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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궁리 상궁과 새터마을 | |
마누라 도망가도 모를 넓은 땅 농지개혁으로 소작농 벗어
최은창옹 없어도 열정있는 사람들 있는 한 평택농악 영원
■ “궁(宮)”자가 들어가는 마을
평택지방에서 “궁(宮)”자가 들어가는 지명은 안성천 변에서만 발견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아울러 이들 지명은 간척지이며 조선시대부터 궁궐이나 세력가,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일본인 지주, 친일지주의 땅이었다는 동질성도 갖고 있다.
궁(宮)자 지명으로 잘 알려진 마을로는 천안시 경계의 안궁리와, 팽성읍 평궁리, 신궁리, 고덕면 궁리, 오성면 상궁원이 있다. 평궁리는 군문교 넘어 평궁리들 가운데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 마을을 기억나게 하는 것으로는 평택농악전수관과 성도아파트를 꼽을 수 있다.
평택농악전수관은 근내리로 갈라지는 사거리의 이정표에 크게 쓰여져 있어 오가는 사람들 눈에 잘 띄고, 성도아파트는 들판 가운데 전망대처럼 우뚝 솟아있기 때문이다.
평궁리라는 지명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상궁(上宮)마을과 상평마을, 새터마을이 통합되면서 만들어졌다.
그 가운데 중심마을은 약 60여 세대가 사는 상궁(上宮)마을이다. 상궁(上宮)은 본래 “궁토” 또는 “궁말”이라고 불리던 것을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때 신궁리 하궁마을과 분리하면서 생겼다.
노인들은 상궁마을의 형성시기를 약 150년에서 200년이라고 하였다. 이 시기는 19세기 중반 전, 후로 평궁리들의 간척시기와 비슷하다. 평궁 2리 “새터말”은 성도아파트 뒤에 숨어 있다. 고 최은창 선생이 거주했던 이 마을에는 약 50세대가 모여 산다.
여러 번 말했지만 새터는 “새말”, “신리”, “신촌”, “신대”처럼 새로 형성된 마을에서 발견되는 지명이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새터”라고 해서 마을형성시기가 짧은 것만은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600년 된 새터도 있고, 300년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도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마을의 형성시기는 대략 80, 90년 전쯤으로 추산된다. 이 시기는 일제가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으로 습지에 대한 간척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던 때였다.
평궁 3리는 상평(上平)마을이다. 상평(上平)은 상궁마을 동쪽 5백 미터쯤 위에 있는 마을로 현재 약 25호가 산다. 이 마을은 본래 30, 40호가 넘게 살았다.
그러던 것이 숙명과 같은 몇 차례의 물난리를 겪고는 일부 주민들이 노와리 산꼭대기(양천리) 마을로 이주하면서 마을이 작아졌다. 평궁리의 세 마을은 모두 각성바지다. 이들의 조상들은 대부분 뼈대있는 혈연에 기대어 시골에서 방귀께나 끼던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부류였다.
궁궐이나 왕족들 또는 시대가 바뀌어 동척농장이나 일본인 지주의 마름들에게 시달리면서도 억쎈 두 팔과 두 다리로 시대를 헤쳐온 민중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동족마을에서 느낄 수 없는 튼튼한 우정과 연대감이 있다.
■ “통한들”로 불렸던 평궁리들
평궁리는 농업지대다. 주민들도 조수가 밀려오는 평궁리 습지대가 개간되면서 이곳에 자리잡았다. 그래서 주민들의 생활과 평궁리들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마을사람들은 “평궁리들”을 “통한들”이라고 부른다. “통’은 사방으로 열려있다”는 뜻이고, “한”은 “크다”라는 뜻이므로, 통한들은 사방으로 열려있는 큰 들판으로 해석된다. 농기계가 없던 시절의 넓이 개념이 궁금해서 “얼마나 넓었어요?”하고 물었더니, 논갈이를 할 때는 작대기로 종대를 세워놓고 일했으며, 남자가 앞에서 밭을 갈면 뒤에서 마누라가 도망가도 모를 정도라는 말로 대신하였다.
그래서 생긴 지명이 “지르볼”이다. 지르볼은 “긴 벌”이라는 말에서 파생되었다. 이곳 사람들은 지르볼 긴 밭에 메밀을 심었다. 농업용수도 부족한데다 수해와 염해도 많고 토지도 박해서 달리 심을 것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평궁리들의 주인은 궁궐이나 왕족이었다. 명례방 추수기라든가, 신대동의 창월리(창고 넘어)라는 지명에서 보듯이 궁궐이나 왕족들은 국가의 공권력과 노동력을 동원하여 이 땅을 개간한 뒤 오랫동안 주인으로 군림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일본인들로 주인이 바뀌었다. 특히 평궁리들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 농장(이하 동척농장) 소유토지가 많아서 무려 전체농지의 50%에 달했다고 한다.
상평마을의 토지는 다께노라는 일본인이 대지주였으며 나머지 땅은 서울 사는 부재지주 김찬영씨 소유였다. 주민들은 동척농장이나 일인지주 밑에서 일하는 소작농이었다.
