면 목마름 따윈 이내 잊고 말 일이다. 다시 잡초의 멱살을 당기며 다음 고랑을 시작한다.
아니, 이게 누구야! 감자 포기 겨드랑 사이에서 배시시 웃고 나오는 꽃. 여인 볼을 밝히며 마알갛게 쳐다보는 저 천진. 호미질을 멈추고 조그만 나팔같은 메꽃을 내려다 본다.
(얘야. 나는 널 뽑아내야 하는데) 녀석은 나의 이런 뜻 같은 건 아랑곳없이 가녀린 손으로 감자 줄기를 붙들고 연실 방글거리고 있었다. ‘섬마’ 하는 아기처럼 마냥 즐겁기만 했다.
살폿한 분홍 볼은 밤내 등잔불을 밝혀 만들어 주시던 옷, 윷동 저고리.
녀석의 발그레한 얼굴에는 내 유년의 가슴 설에던 새 옷 냄새가 배어 있었다. 옷깃을 여며주며 다독이던 엄마의 눈길이 잠겨 있었다.
엄마가 아, 어머니가 웃고 있었다. 밭머리 가죽 나무의 긴 허리를 덮어주며 엄마의 모습으로 인동꽃이 피고 있었다.
엄마의 취색 잘된 삼베 치마 색으로 뱃심 허한 허리를 둘러 주던 바래고 바래운 하얀 광목 행주 치마 색으로 그 꽃은 피고 있었다.
세월 내내 짜 내시던 삼베와 모시빛 그 인내의 빛깔을, 인동잎은 초하의 햇살 속으로 자아 올리고 있었다.
- 겨울은 춥고 길었지. 하지만 그리 지루하지만은 않았단다. 짧은 겨울볕으ㅢ 위로에 나는 늘 감사해야 했고, 가끔씩 품에 깃들던 참새 가슴의 작은 온기는 짜릿한 희열로 떨리게도 했지. 포슬하게 덮어 주던 함박눈의 쌓임은 나는 안온으로 잠들게도 했었지 - .
겨울을 이겨 낸 짙푸른 잎새는 희고 노리한 내 어머니색 꽃을 받쳐 들고 이렇게 얘기 하고 있었다.
꿀맛이 가득 담긴 길쭉한 꽃대를 빨며, 인내를 빨며 우린 그 곷을 꿀꽃이라 했던가.
산그늘을 타고 내리는 바람, 한줄기 움켜 마신다. 솔순 내음이 샘물처럼 쏴아하니 더위를 앗아간다.
멍턱 딸기의 새콥한 과즙은 마른 목안으로 달콤하게 스며 든다.
나 정녕, 저 밭의 끝자락에 서 보리라.
해맑은 메곷과 눈맞추며 솔바람에 나풀거리는 감자잎새를 데리고 밭의 끝자락에 앉아 속 깊은 저 꽃과 마음을 트리라.
갈증 속에서 얻은 한 바가지 샘물의 의미를 우리는 얘기하리라.
느슨해진 호미 자루를 다잡아든다. 풀 속에서 살찐 줄기의 비름잎이 반짝 빛난다. - 옳지, 오늘 저녁엔 저 야드르한 비름 나물을 상에 올려야지. 무침 고추장에는 깨가루를 듬뿍 치는게 제격일 테지 -.
막막하던 잡초밭에는 무수한 찰라의 행복이 숨어 있었다.
겨울 속에서 만났던 인동잎의 행복을, 인고의 세월 속에서 우리를 다독이며 짬짬이 누렸던 엄마의 진한 행복을 눈치 늦은 시골 아낙은 이제서 찾고 있었다.
밭섶엔 산딸기가 알불처럼 달아오르고 꼼지락, 꿈을 꾸는 누렁이의 낮자미 무르익어 가는 나절이다.
