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어의 비극

버지니어의 비극 한뫼 晶峰趙世用 지난 4월 18일 태평양 바다 건너 미국 동부지역 버지니어 공과대학에서 그 대학 영문학과 4학년 재학중인 한국인 1.5세대 교포 학생 조승희군이 총기를 난사하여 사망 32명, 부상 29명의 인명 피해를 일으키고 스스로 자살한 미국 역사상 최악의 교내 대살인사건이 발생하여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 후에 신문이나 텔레비젼 뉴스를 통해 전해진 소식을 종합해 보건대, 조군은 1984년 1월생으로 미국으로 이민 가기 전 초등학교 2학년 시절에는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학생이긴 했어도, 운동도 잘하고 똑똑한 모범생이었다고 하며, 그 후 미국으로 이민 가서 초등학교 다닐 때는 역시 말 없는 학생이긴 했어도 왕따 당하지 않았고, 운동과 공부를 잘해 영어가 필요 없는 수학 과목은 천재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군이 중학교 다닐 무렵부터는 주변 미국인 학생들로부터 영어 발음이 이상하다고 놀림과 왕따를 당하기 시작하면서 우울, 고독, 좌절감으로 지내다가 사회와 체재를 파괴하려고 하는 사이코패스(psychopath=반사회적 성격장애자)의 망상적 정신 이상을 보이다가 마침내 끔찍한 다중(多衆)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 같다. 이 같은 행위는 일찍이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E. 뒤르켐(Durkheim, 1858-1917)이 그의 저서 『사회분업론(1893)』과 『자살론(1897)』에서 학술용어로 사용했던 '아노미(Anomie) 현상'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이러한 아노미 현상은 오늘날 사회학적 의미로는 '행위를 규제하는 공통된 가치나 도덕적 규범이 상실된 혼돈상태'를 뜻하며, 심리학적 의미로는 '불안, 자기 상실감, 무력감 등에서 볼 수 있는 부적응 현상'을 뜻한다. 이러한 아노미 현상의 살인 사건은 서양에서는 '이성 중심의 사회(고대 그리스 시대)→신앙 중심의 사회(중세 사회)→인본 중심의 사회(문예부흥 시대)'에서 20세기 '기술 중심의 호머 화버(homo faber)적 산업사회'로 넘어오면서 물질 만능, 황금 만능의 사상으로 말미암은 인간성의 상실과 가치관의 붕괴에서 다발적으로 발생했으며, 동양에서는 근대 서구의 물질 문명을 받아들이면서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유사한 사건은 비교적 무기 구입이 용이하고 민족적 갈등이 심한 미국에서 빈번하게 발생하였는 바, 1966년 8월 1일 미국 텍사스대학에서 찰스 화이트만이 총기를 난사하여 어머니와 부인 포함 15명 사망, 31명 부상의 인명을 살상한 사건이 그것이요, 1999년 4월 콜로라도주 리틀톤 컬럼바인 고교에서 남학생 2명이 12명의 학생과 1명의 교사를 살해 후 스스로 자살한 사건이 그것이요, 2006년 10월 펜실바니아주 웨스트 니켈 마인스학교에서 우유 트럭 배달부가 어린 여학생 14명을 사살하고 스스로 자살한 사건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는 미국처럼 무기 구입도 용이하지 않고 민족적 갈등이 없는데도 이와 유사한 다중 살인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1982년 4월 경남 의령(宜寧) 경찰서 궁유지서 우범곤 순경이 동거녀와 말다툼을 한 후 화풀이로 총기를 난사하여 주민 56명을 사살하고 34명을 부상 입히고 스스로 자살한 사건이 그것이요,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아내로부터 이혼당한 정신병 경력자인 유영철이 21명의 연약한 노인과 여인들을 골라 망치와 칼로 살해한 후 다시 시신을 토막내어 암매장한 엽기적 연쇄 살인 사건이 그것이요, 우울증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김모씨가 대구 중앙로역에 진입하는 지하철에 신나를 뿌리고 불을 질러 192명을 사망케 하고 140여명에게 중경상을 입힌 사건이 그것이요, 2005년 6월 김동민 일병이 선임병의 가혹 행위에 불만을 품고 연천군 비무장지대 감시초소 내무반에서 총기를 난사하여 8명을 사망케 한 사건이 그것이다. 도대체 인간은 얼마만큼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인간의 본성은 선한 것인가? 아니면 악한 것인가? 혹시 인간의 깊숙한 내면에는 짐승만도 못한 악의 마성(魔性)이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 형상대로 만드셔서 땅 위에 모든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셨다.'( 구약성서 창세기).'에서의 '모든 생물을 다스려 온 만물의 영장(靈長)인 인간',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만물의 무리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 이는 오륜이 있기 때문이다(天地之間萬物之衆惟人最貴所貴乎人者以其有五倫也)(『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의 '만물 가운데 가장 귀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이렇듯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잔인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일찍이 맹자(孟子, 372-289 B.C.)