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서는 신약 성경에 숨은 듯이 박혀 있습니다. 유다서 찾아내려고 하면 힘들어요. 요한계시록 바로 앞에 요한삼서 뒤에 있는데 달랑 1장이에요. 2페이지입니다.
유다서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언급을 잘 안 하지요. 그런데 유다서가 신약성경에 박혀 있다는 말은, 그림을 그리면 이렇습니다. 구약이 이렇게 있는데 구약이니까 옛날 약속이잖아요. 약속은 성취해야 약속 값을 하지요. 약속해 놓고 성취 안하면 그것은 부도수표잖아요. 구약, 옛날의 약속. 옛 약속 있고, 그 다음에 새로운 약속이 있는데 이것을 신약이라고 하지요.
신약이 새로 약속을 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새로 준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옛날 언약을 완성한 걸로 새로 주신다. 새로 주시는데, 그냥 구약 재치고 새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옛날 약속한 것이 새 약속 속에는 하나하나 다 완성되어 있다. 성취되어 있다. 성취된 채로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중국집에 가서 짬뽕 한 그릇, 자장면 한 그릇 약속을 했거든요. 그러면 신약에 와서 ‘손님, 뭐 시키셨지요?’ 이렇게 물으면 ‘아니, 아까 옛날에 약속했잖아요. 짬뽕 한 그릇, 자장면 한 그릇.’ ‘아 잊었네. 다시 하겠습니다.’ 이러면 안 된단 말이지요. 음식을 내 놓으면서 ‘손님, 약속한 것 맞지요?’ 라고 딱 내 놓을 때, 짬뽕 한 그릇, 자장면 한 그릇이 나와야 된단 말이지요. 이게 신약이에요.
신약은 특징이 뭐냐? ‘기쁘다.’ 기쁘다 뒤에 뭐가, ‘구주 오셨네.’ 이렇게 되잖아요. ‘구주 오셨네.’를 괄호 치면 앞에 뭐가 남습니까? ‘기쁘다.’가 남지요. 어떤 사람에게 기쁘냐 하면 옛날 약속을 믿는 사람에게 기뻐요. ‘아, 그 짬뽕, 그 자장면 언제 나오나?’ 이렇게 옛날 약속, ‘짬뽕 올 거야, 자장면 올 거야’ 라고 기다려야 그게 신약에 ‘아, 기쁘다.’가 되지, 옛날 약속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거 왜 주시는데요? 나는 잡채밥 시켰는데 이거 왜 주시는데요?’ 이렇게 딴 소리 하면 안 기쁘죠. 기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세상 끝에 와 있습니다. 옛날에 강의할 때 세상 끝을 ‘절벽’으로 이야기했지요. 절벽이고 우리는 벼랑 끝에 와 있다. 더 이상 길이 없어요. 이것이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 완료된 것이 왔다면, 자장면 한 그릇 짬뽕 한 그릇이 약속된 것이고, 그것이 왔다면 새삼스럽게 잡채밥 달라고 하는 새로운 약속은 다 거부당하죠. 저리가! 하고 차버리죠.
기쁘다. 끝나버렸어요. 더 이상 추가적으로 잡채밥이 필요 없어요. 잡탕밥을 시킬 필요도 없어요. 약속한 대로만 오시는 겁니다.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의 오해 중 하나가,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그분이 성취하시는 것으로 온다. 이렇게 생각하면 편한데, 내가 원하는 것을 혹시 주시지 않을까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고대하는 것을 진짜 주실까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것이 약속에 포함 될까요, 안 될까요? 안 돼요. 하나님이 옛날에 약속할 때 그 때 태어났나요, 안 태어났나요? 안 태어났지. 그러면 하나님이 약속하는 거기에 개입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 자신이 따로 의견을 제시한다든지 ‘이것 좀 들어주세요.’ 라고 요청할 수 없어요. 요청한다고 들어주시지도 않고.
여기에 [비타 500]이 있는데, 이것이 아주 좋은 예화가 돼요. 광주 올 때 내가 은근히 비타 500 먹고 싶어라 하고, 그것도 그냥 비타 500이 아니고, 광동제약 비타 500 기다리는데 준다면, ‘아, 내 약속이 집사님께 약간의 압력이 되었구나. 그래서 주셨구나.’ 이렇게 되는데, 올 때 나는 비타 500 전혀 생각도 안 했어요. 강의 생각만 했지 다른 생각은 안 했는데, 비타 500이 나왔단 말이지요. 이렇게 될 때 내가 생각지도 안았는데 주어졌으니까 그게 뭐가 되겠어요. ‘기쁘다.’가 되죠. 예상치도 않았는데 주셔서 기쁜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 할 때, 신앙생활이 기쁘려면 내가 요구한 대로 하나님이 안 들어주신 것에 대해 기뻐해야 돼요. 내가 기대한 것에 대해서 일체 응답이 없다는 점에 대해서 그것을 즐거워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좋아해야 돼요. 나랑 상관없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점에 대해서 우리는 박수를 치면서 ‘고맙습니다.’ 라는 소리를 할 수 있어야 해요.