(작가 약력)
최영간 : (주소) 강원도 강릉시 난곡동 3통 3반 264번지 (우:210-350)
(전화) 0391-646-4430
(책제목) 1. 인동꽃 피는 고향
2. 인동꽃 산마루에 앉아
멋지고 감칠맛 나게 걸어가리라
최용순
리듬은 생명의 상징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리듬 속에 존재한다. 어저면 살아 숨쉬는 그 자체가 가장 완벽한 조화 속의 리듬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살아있는 그 어느 것이든 리듬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아마도 하잘것 없는 빈껍데기만 남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람이건 동물이건 살아있는 모든 것의 리듬감은 걸음걸이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사자나 표범같은 맹수들은 앞발과 뒷발의 보폭이 정확하고 일정하여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절대로 옆으로 넘어지지 않을 뿐더러 먹이를 따라잡기에 알맞도록 완급이 구분되는 걸음걸이가 발달했고 새 중에는 우아한 걸음걸이를 자랑하며 마음의 표상이다. 우리는 물결치듯 우아하고 경쾌한 걸음걸이에서 걷는 이의 구김없이 해맑은 마음을 읽을 수 있고 뒤뚱거리는 비만형 중년 여인의 둔탁한 걸음걸이에서 찌든 삶의 애환을 발견하기도 한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걷는 사람은 누구일까? 그야말로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감칠맛 나는 걸음걸이는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요즈음 흔히 볼 수 있는 패션 쇼의 걸음걸이가 그 본보기라고 할 수 있으리라. 패션 쇼야말로 첨단 유행의 산실이며 육체미와 매혹적이고 멋스러운 걸음걸이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무르익른 여성미와 의상 디자인의 앙상불 속에 패션 모델은 순간순간 음악과 의상에 따라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가운데 세련된 몸짓과 잘 다듬어진 걸음걸이로 자신만의 개성을 연출한다. 패션 모델이야말로 황홀한 분위기를 그의 매끈한 몸매와 걸음걸이로 보여주는 예술가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런데 패션 쇼의 걸음걸이는 옷을 편안하게 보여주며 디자이너가 만든 옷에 자부심을 불어 넣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디자이너에 따라 옷이 다르듯이 디자이너에 따라 요구하는 걸음걸이의 분위기도 달라진다. 우아하고 강인한 분위기를 원하는 디자이너가 있는가 하면 지극히 심풀한 걸음걸이를 좋아하는 디자이너도 있다.
또 어떤 디자이너는 삶의 충만함을 몸으로 보여주고 모델이 참다운 예술가라고 고집하기도 한다.
나는 잘 아는 디자이너의 초청을 받고 몇 차례 패션 쇼에 다녀온 후로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걸음걸이야 패션 쇼에 나온 모델의 걸음걸이와 비교할 일이 아니지만 건널목을 건얼 때나 버스를 탈 때 어저면 약속이라도 한듯이 뛰는 사람들을 보며 오늘날 생존 경쟁의 살벌함을 실감한다. 도무지 여유를 갖고 멋지게 걷는 사람은 좀처럼 발견하기 힘들다.
요즈음 들어 자동차 문화가 우리의 전통적 멋이 넘치는 걸음걸이를 빼앗아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현대인은 마음의 여유를 갖고 걸을 기회가 없다. 먼 거리는 말할 필요도 없이 단 백미터만 되어도 차를 타고 다니니 제대로 걸을 기회가 없다. 한국의 빨리빨리에 편승하여 숨막히도록 뛰어가는 현대인을 보며 나는 ‘목월’의 「나그네」를 생각한다.
“강나루 건너서 / 밀밭길을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 남도 삼백리 / 술 익는 마을마다 / 타는 저녁 놀 / 구름에 달 가듯이 / 가는 나그네. ”
목월의 나그네는 우리 옛날 선비의 점잖고 여유있는 모습임이 틀림없다. 서두르지 않고 유유자적하게 걸으며 생활을 음미하기도 하고 자연을 관조하기도 하며 걷는 그 모습은 유교 선비의 기품 그대로이다. 그야말로 멋진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비하면 오늘 우리 서울 명동이나 종로에서 신경쇠약을 일으킬 정도의 딸깍거리는 하이힐 걸음은 웬지 우리의 일상이 너무나 숨막히도록 각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도대체 멋이나 여유라곤 눈꼽만큼도 없다.
애당초 걸음걸이의 멋은 도심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 목월의 밀밭 같은 시골 길에서나 찾을 일이다.
