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이육사 생애의 사진과 유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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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생애 연보
1904년 0세 5월 18일(음 4.4)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당시 원촌동) 881번지에서 진성 이씨 이가호(李家鎬, 퇴계 이황의 13대손)와 허형(許 )의 딸인 허길(許吉) 사이에 차남으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원록(源祿), 두 번째 이름이원삼(源三), 자는 태경(台卿)
조부에게서 한학을 배우고 대구 교남(嶠南)학교에서 수학, 1925년 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1926년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베이징 사관학교에 입학, 1927년 귀국했으나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고 지었다. 출옥 후 다시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 수학 중 루쉰[魯迅] 등과 사귀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黃昏)》을 《신조선(新朝鮮)》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 신문사· 잡지사를 전전하면서 시작 외에 논문·시나리오까지 손을 댔고, 루쉰의 소설 《고향(故鄕)》을 번역하였다. 1937년 윤곤강(尹崑崗) ·김광균(金光均)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그 무렵 유명한 《청포도(靑葡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발표했다. 1943년 중국으로 갔다가 귀국, 이 해 6월에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으로 목가적이면서도 웅혼한 필치로 민족의 의지를 노래했다. 안동시에 육사시비(陸史詩碑)가 세워졌고, 1946년 유고시집 《육사시집(陸史詩集)》이 간행되었다.
1909년 7세 조부 치헌 이중직(痴軒 李中稙)에게서 소학 배우기 시작
1916년 12세 조부 별세, 가세가 기울기 시작, 한문학 수학, 이 무렵 보문의숙에서 수학,안동시 녹전면 신평리 듬벌이로 이사
1919년 15세 도산공립보통학교(보문의숙을 공립으로 개편) 1회 졸업
1920년 16세 부모를 비롯한 가족 모두 대구(남산동62번지)로 이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에게서 그림을 배움, 동생 원일(源一)은 글씨를 배워 일가를 이룸
1921년 17세 영천군 화북면 오동(梧洞) 安庸洛의 딸 일양(一陽)과 결혼, 처가에서 가까운 백학학원(1921 설립)에서 수학(보습과 과정 - 1922년까지) 1923년 19세 백학학원에서 교편 잡음(9개월 동안) 1924년
20세 4월 학기에 맞추어 일본 유학 경찰기록 - 토교쇼오소쿠(東京正則)예비학교, 니뽄(日本)대학전문부, 검찰신문조서 - 킨죠우(錦城)고등예비학교 1년간 재학
1925년 21세 1월에 귀국, 대구 조양회관을 중심으로 활동, 이정기·조재만 등과 어울리며 베이징 나들이
1926년 22세 베이징에서 수학, 광뚱성 광저우 쭝산대학(中山大學)에서 후학기 수학(이활李活 이름 사용
1927년 23세 쭝산대학에서 전학기 다니다가 여름에 귀국, '장진홍의거(10월 18일)'에 연루되어 구속됨
1929년 25세 5월에 석방(12월에 무혐의로 종결). 중외일보 기자
1930년 26세 1월 3일 첫 시(詩)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이활), 아들 동윤(東胤) 태어나다.(만 2세에 사망) 10월 《별건곤(別乾坤)》에 이활(李活)·대구이육사(大邱二六四) 이름으로 [대구사회단체개관(大邱社會團體槪觀)] 발표
1931년 27세 1월에 '대구격문사건'으로 구속, 3월 석방, 잦은 만주 나들이. 3개월 머물다 연말에 귀국. 8월 조선일보사로 전근, 대구지국 근무.
1932년 28세 베이징, 텐진에 머뭄. 베이징에서 난징으로 이동하고, 10월 10일에 난징 근교 탕산에서 문을 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 학원(學員)으로 입교
1933년 29세 4월 20일 1기생으로 졸업(26명), 졸업식에 연극 공연, 5월에 상하이로 이동, 6월에 상하이에서 뤼신(魯迅) 만남. 7월에 서울로 잠입
1934년 30세 4월에 {대중(大衆)} 창간호에 평문 [자연과학(自然科學)과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 게재, 3월 22일 군사간부학교 출신 드러나 구속됨(동기생이자 처남인 안병철이 자수한 후 졸업생 연이어 검거됨), 6월 기소유예 의견으로 석방(8월 기소유예 확정), 시사평론 다시 집필 시작.
