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전기]또 다시 런던에 (Arsenal v. Chelsea 2000. 5. 6)

[최승돈]

또 다시 런던에
Arsenal v. Chelsea (2000. 5. 6)

리버풀에서 돌아오니 반가운 우편물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기대하지 않았던 '병기창'(Arsenal)과 '첼시'(Chelsea)의 경기 입장권 두 장이 생긴 것입니다. 아기도 표가 있어야 경기장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아기와 떨어져 있을 수 없는 집사람과 동행할 수 없다는 점이 대단히 안타깝기도 했고, 또 엊그제 리버풀 다녀온 사람이 집에서 하루 자고 런던까지 혼자서 또 먼길을 갔다 온다는 게 이래 저래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만체스터 연합'(Manchester United)과 함께 영국 최고의 명문으로 손꼽히는 '병기창'과 '첼시'의 대결인데 왜 마다하겠습니까? (이럴 때 영국 사람들이 많이 쓰는 표현 - Why not?)

이번엔 런던에 가면서 버스를 탔습니다. 아침에 갔다 저녁에 오는 게 15파운드로 대단히 저렴했습니다. 지난 번 '말죽거리 뜨거운 박차'(Tottenham Hotspur)의 경기를 보러 런던에 갔다 올 때는 기차를 탔는데 왕복 34파운드였지요. 버스 안에 화장실도 있고 안내원 아주머니도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내원 아주머니께서 손님들과 얘기를 너무 많이 나누시는 관계로 졸기가 대단히 힘들었고 아무래도 다리가 길다 보니 좀 불편했지요. 아! 다리가 길어 슬픈 짐승이여!

닉 혼비(Nick Hornby)라는 사람이 쓴 'Fever Pitch'(열기 넘치는 운동장)라는 책이 있습니다. 축구에 빠져서 사는 지은이 스스로의 얘기를 일기 형식으로 쓴 책인데,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제대로 읽지는 않았지만 저도 한 권을 구입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제가 쓰고 있는 글의 형식과 Fever Pitch의 형식이 언뜻 보기에 비슷한 것 같네요.) 영화를 통해 책 내용을 짐작해 보건대 흔해 보이는 축구 팬들의 흔치 않은 축구 사랑 얘기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남편에 비해 축구에 대한 애정이 덜한 아내들에게 보여 주면 좋은 교육이 될 듯 합니다. (거 봐. 나만 그런 게 아니잖아.) 주인공은 학교 선생님인데 속옷도 좋아하는 팀의 속옷을 입고 다니고, 데이트를 하면서도 중계 방송에 몰두하는 축구광으로서 결혼을 하고 집을 구해도 좋아하는 팀의 홈 경기장 주위에 집을 구하는, 그야말로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Fever Pitch의 주인공이 '병기창', 바로 '아스날'의 열렬한 팬입니다.

'귀빠진 날'도 '화창한 봄날'도 아닌 '아스날'. 사실 이 '아스날'이란 (적어도 저한테는) 약간 괴상한 이름이 워낙 널리 알려져 있어서 자꾸 '병기창'이라고 하면 오히려 아는 사람들이 더 헷갈리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병기창'은 '병기창'입니다. 적어도 한국어 사용자들이 이 팀의 뿌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병기창'은 1886년 왕립 무기 제작소(Royal Arsenal), 다시 말해서 병기창의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팀입니다. 팀 별명은 아니나 다를까 포수들(The Gunners)이지요. 지금까지 모두 11회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FA컵 결승에 13회 진출해서 7회 우승, 1971년과 1998년 두 차례 리그와 FA컵 동시 우승(double)을 기록한 명문 중의 명문입니다. 1919년이래 한 번도 하위 리그로 내려가지 않아서 이 부문 영국 최고 기록(the longest unbroken run in the top division)을 갖고 있기도 하지요.

올 시즌 UEFA컵(유러피안 챔피언즈 리그와 함께 유럽 축구 양대 선수권 가운데 하나) 결승에 올라 있는 '병기창'은 3월부터 프리미어 리그 7연승을 기록하면서 승점 69점으로 리그 2위에 올라있지요. 1위 만체스터 연합(Manchester United)과 승점 차이가 무려16점이나 되기 때문에 좀 창피하기는 하지만, 어렵게 정상 궤도에 다시 올라 시즌 막판 성가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변이 없는 한 3위 이내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쳐 내년 유러피안 챔피언즈 리그에 직행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이 날 '병기창'과 '첼시'의 경기는 런던 더비였습니다. 같은 지역 다른 팀의 대결을 더비(derby)라고 부르는데, '병기창'의 이 날 상대팀이며 원정팀인 '첼시'(Chelsea)는 '병기창'과 같은 런던 팀이지만 다른 동네 팀이지요. '첼시'는 바로 동네 이름입니다. 더비란 말은 기독교의 한 절기인 사순절 직전(Shrovetide)에 영국 더비(Derby)에서 벌어진 '성 베드로'(St. Peters)란 팀과 '모든 성인들'(All Saints)이란 팀의 연례 축구 대결에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당시 축구는 동네 사람들이 모두 참여해서 벌이는 군중들의 축구(mob football)로 패싸움과 기물 파괴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말썽이 계속 됐다고 하는군요. 결국 1847년 군중들의 난리를 참지 못한 당국에 의해 축구가 금지되면서 군중들의 축구는 명맥이 거의 끊어졌지요. 어쨌든 더비의 기원이 된 경기가 그렇게도 지독한 경기였는지 오늘 날 어떤 더비든 치열하지 않은 경기가 없습니다.