따사로운 봄날 들꽃 어우러진 비포장 시골길에 손잡고 고향을 찾아나선 젊은 부부의 날아갈 듯한 가벼운 발걸음. 엄마의 손을 잡고 아장아장 장바구니에 매달려 골목길을 나서는 아기의 나들이. 낙엽을 밟으며 한적한 고궁을 끼고 남자의 팔에 매달려 속삭이듯 조용조용 걷는 여인들의 모습에서 현실의 고통을 까마득하게 잊은 인간 본연의 평화를 느낀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패션 쇼에서 놀라움의 눈을 크게 뜨고 조금은 설레는 가슴으로 엄숙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단 한 번만이라도 패션 쇼에 가 본 사람은 미끈하게 빠진 각선미에 초미니를 걸치고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너무도 당당하게 옮기는 발길은 보는 이를 황홀경에 빠뜨리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리라.
거기 살아 숨쉬는 생명의 율동 속에 인생의 향훈은 녹아 흐르고 우리는 잃어버렸던 생의 활력으르 회복한다고나 할까?
나는 오늘도 다이나믹한 음악에 맞춰 한 발짝 한 발짝 내딛는 패션 모델을 보며 내 인생의 이정표를 향해 가까이 다가서 본다.
그리고 나도 롱다리 미모의 패션 모델처럼 내 인생의 길을 힘찬 리듬에 맞춰 멋지고 감칠맛 나게 걸어가리라 다짐해 본다. (한국 수필. ’96. 5)
앨버트로스의 날개이고 싶다
최용순
날개를 편 길이가 무려 350센티미터나 되는 바다새의 수퍼 스타. 헹글라이드보다 성능이 뛰어난 초대형 강력 날개로 독수리나 갈매기보다 더 멀리 더 높이 창공을 멋지게 선회하는 앨버트로스가 있다.
그런데 앨버트로스가 수퍼 스타의 자리를 지키는 비결은 무엇일까. 다만 날개가 크기 때문일까. 그리고 앨버트로스의 일생은 아무 어려움없이 성장과정마저 화려하기만 한 것일까.
앨버트로스는 알에서 깨어나면 바닷물에 떠다닌다. 모든 새가 그렇듯이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날개짓을 하며 비행연습을 시작하는데 미처 비행법을 익히지 못하고 물 위에 떠 있는 포악한 표범 상어의 표적이 된다. 안타깝게도 그 대부분은 비행법을 익히기 전에 물 위에서 파닥이다가 상어의 먹이로 비운의 생을 마감한다.
그러므로 태어나면서부터 상어의 사정거리에서 탈출하느냐 못 하느냐 하는 숙명적 위기감은 필사의 날개짓을 재촉하게 하고 구사일생으로 운 좋게 한 발 빨리 비행에 성공한 앨버트로스만이 초대형 강한 날개를 펴고 타고난 비행술을 자랑하며 끝없는 바다와 하늘을 누비는 자유를 만끽한다.
이와 같이 아슬아슬하게 표범상어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난 극소수의 운 좋은 앨버트로스만이 목숨을 건 고생 끝에 터득한 비행술로 수퍼 스타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
앨버트로스야말로 운명의 불장난에 허덕이는 허울 좋은 비운의 새라고나 할까. 따지고 보면 앨버트로스를 바다의 수퍼 스타로 만든 것도, 살아남게 한 것도 그것은 거의 전부 운명이다.
그러면 인간 앨버트로스는 없는 것일까. 사람이 있는 곳엔 언제나 앨버트로스의 어려운 날개짓이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산업의 발달로 현기증이 나도록 복잡해진 오늘날엔 사람이 머무는 것이면 어디든지 바다 표범 상어가 아닌 인간 표범 상어가 도사리고 있어 우리를 괴롭힌다. 어쩌면 우리 인간은 앨버트로스의 숙명적 위기감보다 더 다급하게 살아남기 위한 지극히 어려운 날개짓을 강요당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역사 속의 인물들을 보라. 불운으로 허덕이다가 세상을 등진 안타까운 여인들을 보고 있노라면 인간은 운명의 여신 앞에 얼마나 나약한가를 거듭 생각하게 한다.
