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고를 활성화하라!" 이공계 기피현상이 심화되면서 새삼 과학고가 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미래 '과학 한국'을 이끌어 나갈 과학영재(英才)의 산실(産室)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이 부여돼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학고는 한동안 많은 국민들의 뇌리에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가 최근에서야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과학고는 설립 취지에 맞게 잘 운영되고 있을까? 과학고가 본연의 역할에 더 충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전원 기숙사 생활… 내년 2곳 새로 문 열어
현재 과학고는 시ㆍ도별로 1개(서울은 2개교, 울산은 제외)씩 전국적으로 16개교가 설립돼 있다. 여기에 내년 경기 제2과학고(의정부)와 울산과학고가 개교를 앞두고 있다. 재학생 수는 약 3200명. 다른 특목고인 외국어고와 함께 대부분 각 시ㆍ도별로 가장 우수한 학생들이 진학한다. 따라서 자녀의 과학고 진학은 다수 학부모들의 희망사항이 되고 있다. 한 해 전체 과학고 입학 정원은 약 1100명. 이들은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학교에서 집중적인 과학 교육을 받는다.
이들이 수학ㆍ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지난 10여년 간 국제과학올림피아드에서 우리나라가 딴 메달의 81%가 이들의 공로라는 사실이 이 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학고는 1983년 경기과학고 설립에서 시작됐다. 이후 1984년 경남.광주.대전과학고, 1988년 대구과학고, 1989년 서울.충북과학고, 1991년 부산.전북.전남과학고, 1992년 한성과학고(서울), 1993년 강원.경북과학고, 1994년 인천.충남과학고, 1999년 제주과학고, 2003년 장영실과학고(부산)가 문을 열었다. 한편 부산과학고는 2002년 부산과학영재학교로 전환했다.
가장 먼저 배출된 경기과학고 1회 졸업생들이 현재 38세로 대부분 과학기술 분야 중견으로 활동하고 있다. 후발 과학고 졸업생들도 대다수가 과학기술 분야에서 공부.연구 중이다. 작년 졸업생들의 진로를 파악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과학고 졸업생 1117명 중 KAIST 485명(43.4%), 포항공대 52명(4.7%) 등 831명(74.4%)이 이공계열로 진학했다. 이밖에 의예계열 146명(13.1%), 인문계열 11명(1.0%), 기타 계열 8명(0.7%), 미진학 119명(10.7%) 등으로 나타났다.
여기서 의예계열 진학이 13.1%에 이르는 점을 놓고 최근 과학영재 육성이라는 설립취지에 어긋난다는 사회적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과학고 내부에서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사안이라고 말한다. 넓게 보면 의학도 과학의 한 분야일 뿐 아니라 실제로 대다수 과학고 졸업생들은 이공계로 진학하고 있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참고로 미국 일리노이주의 대표적인 수학.과학 영재학교인 IMSA(일리노이 수학.과학 아카데미)의 경우, 1995년 입학생들이 졸업 후 전공한 분야는 사회과학(21%)이 1위였다. 그 뒤를 이어 공학(16%), 생명과학(16%), 물리학(12%), 정보과학(10%)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미국의 경우 과학고 출신이 반드시 이공계로 진학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학고는 약 20년에 걸친 역사만큼 위상 변화도 있었다. 과학고 위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대학 입시제도의 변화이다. 이를 기준으로 과학고의 위상은 크게 비교내신제 실시 시기(1983~1997)와 비교내신제 폐지(1998) 이후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일반 고교와 달리 학교 내신 대신 고3 때 치르는 수능시험 성적을 전국 학생들의 성적과 비교해 내신을 산정(비 이공계 진학시 제외)한 시기이다. 이 시기의 과학고는 대학입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 일반 고교와 달리 제대로 된 과학 영재교육을 실시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서울과학고는 1994년도 서울대 입시에서 응시자 132명이 전원 합격하는 기록을 세워 화제가 됐다. 그러나 1998년 비교내신제가 폐지됨에 따라 과학고에는 곧바로 자퇴 파동(한 예로 당시 한성과학고는 180명 중 70명이 자퇴)이 불었다. 내신 불이익으로 아무리 우수한 학생이라도 수시모집을 제외하고는 서울대 진학이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많은 학생들이 수시모집 지원 자격을 얻기 위해 각종 경시대회 입상을 추구하게 됐다. 동시에 외국 유명대학 유학 붐이 불었다. 한 예로 서울과학고의 경우, 1997년 이전 한 해 1~2명이던 해외유학생이 2003학년도에는 11명으로 늘었다.
