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프로그램과 DTP 프로그램으로 꿈을 키우던 예비 예술가들
컴퓨터 사용자에게 친숙한 그래픽 프로그램이라면 페인트브러시, 닥터 할로Dr.Halo, 디럭스페인트를 들 수 있다. 닥터 할로는 마우스 없이 키보드로도 그림 그리기가 가능해서 선을 이용한 그림 그리기에 많이 사용했던 프로그램이다. 디럭스페인트는 마우스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도구로 학생들이 가장 많이 사용한 프로그램이다. 다양한 기능과 화려한 VGA 지원이 특징이며 한동안 컴퓨터잡지에 응모하는 그림의 대다수가 디럭스페인트로 그린 그림일 정도로 큰 인기를 누렸다.
사진 편집 기능을 갖춘 그래픽 프로그램은 좀 더 뒤에 보급되었다. 사진 편집 프로그램으로는 앨더스 포토스타일러가 가장 대표적이다. 지금의 포토샵과 거의 기능이 같았던 포토스타일러는 도스용 프로그램과는 차원을 달리 하는 프로그램으로 화려함을 자랑했다. 그러나 앨더스 포토스타일러는 거의 같은 모습을 한 포토샵에 밀리면서 결국 그래픽 프로그램의 왕좌를 포토샵에 내주고 만다.
도스 시절에 많은 컴퓨터 사용자들이 그래픽 프로그램을 이용한 컴퓨터 아트를 꿈꾸었다. 마침 백남준 씨의 비디오아트가 한창 유명할 때라 컴퓨터를 이용한 컴퓨터아트는 많은 청소년이 꿈꾸는 멋진 작업의 하나였다. 그러나 컴퓨터아트는 많은 비용을 요구했다. 지금은 몇 천 원에 불과한 마우스가 당시에는 수십만 원이나 했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사용한 마우스는 볼마우스도 아니고 광마우스인 PC마우스였는데, 당시에는 40만 원 정도 되는 고가품이었다. 학생 신분으로는 감히 구입할 수 없는 제품이 마우스였다. 때문에 마우스 가격이 내려가면서 보급되었을 때 가장 신났던 사람은 컴퓨터아티스트를 꿈꾸던 학생들이었다. 이들이 지금은 2D와 3D를 망라한 국내 컴퓨터 그래픽 분야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었다.
쪽박사 사건으로 사임당 등 국산 소프트웨어에 대한 불신 증가
쪽박사는 ‘한글2000워드’를 개발한 한컴퓨터연구소에서 ‘한글2000’의 후속 제품으로 1990년에 내놓은 제품이다.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에 그림 그리기 추가된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그림 그리기 프로그램에 글쓰기 기능이 추가된 것으로 볼 수도 있는 프로그램이다. 어찌 보면 간단한 기능의 DTP전자출판 프로그램으로 볼 수도 있다.
하여간 쪽박사는 한글이 지원되는 그래픽 프로그램이었다. 사용법도 쉽지만 무엇보다도 그림 안에 한글을 표시할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상용임에도 큰 인기를 모았고 정품도 많이 판매되었다. 쪽박사와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한글박사’라는 것도 있었다. 이름도 비슷하고 기능도 비슷하지만 둘은 다른 제품이다.
쪽박사의 성공에 힘입어 한컴퓨터연구소는 1991년에 쪽박사보다 더 성능이 좋은 사임당이라는 프로그램을 내놓는다. 사임당은 DTP라고 할 정도로 매우 세련된 프로그램이었으며 ‘한글2000’의 개선판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전에 사용하던 쪽박사 사용자를 배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누가 봐도 쪽박사 후속판으로 보이는 사임당을 내놓으면서 쪽박사가 아닌 사임당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이전의 쪽박사 사용자로 하여금 사임당을 새로 사게 만든 것이다.
수많은 쪽박사 정품 사용자는 화를 냈고, 사임당 불매운동을 시작한다. 사용자의 불신은 결국 쪽박사도 사임당도 더 이상 팔리지 않은 상황을 만들어냈고, 국산 그래픽 프로그램은 그렇게 시장에서 퇴출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포토스타일러와 포토샵이 차지했다.
사실 사임당이 적게 팔린 것은 아니다. 사임당은 1991년에 4만 개가 팔려 7억 원이란 큰 매출을 거두었다. ‘아래아한글’이 3만 개 밖에 팔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사임당의 판매 수량은 매우 많은 것이다. 역으로 생각하자면 사임당의 불법복제 방지가 아래아한글에 비해 훨씬 강력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정품 사용자는 많지만 정품 사용자 외의 복제 사용자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소비자의 반발과 적은 수의 사용자라는 한계 때문에 사임당도 실패의 길을 걸었다.