한 시대를 풍미한 영원한 여걸 황진이가 좋은 날을 택하여 목욕재계 후 자결로 최후를 맞는 것도 운명이요, 춘향이 이도령에게 결혼을 빙자한 간음을 당한 후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고초를 겪는 것도, “노틀담의 꼽추”에 나오는 집시의 여인 에스메랄다가 아름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제의 질투를 사서 마녀로 전락 파란만장한 최후를 마치는 것도, “테스”의 주인공이 부잣집 하녀로 들어갔다가 그의 상전 알렉 더버빌에게 강간 당한 후 볼록한 배를 안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고 비텨갈 수 없는 쓰라린 운명이다.
한편 생각하면 세상만사 운명 아닌 게 없다. 공자나 예수나 석가도 고행 끝에 혜성처럼 빛나는 성인이 되었지만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 성인이 되겠다고 다짐한 것도 아니다. 그분들을 고행의 길로 인도한 것도 성인으로 만든 것도 그분들의 팔자요 운명이 아닐까.
우리 주변에는 사람의 일이야말로 마음 대로 되는 게 아니구나 할 정도로 얄궃은 운명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용모나 언행을 보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은 불행이 비껴갈 것 같은데 아린 가슴을 안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면 울고 싶도록 안타깝기만 하다. 정말로 사람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정녕 비운의 여신이 그의 앞에 기웃거리기 전에, 큐피트의 화살을 그에세 향하도록 방향을 바꾸어 놓을 수는 없을까.
정성과 노력만으로 될 것이 아닌 게 사람의 일인가. 결국 행복과 불행은 운명에 맡기는 도리밖에 없는가 보다. 인간의 운명은 어쩌면 앨버트로스보다 더 비참하게 마음껏 날개짓 한번 못 하고 사라져가는 경우도 허다가지 않을까. 다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감상적이고 낭만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우리 사회를 보라. 극소수의 운 좋은 사람만이 사는가 싶이 성취감에 기쁨을 누리며 우뚝 서는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의 영예를 축하하는 들러리라고나 할까. 아니 인간이란 보잘 것 없는 몰골로 운명 앞에 무릎을 꿇고 순응할 수밖에 뾰족한 방법이 없는 걸 생각하면 연민의 정으로 가슴이 녹아 내린다.
사람은 누구든지 꿈을 머금고 그리움에 함초롬히 젖은 채 살아간다. 그런데 운명은 자유뷴번헌 꿈을 짓밟고 지나가는 폭풍우와도 같은 것. 그러므로 나는 비운을 말끔히 떨쳐버릴 수 있는 행운의 앨버트로스를 꿈꾼다. 운명을 뛰어 넘어 거대한 두 날개를 펼치고 멋지고 감칠맛 나게 낭만과 감격어린 비행을 할 수 있는 앨버트로스의 날개를‧‧‧‧‧‧.
(작가 약력)
최용순 :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서울 송파구 잠실 6동 장미아파트 20동 501호(우:136-226)
02) 416 - 7046
나의 네 번째 사랑
최춘지
“사람들은 자신의 배우자가 첫사랑이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세 번째 아니면 네 번째 사랑이래. 첫번째 두 번째, 세 번째는 자기도 모르게 지나가기 때문에‧‧‧ 그러고 보면 나의 첫사랑은 삽으로 몇 장을 떠 서 내 대야에만 담아주던 초등 학교 때 그 남학생이었나 봐. ” 라던 국문학과 친구의 사랑론이 30여년 세월이 흐른 이 가을에 문득 생각난다.
여고 졸업 후 재수를 하던 외롭고 힘들던 계절에 아름다운 글을 보내 주어 위로가 되었던 산골 소년, 노란 개나리가 활짝 핀 계절에 휴가길에 들렀던 고향 선배님을 청량리 기차역에서 전송을 하였는데, “선생님, 저기 밭둑에 들국화가 가득 피었던데 보러 가요. 권금성 계곡에 목련을, 천불동 계곡에 단풍 을‧‧‧‧‧‧. ”
장작불이 활활 타는 교무실 난롯가에서 밤이 깊도록 얘기가 즐거웠던 선배 선생님, 다시 맞은 이 아름다운 가을 햇살에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얼골들이다.