내가 비타 500 공장장도 아니고 아무 상관없어요. 그냥 주셨으니까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고민되고 걱정되는 것은 자기 뜻과 자꾸 연결시키려는 부질없는 짓거리를 하니까 그래요. 하나님의 약속에 내 것을 자꾸 집어넣으려고 애를 쓰니까 신앙생활이 무척 힘들어요.
지금 우리가 유다서를 하고 있는데, 유다서는 어디 속하느냐? 신약, 즉 새로운 약속에 속합니다. 새로운 약속은 우리가 뭘 하란 말입니까, 말란 말입니까? 그것이 아니죠. 우리가 하고 말고가 아니고 그저 있는데, 뭐가 들이닥쳤지요. 뭐가 왔잖아요. 내가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뭐가 왔단 말이지요.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뭐가 왔으니까 나와 아무 상관없이 그냥 왔으니까, 앞에 상 차리듯이 차려 놓았으니까 먹기만 하면 된단 말이지요. 이건 내가 주문한 것이고, 이건 내가 원했던 것이고, 이것은 내가 시켜 달라고 한 것이고 이렇게 거기다가 시비를 걸지 마세요. 자꾸 나와 연결 짓지 마세요.
아무리 좋은 피아노가 있어도 내가 손가락으로 쳐야 소리가 나지요. 그런데 피아노를 전혀 못 치는 사람이 세종문화회관에 수천 명 관중 모아놓고 ‘베토벤 교향곡 제 3악장을 치겠습니다. 이근호라는 사람이 연주하겠습니다. 들어봅시다.’ 라고 하는데 나는 피아노 못 쳐요. 베토벤 3악장이 뭔지, 교향곡이 뭔지 몰라요. 그냥 폼만 잡는데 소리가 베토벤 소리가 나올 때, 청중들은 ‘잘 친다. 잘 친다.’ 하지만 나는 미안합니다. 하면서 폼만 잡는데 피아노 건반에 손도 안 댔는데 다 쳐버렸어요. 그래서 끝나고 난 뒤에 일어서니까 관중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쳐요. ‘앤콜. 앤콜.’ 해서 다시 피아노 앞에 앉아서 폼만 잡았어요. 그런데 송대관의 [4박자 인생]을 피아노가 알아서 다 쳐버렸어요. ‘최고. 최고.’ 하고 관중들이 소리쳐요. 뭘 최고야. 난 치지도 안 했는데.
그 때 뭐라고 해야 됩니까? ‘기쁘다.’ 이렇게 되겠지요. 신앙생활 이렇게 하는 겁니다. 폼만 잡는 거예요.
다시 이야기 해 드릴게요. 지금 유다서를 하는데, 유다서는 신약에 속했다. 그런데 신약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고 그 전에 구약이 있었다.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은 옛날 약속(구약)은 그냥 약속할 뿐이고, 신약은 그 전체가 성취고 완성이라고 했지요. 구약처럼 뭘 지켜야 되는 것이 아니고 가만히 있는데 온 거지요. 제가 뭘 예로 들었습니까? 자장면 하나 짬뽕하나 옛날 약속 했는데 자리에 앉으니까 과연 자장면 한 그릇 짬뽕 한 그릇이 왔어요. 먹기만 하면 된다니까. 먹는 것도 못해요? 이게 신약이에요.
신약에는 새삼스럽게 지키는 게 없어요. 주신 것 그냥 처먹으면 된단 말이지요. 맛있게. ‘고맙습니다.’ 하고. 피아노 칠 때 피아노 못 쳐요. 못 치는데 피아노가 알아서 다 움직여서 관중석에서 환호성이 일어나고 난리에요.
그러니 이 유다서를 들어가면서 성경 전체가 구약과 신약으로 나누어 졌고, 구약의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고스란히 신약에서 성취로 우리 것으로 안겨 줬다는 이 사실에 대해서 신약성경 처음부터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기쁜 소식’이라고 하지요. 어떤 사람이 들어도 기뻐할 수밖에 없는 기쁜 소식이고, 제가 오늘 강의하는 것이 바로 기쁜 소식에 대해서 강의하려 합니다.
기쁜 소식을 두 자로 줄이면 ‘복음’이라 하고, 마태가 전하는 기쁜 소식을 ‘마태복음’, 마가가 전하는 것은 ‘마가복음’, 누가가 전한 것을 ‘누가복음’, 요한이 전한 것은 ‘요한복음’ 이렇게 되지요.
처음부터 신약 전체는 기쁘다는 것이지요. 그냥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이에요. 마태 같은 경우에 기쁜 소식을 어떻게 전하느냐 하면,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 빛이 비췄다는 것입니다. 야, 이런 것은 강의를 하기 보다는 불을 끄고 여기에 어떤 조명 하나가 쫙 나에게 집중해야 돼요. 이걸 말고 강의하면 안 돼요. 이것은 실제로 해야 되는데, 마태가 전한 기쁜 소식을 뭐라고 했지요? 마태복음이죠. 그러면 마태복음의 한 구절이 뭐냐 하면, 어두움에 있는 자에게 뭐가 왔다? 빛이 비췄잖아요. 이게 얼마나 놀랍습니까.
