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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해설
찬양에 적합한 언어
-이영자 시집 『영혼의 생명선』을 통해 본 신앙적 시세계
김순진(시인〮스토리문학 발행인)
신앙심이 깊은 이영자 시인이 우리 스토리문학으로 등단하게 된 것은 퍽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난해 11월 초,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신 박재릉 시인께서 하루는 전화를 하셨다.
“김 선생! 스토리문학에도 등단제도가 있나요?”
“네 그럼요. 선생님! 한 달에 한두 명씩 엄선하여 귀하신 원로 선생님들께서 추천해 주십니다.”
“그럼 내가 미국에 사는 신인 한 분 소개해줄 테니 작품이 괜찮은가 잘 관찰해보세요.”
그렇게 해서 미국 워싱턴으로부터 이영자 시인의 작품이 건너왔고 스토리문학을 발행하고 있는 필자는 내심 고무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전화를 다시 드려,
“선생님! 작품이 좋으니 선생님께서 추천심사평까지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했더니 기꺼이 추천심사평까지 써서 보내주시며 추천해주셨다.
박재릉 시인은 등단추천서평에서 이영자 시인에 대하여,
“그의 정서는 고국여성의 정서와 비견될 만큼 티 없이 맑다. 매우 안온하면서도 강인한 투지와 기독정신이 내면을 깔고 있다. 우리의 친근한 삶과 동반하고 있는 작품의 소재는 가슴에 와 닿는다. 이는 많은 세월을 여과하고 길러낸 이 시인만이 나타낼 수 있는 관조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언어조탁의 연마를 돋보이게 하는 작품으로 선율이 섬세하고 고우며 이 시인의 마음결 같은 온상을 펼쳐 보인다. 인간의 슬픔, 아픔, 인내, 침묵 등 모든 것을 융합하여 내밀히 속삭이는 진주로 승화시키며 신앙세계를 정결하게 나타낸 작품은 미지에 대한 상상력과 투영도가 좋다”라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런 이영자 시인이 등단 이후 태평양이란 거리 차를 극복하지 못하여 연락이 힘들었다. 금년 1월 신인상 상패를 만들어 놓은 후 어떻게 하면 많은 축하 속에 전달할 수 있을까에 고민해오던 중 7월 스토리문학 창간 3주년 기념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영자 시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행사는 2007년 7월 14일에 있을 예정이었다. 이영자 시인은 원래 10일 정도 늦은 7월 25일을 전후하여 그리던 고국 땅을 밟고 싶었으나 갑자기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들어오고 싶어 일정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시인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문단의 원로인 구인환 박사로부터 신인상 상패를 받을 수 있었다. 그 또한 하나님께서 시킨 일,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영자 시인이 이번에 내는 시집은 말 그대로 신앙시집이다.
이 시인이 이번에 시집을 내게 된 것은 스스로 쓴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기에 순종하고 사역함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시집 원고를 받아들고 필자는 오랜 감동과 속죄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이 시집은 단순한 시집이 아니라 나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믿고 따르며 섬겨야 할 이유와 방법이 낱낱이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박겉핥기식이지만 지면상 몇 을 관찰하면서 그의 영혼의 세계를 들여다보자.
바람은 보이지 않아도 바람이 있고
하나님도 보이지 않으나 하나님 계셔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
하나님은 영적인 분
사람도 그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적인 존재
세상 모든 사람에게
영의 자리가 있어도 눈에 보이지는 않으나
하나님을 알고의식하는
사랑과 믿음이 역사하는
영의 자리가 있네
「보이지 않아도」전문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으며 추구한다. 산이 있어 거기에 간다면서 억지로 철사다리를 놓고 와이어를 매고 돌을 파 훼손하면서 까지 산에 오른다. 그러나 정작 영혼의 정상에 오를 줄 모른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말한다. 시인이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비단 하나님을 비유하려는 뜻에서만은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물질로 사랑을 고백한다 할지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면 그 사랑이 오래가지 않듯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영혼의 고백이어야 한다는 말과 상통한다. 시인의 이러한 혜안은 오랜 신앙생활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러한 시야를 확보한다는 것은 시인이 그만큼 깊이 오래 사유해온 결과물이라 생각하며 ‘가장 쉽게 쓴 시가 가장 쓰기 어려운 시’라는 말을 떠올려본다.