는 '인간의 본성은 본디 착하다.'고 하는 이른바 성선설(性善說)을 『맹자』공손추장구(公孫丑章句) 상(上)에서 사단(四端)을 들어 다음과 같이 갈파한 바 있다. 물에 빠진 어린 아이를 가엽게 생각해서 그를 구해 주려고 하는 마음은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이는 곧 인(仁)의 실마리요, 옳지 않은 것을 보고 부끄움을 느끼거나 그를 미워하는 마음은 수오지심(羞惡之心)으로 이는 곧 의(義)의 실마리요,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과 윗사람을 공경하는 마음은 사양지심(辭讓之心)으로 이는 곧 예(禮)의 실마리요, 스스로의 양지(良知)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결정(決定)하는 마음은 시비지심(是非之心)으로 이는 곧 지(智)의 실마리라고 하였다. 인간은 본디부터 사지(四肢)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선(善)을 실현할 수 있는 실마리인 이 사단(四端)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 사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선(善), 즉 인, 의, 예, 지의 형이상학적 4덕(德)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은 스스로를 해치는 사람이요, 그것을 확충(擴充)시키지 못한 사람은 사해(四海=천하)를 편안케 할 수도 없으며, 부모를 제대로 섬길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선한 본성을 적극적으로 확충시켜 나갈 것을 강조한 설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 맹자와 유사한 성선설을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J. J. 루소(1712-78)이다. 그는 『에밀(Emile)』에서 '인간의 자연 본성은 선한 것인데 역사 문명과 사회제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자연이 만든 사물은 모두 선하지만, 일단 인위를 거치면 악으로 변한다.'고 하면서 '선은 천성에 속하고 악은 인위에 속한다.'라고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친 바 있다. 맹자의 성선설과 정반대되는 학설은 순자(荀子, 298?-238? B.C.)의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라는 성악설(性惡說)이다. 『순자(荀子)』, 성악편(性惡篇)을 요약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간의 본성은 악한 것인데, 이것을 선(善)이라 하는 것은 위(僞)(여기서 '위(僞)'의 의미는 '거짓'이나 '속이다'의 의미가 아니고 '사람의 힘이 가해지다'의 뜻임), 곧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다. 이제 사람의 본성을 보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하는 성질이 있어 이것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자연 다른 사람과 싸워 빼앗으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다. 또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남을 질투하고 미워하는 성질이 있어 이것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자연 음란한 행실이 생기게 되고, 동시에 예의와 조리(條理)가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이 타고 난 본래의 성이나 감정이 가는 데로 따라갈 때는 반드시 서로 싸우고 빼앗게 되므로, 이것이 분한(分限)을 범하고 조리를 어지럽히는 행위가 되어 마침내는 난폭한 세상으로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반드시 스승과 법도에 의한 교화(敎化)와 예의에 의한 교도(敎導)가 필요한 것이니, 이것을 받음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서로 사양하는 마음, 곧 예(禮)을 일으키게 되고 조리에 합하게 되어 마침내는 세상이 평화롭게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 볼 때 인간의 본성은 악이라고 하는 것이 분명하니, 이것을 선이라 하는 것은 노력에 의한 것이다.'라는 것이다(순자 이외의 동양철학에서의 성악설의 동조자로는 묵자(墨子, 480-390 B. C.), 한비자(韓非子, ?-233 B. C.) 등이 있다. 송대(송代)에 완성된 성리학(性理學)에서는 맹자의 성을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순자의 성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 하여 두 설을 통합하였다.). 