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영화 수학기
중대 연영과 시절
그곳은 가슴으로 필름을 구워내는 젊은 영화혼들로 항상 충만하다.
떄로 가차없는 질타를 해 주시는 여러 교수님들과 함께 우리의 영화이상을 키웠던 곳.
그들은 충무로를 주시하고 있으며 현장을 동경하고 있다.
이땅에서 영화를 하겠다는 이단아(?)들이 흔히 겪는 과정이겠지만 나의 겨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좌절된 영화고교로의 꿈을 끝내 버리지 못했고 매일 매일을 영화관에 파묻혀 한 영화를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해 보는 것이 습관화 되었다. 이미 나의 영화제 투신은 뇌리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몇 해 후 나는 중앙대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시험과목은 국어, 영어, 영화이론, 실기 및 논술 등이었다. 합격소식의 감동은 지금도 잔하게 남아 있다.
드디어 대학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영화를 직접 만들겠다는 것은 아직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지엄한 선배들의 영화를 가끔 편집실에서 훔쳐 보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었다. 대학이지만 연극영화학과는 규율아 엄했다. 또 국어 ,영어, 철학, EDPS, 자연과학, 심리학, 예술개론, 문학개론 등 교양과목의 학점취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들이 가장 싫어했던 과목은 자연과학이었다. 그 교수는 “한국 사람들은...” 하면서 서두를 꺼내는 버릇이있었다. 전공 과목은 영화개론, 연극개론 네시간이 전부였는데 그 시간은 모두에게 기다려지는 시간이었다.
1학년을 그렇게 보낸 후 다시 2학년 1학기에서도 교양과목은 계속되었다. 국민윤리, 한국사, 예술사조사, 이태리어 등 등 그러나 연극사, 영화사, 영화기술, 시나리오 작법 등 전공과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연극전공 학생들과 영화전공 학생들의 과목선택이 틀려진다. 드디어 2학기에 들어서면서 개인의 작품개요서 및 시나리오를 제출하여 워크샾 연출자를 가리고 파트를 나누었다. 당시 영화를 전공하겠다던 학생은 전 동기생 40명의 20%인 여덟명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은 반 반 정도로 균형을 이루나 당시만 해도 영화전공학생은 소수였다. 워크샾에 참가하면서 우리는 편집실을 당당히 출입할 수 있게 됐다. 이제 선배들과 작품으로 이야기 할 떄가 온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영화연출이 공부만 해서 되는 것이냐는 일종의 예술적 자만심이었다.
우리는 선배들의 보렉스 카메라에는 엄두도 못내고 우리에게 배당된 자동노출의 캐논 스쿠피에 리버설 필름을 장진해서 첫 촬영을 나갔다. 순번에 의하여 우리 파트는 세 번 째였으나 우리는 파트 구별없이 돌아가며 뒷 스탶일을 봐 주었다. 로케이션은 어느 강가의 자갈밭이었다. 바람이 몹시 불었다. 그러나 첫 메가폰을 거머쥔 학생감독 정군의 목소리는 뜨겁기만 하다. “레디고! ” 여인이 뛰어나온다. 하이힐이 벗겨진다. 여인 쓰러진다. 카메라 훌샷에서 줌인! 그러나 이게 여의치않다. 촬영지원 나온 조교의 얼굴에 땀이 맺힌다. 안타까운 것은 연기자의 N.G. 정군은 초조해져 간다. 다시! 다시! N.G! N.G! 이 영화는 그해 불란서 문화원에서 있었던 제 22회 영화제에 <N.G>란 제목으로 출품되어 대단한 반응을 얻는 이변을 낳는다. 두 번째 파트의 작품도 의욕 과잉으로 표현에만 치중하여 무슨 뜻인지 모를 작품이 되었다. 나는 콘티 작업에 철저를 기했다. 캠퍼스는 좋은 로케이션 장소였다. 뭇 학생들의 눈길을 받으며 영화제 기일을 넘겨 완성한 나의 첫 작품도 예외없는 절름발이 영화가 되어 버렸다. 전 작품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화 메카니즘과 예술적 창조의 함수관계를 피부로 느꼈다. 학생들은 뷰어로 몇 번이고 돌려보며 커트나누기, 매칭, 커팅 등 영화기본기를 익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순서작업을 아세톤 편집기로 하여 나중엔 필름이 넝마꼴이 되다시피 했다. 이 당시 학생들의 영상화 대상은 종교, 내면세계, 인생 등 두로 철학적 테마를 실험적으로 다룬 것들로 그것을 단편으로 표출하려니 자연 난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중엔 성(性)을 다룬 <세차> 같은 작품도 있었다.