자연을 대하였을 때
우리 마음이 좋은 것은
사람이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인가 보다
앉아 있을 때보다
누워있을 때가 더 편안한 것은
사람이 흙과 가까워졌기
때문인가 보다
사람의 호흡이 끊어지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하나님께로부터 와서
다시 하늘나라 본향으로 되돌아가니
사람이 죽으면 온 곳이 있기에
돌아갔다고 하는가 보다
때가 되면 언제고 떠나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
그래서 장차 하늘나라가
나의 소망이 되는가 보다
「사람이 죽으면 온 곳으로」전문
시인의 말처럼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는 말을 한다. 몸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었으니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하나님께서 직접 입으로 불어넣으셨으니 하늘나라로 돌아가는 것이 맞다. 그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사람이 죽으면 ‘돌아갔다’고 하는 데 그것은 누구에게나 ‘믿어야 한다. 믿고 싶다’는 잠재력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한국이나 미국에서 살면서 한 번도 하나님의 성경말씀을 전해 듣지 않았거나 접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전철에만 가도 전도하고 작은 공원에만 가도 기타를 치며 전도하는 이들이 있다. 그 사람들이 하릴없이 그러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은 그렇게 해야만 하는 사명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요. 그렇게 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영접한 기쁨을 어떻게 주체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 곁으로 돌아간 후에는 셀 수 없을 만큼의 행복과 시간이 존재하겠지만 이승에서는 고작해야 80년 남짓 산다. 시인의 말처럼 ‘때가 되면 언제고 떠나야 하는/사람은 시한부 인생’을 사는 우리다. 사는 동안 서로 사랑하고 나누며 하나님 뜻대로 말씀대로 살아야하지 않겠는가?
촛불이 심지에서 탈 때
심지 밑에는 하늘색
위에는 따스한 연붉은색으로
타는 것을 보았는가
타고 있는 촛불의 색도
분리하여 나눌 수 없듯이
하나님의 영 성령은
하나님 자신이므로
더욱 나눌 수 없는 한 분이시다
촛불을 켜는 순간
빛을 발하는 것 같이
우리를 오라 부르실 때
순종하고 나가면
하나님 사람으로
생명의 빛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니(중략)
「촛불」부분
시는 관찰이다. 어떠한 시를 쓸 때는 그 사물에 대하여 끊임없는 관찰과 말걸기를 해야 한다. 그리고나서 시를 쓰기 시작하면 그 사물을 통해 자신이 전달하려는 이미지를 운반하여야 한다. “모든 시는 객관적 상관물을 통하여 운반되어야 한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요즘 인터넷에서 많이 도는 사랑시의 병폐에는 자신의 뜻을 직접 전달하려는 데 있다. ‘사랑한다, 그립다 보고 싶다’라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해 내는 데 문제점이 시작된다. 시는 비유다, 은유다. 메타포어가 많고 깊을 수록 잘 된 시다. 그런데 이영자 시인의 시에는 은유가 많다. 비유가 좋다. 시인이 시에 대하여 특별히 교육받은 것은 학생 때뿐이면서도 몇 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시창작의 기본을 잘 이해하고 시에 효과적으로 접근한다. 자세한 관찰을 통하여 이미지를 운반한다. 이영자 시인의 시가 신앙시라 문학에서 멀리 있다는 평가를 하려는 사람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이영자 시인의 시에는 메타포어도 있고 활유도 있으며 환유, 도치, 대치, 아이러니와 카타르시스 등 문학작품에 있어야할 수사법을 고루 접근하여 소화하면서 하나의 완성작을 도모해가는 과정이 아름답다.
어린 아이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알고 믿는 것 같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는
빛의 자녀가 됩니다
어린 아이가 태어나
보모의 돌봄을 통하여
바르게 성장하면
부모의 보람이 되고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새롭게 태어나 거듭나고
믿음이 자라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부족하고
허물이 있다 할지라도
자녀 삼으셨으니 자녀 된 자는
하늘나라를 상속받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다」전문
이 시인이 펼치는 이론은 이해하기 쉽다. 아이를 통해 하나님 사랑을 비유한다. 하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둘을 가르치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하나를 터득한 사람에게 둘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라면 하나님의 사랑을 터득해야한다는 이론이다. 사람이 자녀에게 줄 것은 땅도 아니고 집도 아니며 돈도 아니다. 우리가 자녀에게 물려줄 상속은 신앙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식이기에 하늘나라를 상속받으므로 돌아갈 곳 있음에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시인은 이 시집 『영혼의 생명선』에서 신앙인에게는 자기의 신앙을 더욱 견고히 다지는 계기로 삼기를 희망하며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천천히 걸음마를 배워 하나님의 나라를 거닐 수 있게 되길 바라면서 그 심도深度를 높여 나간다.
높일 자를
먼저 낮추시고
부요케 할 자를
먼저 가난하게 하시고
강하게 할 자를
먼저 약하게 하고
귀한 믿음 주실 자를
먼저 정금같이 단련하시고
사명 있는 자를
먼저 연단하시고
「하나님의 뜻」부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 도구로 쓰시고자
웅덩이에 처넣고
쪼이고 매만지고
물을 뿌려 씻을 때
흙탕물이 튀겨서 묻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 사람 본래 모습이 아니니
요셉을 감옥에 넣었다가
나오게 한 것 같이
하나님의 도구로 쓰시고자하여
기계를 재정립하는 것이며
불도가니에서 불순물이 빠져
순금이 만들어지듯
고난이란 용광로를 통하여
우리 영혼을 깨끗게 하시는 것입니다
「연단 2」전문
『孟子』의 「告子」下 편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천장강대임어시야天將降大任於是人也인댄 필선고기심지必先苦其心志하며 노기근골勞其筋骨하며 아기체부餓其體膚하며 공핍기신空乏其身하야 행불난기소위行拂亂其所爲하나니 소이동심인성所以動心忍性하야 증익기소불능曾益其所不能이니라. 이는 “하늘이 장차 큰일을 어떤 사람에게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괴롭히고, 그 몸을 지치게 하고, 그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그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과 같지 않게 한다. 이것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성질을 참게 하여 일찍이 할 수 없었던 일을 더욱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로 해석된다.
