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열전에 나올 만한 그런 사람들을 알게 된 것은 그리고 그들과 교제하며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
사실 나는 그녀를 그레이스 홈에 단기로 3번 왔었던 형제인 부틀러를 통하여 알게 되었다. 형제의 아버지는 파라구아이에서 10여년을 선교사로 사역하고 지금은 미국에 돌아와서 목회하고 계시는 분인데 자녀들이 먼 땅에 단기로 간다고 하자 허락하였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그 형제와 케더린 멕다니엘 선교사 가족과 그리고 그의 아들과는 절친한 친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케더린에게 전화를 하게 되었고 우리는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몇번을 만나고 나서 한참이 지난 후까지도 사실 나는 그녀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었다. 처음 만나던날 우리 집에 와서 한국 식사를 대접하자 잘 드시고 지금도 치앙마이 제일교회에서 섬기며 감옥 사역을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 말고는... 2-3년이 지난 다음 나중에 내가 좀 더 그분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외국인 묘역에 대한 설명이 있는 책자를 통해서 였다.
처음에 미국에서 한 형제가 단기로 오겠다고 하였다. 그 형제가 치앙마이에 도착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선교사가 있다고 하였다. 그녀의 이름은 케더린... 나더러 전화를 해보라고 전화번호를 주길레 전화를 하였다. 전화상의 목소리는 밝고 생기발랄한 20대 여성의 목소리였다. 전화로 인사를 하며 만나기를 원하자 단기로 온 형제와 함께 만나기를 원하였다. 밖에서 만났는데 놀라고 말았다. 20대의 여성이 아니라 50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두번째의 만남은 우리 집에서 하기로 하였다. 한국식으로 우리 집에 와서 교제하며 그이 입을 통하여 그의 일생의 삶을 들을 수 있었다. 아래의 내용은 그녀에게서 들은 내용과 책에서 읽은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뉴질랜드 태생의 섬처녀 케더린은 뉴질랜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뉴질랜드 사람이다.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자란 케더린은 대학을 졸업하고 선교단체에서 사역하다. 태국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25세의 나이.... 그러나 그때 하나님은 그에게 태국에 6개월만 가도록 부르셨다고 한다. 선교사역에 필요한 훈련이며 준비를 마치고 여자 나이 26세에 미지의 나라 태국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지금부터 40여년 전이니까 태국이나 뉴질랜드의 상황이 지금처럼 그렇게 쉽지많은 않았으리라...... 한번에 한걸음씩 "주님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케더린이 가장 좋아한다고 고백한 성경구절이다. 하나님은 그에게 한꺼번에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고 한걸음씩만 하도록 하였다고 고백한다. 26세 되던 해에 뉴질랜드를 떠나올 때 주님은 그녀에게 태국에 가서 6개월만 있도록 하셨다. 그녀는 6개월이라면 기꺼이 순종하겠다고 하였고 태국에 도착하여 일하면서 약속한 6개월이 지나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녀에게 또 1년을 연장하고 또 1년을 연장하여 이제는 이 땅에서 35년이 넘는 세월을 보내게 되었다. 때로는 가족이 그리워 돌아갈 생각도 하기도 한 적이 있었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순종하고자 그런 생각들도 접어야 했다며 과거를 회상하는 그녀, 책에서 읽은 것이지만 남편이었던 분은 유명한 의사로 태국 선교사로 태국에 와서 50여년동안 섬기다가 1999년 소천하셨다. 그녀의 결혼에 관한 이야기는 본인에게 직접 듣지는 못하였지만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 책을 통하여 들을 수 있었다. 싱글이며 간호사였던 케더린은 의사 선교사인 멕다니엘의 부인이 먼저 부르심을 받게 되자 케더린은 멕다니엘과 결혼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나이차(30년 정도)가 너무나 사람들이 어렵게 생각하였지만 그 어려움을 무릅쓰고 케더린은 의사 선교사였던 멕다니엘과 결혼하였다. 멕도넬은 초창기 선교사인 멕길버리 선교사가 세운 멕코믹 병원에 와서 시스템을 완전히 세팅하고 태국에 아직 전기와 물 등의 환경이 열악한 상황에서 그런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들여와 공급함으로 태국 정부에 기여하였으며 한가족이 10명정도의 자녀를 낳던 것을 처음으로 태국에 가족 계획을 실시하게 함으로 가정에 대한 바람직한 문화를 정립하게 하여 선교사였지만 태국인들의 삶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태국 정부와 태국의 선교 역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아니될 기념비적인 선교사였다.
다음은 그의 남편이었던 멕다니엘에 대한 기록이다. 3. Dr. McDANIEL, Edwin Bailey, (15th 4. 1917 -18th,3.1999) 에드윈 바이레이 멕다니엘은 1917년 미국에서 태어났다. 당시 의료선교사로 시암(태국)에서 1902년부터 1934년까지 사역하였던 아버지 에드윈 브루스 멕다니엘과 어머니 엘렌 사이에서 태어난 육남매중의 막내였다. 그는 그의 남매중 미국에서 태어난 유일한 아들로 안식년 기간동안 미국의 미시간 주의 크리스탈 폴에서 태어났다. 에드는 그의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태국 남부의 나콘 시 타마랏에서 보냈는데 의료 선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문둥병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나환자들을 위한 공동체를 설립하여 돌보고 있었다. 에드는 그의 어머니의 헌신적인 봉사와 의료선교사였던 아버지의 사역에 깊이 감명을 받고 일찌기 어린 시절부터 의사 선교사가 되어 장차 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결심하였다.