해방 후 농민들은 팔자를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세 번 겪었다. 그 중에서 가장 극적인 사건은 1950년 농지개혁이었다. 특히 일본인들이 남긴 적산농지가 많았던 이 마을에서 농지의 불하는 만년 소작농 신세에서 벗어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62년 안성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수해(水害)의 위험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고, 1972년의 아산만방조제 건설로 염해(鹽害)와 농업용수 부족에서 완전 해방되었다.
마을에는 위의 사건 말고도 1943년 망근다리 아래 안성천을 가로막은 “양수장(계미보)” 건설을 큰 사건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계미보는 식량증산이 필요한 일제와 농업용수 확보가 시급했던 신궁리, 신호리, 내리, 대추리 농민들의 필요가 어우러져 축조되면서 농업용수 해결에도 도움을 주었지만, 평택에서 가장 먼저 전기를 공급받는 혜택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계미보 만으로 부족했던 농업용수는 가을걷이한 논에 물을 가둬두었다가 모내기에 이용하는 것으로 해결하였다. 그래서 겨울이면 평궁리들은 거대한 호수가 되었다.
호수에는 수 천 마리 고니 떼가 몰려들었고, 아이들은 얼음판 위에서 썰매타기를 즐겼다. 6.25전쟁 때는 피난민들도 빙판을 걸어 내려왔으며, 몸져누운 어머니의 약을 사러 평택에 나갈 때도 이 곳을 건넜다.
■ 두레풍물에서 평택농악까지
들이 넓고 논농사가 발달한 지역은 두레가 성(盛)하다. 그 중에서도 평궁리 두레풍물은 최은창 선생을 배출하여 평택농악의 기초를 놓았고, 평택농악이 형성되는 과정에서도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내가 평궁리 노인정을 찾은 시기는 지난 2월이었다.
농한기라서 노인정에는 나이 든 노인들은 모두 모여있었다.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고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마침 점심시간이라며 방을 치웠다.
무르익을 분위기를 깨기는 싫었지만 어르신들 심기를 건드리면 인터뷰는 고사하고 버르장머리 없다고 쫓겨날 판이라 일어나서 상 차리는 것을 도왔다. 마을노인들은 겨울이면 노인정에서 함께 점심을 먹는다고 하였다. 염치불구하고 한 쪽 귀퉁이를 차고앉아 밥을 얻어먹은 뒤 치우는 일까지 도왔더니 싹수가 괜찮다고 여겼는지 매우 호의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평궁리 노인들 중에서 두레를 경험한 사람은 손석건(85세)씨 한 사람 뿐이었다. 이 마을에서는 두레를 둥글레라고 불렀는데 형식과 절차는 주변 마을과 비슷하였다.
하지만 논매기 소리가 세 마디로 구성되었다는 것과, 왼발을 먼저 내딛으며 소리를 시작하였다는 점은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이곳에서 들은 두레패의 논일(김매기)과정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마을에서 모인 두레패는 그 날의 일을 정하고 두레기와 풍물패를 앞세워 들로 나갔다.
논에 들어가서는 북소리와 함께 일을 시작하고 끝내었다. 쉴 때에도 북소리에 맞춰 휴식을 하였으며, 담배는 곰방대에 부시를 쳐서 돌아가며 피웠다. 새참이나 점심을 먹을 때도 두 줄로 마주보고 늘어앉아 먹는 등 규율이 엄격했다.
풍물패는 겨울에 걸립을 하기도 하였다. 걸립은 당제(堂祭)와 같은 마을의 공공행사나 마을 앞에 나무다리를 놓는 기금마련과 같은 공공목적을 갖고 시작했으며, 대부분 정월 달에만 하였다.
걸립을 시작하려면 먼저 경찰서에서 허락을 받고 패를 받았다. 마을에는 이장이나 연장자에게 허락을 받은 뒤 들어갔으며, 화주가 정해지면 풍물을 놀고 우물이나 서낭 또는 부엌과 장광 등에 고사를 지냈다. 손석건 옹은 두레패에서는 기수를 하였으며, 걸립을 할 때는 악기관리를 맞았다고 했다.
하지만 걸립은 고생도 심했거니와 때때로 괄시도 받아서 두 번쯤 따라나섰다가 그만두었다. 분위기가 달궈지자 손석건 옹은 논매기 소리와 상여소리를 들려주겠다며 북채를 잡더니 쩌렁쩌렁하게 한 자락 뽑았다. 신문사 기자가 왔어도 안 불러 줬다는 말과 함께...
돌아오는 길에 평택농악전수회관을 찾았다. 마을 안쪽에 자리잡은 전수회관에는 교육이 한창이었다. 돌아가신 최은창 선생은 뵐 수 없더라도 사무국장으로 일하시는 김호환 선생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기대하며 찾았더니 마침 나오지 않는 날이라고 했다.
그냥 돌아서기가 아쉬워 전수교육을 지도하는 황영길 선생께 교육장면을 참관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느냐고 부탁했더니 쑥스러워하면서도 허락을 한다.
평택농악인처럼 생긴 황 선생은 전통연희와 음악에 남다른 열정과 이해가 깊어서 대화를 하며 많은 울림과 가르침을 받았다. 열정 있는 사람들이 있는 한 평택농악은 영원히 우리 곁에 숨쉬리라 생각하며 마을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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