물론 이영자 시인이 이 맹자의 구절을 접하고 저 두 시를 썼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영자 시인이 쓴 위의 두 시와 맹자의 구절은 너무나 유사하다. 하나님의 뜻도 그러하시다. 모든 진리는 통한다는 말과도 바꾸어 말할 수 있다. 이영자 시인의 말처럼 ‘사명 있는 자를/ 먼저 연단하시니’, ‘고난이란 용광로를 통하여/우리의 영혼을 깨끗게 하시는 것’이니 자신이 지금 힘들거나 고되더라도 극복하라는 말이다. 극복 뒤에는 달디 단 행복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고 성난 파도 뒤에는 맑고 파란 바다가 펼쳐지는 법이다.
이상에서처럼 이영자 시인의 시를 몇 수 관찰하면서 이 시인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았다. 물론 이영자 시인의 정신세계는 기독교적 정신세계라 단언한다. 그러나 시인이 아무리 하나님의 딸로서 기독교적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근본이 겸손치 않으면 그러한 세계를 지향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무엇보다도 이웃을 사랑하기에 거친 손을 내밀기 싫기 때문에 언어에서조차도 밤을 새우고 조탁하며 어떻게 하면 쉬운 말로 부드러운 말로 남녀노소 누구나 접할 수 있는 하나님 말씀을 써나가느냐 고민한 흔적이 곳곳에 발견된다.
시인은 그간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어려운 말을 사용치 않고, 미국에 거주하면서도 애써 외국어를 써서 유식하게 보이려 하지 않고, 아주 쉬운 언어로만 하나님 이미지로 형상화하면서 독자를 가까이 다가오게 하는 마력을 지닌다. 소재를 먼 곳에서 찾으려하지 않고 눈, 나뭇잎, 향기, 그릇, 오솔길 등의 자연과 은사, 성령, 음성, 영, 보혈 등 성경적 언어를 적절히 배합 구사하면서 독자를 고문하지 않는다.
이영자 시인은 시집 제목을 『영혼의 생명선』이라 붙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는 낭떠러지나 강, 폭포 따위의 죽음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을 생각지 않고서는 진정한 가치가 없는 일이다. 사람에게는 영혼과 육신이 있다. 육신은 영과 혼이 존재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아주 짧은 도구이다. 영혼이 떠나가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영혼은 하나님 곁으로 올라가 무한대, 무량수로 살아갈 것이기에 이 땅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그만큼 중요하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주먹을 믿는다’던지 아니면 ‘자신을 믿는다’며 자만하는 자가 많다. 그런 사람들도 천둥벼락이라든지 폭우로 인한 산사태, 쓰나미 같은 해일을 만나면 자신도 모르게 “오, 주여! 오, 하나님!”을 찾게 마련이다. 그것은 곧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지 않으면 결국 하나님 곁인 천국에 가지 못하고 떠도는 영혼이 되고 만다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다.
이토록 절실한 시간에 이영자 시인의 시집 『영혼의 생명선』이 출간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크나큰 선물이다. 시집 전반에 깔린 정신은 누가 뭐래도 사랑이다. 은혜니 나눔이니 하는 모든 감사의 언어를 포괄하는 말은 사랑이 아니겠는가?
필자는 그간 기독교 시인들의 시집을 무수히 보아왔다.
대부분 일반시를 70~80%를 앞부분에 넣고 교인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신앙시 몇 수를 뒷부분에 약간 넣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다. 또한 출판사를 경영하는 필자로서 그렇게 유도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에 나오는 이영자 시집의 경우는 다르다. 이처럼 신앙시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여 한 권의 성경을 보는 듯,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간증과 말씀이 이어지는 신앙시집은 일찍이 본 일이 없다. 이 시집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고 영접한 한 신앙인의 시집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간증서요 간구서며, 고백서요 찬양서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신 권세를 찬송한들 찬양한들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만이나 할까? 그러나 우리는 한 사람의 목소리라도, 한 사람의 손뼉이라도 그분의 과업에 힘을 보태드려야 한다. 노동하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직장에 다니는 사람도 모두 그분 말씀을 믿고 그분을 찬양하기에 바쁘다. 그만큼 그분의 말씀이 옳고 그분의 은혜가 깊으며 그분의 지혜가 넓고 크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점점 더 깨닫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이란 사람이야 마땅히 그 분이 들으실 수 있도록 찬양에 적합한 언어로 찬양 드려야 하지 않겠는가?
이 시집을 통하여 하나님 말씀이 더욱 전파되고 증거되며 부흥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