런던에는 팀이 워낙 많다 보니 더비의 열기가 다른 여느 더비만큼 뜨겁지 않은 듯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병기창'과 '말죽거리 뜨거운 박차'(Tottenham Hotspur)의 대결은 런던의 여러 더비 가운데 비교적 오랜 원한(?)이 서린 더비로서 북런던 더비(North-London derby)라 불리는 꽤 유명한 더비인데, 1913년 '병기창'이 '말죽거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말죽거리'로부터 약 3마일(4∼5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동네로 이사를 온 데서 비롯됐다고 하는군요. 북런던 더비와 함께 영국 3대 더비로는 '에버튼'(Everton)과 '리버풀'(Liverpool)의 머지강변 더비(Merseyside derby. 두 팀이 사이가 좋지 않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지난 번에 설명 드렸죠?), 그리고 요즘은 상대가 안 되겠지만(그래도 더비는 해봐야 알죠.) '만체스터 연합'(Manchester United)과 '만체스터 도시'(Manchester City)의 대결을 꼽습니다. 이 밖에도 '신성 연합'(New Castle United)과 '선더랜드'(Sunderland)의 북동 더비(North-east derby), '브리스톨 도시'(Bristol City)와 '방랑자들'(Rovers)의 브리스톨 더비(Bristol derby), (제가 살고 있는 카디프의) '카디프 도시'(Cardiff City)와 '스완지 도시'(Swansea City)의 남 웨일즈 더비(South Wales derby) 등 유명한 더비들이 많이 있고,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우(Glasgow)에서 펼치는 신구교의 대결, '배회하는 사람들'(Rangers)과 '켈트족'(Celtic)의 맞수(Old Firm - Rangers와 Celtic 두 팀을 이렇게 부릅니다) 대결도 빼 놓을 수 없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더비로는 역시 이태리 밀라노 산 시로(San Siro) 경기장을 함께 사용하는 '밀란 체육부'(AC Milan. 한 단어로 표기할 때는 Milan)와 '국제'(Internazionale. 짧게 쓸 때는 Inter)의 대결을 꼽을 수 있겠지요. 1908년 일부 사람들이 '밀란 축구부'(Milan FC. AC Milan의 원래 이름이라고 해야겠네요)에 만연한 영국 영향에 반발해서 별도로 '국제적인 밀라노'(Internazionale Milano. 이 팀이 결국 Inter지요.)라는 팀을 만든 것이 두 팀의 대립과 경쟁의 시작이죠. 같은 경기장을 사용하는 같은 도시의 팀이지만 우여곡절도 많았고, 두 팀은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랑을 받아 왔는데, 전통적으로 '밀란 체육부'는 노동자 계층의 사랑을, '국제'는 중상류층의 사랑을 받아왔다고 합니다. 유니폼 색깔도 대조적이어서 '밀란 체육부'는 빨강과 검정 세로 줄무늬 옷, '국제'는 파랑과 검정 세로 줄무늬 옷을 입습니다. 두 팀의 오랜 경쟁 관계는 두 팀이 이태리 축구를 대표하고 세계 축구를 대표하는 팀으로 성장하는 데 큰 힘이 되었지요.

우리 나라 프로 야구 얘기라면 같은 서울 팀 '두산'과 'LG'의 대결을 더비로 꼽으면 되겠지만 더비라는 게 야구에도 통하는 얘긴지는 잘 모르겠고, 우리 나라 축구 경기 가운데는 '고려대학교'와 '연세대학교'의 고연전이나 '강릉 상고'와 '강릉 농공고'의 정기전 같은 것이 꽤 비슷한 더비의 사례로 꼽힐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고 싶다. 내 고향 강릉.)