3학년에 올라와서 본격적인 영화수업이 시작되었다. 카메라, 감독론, 한국영화사, 레디오 &TV. 영화워크샆. 이 밖에 연극연출, 체육 등 선택과목도 들었다. 나는 우선 시나리오에 중점을 두어 방학동안 수편을 써두고 계속 손질을 하고 있었다. 1학기 워크샾은 나의 영화부터 시작하였다. 복학한 선배들과의 협동작업은 퍽 유익했다. 우리는 벨&하웰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나갔다. 테마는 현재와 과거속에 펼쳐지는 상상유희로서 어느 봄날 공원을 무대로 펼쳐지는 심리극 이었다. 지도 교수님과 함께 태능 현장에 집합하여 촬영은 시작되었다. 출연자는 학교 동기생들이다 교수님은 몇가지 조언을 해주시고는 나의 의도대로 촬영하도록 하셨다. 촬영은 내생각대로 무난히 진행되어 나갔다. 촬영을 마치고 신설동 복집에서 명동으로 이어진 교수님과 우리들의 열띤 영화이야기는 그칠줄을 몰랐다. 이 때의 영화 학구열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중앙대가 서라벌예대를 병합하며 갑자기 늘어난 기재가 학생들의 창작열에 부채질을 하였고 또 누구나의 가슴 속엔 한국영화의 재건을 우리손으로 하자는 열의로 가득 차 있었다.
후반작업을 마치고 관례대로 교수님과 학생들이 모여 평가시사를 가졌다. 그 결과는 학점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다른 파트 촬영에도 같이 나갔다. 학교 강의를 마치면 촬영나간다. 그것은 그때 우리 생활의 전부였다. 우리는 멀리 국수도로 로케이션을 감행하였다. 물론 교수님도 동참하시었다. 2박3일의 로케일정은 바빴으나 우리는 피로를 모르고 촬영에 임했다. 이때 촬영된 영화는 박장균작 <난파선 Ⅱ>였다. 자살 직전의 여인을 놓고 벌이는 두 남자의 본능적 갈등을 그린 영화로서 활극적 요소가 상당했다. 연출은 나의 동기로 또 영화서클 “영상미학회” 동료로서 내 영화에도 출연하였던 정태원군이었다. 나는 그의 출연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이때의 출연경험으로 후에 실습TV 드라마와 몇편의 영화에 더 출연케 된다.
2학기에 접어들어 예술심리학, 연기연구, TV 워크샾 준비에 바빴다. 2학기 일정은 불과 백여일뿐이기에 더욱 바쁘다. 이번 학기에 제출한 시나리오는 7분 짜리였다. 이때부터 연출희망자가 늘어나 필름을 몇 사람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다. 우린 네가필름 400자 씩을 받아들고 흡사 금쪽같이 여기며 촬영에 열을 올렸다. 이 때는 학부선배인 이우승, 선우완(현 영화감독)씨 등이 영화진흥공사에서 실시한 한국청소년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연속 수상하여 중대 영화학과생으로서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이때 학생들이 가슴속에 품었던 꿈은 극영화계 진출이었다. 우리는 불란서 문화원에서 극영화는 영화의 꽃이다. 또 술좌석에선 한국영화 발전에 대한 이야기로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곤 했다. 나는 <길> 이란 시나리오를 써주기도 하며 편집실에서 드디어 세 번째 아이를 탄생시켰다. 그 해 초겨울 우리 학년만의 조촐한 영화제가 소극장에서 열렸다. 새삼 뜨겁게 느껴진 격려의 열기에 우리는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이 때의 활발한 학교영화 활동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슴속의 허전함을 메꿀 길이 없었다. 사실 나는 극영화계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출부 입문도 내뜻과는달리 여의치 않았다. 4학년에 접어들면사 나와 동기들은 군복무를 위해 휴학계를 냈다. 나는 여전히 충무로를 기웃거리다가 그 해 여름 입대하여 강원도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1980년 신춘, 나는 복교하였다. 학원가는 술렁거리고 있었으며 예전같은 영화의 열띤 분위기도 찾아 볼수 없었다. 중앙대 영화학과는 과연 방화따라 침체해 버린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다시 카메라를 만지고 필름 라이브러리에 산재한 선배들의 영화를 돌리며 또 우리들의 작은 연구지를 만들면서 분위기는 다시 예전처럼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학년으로 대학생활을 정리하는 영화연출(2), 영화평론, 기록영화, 사진 그리고 선택과목 무용론 등의 과목을 신청하고 내가 꼭 만들고 싶었던 비행소년에 대한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지도교수는 또 다시 이중거 교수님이었다. 첫 시나리오 제출에서 현장취재를 다시 하라는 엄명으로 나는 남대문시장 및 기타 우범지역을 뒤졌다. 시나리오는 발로 쓴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영화를 통하여 사회를 반영하고 영화가 지니는 호소력을 활용해 보는이들에게 경종을 울려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그이상 바랄것이 있겠는가?” 이것은 영화의 제작의도이다. 곧 수정된 시나리오로 촬영은 시작되었다. 모든 여건은 어려워져 있었다. 필름값은 올랐고 그렇게 만지고 싶던 보렉스 카메라는 몇 년의 시간 경과에 의해 덜그럭거리기 시작했으며 같이 영화를 얘기했던 선배들은 모두 떠나가고 없었다.