에드윈은 초등학교를 미국의 사던 인디아에서 다녔고 뉴욕주의 스토니 브룩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으며, 일리노이주에 있는 윗튼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일리노이주의 주립 대학에서는 의학을 공부하였다. 1941년에는 그의 대학교때 연인이었던 샬롯때 미차우드(Charlotte Michaud)와 결혼하였다. 다음해 2차 세계대전시에는 군인 의료지원단으로서 이탈리아에서 복무를 하기도 하였으며 1948년 9월에 에드와 샬롯때는 두아들인 에드윈 브루스와 필립을 데리고 태국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의료선교사로서의 첫 번째 사역을 치앙라이에서 보냈는데 그곳에서 그는 태국인들에게 “마오 멕”으로 알려졌으며 오버부룩 병원의 유일한 내과의사였다. 그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세 번째 아이인 케롤을 낳았으며 1964년에는 네 번째 아이를 프레에서 입양하였다.
1953년에 그들의 첫 번째 안식년을 마치고 에드와 샬롯때는 치앙마이에 있는 멕코믹 병원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곳에서 그는 다른 네명의 의사들과 함께 팀을 이루었다. 그는 수년 동안 산부인과 담당의사로서 봉사하였으며 공식적으로는 1982년에 은퇴하였으나 그후로도 수년동안 의료선교사로서 적극적으로 사역하였다. 1960년대 초에 산부인과 환자들의 요청으로 맥 다니엘 선교사는 멕코믹 병원의 후원아래 가족계획 사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자 이 프로그램은 전세계에서 가장 초기의, 가장 큰 가족 계획사업중의 하나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는 이동진료소를 마련하여 외진 마을구석구석까지 찾아갔으며 치앙마이 지역에 거주하는 여성들에게 믿을 만하며 값이 싼 가족계획 기구를 제공하였다. 이 프로그램은 주사할 수 있는 피임방법으로 초기의 그리고 가장 널리 사용되어진 방법으로 유명하며 국제적으로도 널리 환영을 받았다. 멕다니엘이 사역하는 기간동안 태국은 전세계의 저개발국가들 중에서는 인구의 증가율이 가장 빠른 나라들중의 하나였다.
1976년에 그의 사랑하는 아내 샬롯때가 60세에 백혈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생전에 적극적으로 사역에 임하였는데 한편으로는 남편의 비서로, 또 한편으로는 멕코믹 병원에 개설된 간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헌신하였다. 그녀의 묘비는 치앙마이 외국인 묘역의 다니엘 멕길버리의 묘비 근처에 있는데 그녀의 묘비에는 “태국을 사랑한 선교사”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첫 번째 아내가 죽고난 2년후인 1978년 그는 인생의 새로운 동역자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당시 뉴질랜드에서 장로교 선교사로 태국에 와서 치앙마이에서 선교사역을 감당하고 있었던 케더린 홉킨스(Kathryn Hopkins)가 응답을 하였다. 그들 사이에 많은 나이차(30여년)가 있었지만 케더린은 에드가 죽을 때까지 그의 마음에 젊음을 유지하도록 도와준 사랑스럽고 헌신적인 내조자였다. 에드와 케더린이 결혼하여 살던 21년 동안 그들은 World Neightbors와도 잠시 동안 일을 하였으며 가족계획 프로그램을 보급시키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여러 나라에 자문을 제공하기 위하여 아시아의 많은 지역을 순회하여야 하였다. 당시 에드에게 큰 도움이 된 것은 그의 아들 필립이었는데 그는 태국에서 3대째 사역한 의료선교사였다. 종종 에드는 일년에 수주일 동안을 그의 아들 필립을 불러 미얀마 국경 근처에 있는 기독교인 호텔로 불러 쉬게 하였다. 그 기회에 필립은 회의에도 참여할 수 있었고 가족 바캉스나 여가를 가질 수가 있었다. 후에 에드와 케더린은 치앙마이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외국인 범죄자들을 위한 긍휼 사역을 시작하였다. 에드가 만 80세가 될 때까지 에드는 감옥에서 병을 앓고 있는 태국인들과 외국인 죄수들을 치료해 주는 사역을 계속하였다.
멕 다니엘의 마지막 한가지 소망은 그의 남은 여생을 태국에서 마치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의 삶의 대부분을 태국에서, 그것도 북부의 중심인 치앙마이에서 살았고 50년 이상을 태국 주민들과 산족 주민들을 섬겼던 이곳 치앙마이의 외국인 묘역에 묻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의 삶을 신앙, 환자들과 가족, 친구들과 태국 사람들과 태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의 삶은 그리스도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의 좋은 본보기였다.
from the book "DE MORTUIS", by R.W.Wood(Craftsman Press, Co.Ltd, Bangkok, 1999, p.48-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