[새]라는 영화에 포스터를 보면, 어떤 남자가 새처럼 이렇게 교도소에서 쪼그려 앉아있는 장면 기억납니까? 젊은 분들 [새] 영화 포스터 알아요? 올 누드로 해서 남자 하나가 쪼그려 앉아서 빛이 나오는 허름한 창틀만 쳐다보며 불쌍한 몰골을 하고 있는 포스터가 있어요.
어두움에 있는데 어두움에서 탈출한 것이 아닙니다. 열쇠로 문 열고 나온 것이 아니고, 그냥 어두움에 있는데 빛이 쫙 비친 거예요. 이렇게 되면 자기는 뭐가 되는가? 이것을 두 자로 하면 ‘발각’이죠. 들키는 거죠. 들켰을 때 자기는 죄인인 것을 비로소 알잖아요. 이 죄인을 건지기 위해 빛을 비췄으니까.
신약에서 기쁜 소식에 해당되는 사람은 주님의 빛에 의해서, 이것을 원초적 빛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데 잘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두운줄 모르고 어두움에 있었는데 빛이 비치니까 비로소 내가 죄인 중 하나였구나.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이사야의 고백처럼 발각당하는 거죠. 발각당한 요 관계를 가지고 바울은 뭐라고 하는가 하면, ‘주의 의’라고 해요.
‘주의 의’가 성립되려면 한쪽은 의의 제공자가 되어야 하고, 한쪽은 하나님의 의로움을 수혜, 받기만 하는 죄인이 등장해야 됩니다. 여러분 아령 알지요? 어떻게 생겼습니까? 이 관계가, 이쪽은 예수님이고 이쪽은 죄인 되어야지요. 그래야 의가 예수님 쪽에서 죄인 쪽으로 흘러가지요.
이 관계로 인하여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 구원을 소유하려고 하면 안 되지요. 소유당하면 돼요. 내가 소유하려면 구원이 안 됩니다. 주의 의를 내가 갖고 있으면 안 돼요. 주에 의에 내가 소유당해야 되지.
시편 71편을 봅시다. 2절을 누가 한 번 읽어보시겠습니까?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주시며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나를 구원하소서”
그 다음 15절 읽어보세요. “내가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 내 입으로 종일 전하리이다”
누구 의를 말합니까? 자기 의가 아니고, 말씀 지켜서 자기가 획득한 마일리지 쌓은 자기 의가 아니고 누구 의입니까? ‘주의 의’를 입에서 계속 토설해 내는 거예요. 뭐가 들어왔단 말이지요. 낯선 것이. 죄인인 내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내가 평생을 착하게 살아도 만들어 낼 수 없는 그 무엇이 내 속에 침투했고, 그 침투한 것을 내가 종일 외부에 드러내겠단 말이지요. 이게 ‘주의 의’고, 그 ‘주의 의’가 바로 로마서 1장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하지요.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마태의 기쁜 소식은 어두움 속에 빛을 비추는 것이라면, 로마서 1장의 복음은 이것을 좀 더 구체화해서 그 빛이 죄인을 어떻게, 무슨 능력으로 구원하는가?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의가 없는 우리 죄인에게 침투함으로 말미암아 그 침투한 의에 대해서 우리가 종속될 때, 그 때 우리는 의인되는 거죠.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의인 돼 버리는 거죠. 그러면 죽을 우리를 주의 의로 말미암아 살리신다. 주님의 자기 숙제지요. 주님의 자기 과제, 자기 업무에요. 내 업무가 아니고 예수님 업무.
이게 바로 이 시대에 왔던 자장면이고 짬뽕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식으로 구원 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예상 밖의 어떤 분이 등장해서 그저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그저 구원 받는 요 방식은 우리는 몰랐는데 구약 때부터 이미 약속으로 계속 이어져 왔단 말이지요.
그래서 신앙생활 하면서 제일 주의해야 할 것은 내 쪽에서 할 게 없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신앙생활 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낙담에 빠지고 낙심하는 이유는, 할 게 없는 내가 뭔가 하려고 시도할 때부터 발생이 되는 겁니다. ‘아이고 헌금을 안 해서 어떻게 하나? 예배를 지금 두 달째 참석 못했는데 어떻게 하지? 성경 안 본지 벌써 3년째가 되어 가는데 이렇게 해서 어떡하나?’라고 나설 때 왜 그 신앙생활이 잘 못 되었는가 하면, 그것은 어디에 해당 안 되는 겁니까? 옛날 약속에 없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신약시대 아닙니까. 신약 시대에는 어디에 저촉을 받습니까? 철저하게 우리 개인의 저촉을 안 받아요. 신약 시대에는. 신약 시대 모든 일은 우리의 활동과 노동에 의해서 변혁되고 개혁되는 게 아닙니다.