더비 얘기는 그만 하고 다시 본론으로 돌아갑니다. 비록 결승에 오르지 못했지만 유러피안 챔피언즈 리그 4강까지 진출했고, 5월 20일 벌어지는 FA컵 결승의 주인공인 '첼시'는 경기 전 순위 5위로 남은 경기를 다 이겨도 목표로 하는 3위권에 진입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3위 '리즈'나 4위 '리버풀', 두 팀 중 한 팀이 남은 경기 가운데 한 경기만 이겨도 '첼시'는 목표를 이룰 수 없습니다. 설사 '리즈'와 '리버풀' 두 팀이 모두 승점을 추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첼시'가 남은 경기 가운데 한 경기라도 패하면 3위권 진입은 완전히 물 건너간 일이 되고 맙니다. 답답한 상황이지만 '첼시'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겠지요.

경기가 벌어지는 '병기창' 경기장을 찾아가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습니다. 경기장 옆에 있는 지하철 역 이름이 아예 '병기창', 'Arsenal'입니다. 축구 팀 이름이 지하철 역 이름인 것은 영국 전체를 통틀어 '병기창'의 경우 하나 뿐입니다. 1932년 10월 '병기창'의 감독이던 허버트 채프만(Herbert Chapman)의 청원에 의해 Gillespie Road역이 Arsenal Highbury Hill로 이름을 바꾸었고, 1934년 뒷부분을 떼 내고 그냥 Arsenal역이 되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팀 이름을 지하철 역 이름으로 삼아도 좋을 만큼 각 지역에 제대로 뿌리내린 팀들이 많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허다한 무리들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Arsenal역에 도착, 바깥으로 나오니 바로 영화 Fever Pitch의 무대가 펼쳐졌습니다. 별다른 특색이 없는 평범한 주택가지만, 아무래도 영화에서 본 곳이라 그런지 감회가 달랐습니다. 펄럭이는 깃발과 북적이는 거리. 영국 축구장 주변 풍경에 어느새 익숙해진 탓도 있겠지만, 영화를 통해 이미 경험한 곳이라 그런지 유난히 푸근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 번 '서부 찐 고기 연합'(West Ham United)과 '신성 연합'(新城 聯合. New Castle United)의 경기 때에 이어서 오늘도 축구장에 동행을 하게 된 행운의 주인공 윤한결 군도 분위기가 무척 좋다며 상기된 표정이었습니다.

명문 팀답게 최고의 시설을 갖추었더군요. 우선 경기장이 깨끗하고 대형 전광판에다가 별도의 점수판이 완비돼 있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십니다만 영국에 점수판 없는 경기장이 많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점수판이 있든 없든 하여튼 경기장이 많다는 사실) 좌석에는 비록 약간이지만 스폰지가 들어 있어서 편안했고 화장실을 비롯해서 관중석 바깥의 휴식 공간도 여느 경기장보다 훨씬 넓고 쾌적해서 무엇을 더 바랄 게 있을까 생각해 봐야 할 정도였습니다. 쓸데없는 데 돈을 쓴다고 집사람한테 욕을 먹을 때 먹더라도 이 경기장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문 구단 응원답게 응원도 다채롭고 열정적이었습니다. 우선 제가 앉은 곳이 홈 팀 골수 서포터들이 몰려드는 골대 뒤의 명당이어서 훨씬 분위기가 좋았지요. 특별히 이끄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분위기가 고연전과 다름없습니다.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이 사람 저 사람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그 노래가 경기장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 순식간의 일이었는데, 이제 저도 몇 곡은 따라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휴식 시간 관중석 바깥에서도 사람들의 응원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음료수 혹은 맥주를 마시다가 이곳 저곳에서 소리를 지르며 응원을 펼치더군요. (이건 정말 고대생이 아니고서야...) 경기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는 사람들도 무척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까지 사야 되나?) 이 숱한 사람들의 열정적인 모습은 축구라는 이름을 가진 일이 단순한 운동 경기의 차원을 넘어서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날 축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고도의 문화 행위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아멘)