과학고의 위상을 더 흔든 것은 잇단 과학고 증설로 과학고 전체 입학정원이 1100명에 달함에 따라 주요 이공계 대학(KAIST, 포항공대, 한국정보통신대)의 과학고생에 대한 입학정원(대략 660명)을 초과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2학년 때 조기 수료자.졸업자 수시 전형을 통해 진학하지 못하면 내신과 수능 점수로 일반 학생과 힘들게 겨뤄 입학해야 한다. 경기과학고 이원배 교사는 "과학고 학생들은 일반 학생들에 비해 수능 준비에 매달릴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며 내신에서도 크게 불리하다. 이런 상황은 결국 과학고 본연의 수업과 탐구활동을 성실하게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대학 진학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과학고 교육이 파행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2학년 조기졸업을 원하는 학생들은 과학 탐구활동이나 논문 작성이 당연히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주말을 이용해 입시학원을 전전하고 기숙사에서 동영상 수능 강의를 듣는 경우까지 생겨나고 있다. 또 3학년 학생들은 학교에서 과학 심화(深化)과정을 다루기보다 오히려 수준을 낮춰 수능 준비를 도와 줘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과학고는 2학년 조기졸업자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한성과학고 김규상 영재부장은 "학교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한 학년의 3분의 2 정도가 2학년 때 조기졸업, 진학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경기과학고의 경우, 작년 2학년생 69명 중 59명이 졸업하고 10명이 올해 3학년으로 진급했다. 이는 KAIST 등 이공계 대학들이 과학영재가 수능준비 등에 시간과 노력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과학고 2학년생들을 신입생으로 선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2002년 부산과학영재학교(부산과학고가 전환)의 출현도 과학고에 위기감을 안기고 있다. 교육부 소관인 과학고와 달리 이 학교는 과기부 소관이어서 더 많은 자율성이 보장되며 더 많은 정부 지원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첨단시설 확충, 우수교사 확보, 교과과정 운영 등에서 기존 과학고를 앞선다는 것이 과학고 관계자들의 평가다.
% 과학영재학교 출현에 위기감 고조
부산과학영재학교에는 전국에서 우수학생들이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예로 작년 경기도에서 57명이 이 학교에 합격, 인재 유출 논란을 낳았다. 서울시교육청도 인재 유출을 우려해 관내 서울.한성과학고에 대해 기자재 구입, 학생 해외 견학 등의 방식으로 지원을 강화했다. 과학고 관계자들은 부산과학영재학교의 성과에 따라 과학고들의 영재학교 전환이 잇따를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과학고 관계자들은 과학고의 위상 제고를 위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크게 과학 교육을 연계.심화시킬 수 있는 대학 교과과정 마련, 교사 임용.연수에서의 우대, 학생 선발방식의 개선 등을 주문하고 있다. 특히 학생 선발방식 개선은 전국과학고등학교협의회가 연례 공청회를 개최하는 등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과학고도 일반 고교와 마찬가지로 필기시험을 볼 수 없어 서류전형과 면접, 구술고사로 학생을 선발한다. 이에 대해 과학고 교사들은 이런 방식으로는 과학영재성을 가진 학생을 선발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과학고협의회 배희병(한성과학고 교장) 회장은 "부산과학영재학교는 과기부 소속이어서 필기고사도 치른다. 우리도 1차적으로 필기고사를 치른 다음 창의성.집착력 테스트를 거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 입시제도의 개선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 과학고에 입학하려면?
과학고의 학생 선발은 특별 전형과 일반 전형으로 나누어진다. 특별 전형은 서류 전형과 면접을 실시하고 일반 전형은 서류 전형, 면접, 구술고사로 구성돼 있다. 서류 전형의 바탕이 되는 중학교 때의 내신성적은 대체로 수학, 과학, 국어, 영어 점수를 크게 반영하고 있다. 최근 서울과학고와 한성과학고의 경우, 수학ㆍ과학을 중심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대부분의 과학고는 여전히 수학ㆍ과학 성적뿐 아니라 국어ㆍ영어 성적도 비중있게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수학, 과학, 국어, 영어 과목의 성취도가 모두 수인 자' 등으로 입학 지원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경시대회 가산점의 경우, 수학ㆍ과학 성적과 무관한 영어 학력, 발표력 경시대회, 국어 경시대회에서 은상 이상 입상자에게 가산점을 주는 과학고도 있다. 일반 전형으로 응시하는 학생들에게 적용되는 구술시험은 수학ㆍ과학과 관련된 문제(10문항 정도)에 대해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치러진다. 수험생에게는 40~50분의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한성과학고의 경우 특별 전형은 학교장 추천(수학ㆍ과학의 석차가 상위 3% 이내인 학생), 수학ㆍ과학 경시대회 입상자, 정보올림피아드 경시대회 입상자, 국제올림피아드 출전자 등을 대상으로 입학 정원의 절반 가량을 선발한다. 일반 전형의 경우 수학ㆍ과학의 교과목 석차가 상위 10% 이내인 학생들에게 지원자격을 주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중학교 전교 석차가 5등 이내에 드는 우수한 학생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중학교 영재교육 수료자, 국가유공자 자녀, 특례입학 대상자(귀국자 자녀) 등을 정원 외로 약간명씩 선발한다. 중학교 영재교육 수료자는 서울대나 연세대 등 대학 부설 영재학교, 과학고 부설 영재교육원 등에서 소정의 교육과정을 마친 학생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