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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지, 곤지 찍은 탈을 쓰고 "엄마, 나는 어딨어?" 하고 묻는 딸 서윤의 '본능적인 정체성 찾기'를 시인은 사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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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신현림 | 정오를 10분쯤 넘은 시각, 지하철 5호선 여의도역 3번 출구 앞 한 카페. 시인은 한쪽 벽에 몸을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6척의 사내가 가까이 다가가도 인기척을 못 느끼는 것이, 살짝 잠이 든 모양이었다.
정오 약속이었는데, 인천 동암역에서 출발한 내가 신길역에서 시인에게 전화하고 환승한 시각이 꼭 정오였다. 한 정류장 거리, 그 사이에 잠이 들 정도니 시인이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시와 사진, 예술기행문 쓰기과 번역, 그리고 방송 출연으로 바쁜 한 예술가의 작업에 지친 모습. 문득 깨우지 말고 그 모습을 '디카'에 담아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꾹' 참았다.
"왔습니다."
시인은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시인은 '핫', 이쪽은 '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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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림(시인, 사진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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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왕에서 태어나 아주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상명대 디자인대학원 사진학과에서 순수사진을 전공했다. 저서로는 시집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영상에세이집 <나의 아름다운 창> <희망의 누드> <슬픔도 오리지널이 있다> <빵은 유쾌하다> <굿모닝 레터>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현대미술 에세이집 <너무 매혹적인 현대미술>, 박물관 기행 산문집 <시간창고로 가는 길>, 시 모음 <당신이라는 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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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들은 저렇게 시끄러운 음악을 크게 틀어놔야 대화가 되는 모양입니다. 내가 해결하지요."
카운터로 가서 음악을 좀 줄여 달랬더니, 아예 꺼준다. 돌아와 앉으며 가만 생각해 보니, 우리 세대에서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체질 나름, 취향 나름 아니었던가? 우리 때도 고고장이니 디스코테크 가던 사람 얼마나 많았던가.
40대 중반의 나이에도 발이 닳도록 나이트클럽 다니는 사람들도 적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요즘 젊은이들'이란 말은 잘못됐다. '비교적' 그런 수가 많아졌을지는 몰라도.
"점심 드셨어요?" "아뇨, 아직. 드셨나요?" "예, 저는 방송국 로비에서 뭘 좀 먹었어요. 같이 나가서 뭐 좀 드신 다음에 다시 이리로 올까요?" "여기서 샌드위치라도 먹죠."
커피(시인은 '핫', 나는 '쿨')와 더불어 샌드위치가 두 사람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마요네즈 냄새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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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상에세이집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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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문학동네 | 나는 가방에서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을 꺼내어 탁자 위에 놓았다. 그랬더니 시인은 시집을 꺼냈다. 표지가 단순하고 신선한, <해질녘에 아픈 사람>이다. 시집의 내지에는 시인이 찍은 사진도 더러 담겨 있다.
"오랜만에 시집을 냈어요."
둘째 시집 <세기말 블루스>를 낸 지 8년 만이다. 시인은 <해질녘에 아픈 사람> 머리말에 이렇게 썼다.
'끝 간 데 없이 힘겨운 나날을 일중독으로 잘 살아냈고, 배우려고 하는 한 괴로운 체험도 버릴 게 없으며, 모든 이가 내 삶의 스승임을 깨달았다.'
셋째 시집에는 시인의 살아가는 모습이, 생각이, 진저리치도록 가슴아프게, 때로는 너무 서글프다 못해 더러 유쾌한 느낌을 주면서,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담겨 있다. 시를 관찰하다 보면 때로는 동질성이 느껴져서 "후후후" 하고 웃음이 새어나오기도 한다.
가난에 갇힌 것보다 힘없는 나라에 사는 일보다 체념에 익숙해지는 것이 더 서러워 슬픈 눈을 땅에 떨어뜨리며 늙은 아이들이 날아가고 새들은 땅속을 파 들어가고 오래된 건물을 뚫은 포도 넝쿨이 한스럽게 뻗쳐오른다 가난과 설움을 넘어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허기진 생활의 멜로디여 아슬아슬한 나날의 쌀자루여 낡은 육신의 그물을 던지는 나와 너여
-신현림 '흐느껴라, 노래하라, 타올라라' 전문
내가 스무 살 때 독서실에서 남학생이 수음하는 걸 보았다 굿 나잇 수음이군 건강 유지용 운동, 하며 모른 체했어야 했는데 나는 무서워 도망쳐 나왔더랬다 이상하게 생긴 막대기 처음 본 거라 구역질에 났었다
얇은 진흙 아래 숨은 욕망의 드릴 곶감을 꿰뚫은 꼬챙이처럼 다들 꿰뜷고 싶은 거야 (중략)
그럼, 열심히 해봐 굿 나잇 수음
-신현림 '굿 나잇 수음' 일부
밥 속에 헝그리 정신을 비벼 넣고 몸속에 헝그리 정신 채워 넣고 손에 헝그리 볼펜 감싸 쥐고 황홀하도록 고요한 도서실에 앉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일하는 것밖에 없다 (중략)
불황이다 부정부패다, 부익부 빈익빈이다 이 세계를 견디게 하는 헝그리 정신 이승을 살며 저승을 지나기 위해 달콤해진 헝그리 정신 만삭의 아이와 함께 배고픈 날개를 달고 아으 다롱디리 헝그리 정신
-신현림 '헝그리 정신' 일부
시인의 시의 목소리는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다. 노래가 그렇지 않은가. 명치 아래서부터 올라와야 호소력이 있지 않은가. 입으로만 예쁘게 만들어 부르는 노래, 얼마나 유치하고 허망한가.