신약 시대에는 어디에만 저촉을 받아요? 구약에만 저촉을 받아요. 구약에 약속된 것만 성취, 또는 완성으로 주어진단 말이지요. 그러면 구약 때에 우리의 기도, 전도, 봉서, 헌금 이런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구약 때는 이걸 누가 한다? 구약의 모든 말씀은 오실 메시아가 이 말씀을 본인 혼자 다 이루셔서 이걸 우리한테 그저 주시는 형태로 우리를 건지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 아이디어가 아니고 구약 때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내가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준다.’는 것으로, 다른 신과 여호와의 차별화를 그렇게 이룬 겁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잖아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 은혜, 긍휼 뜻이 뭡니까? 우리보고 똑똑하라는 말입니까? 열심히 하란 말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너는 은혜 받아야만 살아.’ 라는 그런 규정 하에 우리가 놓여 있단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가 여호와 하나님을 안다면 어떤 입장을 계속 유지하고 있어야 돼요? ‘우리는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해. 우리는 은혜 받아야 되지 내 힘으로 되는 것은 없어.’ 라는 것을 계속 유지해 나가야 해요. ‘이제는 자립했다. 예수 믿고 성령 있는데 내가 알아서 하겠다.’ 이렇게 되면 안 된단 말이지요.
자기가 어떤 계획을 잡아서 나서게 되면 이것은 구약에 그런 약속의 내용이 없는데, 없는 내용을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내 자존심이 하나님의 약속에 삽입되어서 엉뚱한 약속을 자기가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돼요. 이러면 남묘호랑게교와 똑같이 되고, 여호와의 증인이 돼 버려요.
하나님이 약속하지도 안았는데,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약속에 의해서 구원 받는데, 갑자기 자기가 그 약속에 뛰어들어서 자기 뜻이 들어가 버리면, 그러면 예수님 혼자 성취했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갖게 되지요. 주님 성취한 것은 일단 챙기고 내가 원했던 것이 있잖아. 그것은 왜 안 주십니까? 이렇게 따지고 나설 것이 분명하단 말이지요.
[비타 500] 주실 줄은 생각도 못했지요. 그런데 광주 오기 전에 ‘아마 내 책상위에 [비타 500]이 있을 걸.’ 생각하고 왔는데 없으면 ‘주세요. 왜 안 주십니까?’ 이렇게 된단 말이지요. 그러면 집사님은 뭐라고 합니까. ‘그것은 구약의 약속이 아닙니다. 그것은 당신 뜻이 개입된 거고 ---’
완전히 우리의 뜻을 배제해야 돼요. 우리 소망, 우리 뜻 이런 것은 욕심이거든요. 욕심이 잉태하여 선악과를 따먹었고 죄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항상 우리 욕심이 선악과와 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우리의 욕망을 배제해 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우리 뜻이 없어요. 심지어 예수님도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라고 했습니다. ‘내가 온 것은 내 뜻을 위함이 아니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왔다.’ 철저하게 인간을 배제해 버립니다.
주신 것을 그냥 받으면 돼요. 그런데 자꾸 거기에 내가 개입하려고 할 때 신앙생활이 꼬이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신앙이고 뭐고 다 집어던집니다.
옛날 젊은 시절에 교회에서 성탄절 준비를 하는데, 원래 주일학교 교사가 그렇잖아요. 12월에 성탄절 준비를 하는데, 저녁에 7시까지 모입시다. 그런데 일찍 오면 8시고 늦으면 9시 30분에 오고. 그런데 제가 아는 어떤 교회는 교사가 10명쯤 되는데 성탄절이 다가오는데 무대 장치를 준비해야 하는데 아무도 안 오고 자기 혼자 달랑 왔단 말이지요. 그 여선생이 30살쯤 된 사람인데 혼자 그림도 그리고 하다가 나중에 화가 나서 그림을 다 찢고 내동댕이쳤어요.
저도 백수로 있을 때 서울 안암제일교회에 나갔는데 안 바쁜 사람이 저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내가 성탄절 준비 다 했는데 그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성탄절 준비하고 찬양대 칸타타 준비하는데 몇 명 오지도 않고 심지어는 반주자도 안 오고 할 때, 지휘자가 얼마나 속에 천불이 나겠습니까? 다 찢어버리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제가 신학을 공부하고 해 보니까 바로 그것이, 찢어버리고 싶은 그 마음, 그것이 바로 대표적인 불신앙이라는 거죠. 하나님께서 그런 길로 인도해야 좁은 길이 되는 거죠. 여럿이 모여 가는 길이라면 그것은 넓은 길이고 계모임이지 그것이 좁은 길이 되겠습니까.