그러면 나의 배우자는 네 번째 사랑이라고‧‧‧‧‧‧.
청계산 계곡에 버들강아지를, 연분홍 꽃분이 천지에 가득한 진달래를, 5월이면 계곡 어귀에 딱 한 송이 피는 난꽃을 보려고 이른 봄부터 늦가을 낙엽이 질 때까지 산과 들을, 겨울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태능 스케이트장을 다녔던 젊은 날들은 어느덧 지나가고 50고개를 넘으니 아이들은 제각기 흩어지고 교통은 혼잡하여 남산 숲 속이나 한강 잠수교를 밤에 드라이브를 함께 즐기는 나의 사랑하는 동반자에게 웬지 이 가을에 옷깃 여며 감사하는 마음이다.
오는 주말엔 들로 나가 보자고 졸라 봐야지‧‧‧‧‧‧.
그리운 강릉
한 숙 향
꿈만 같은 목소리였다. 어느 날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나의 가슴은 마구 뛰었다. 어린 시절 가장 다정했던 친구 이정순에게서 온 목소리는 한없이 기쁘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내일 초등 학교 동창회가 강릉 모교에서 있으니 무조건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목메인 시간 속에서 긴 세월 마구 뛰다가 보니 나는 친구도 고향도 잃어버린 고아였다. 나는 왜 동창도 친구도 고향도 잊는가. 한탄과 비탄의 시간 속에서 모질게 살아온 나의 세월이 새삼 그리웠다.
다정했던 친구의 목소리. 그리고 동창회와 모교의 그리운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강릉의 어머니 목소리가 스며있고 집과 동산과 바다와 친구의 얼굴이 그리웠다. 거기서 동창회가 40여년만에 열린다니 감개무량했다.
꿈과 낭만의 꽃되던 거기에서 다정한 친구와 담임 선생님도 만날 수 있다니 가슴이 뛰었다. 먼 고향의 아스라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성당의 마리아 모습도 보고 싶었다.
그 때 나는 울이모의 무서운 비바람 속에서 부모 형제도 잃고 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나에게는 학교의 친구가 있고 담임 선생님이 있고 성당의 수녀님이 계셨다.
그 중에서도 특히 6학년 4반의 심일섭 선생님이 보고 싶었다. 아침 등교길에 어떤 가엾은 거지 할머니를 보았다. 나는 도시락을 아침마다 들렀다. 그리고 그 분은 아침마다 나를 기다렸다. 내가 그 때 도시락을 싸 가지고 오지 못한 것을 안 담임 선생님은 내가 가난해서, 아주 가난해서 라고 생각하셨는지 내게 늘 당신의 도시락을 주셨다. 나는 매우 쑥스러워 나의 그 사정을 말씀드리지 못했다. 아침마다 그 분은 나를 기다리고 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면서 마냥 그 분에게서 모정을 느꼈다.
선생님은 당신의 도시락을 내 책상 속에 늘 놓으시고 나는 점심 시간이면 멀리 달아나서 나무 밑에서 책을 읽던 기억이 새로웠다. 그러나 선생님의 그 거룩한 사랑은 내 인생을 살아 오면서 커다란 지팡이가 되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등불이었던 사랑의 스승, 나를 바르게 설 수 있도록 인도하신 선생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나는 사뭇 모교의 그리운 운동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 선생님을 뵙고 싶었다. 손을 잡고 그리운 얘기도 나누고 싶었다.
나는 그 동안 크게 되지는 못하였지만 내 나름대로 혼자의 힘으로 장하게 살아온 내 모습을 빨리 보여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간의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선생님 저는 도시락을 못 싸온 것이 아니라 그 할머니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선생님, 그 때 저로 하여금 몹시 시장하셨지요. 선생님의 큰 사랑이 저를 이렇게 키워 주신 것입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바르게 저를 인도하신 선생님 감사합니다. ”
나는 전화를 받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면서 한없이 모교와 선생님과 고향의 바다가 그리웠다. 다음 날 잠실 올림픽 공원에서 우리는 다정한 친구들을 만났다. 이정순을 만나면서 그 간 교통사고로 다리를 다친 정순이를 안으면서 새삼 강릉으로 달려갔다.