반면 불법복제로 곤욕을 치렀던 한글은 불법복제 사용자를 기반으로 기업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면서 급성장한다. 강태진 사장의 능력으로 볼 때 한컴퓨터연구소의 몰락은 아쉬운 점이다. 쪽박사와 사임당이 성공했다면 아래아한글과의 경쟁을 통해 국산 그래픽 프로그램이나 국산 DTP,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의 경쟁력이 더 강해졌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휴먼컴퓨터의 아쉬운 실패
그런 점에서 휴먼컴퓨터도 아쉬운 업체였다. 휴먼컴퓨터는 1989년에 카이스트에서 전산학을 전공한 박사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회사로 출판프로그램DTP인 ‘문방사우’, 윈도용 워드프로세서 ‘글사랑’, 컴퓨터글꼴모음 ‘통합글꼴’을 내놓은 우수한 기술력을 가진 회사다. 특히 문방사우는 영문 DTP 프로그램에 결코 뒤지지 않은 빼어난 기능으로 출판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문방사우 역시 지나친 복제방지 장치가 문제였다. 컴퓨터 프린터포트에 장착하는 하드웨어 방식의 락인 ‘T락’을 사용함으로써 불법복제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T락은 정품사용자를 괴롭히는 족쇄가 되었다. 한글 사용 때는 컴퓨터 뒤에 손을 뻗어 한글용 T락으로 교체했다가, 문방사우 사용 때는 문방사우용 T락으로 프린터케이블을 연결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을 하루에도 수십 번 반복했다.
정작 복제품은 편하게 두 프로그램을 구동시킬 수 있는데, 정품 사용자가 이런 괴로움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었다. 결국 T락은 정품사용자의 애정을 끊는 장치가 되었고, 정품사용자마저 불법복제품을 사용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94년 1월이 시작되자마자 국내 대표적인 소프트웨어업체인 휴먼컴퓨터대표 정철와 한컴퓨터대표 강태진는 연합을 선언한다. 두 업체는 두 회사의 워드프로세서 개발팀을 통합하여 2월에 자본금 10억 원 규모의 나라소프트를 설립할가칭란 별도의 회사를 설립키로 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모색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이는 한국산 DTP 및 그래픽 소프트웨어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잠깐] 강태진 씨의 야심이 꽃 피우지 못한 이유 |
아래아 한글이 등장하기 전에 가장 널리 사용한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은 삼보에서 만든 보석글이다. 그러나 아래아한글이 자체 내장 글꼴로 시장을 장악하면서 사라진다. 아래아한글 등장 이후 경쟁자는 하나워드와 훈민정음이었다. 그 외 백상, 21세기, 문방사우 등도 있었다. 그러나 아래아한글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원래 ‘한글2000’이었고 아래아한글 발표 후에는 ‘사임당’이었다. 1988년 여름에 캐나다 거주 대학원생이었던 강태진 씨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직접 개발한 ‘한글2000워드’로 한국 시장에서 성공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한컴퓨터연구소’라는 회사를 설립한다. '한컴퓨터연구소'에는 애플II+용 워드프로세서인 ‘한글III’를 만든 정재열 씨도 합류했다. ‘한글2000’은 기능 면에서 매우 뛰어난 프로그램이었다. 그가 실리콘밸리를 오가며 북미에서 배우고 익힌 지식을 바탕으로 개발한 ‘한글2000’은 한글이 지원되지 않는 컴퓨터에서도 사용이 가능했고, 화면에 보이는 글자와 그림이 그대로 인쇄되는 국내 최초의 ‘위지윅’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강한 복제방지 장치가 화근이었다. ‘한글2000’은 널리 퍼지지 못했고, 그 사이에 이찬진 씨의 ‘아래아한글’이 나와 전국적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만약 강태진 사장이 보급에 먼저 역점을 두고 정책을 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
《대한민국 IT사 100장면》, e비즈북스, 김중태 저
첫댓글 와~ 이 책 내용이 정말.. 주옥 같네요 ㅠ_ㅜ 추억에 젖을 듯한 이 내용... 386세대나 그 이후의 x세대에게 많은 향수를 불러 일으킬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는 거 같습니다~! 닥터 할로, 페인트 브러시... 많이 들어본 ~ 정말 아쉬운 점이라고 한다면, 집에 경제력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런 아버지 덕분에 컴퓨터 구경도 못했다는 점입니다. 물론, 컴이 있었다고 해도 게임을 주로 했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어차피 잘 하지 않았던 공부.. 그때 컴퓨터와 더 친숙했다면... 지금의 제 모습과 상당히 차이가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ㅠ_ㅜ 지금도 결국은 컴관련 일을 하쟎아요...
음화화. 우쭐우쭐.
저작권 관련... 소비자를 위한다는 개념이 없었던게 가장 큰 문제였던 거 같습니다. 기술만 알지 마케팅이나 소비자 행동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데다.. 저작권에 대한 나쁜 개념만 - 만들면 다 내 거다 -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 -ㅇ-;; 프로그램 개발의 역사에 대하여 어느정도 이해가 있었으면 자신의 저작권을 지킨다고 지나치게 묶어두려고 하진 않았을 듯 싶은데... 아쉬운 점이 있네요 .. 휴먼컴퓨터에 대해선.. 폰트제작 도구를 만들었다는 점만 기억나는군요... 돈만 있으면.. 폰트제작 프로그램 하나 구하고 싶어요 ^^;; 폰트. 노가다 해서 하나 만들고 싶다는...
자신만의 폰트는 듸자인 계통 분들의 로망이죠.
역시 아시는 군요 ㅋㅎㅎ 특히, 전 글자에 관심이 많아서요 ㅠ_ㅜ 못 쓰는 글이지만... 에혀.. 아시아폰트 쪽에서 툴을 판매하던데.. 150만원 정도 하더군요 ^^;; 맥 전용이구요... 하여간 돈 벌면 맥 한대사고, 이 툴 살겁니다. 아앜.. 사고 싶은 건 너무 많군요 ㅠ_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