서양에서의 성악설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로마 말기 종교 사상가이며 교부철학(敎父哲學)의 대성자인 A. 아우그스티누스(354-430)라고 볼 수 있다. 그 후 이탈리아의 정치 사상가이며 역사학자인 N. 마키아벨리(1469-1527)는 이탈리아의 부패상을 직접 보고 나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고 단정하였고, 영국의 철학자이며 법학자인 T. 홉즈(1588-1679)는 '원시사회 초기에 백성들이 혼전(混戰)하는 자연 상태를 가상하여 인간의 본성이 악함'을 추론해 내었으며, 독일의 철학자 A. 쇼펜하우어(1788-1860) 는 '죄악이 인간 본성 가운데 뿌리깊게 박혀 있기 때문에 제거할 방법이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 밖에 '태어난 그대로를 성(性)이라고 한다(生之謂性).'고 정의를 내리고, '식욕(食欲)과 색욕(色欲=성욕(性欲)을 곧 성이라 한다(食色性也).'고 주장하면서 '성에는 선(善)도 불선(不善)도 없다.'고 하는 전국시대 제(齊)나라 사상가인 고자(告子, ?-?)의 '성무선무불선설(性無善無不善說)', '모든 사람의 성에는 선과 악이 동시에 혼재해 있다.'는 전한(前漢)의 유학자 양웅(揚雄, 53 B.C.-A.D.18)의 '성선악혼효설(性善惡混　說)', '사람 중에는 선한 성을 가진 사람, 악한 성을 가진 사람, 선으로 인도하면 선하게 되고 악으로 인도하면 악하게 된다.'는 당(唐)나라 시인 한유(韓愈, 768-824)의 '성삼품설(性三品說)' 등이 이 있다. 인성론 중심으로 발달한 우리나라 유학에선 이같이 인간 본성에 대한 다양한 설 가운데 맹자의 성선설이 주로 수용되어 수양 철학(修養哲學)이 발달하였다. 퇴계(退溪) 철학에서의 경사상(敬思想)이나 율곡 철학(栗谷) 철학에서의 경사상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여기서 분명한 것은 인간 본성의 대표적인 학설인 맹자의 성선설에서도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해질 수 있는 사단을 타고 났으며, 이를 확충해야 선을 실현할 수 있고, 그것을 확충하지 않으면 악해질 수 있다고 하는 인간 내면에 '선악의 혼재'를 시인했고, 순자의 성악설에서도 인간은 선천적으로 악하게 태어났으나, 인위적인 노력(스승과 법도에 의한 교화와 교도)에 의해 선해질 수 있다는 맹자와 똑같이 '선악의 혼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버지니어의 비극처럼 일종의 아노미 현상에서 발생한 사건은 아니지만,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의 A. 히틀러가 아우슈비츠(Auschwitz)에서 약 4백만의 유태인과 폴란드인들을 독가스실에 가둬 놓고 집단 살해한 사실이나, 일제 때 만주 허얼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731부대에서 생체 실험을 하기 위해 약 3천명의 마루타(=인간 통나무)에게 약물을 투여해서 죽였던 사실이나, 태평양 전쟁시 약 20만의 우리나라 여성들을 정신대라는 미명하에 강제로 끌고 가 짐승만도 못한 성노예로 인권 유린했던 사실이나, 1975년에서부터 1979년 사이 캄보디아를 통치했던 폴폿의 크메르 루지(민주 캄푸치아) 공산 정권이 캄보디아 국민의 3분의 1이 넘는 약 200만명을 처형했던 사실이나, 고려 충렬왕 때 원(元)나라의 내안(乃顔)이 합단(哈丹)과 합세하여 고려 국경을 넘어오면서 고려의 여인들을 보는 대로 잡아 능욕한 다음 살해해서 인육포(人肉脯)를 만들어 뜯어 먹고 남하한 비극의 역사적 사실로 보아, 인간의 내면에는 선악(善惡)이 혼재해 있으면서 이성으로 억제할 수 없는 '짐승만도 못한 마성(魔性)'이 본성 한구석에 깊숙이 숨어 있는 것이 확실하지 않나 싶다. 러시아의 작가 V. M. 가르신(1855-88)이 그의 <신호(信號)>라는 작품에서 '이 세상에서 사람처럼 흉악한 동물은 없다. 늑대는 서로 잡아먹는 일이 없지만 인간은 인간을 산 채로 삼킨다.'라고 기술한 사실과 영국이 나은 20세기 위대한 역사학자요, 국제정치학자요, 문명비평가인 A. 토인비(1889-1975)가 '인간은 무한히 잔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갈파한 말이 새삼 머릿속에 떠오른다. 오늘 아침 C신문에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버지니어 공대 광장에 설치한 33명의 사망자 추모석 네 번째 조승희 추모석에 "네가 그렇게 필요했던 도움을 받지 못했던 걸 알고 마음이 아팠어.", "얼마나 힘들었니? 홀로 끔찍한 고통을 겪었던 네게 손 한번 내밀지 않았던 나를 용서해 줘."라고 쓴 사랑과 용서의 편지와 꽃이 놓여 있었다는 기사와 함께 제주도 서귀포에서 뇌수막염으로 뇌사상태에 빠져 있던 33세의 젊은 주부가 장기 이식 받기를 기다리고 있는 14명에게 자신의 장기를 기증하기 위해 수술대 위에 누워 수술 받는 아름다운 모습의 사진을 보고, '그래도 이 세상엔 아직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보다는 선행을 행하는 사람이 더 많구나.'하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언제고 또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질 것만 같은 불안감이 완전히 가시지 않는 건 무슨 이유일까? (2007. 4.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