찾는 이가 적어요. ‘내가 똑똑하다. 나 혼자 왔구나. 역시 나는 훌륭해.’ 가 아니라. 내가 오게 된 것도 내 노력이 아니고 주님께서 준비하신 어떤 약속의 컨베어벨트에 내가 실렸기 때문에, 주님의 약속 차원에서 나를 사용하시는구나. 그렇게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뜻을 유다서나 다른 어떤 성경을 읽으면서 개입시키지 마세요. 개입시키면 성경을 아무리 많이 공부해도 결국은 잘못된 결론에 도달됩니다. ‘열심히 살자.’ 이렇게 돼 버려요. 그래서 열심히 하게 되면 결국, 열심히 한다는 자체가 우리에게 뭘 남기느냐? 항상 미흡함을 남깁니다.
‘목사인데 공부 열심히 해야지. 그래, 열심히 해야지.’ 그러면 그 목사에서 뭐가 남습니까? 미흡함이 남는 거예요. 짜증이 나지요. 공부 열심히 하다가 덥다고 안 하면 ‘예이 씨, 때려 치우자.’ 아까, 성탄절에 봉사하다 다 찢어버린 것처럼. ‘목사 안 하면 안 했지. 공부 안한다.’ 애 셋이 소란을 피우며 돌아다니고. ‘예이 짜증나. 공부 안한다.’ 이게 바로 불신앙 적인 요소입니다.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신앙은 그냥 내가 주문하지도 않은 음식이 난데없이 들이닥친 것처럼, 성경을 복음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기뻐요. 내가 예상치도 않았는데 조명 비추고 그냥 하나님의 의가 들이닥친 겁니다. 차려놓은 상도 못 먹습니까? 그냥 넙죽넙죽 받아먹기만 해도 그것이 믿음 좋은 거예요. 이게 신앙생활 정말 잘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신앙생활 잘 하는 것은 누가 방해합니까? 내가 방해합니다.
그래서 어려운 이야기지만 ‘자아’하고 ‘나’가 달라요. ‘자아’는 시간에 따라서 자꾸 변합니다. 그런데 변하는 ‘자아’를 통일시키려는 것이 뭐냐? ‘나’가 통일시켜요.
이번에 손하진 씨가 피히테 강의 녹취한 것 올렸지요. 그 강의 내용이 아주 좋은 겁니다. 읽어보려니까 더운 날씨에 짜증이 나지요. 그 내용 가운데 참 좋은 내용이 많지만 특히 ‘아(我)와 비아(非我)’ - ‘아’는 나, ‘비아’는 내가 아닌 것. 그런데 피히테가 말하기를 뭐냐 하면, 나라는 것이 어느 정도로 위대하냐를 모를 때는 내가 아닌 타인을 통해서 내가 이만큼 위대한 것을 확인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특징이라는 거죠.
‘내가 얼마나 잘났지?’ 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과 비교해 봐야 돼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지?’ 하는데 거울이 뭐라고 합니까? ‘궁중에서는 왕비가 예쁘지만 저 숲속에 있는 백설공주보다 못합니다.’ 여기에서 돌아버리지요. 사과 먹여서 죽여 버리지요. 공주는 왕자가 뽀뽀하니까 깨어나고.
나라는 인간은, 나의 한계는 내가 아닌 비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비아는 두 가지가 있어요. 타인도 비아고 자연이 비아에요. 그 자연 속에 누가 들어 있는가? 신이 들어 있다. 그러니까 인간은 신과 라이벌이에요.
예수를 믿으라고 하니까 예수를 모델 삼아버려요. 이것은 신앙이 아니에요. ‘야, 나도 예수님처럼 살아야지.’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예수님을 라이벌로 여기는 거예요. ‘예수님이 형제를 사랑했구나. 나도 형제를 사랑해야지.’ 이것은 다른 종교들 불교나 이런 것과 똑같아요. 어떤 교주가 있고 그 교주를 본받자. 이렇게 돼요.
결국 이것은 뭘 포기 못했습니까? 피히테처럼 ‘아’ 나를 포기를 못한 거예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신약 성경의 내용이 뭐냐? 새로운 약속이 뭐냐? 내가 예상도 못했고, 내가 끼어들 여지도 없는 상태에서 난데없이 날 구원하겠다고 찾아오는 소식.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내가 여기에 개입을 안 했어요. 나는 나 혼자 똑똑해. 구원이고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런 것은 몰라도 돼. 왜? 지금 나 혼자 잘 놀고 있으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쳐들어 올 때는 나는 뭐로 발각됩니까? 죄인으로 발각되고, 죄인에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의가 여기에 침투함으로 말미암아, 아령처럼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하나의 아령이니까. 아령은 한쪽이 떨어져나가면 아령이 아니잖아요. 아령은 동그랗게 양쪽 두 개가 있어야 아령 아닙니까. 전체가 한 덩어리 될 때 그것이 신약입니다. 새로운 약속이 그래요.
예수님은 자기 구원 받으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인을 건짐으로써 신약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거예요. 예수님 안에 내, 내 안에 예수님이 있어야 구약의 약속이 우리한테 성취가 됩니다. 짬뽕으로 예를 들면 우리는 짬뽕에 있는 고춧가루하나 정도. 그 고춧가루로 있든 말든 그 고춧가루는 짬뽕이 되니까. 우리는 하나의 면발. 면발로 투입될 때 주님께서는 ‘면발 예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아이고 짬뽕 예쁘다.’ 하지요.