반백이 된 친구. 그 때의 어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지만 우리들은 서먹함도 없이 금세 형제처럼 수다를 떨었다. 누구는 어떻고 누구는 갑부가 되고 누구는 누구와 살고 누구는 죽고 누구는 너의 짝이었다. 그런 그런 얘기로 손을 잡으면서 맑고 꿈 많았던 기억을 싣고 관광 버스로 대관령을 넘었다. 길고 수려한 산굽이를 돌아서 바닷가의 백사장으로 그 때의 갯바위로 내 어린 시절의 첫 사랑도 찾을 수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고 군복무 삼년 육개월 내내 전방 부대에서 제일 먼저 돋아나는 꽃잎과 야생화 쥐똥나무의 가지 위에 정성스럽게 쓴 편지를 나는 지금도 잊을 수 없지만. 수삼년 간 답장 하나 없이 받기만 했던 그 편지의 사랑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옥천동 44번지의 전찬홍,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별이 되고 해가 되었는지.
강릉은 그 뿐만이 아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눈물이 앞을 가린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강릉에서 다시 살고 싶다.
(저자 약력)
한숙향 / 강릉 사범병중 14기 /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 / 새하얀미술학원 경영
주소) 서울 관악구 신림 8동 1645-1 강남아파트 상가 내 새하얀 미술 피아노 학원 (전화:854-0895)
강릉 남대천의 은어떼
홍성암
포장술집은 시끌벅적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면 으레 그랬다. 귀가길에 한잔들 걸치려는 것이다. 술이 취한 사람은 술이 취한 김에 한 잔 더 걸치려는 것이고 덜 취한 사람은 맹물 같은 맨정산아 삻어서 한 잔 더 마시려는 것이다. 아파트 생활이란게 마냥 단조롭기 마련이었다. 어제도 그제 같고 오늘도 어제 같은 생활, 내일인들 오늘과 다를게 별로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귀가길의 한잔이야말로 유일한 변화요 변칙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밤이면 모두들 포장집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그날도 나는 취했고 그래서 취한 김에 한 잔 더 걸치려고 포장집엘 들렀다.
소주 한 병. 꼼장어 한 접시. . . 소주는 그린이요.
나는 습관처럼 그렇게 말했다. 소주는 그린이요. 그린 소주는 대관령 청정수로 빚은 술이라는 바람에 내 단골 메뉴가 되었다. 내 고향이 그곳이기 때문이었다. 소주는 그린이요. 그렇게 주문을 할 때면 이상하게 가슴 한 자락이 찌르르 울린다. 고향 떠난지도 30여년이 넘고 보니 고향을 떠올릴만한 일도 많지 않다. 그래서인지 별것 아닌 그린 소주 한 병 시켜 놓고 향수에 젖어도 보는 것이다. 소주 한 잔 홀짝 마시고는 경포대 해수욕장도 떠올려 보고 또 한 잔 홀짝 마시고는 남대천 뚝방길도 떠올려 본다. 한 잔 홀짝 마시면 송정리 솔밭이 보이고 또 홀짝 마시면 남문동 시장바닥이 떠오른다.
강릉이란 곳이 말이지. . .
어떤 사내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 온 것은 바로 그 때였다.
웃겨도 한참 웃기는 곳인데 말이네. . .
그는 그런 식으로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무뚝뚝하기가 참나무 장작이라 그 말이네. 만약 자네가 말이야. 강릉엘 온다면 말야. 소문난 음식점엘 들어가서 물어 보게나. 「이 집 칼국수 맛있소?」하고 말이야. 그럼 그 여주인이 뭐라는 줄 아나? 열이면 열이 한다는 대답이 「맛없소. 하지 말라우」그런 식이라고. . . 막상 시켜서 먹어 보면 기막힌 솜씨인데도 말이네.
허, 자네 누구 병신 만들 일 있나?