그렇다. 이제는 우리가 그 선배가 된 것이다. 권위와 군림보다 사랑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선배, 나는 ‘무영회’란 영화서클로 각 학년 참여의 자리를 마련했다. 촬영은 몇날 며칠을 편집실에서 새우며 계속됐다. 다행히 강의시간이 저학년보다 많지 않아 촬영엔 지장이 없었다. 그러나 그 해 늦봄 휴교령으로 학교문은 닫히었다. 그래도 우린 계속 촬영을 하였고 기어이 작품을 완성시키고 말았다. 녹음을 앞두고 교수님을 학교 앞으로 모셔 시사를 갖던 일은 잊을 수 없다. 그 작품은 그 해 12월달 영화인협회가 주최한 “제1회 한국 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다.
2학기에 다시 문을 연 대학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지막 학기 수강과목은 영화워크샾(Ⅴ), 영화미학, 감독연구이다. 우리는 곧 있을 제 27회 중앙영화제의 준비에 박차를 가하며 각 개인의 졸업작품에 착수하였다. 지도교수님이신 김정옥 교수님, 그리고 양광남 예술대학장님과 오직 30여년을 강단에서 후진양성에 힘쏟으시고 정년퇴임을 앞두신 이응우 학과장님의 따뜻한 배려 속에 영화제 준비작업은 진행되어 갔다. 4년 대표로서 총 집행을 맡게 된 나의 소임은 컸다. 26회까지 이어 내려온 중앙영화제에 모인 관객 들에게 실망을 안길순 없었다. 전체 영화파트 40여명은 각 학년대표를 중심으로 활기차게 작품 준비와 영화제 준비를 해 나갔다. 나는 나의 졸업작품에만 연연해 할 수 없었다.
11월 26일 드디어 ‘선입관, 편견으로부터의 해방! 이란 모토를 내건 우리 중앙영화제는 전야제를 시작했다 나는 워크 프린트에 임시 마그네틱 녹음을 한 미완성작품을 출품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추운 루이스를 냉기 속을 꽉메운 기대의 눈빛들은 우릴 설레게 했다. 드디어 조명이 꺼지고 프로젝터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때 의 작품을 살펴본다면 <空> (안태근 작) <童春> (안태근 작) <부러진 날개> (김학용 작) <연> (김성호 작) <우리네>(우상기 작) <六月祭> (김수용 작) <終> (정태원 작) <出漁> (이근목 작) <Wash Room> (찬조작품, 이우승 작) <삶> (김종길 작) 등 모두 열편이었다. 개성 가득찬 한 편 한 편이 끝날 때 마다 뜨거운 박수소리가 온 홀을 울렸다. 아쉬운 것은 그들 중 현장영화인들이 없다는 점이랄까... 드디어 마지막 날까지 무사히 영화제를 마치고 우리는 학과에서 내준 보조금을 갚고도 상당한 금액을 남겼다. 우린 그 수익금 일부를 다음 28회 영화제 기금으로 쓰고 전금액으로 그간 아쉬움을 느꼈던 영화학과 도서실 설립의 도서를 기증키로 했다. 우리 졸업생 몇 명은 광화문, 종로, 청계천 등을 뒤져 백여권의 책을 구해 영화 라이브러리 도서로 기증하였다.
우리 졸업생은 우리가 해온것처럼 저들 또한 새로운 전통을 만들며 휼륭히 해나가리라 믿고 있다. 이것이 이어져서 어느 선배님의 발처럼 한국영화 발전의 도약대가 될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필자소개: 1981년 중앙대연영과 졸업
제 9회 한국청소년영화제 우수상 수상
(이 글은 ‘월간 영화’ 1984년 4월호에 발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