그러면 혼자 면발이 짬뽕 벌건 국물 속에서 그냥 고맙습니다. 하면 될 텐데 지가 톡 튀어나와서 ‘내 면발 어때?’ 하면 ‘너는 짬뽕이 아니야. 짬뽕 속에 있는 면발이야. 네가 짬뽕을 왜 대변하려고 해.’ 이렇게 된다고. 그러면 주님은 미워서 면발 안 먹고 국물만 마셔요.
처음부터 하나님은 피조물을 방치한 적이 없어요. 창세기 2장 보세요.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마지막 사람을 만드시고 안식을 하시지요. 하나님의 일은 피조물과 엮여서 돌아갑니다. 우리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이 된 상태에서 신약이 이루어 진 겁니다.
만약에 내가 피히테처럼 나라는 것을 고수하고 나의 절대성을 위해 일하려면 타인이나 하나님이 다 나의 라이벌이 되어서 나로 하여금 미워하든지 질투하든지 뭔가 수를 써야 돼요. 날마다 복수하지 않으면 속이 편할 날이 없어요.
피히테의 이론에 의해서, 그 사람 말이 맞지요. 나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누가 필요하다고요? 타인이 필요하데요. 내가 어떤 인간이냐 하는 것은 타인이 나의 수준을 따라오느냐 마느냐 그것을 견지해서 나를 다시 한 번 재정립하려고 한다 이 말이죠.
그런데 나중에 피히테 이후 철학에 보면, 이 나가 어느 타인이 오느냐에 따라서 나가 달라지니까, 이게 달라진다는 말은 우리에게 뭘 조성한다? 하이데거는 불안감을 조성한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누군지 모르겠다. 자기 딴에는 노래 좀 한다고 해서, 우리 동네 노래방에서는 내가 노래 좀 하는 사람인데 광주에 가니까 내 노래는 노래도 아니고 완전히 소음에 불과하더라. 그렇다면 내 노래 수준은 어느 정도야? 이렇게 자기 주체가 파악이 안 되니까 항상 불안해요.
혼자서 기도할 때는 기도를 참 잘해요. 내가 생각해도 나는 기도 참 잘 한다. 그런데 큰 교회에 가면 과부 된지 30년, 40년 기도만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과 새벽기도회 가서 경쟁 붙어보세요. 새벽기도 예배 한 10분 드린 후 각자 기도시합 들어가는데, 30분이 지났는데도 안 일어나요. 한 시간 지나도 안 일어나요. ‘저 할머니는 도대체 아침도 안 드시나?’ 좋다. 누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1시간 30분이 지났는데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중에 보니까 주무시고 계셔요. 괜히 기도 경쟁했네.
사람이 기도 하나를 해도 스스로 기도 잘 했는지 못했는지 점검해 보려고 해요. 목사한테 검사받고 장로한테 검사받고 집사한데 검사받고 ‘내 기도 어때요?’ 하고 검사 받으려고 해요.
우리교회 교인들 오후 예배에 기도 순서에 넣어도 안 하려고 합니다. 왜? 검사 받기 싫다고. 구원하고 상관도 없는데. 언제쯤 이 성취를 아는 사람이 될는지.
나가 계속 태양처럼 들끓고 있으니까 애매한 타인들이 자꾸 나의 미움의 대상이 되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시편 73편을 보겠습니다. 이것은 꼭 기억하셔야 되는 거예요. 2절입니다.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사람이 길을 갈 때 반듯하게 발걸음을 탁탁 걸어가면 안정성이 있는데, 눈 쌓인 길에 미끄러지면서 길을 가면 불안하잖아요. 우리 인생살이가 만날 눈길을 걷는 것처럼 자꾸 넘어지고 부러지고 그래요.
왜 그러냐?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건강하며 타인과 같은 고난이 없고 타인과 같은 재앙도 없나니”(시 73:3-5)
왜 안 믿는 사람들에게 재앙이 있어야 되는데? 이것은 자기 생각이에요. 예수를 안 믿고 하나님을 안 믿더라도 죽을 때도 건강하게 죽고 고난도 없고 만사형통하고, 이거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오늘날 이 시대에 성취 됩니까, 안 됩니까? 그대로 되지요.
그러면 우리는 시편 73편을 보면서, ‘아, 예수 안 믿어도 잘 되는구나.’ 라고, 이것을 ‘약속의 일종이네’ 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되는데, 왠지 오늘은 시기가 나고 질투가 생기고 갑자기 사는 게 싫어 죽고 싶고, 졌다는 것. 여자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남자들에게는 졌다는 것보다 더 기분 나쁜 게 없어요. 패배감.