'병기창'의 선발은 데이빗 시맨(David Seaman. 뱃사람? 잉글랜드 국가대표 골키퍼), 리 딕슨(Lee Dixon. 전 잉글랜드 국가대표), 토니 아담스(Tony Adams. 잉글랜드 국가대표. 차기 국가대표 주장으로 거론), 쥘레 그리망디(Gilles Grimandi. 프랑스 출신으로 AS모나코에서 이적), 실비뇨(Silvinho. 전 브라질 국가대표), 레이 팔러(Ray Parlour.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 출신), 패트릭 비에라(Patrick Vieira. 프랑스 국가대표), 엠마누엘 쁘띠(Emmanuel Petit. 프랑스 국가대표), 마크 오베르마스(Marc Overmars. 네덜란드 국가대표), 데니스 베르캄프(Dennis Bergkamp. 네덜란드 국가대표), 띠에리 앙리(Thierry Henry. 프랑스 국가대표) 등이었습니다. 축구 강국의 국가대표급이 아니면 끼워 주지를 않지요? 후보도 어지간하면 이 나라 저 나라의 국가대표들인데 아프리카의 축구 강국 나이지리아의 국가대표 은완코 카누(Nwankwo Kanu)가 오늘은 벤치를 지키다가 후반에 베르캄프와 교체되어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병기창'이 대체로 영불연합군의 성격을 갖는다면 '첼시'는 그야말로 다국적군이지요. '첼시'의 선발은 에드 드 호이(Ed de Goey. 전 네덜란드 국가대표), 베르나르 랑부르드(Bernard Lambourde. 프랑스령 과달루페 출신), 프랑크 르뵈프(Frank Leboeuf. 프랑스 국가대표), 마르셀 드사이(Marcel Desailly. 프랑스 국가대표), 마리오 멜치옷(Mario Melchiot. 네덜란드 청소년대표 출신), 로베르토 디 마테오(Roberto di Matteo. 전 이태리 국가대표), 데니스 와이즈(Dennis Wise 잉글랜드 국가대표), 조디 모리스(Jody Morris 첼시의 젊은 기대주) , 지안프랑코 졸라(Gianfranco Zola. 전 이태리 국가대표), 조지 웨아(George Weah. 라이베리아 국가대표. 1995년 FIFA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 토레 안드레 플로(Tore Andre Flo. 노르웨이 국가대표) 등이었습니다. 역시 국가대표급이 아니면 쓰지를 않는데다가 후보라고 부르기 미안한 이날의 후보 디디에 데샹(Didier Deschamps. 프랑스 국가대표), 구스타보 포옛(Gustavo Poyet. 우루과이 국가대표) 등도 대단히 유명한 선수지요.

가끔 영국 축구가 얼마나 대단하냐고 묻는 분들이 계신데, 이렇게 한 경기의 선수 명단만 불러 드려도 대답이 다 될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몸값이 싼 아프리카나 남미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다수 수입해 오고, 가속되는 유럽 통합에 따라 유럽내 선수들의 이동을 제한하지 않다 보니 각광을 받는 선수들 가운데 외국 선수들이 워낙 많아서 정작 영국(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 국가대표의 수준은 그렇게 높지 않다는 얘기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만, 어쨌든 영국 프로 축구는 각국 국가대표들이 소속팀만 바꿔서 벌이는 월드컵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영국답지 않게 쾌청한 날, 오후 3시에 시작된 '병기창'과 '첼시'의 대결은 런던의 명문 팀 더비답게 팽팽한 한 판 승부였습니다. 경기 초반 양팀은 득점 기회를 몇 차례씩 주고받으며 활기 넘치는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균형이 깨진 것은 전반 21분. '병기창'의 쁘띠가 아크 왼쪽으로 길게 띄워 준 공을 공격수 앙리가 잡아 골키퍼를 제치고 돌아 들어가서 차분하게 반대편 골대 쪽으로 차 넣었습니다. 황급히 골문 앞을 두 명의 수비수가 막아섰는데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마음먹은 대로 공을 차 넣은 앙리의 감각적인 축구 솜씨는 정말 경탄할만하더군요. 강한 슛도 좋지만 마음먹은 대로 정확하게 공을 차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해 주었습니다. 띠에리 앙리는 후반 3분 거의 같은 방식으로 또 다시 한 점을 추가, '병기창'이 2대0으로 앞섰습니다. '첼시'는 후반전에 데샹과 포옛을 교체 투입했는데, 이 가운데 우루과이 국가대표 구스타보 포옛이 후반 33분 한 골을 기록, 2대1로 추격을 했지요. 포옛의 득점이 기폭제가 되어 '첼시'는 최소한 비기기라도 하기 위해 맹공을 퍼부었지만, 불이 너무 늦게 붙어서인지 경기 결과를 바꾸어 놓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2대1로 '병기창'이 승리를 거두고 2위 자리를 거의 손에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첼시'는 유러피안 챔피언즈 리그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구요.

어떤 책을 보니, '병기창'은 틀림없이 영국에서 가장 성공적인 팀 가운데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팀이라는 얘기가 있습니다. 너무 얄밉게 축구를 잘 하면 적잖이 싫어하는 사람들도 생기기 때문일까요? 부(富)와 기회가 집중된 런던 팀이라는 사실이 다른 고장 사람들이 볼 때 '병기창'에게는 좋은 점이 아닐 수도 있을테구요. 어쨌든 이 날 저는, 아마 지금도 대포가 그려진 빨간 '병기창' 속옷을 입고 있을 Fever Pitch의 주인공이 왜 '병기창'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도 애초 생각보다 훨씬 길어진 축구 얘기를 이제라도 속히 마무리하면서 집사람한테 한 번 물어 보지요? "여보. 축구장 하나 사면 안 돼?"



'월드컵도 하는데 축구장 하나 살까' 145~15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