거짓말이라고?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한번은 말이야. 집사람과 어시장엘 갔었지. 길바닥 난전에 생선들이 즐비하더군. 집사람이 명태 한 무더기를 가리키며 묻더군. 「아줌마, 이거 얼마요?」 그러자 생선장수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하더군. 「오천원이요. 」 집사람이 생선값을 알리가 없지만 버릇이 돼서 값을 깎자고 하더군. 「오백원만 깎아 주세요. 」 「안됩니다. 아침 마수거리라서 헐하게 부른거요. 」 「그래도 그렇지요. 오백원쯤 깎는걸요. 」 「그래도 안됩니다. 」 「아줌마도 어지간 하시네. 오백원만 깎아줘요. 」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나?
취객이 눈을 반들대며 동료를 보았다.
생선장수가 생선이 든 함지막을 땅바닥에다 팍 엎어버리는 거라. 그리고는 하는 말이 말이네. 「안된다면 안되는거지. 왜그리 잔 말이 많소. 나는 그렇게는 안 팔겠단 말이요. 한 번 말하면 알아 들어야지. 귀한 밥 먹고 꼭 두 말 세 말 되풀이 해야겠소?」하고 길길이 뛰는데 말이네. 집사람이 기가 팍 질려 갖고 말이네. . .
나는 사내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빙긋이 웃었다. 그래, 그게 강릉 사람이다. 그래서 어쨌다는 말이냐? 남에게 아첨할 줄 모르는 게 강릉 사람이다. 손님이 없어서 장사를 안 하면 말지 마음에 없는 말로 아야을 떨 수는 없다. 몸에 배지 않은 짓을 새삼 어쩌란 말인가?
아무튼 남들은 믿지 못할 정도인데 말이네. 서울에서 벚꽃이 만발하는 때가 4월 중순이 아닌가? 날씨가 얼마나 화창하냔 말이네. 어디 벚꽃뿐이던가? 진달래 개나리는 물론이요 목련과 복숭아꽃, 살구꽃이 어우러져서 그야말로 사람을 달뜨게 하는 날씨가 아니냐구?
그야 봄인걸.
그런데 그 곳은 어떤지 아나? 봄철 내내 바람이네. 흙먼지를 뿌옇게 날리는 높새바람이 밤이고 낮이고 계속 불어대는거라. 아주 메마른 바람이어서 나뭇잎이 시들시들 마르고 풀들이 누렇게 죽어간단 말이네. 봄철 내내 말이네.
그럼 꽃들이 피지 않나?
피기야 피지. 그런데 바람에 비쩍 마르거나 아니면 눈에 푹 파묻히는거라.
봄철인데 눈은 무슨?
허, 이 사람. 그 곳엔 5월에도 눈이 내리는 곳이라구. 벚꽃이 만개한 다음 날엔 으레 눈발이 날리기 마련인데. 눈도 그냥 눈일 줄 아나? 봄눈이라도 내렸다하면 폭설이야. 사람의 키를 넘는 일은 약과고 지붕 처마 위까지 눈으로 뒤덮이는데 그러면 학겨도 쉬고 관공서도 쉬게 되지. 집과 집들 사이로 굴을 뚫어야 왕래가 될 정도네. 알라스카도 아닌 대한민국에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껏 몰랐겠지?
그런데 왜 그런게 신문이나 테레비에 나오지 않지?
허, 이 사람. 뉴스꺼리가 되자면 새로운 것이어야 하는데 그 지방에선 해마다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어서 아예 뉴스꺼리로 치지를 않거든. . .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내 고향 강릉은 아프리카의 사막이 되었다가 알라스카의 빙판이 되기도 했다. 취객의 말이 상당부분 과장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근거가 전혀 없는 말은 아니었다.
폐쇄된 지역이라 텃세도 심하겠군그래?