우리나라 축구팀이 지게 되면, 대리 만족을 얻고자 하다가 지게 되면 대리 패배감을 갖지요. 이런 생각하는 자체가 우리에게 뭐가 문제 있다? 자아는 곧 죄인이구나. ‘열심히 살려고 애쓰는 내가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크게 떠벌이는 것밖에 안 되는구나. 평생 동안.
그래서 그 때부터 나는 겸손해야지. 나는 죄인 맞습니다. 라고 했는데, 우리교회 나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있어요. 또 화가 나요. 지가 뭔데 내보다 더 겸손해? 나는 하루에 서너 번만 ‘죄인입니다. 부족합니다.’를 하는데, 그 집사님은 하루에 열 번도 더 해요. 이것 또 기분 나빠.
이것이 결국은 뭐냐? 또 하나님의 약속에 누가 개입했어요? 내 느낌을 거기다 가져간 거예요. 예수님은 우리를 아예 죄인으로 봐서 우리를 갈구지도 않는데 괜히 내가 나를 갈궈요(갈구다: 경상도 방언, 못살게 굴다).
‘겸손해야 돼. 교만하면 안 돼.’ 내가 나를 괴롭혀요. 그냥 생긴 대로 살면 되는데. ‘못생겨서 죄송합니다.’ 이주일처럼 생긴 대로 살면 되는데, 내가 나를 갈구는 거예요.
강의 처음부터 다시 돌아오면, 하나님의 약속이란 것은 우리를 배제하고, 우리는 다만 은혜의 수혜자입니다. 긍휼을 입을 자에 해당될 뿐이고, 일을 알아서 다 처리하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일을 다 처리해서 예수님 홀로 이루신 그 공로를 그냥 우리에게 기쁜 소식으로 그냥 주시는 겁니다. 이걸 우리가 인정하면 됩니다. 입으로 시인하면 되고.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장 10절.
그런 사람에게 아까 시편 72편 15절에 “내 입으로 종일 전하라이다” 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이 말씀에 또 자아를 집어넣으면 또 누가 해야 돼요? 내가 종일 이 짓을 해야 되는 거예요. 이것 안 하면 우리한테 뭐가 생기고? 미흡함이 생기죠. 나보다 나은 사람 만나면 화가 나고.
서울 사람들이 서울 말씨 쓸 때 지방 사람들 특히 경상도 사람들은 상당히 열등의식을 느끼죠. 평생을 경상도에서 살다가 가끔 서울에 있는 친구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동화가 돼요. 경상도 말씨가 아니고 서울 말씨처럼 동화가 된다고. 그게 뭐냐? 서울 말씨를 써야 내가 더 우월하다는 것, 자아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한 자아의 발동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개그 코너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서울말 쓰기는 쉽다. 왜? 무조건 말끝을 올리면 된다는 거예요. 끝을 올리면. ‘뭐 했다면 써~“(끝을 살짝 올리고) 이러면 서울 말씨가 된다니까.
그런데 제가 왜 이런 말 하는가 하면 신앙을 흉내 내리 말라는 겁니다. ‘네 친구가 2층에서 널졌다면 써~’(끝을 올린다) 이렇게 하거든요. ‘널졌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모르겠지요? 이게 경상도 사투린데 ‘떨어졌다’는 말이에요. 말끝만 올리면 서울 말 된다고 생각하고 했는데 내용은 경상도 말.
‘해수욕장에서 샤워를 하는데 물이 선나깨비 나온다면 써~(끝을 올림)’ 경상도 사투리하면서 끝만 오린다고 서울 말 됩니까?
자아는 없는 건데, 자아 + 믿음을 붙여봐야 그건 믿음 아닙니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널졌다면 써~’ 이게 무슨 서울말 입니까? 아무리 흉내를 내서 끝을 올려도 앞에 자아 중심의 신앙이 되면 이런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없는 것입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구원 받는다. 이런 것은 아예 약속에 없어요.
그러면 이런 것 없앨까요? 없앤다고 구원 되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냥 놔두세요. 자아가 열을 내던 흥분을 하던 그냥 놔두시고, 하나님의 말씀만 믿으면 되는 거예요. 내 자아는 따로고, 욕심쟁이요 나밖에 모르는 나에게 이미 십자가에서 그런 인간을 구원하려고 이미 완성태로 일을 다 조치, 완료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불교도 아닌데, 자아를 없애고, 내가 나를 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
이렇게 하고, 이제 유다서에 들어가야 합니다. 왜 이런 소리를 했는가 하면 유다서하면서 수많은 주석들이 유다서에서 윤리, 도덕을 끄집어내는 식으로 해석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이 신학자라고 하면서 가장 근본적인 믿음조차 없구나.