1935년 31세 정인보 댁에서 신석초 만나 친교, 다산 정약용 서세 99주기 기념 {여유당전서} 간행에 참여, 신조선사(新朝鮮社)의 {신조선(新朝鮮)} 편집에 참여, 본격적으로 시(詩) 발표.
1936년 32세 7월 동해송도원(포항 소재)에서 휴양
1937년 33세 서울 명륜동에서 거주, 평문 성격 바뀜(시사에서 문학으로)
1938년 34세 신석초·최용·이명룡 등과 경주 여행, 가을에 신석초와 부여 관람, 11월 부친 회갑연
1939년 35세 종암동 이사, [청포도(靑葡萄)] 발표
1940년 36세 시 [절정], [광인의 태양] 등 발표
1941년 37세 2월 딸 옥비(沃非) 나다. 폐질환으로 성모병원 입원, 부친상
1942년 38세 2월 성모병원 퇴원, 모친과 백형 별세하여 원촌 큰집으로 귀향, 7월 신인사지(神印寺址, 옥룡암玉龍庵)에서 요양, 서울 수유리 거주
1943년 39세 1월 신정에 석초에게 베이징행 밝힘, 한글 사용 규제 받자 한시(漢詩)만 발표. 4월에 베이징으로 감, 충칭과 옌안행 및 국내 무기 반입 계획 세움. 7월 모친과 맏형 소상에 참여하러 귀국, 늦가을에 피검, 베이징으로 압송됨, 베이 징주재 일본총영사관경찰에 구금된 것으로 추정됨
1944년 40세 1월 16일 새벽, 베이징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 동지이자 친척인 이병희(여)에 의해 시신 거두어져 장례 치러짐, 원창에게 유골 인계되어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
1946년 1월 16일 인천 송현동(松峴洞) 동생 원창의 집에서 대상을 지내고 집안이 모인 자리에서 원창의 셋째아들 동박(東博)을 후사(後嗣)로 결정하다. 동년 10월 20일, 여러 지면에 흩어진 시고(詩稿)와 유고 등 20편의 작품을 모은 『육사시집(陸史詩集)』을 서울 출판사에서 발간하다.
1956년 4월 10일 서울 범조사에서 미발표 유고로 발표된 「편복」과 수필 「산사기(山寺記)」를 추가한 『육사시집』을 다시 간행하다.
1957년 가을, 대구 한양 다실에서 <육사 추도의 밤>을 가지다. 이 때의 행사로는 조지훈의 「육사의 민족 운동」, 김종길의 「육사의 시」등의 강연과 박양균의 추도시 「초인(超人)에의 노래」낭독 등이 있었다.
1960년 봄에 유해를 고향 원촌으로 이장하다.
1964년 음력 4월 초4일 환갑을 맞아 장조카 동영(東英)이 시비 건립 운동을 펴서 신석초(申石艸)·이효상(李孝祥)·조지훈(趙芝熏) 등의 협조를 얻어
<이육사 선생 기념비 건립 위원회>를 조직하고, 시집을 『청포도』라 개제하여 서울 범조사에서 9월 15일자로 다시 발간하다. 8월 16일 안동에서 육사 시비 건립 기념 강연회를 가지다. 이 해 가을에 딸 옥비(沃非)가 경산 사람 양진호(梁振鎬)에게 출가하다.
1968년 5월 5일 어린이날에 안동 낙동강 가에 「육사 시비(詩碑)」가 제막되다. 그 전날 <추모의 밤>이 경안 극장에서 열리고, 또 추모 강연회(연사 : 노산 이은상)가 안동예식장에서 각각 성황을 이루다. 시비 전면에는 유시 「광야」를 새기고
비문을 조지훈(趙芝熏)이 짓다. 그리고 전면 글씨는 김충현(金忠顯)이 쓰고 뒷면 글씨는 배길기(裵吉基)가 쓰다.
1974년 미발표 유고 「바다의 마음」과 난초 그림 두 폭이 새로이 발굴되다. 이것은 육사가 직접 신석초(申石艸)에게 준 것으로서, 그동안 어디에 두었는지 알지 못하다가 <나라사랑> 16집 특집을 계기로 처음으로 찾아낸 것이다.
몇편의 한시(漢詩)도 석초가 등초해 두었던 것이다. 작품의 연대는 1937년 <자오선(子午線)> 동인(同人) 때로 추정된다.
1945년 동생 원조가 유시(遺詩) [꽃], [曠野]이 소개됨 1946년 원조에 의해 {육사시집(陸史詩集)} 출판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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