텃세도 제법 있지. 자신들의 지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네. 가장 대표적인 게 남대천의 은어떼 얘긴데. . . 어릴 때 은어떼가 하얗게 몰려 왔다고 자랑들 하거든. 은어떼가 하얗게 몰려 오는 남대천. 어때? 그럴듯하지? 그런데 그 남대천이란 개울이 말이네. 서울 정릉천보다 수량이 많지 않아. 그러니 서울 사람 같으면 그 개천에다가 감히 대(大)자를 붙일 엄두도 내지 못할꺼야. 그런 작은 개천에 무슨 수로 은어떼가 하얗게 몰려 들겠나? 어느 장마 때 한 번 몰려 온 걸 갖고 두고두고 자랑하는거지. 아니면 예전 부모들 시대에 있었던 이야기를 갖고 전설처럼 뒤로 물려주고 있든지. . .
비록 그게 취객의 말이긴 하지만 말이 그렇게 되어서야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소주잔을 들고 취객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우락부락한 표정으로 윽박지르듯이 사내에게 물었다.
이보시요. 그 곳은 내 고향이요. 댁은 그 곳에 몇 년이나 살았소?
내가 그렇게 따지듯 묻자 사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한 삼년 됩니다.
그럼 그 곳의 가을을 겪었겠구려? 가을 하늘이 어땠소?
가을이야 좋지요. 공기가 맑고 하늘을 맑지요. 공장이 없어서 매연이 없는 도시지요.
감나무는 구경했소?
물론이지요. 도시의 가로수가 온통 감나무입니다. 감은 나뭇잎이 모두 떨어진 다음에도 여전히 달려 있지요. 그러니 도시가 온통 빨간 감나무 숲입니다.
강릉 남대천 물이 어느 바다로 빠져 나가는지 보았소?
안목쪽이라는 말만 들었소.
직접 보지는 못했구려?
못했소?
여름철에 한 번 가 보시요. 그러면 하얗게 밀려 오는 은어떼를 보게 될 것이요.
나의 말에 사내는 긴가민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릉 사람이 그렇다면 그런거요.
나는 그린 소주를 입속으로 털어 넣으며 말했다.
겨우 삼년 살고서 댁이 뭘 안다는게요. 경포 호수에서 부새우 뜨는 것 보았소?
부새우가 뭐죠?
부새우가 부새우지 뭐라니?
나는 핏대를 세웠다.
거기서 어떤 조개가 잡히는 지는 아오?
그 호수에 무슨 조개가 있다는 겁니까?
젠장할. 아무 것도 모르면서 뭘 그래?
나는 소줏잔을 팍 엎었다.
강릉사람 순하지요?
그러요.
화 내면 무섭지요?
나의 말에 사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친구의 옷자락을 끌며 서둘러 포장집을 떠났다.
젠장할. 제놈이 뭘 안다고 그래.
나는 엎었던 소줏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 그리고 그린 소주를 다시 입 속으로 쏟아 부었다. 한 잔 소주에도 강릉 남대천에 은어떼가 하얗게 몰려 오기 시작했다. 은어란 놈은 그 이름 그대로 하얗고 깨끗한 물고기다. 몸뚱이에 파르스름한 가로줄이 있고 물빛처럼 투명해서 떼를 지어 다니지 않으면 얼른 식별해 내기가 어려울 정도다.
한 여름이면 그 투명한 은어들이 떼를 지어 몰려 온다. 바다에서 강으로 거슬러 오른다. 그러다 한 여름의 기온이 턱없이 높아서 민물의 온고가 갑자기 높아지기라도 하면 은어들은 뜨거운 민물에 기절해서 흰 배를 들어내고 하얗게 떠오른다. 발가숭이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수면 위로 떠오른 기절한 은어들을 건져 낸다. 은어들은 기절한 채 물따라 흐르다가 바닷물의 찬 기운을 만나면 다시 살아나서 퍼득인다. 그게 은어다.
나는 다시 술잔을 홀짝였다.
강릉 사람도 아닌 주제에 제놈들이 뭘 안다고. . . ?
그렇게 중얼거리는 나의 눈에는 40년 전의 은어떼들이 다시 하얗게 몰려 오는 것이었다.
(저자 약력)
‧1942년생. 강릉시 연곡면 영진리 출생
‧강릉 사범. 한양 대학교 대학원 졸업(문학 박사)
‧현대문학지에 소설 추천 완료로 문단 데뷰
‧소설집 큰물로 가는 큰고기. 대하역사소설 남한산성(전 9권) 등이 있음.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