1장 1-2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는 부르심을 입은 자 곧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라”
여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라고 했지요. 아령을 크게 그려야 합니다. 제가 강의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봅시다. 아령입니다. 운동기구 아령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쪽 동구란 부분이 예수님, 저쪽은 죄인이죠. 그래서 여기서(예수님 쪽) 뭐가 흘러 들어옵니까? 하나님의 의가 들어와서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는 형식으로, 예수님과 죄인 이 자체(아령)가 새 언약, 다른 말로 하면 새 약속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 피 흘렸습니까? 예수님이 자기를 위해서 살 찢었습니까? 뭔가 대상자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대상자가 누굽니까? 바로 택한 백성, 아령으로 말하면 이쪽, 죄인이잖아요. 그 죄인 속까지 이미 주님의 의가 완전히 장악해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죄인인데 빛의 조명을 받은 것을 깨닫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안에서는 정죄함이 없는 거예요. 오늘 머릿속에 아령하나 가지고 가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했지요. 유다가.
‘유다가 야고보의 형제인데,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이냐, 아니면 제자 야고보냐?’ 이런 것은 별 의미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의미 있는 것은 야고보가 누구인지, 예수님의 동생인지 아니면 제자인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어떻게 그에게서 흘러나오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야보고 알아서 라이벌로 삼으려고요?
우리는 그리스도만 바라보면 되지 남하고 경쟁할 필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왔다는 말은, 예수님이 부리고 사용하는 그런 유다가 너희에게 편지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편지를 할 때, 요즘은 전자메일로 하지만, 컴퓨터 앞에 앉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근호는 여러분에게 편지 하노니’ 이런 식으로 쓸 때, 결국 상대방에게 뭘 말하려는 것입니까? ‘나 이근호 잘났다. 한 골 넣었다.’ 이런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축구선수 이근호 말입니다. 그게 아니고,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은 이런 분입니다. 라는 것을 증거하는 용도입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만나는 이유는 세상적인 것을 위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인도하십니까?’ 또는 ‘어떻게 은혜 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나는 이렇게 죄인인데, 은혜 주셨습니다.’ 이런 것을 끄집어내야 돼요. 특히 목회자들이 제일 못하는 것이 뭐냐 하면, 목회자들은 신앙생활을 못해요. 남 가르치는 것은 잘 하는데, 마치 중국집 주방장이 면발은 잘 뽑는데 신앙생활은 못하는 것처럼.
성경 가르치는 것은 잘하고 기도는 잘 하는데, 본인의 신앙생활은 못해요. 어떻게 하는 줄을 몰라요. 이게 문제예요. 목사가 목회는 열심히 하는데 신앙생활은 안 해요. 오목사님을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이 보면 설교에서 나타나요.
설교에 ‘나는 죄인입니다.’하는 식으로 설교가 나오면, ‘아, 저 목사님 신앙생활 하고 있구나!’ 이렇게 되는데, ‘내가 여러분에게 한 수 가르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면 그것은 신앙생활 하는 게 아니고 중국집 주방장이 면발 뽑는 것과 똑같아요. 어떤 기능을 발휘하는 거죠.
신앙생활 하는 설교는, ‘이 말씀을 전하는 목사 나도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 나와야 해요. ‘이 본문에 의하면 나도 형편없는 인간입니다.’ 라는 것이 나와야 해요. 그걸 내 줘야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만약에 자기 잘났다고 해버리면 교인들이 목사를 바라봐요. 이렇게 되면 그 목사는 교주가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에요.
목사가 그리스도의 종에서 교주 되는 시점이 언제인가 하면, 교회를 자기 교회로 삼으려고 하는 순간입니다. 더 이상 회개할 것이 없으면 나오는 것이 교회를 삼키려고 합니다. 목사가 회개를 하게 되면 항상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으로 늘 기쁨으로 강단에 서는데, 계속해서 회개가 되지 않으면 복음의 기쁨이 없고, 복음의 기쁨이 없으면 교회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는 소유의 기쁨으로 전환 돼 버립니다. ‘이 교회는 내 것이다. 어느 놈이던 손만 대봐라. 조져버린다. 이 교회는 내가 세운 교회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은 자아가 더욱 더 강렬해 져요.
오늘 집사님 식당에 가서 맛있게 대접을 받았는데, 음식 맛있고 칭찬을 하면 집사님 기분이 좋아요. 그런데 언제 바짝 긴장이 되는가 하면, 누군가 와서 ‘이 식당 내 것이다.’ 하고 나올 때 ‘너 죽을래?’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목사에게, ‘이야, 설교 잘한다.’ 이러면 ‘감사합니다. 다 주님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역사이지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다가, 언제 독이 오르는가 하면 ‘이 교회에서 나가라.’고 하든지 다른 사람이 와서 자기보다 설교 잘하면 돌아버립니다. 평소에 음흉함이 있었단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때는 완전히 자아를, 유다는 ‘내 자아의 입장에서 이 말씀을 전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라는 식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그 뒤 유다서 모든 이야기는 누구 이야기입니까? 유다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것이 주석가들의 맹점이에요. 유다 이야기가 아니고 누구 이야기에요. 예수 그리스도가 유다라는 아령을 통해서, 왜냐하면 이것 전체가 신약이거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라는 아령을 통해서 우리의 죄인 됨을 깨닫게 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증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유다서의 핵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