유치원 나이의 어린이 유치함이야 그것이 자연스러우니까 오히려 좋고, 할아버지 할머니 나이의 유치함도 어린이 마음을 찾아가는 거니까 그것이 차라리 좋을 수도 있지만, 열심히 살아갈 나이의 사람들의 노래 부르기가 어디 그런가. 시 읽기도 마찬가지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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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아름답고 눈부신, 아이들 가슴처럼 순결한 새만금의 풍경은 이제 철저히 버려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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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신현림 |
| 시인의 시는 호소력이 너무 강하다 못해, 읽는 이를 숨가쁘게 했다. 숨가쁘다 못해 "헤헤헤" 웃도록 만들었다. 일상의 헝그리, 가난한 자의 만삭에서부터 '자아(自我)'를 찾아가는 이혼에 이르기까지… 딸과 꿈을 살려나가고 있는 작업의 치열함을 보면서… 도리어 시인의 하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기(氣)를 느낄 수 있었다.
"이 시집이 잘 나가요." "아, 그러세요? 정말 잘 됐네요."
시인의 환한 얼굴을 보니, 너무 기분이 좋다. 나온 지 3개월째, 벌써 5쇄를 찍었다고 한다. 책값이 싼 만큼(6000원이 비싸다고 하는 이들이 있는데, 해물뚝배기 1인분 값밖에 안 되는데 무어 그리 비싸단 말인가) 시집의 인세가 많지는 않지만, 책 안 팔리는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듣기 좋은 소식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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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전자의 물이 끓었을 때 "휴~" 하고 나는 소리는 '휴(休)'와 같은 느낌을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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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신현림 |
| 사진으로 건져 올린 '물고기처럼 펄떡이는 싱싱함'
시인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의 머리말과 사진의 의미를 한층 더 살려내는 본문에 잘 담겨 있다. 시인은 머리말에 이렇게 털어놓았다.
'여기서 참으로 부끄럽지만 꼭 하고 싶은 얘길 풀어놓아야 한다. 지지리도 부실했던 나는 대학입시에서도 여러 번 실패하였다. 이제 그 많은 실패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른바 일류대학에 원하는 대로 들어갔다면 아웃사이더의 소외감이나 슬픔을 그렇게까지 못 느꼈을 테고, 그쪽에 관심도 덜 갔을지 모른다. 혼기도 놓치지 않고, 결혼생활도 부유하고 평탄했다면, 시와 사진 작업을 그토록 열심히 했었을까? (중략)
그 옛날 경제 상황이 안 좋은데도 미대 간다고 재수, 좀 다니던 학교도 맘에 안 들어 다시 삼수까지 해서 또 떨어진 어느 겨울이 떠오른다. 동생은 대학 장학생으로 붙고, 나는 떨어져 더없이 창피해서 눈물만 나던 후기대학 발표날 밤. 바람에 문풍지가 울고 내 마음도 울고, 하염없이 서러운 밤이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아득하기만 했고, 죽음보다 더 우울한 기분 속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중략)
"춥진 않냐?" "괜찮아요." 하도 울어 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내 방의 아궁이를 열어 아버지는 연탄불을 살피시면서 다시 물으셨다. "누구 원망스런 사람은 없느냐?" "누굴 원망하겠어요? 내가 못한 건데요." "그럼 됐다. 그만 푹 쉬어라." (중략)
이상하게도 오랜 세월 동안 아버지의 이 말씀은 잊혀지지 않고 보석처럼 빛난다. 결국 내 인생 내가 책임져야 하고, 내 탓이고 내 잘못이란 무언의 가르침이셨다.'
그 시절에 깊이 깨달아서 쓴 시가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에 실려 있다고 했다.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첫 연은 이렇게 시작된다.
낡은 노트가 책장에서 떨어졌다.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나폴레옹의 이 말은 십 년 동안 내 머릿속을 돌아다닌 송곳이었다.
마지막 연은 이렇다.
왜 뒤늦게 깨닫는가 상처는 스스로 만든 족쇄였음을 아픔은 의지가 약한 자의 엄살은 아닌가 그래도 내 아픔의 고압선은 풀지 않으리 잃기 싫어서 우스워서 나만 아픈 것이 아니어서 누가 내게 욕설의 총탄을 퍼부을 수 없나 후회가 두려워 일부를 지웠다 오직 기록한 것만 살아 있는 것일까
살아 있다는 것은 착각이 아닐까
-신현림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 일부(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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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이 폐가에다 '우울증에 빠진 폐가'라고 이름붙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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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신현림 |
| 시인은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머리말에다, 자신이 대학 유급생 시절에 독서에 빠져들 때 사연, 그리고 20대 중반에 사진에 빠져들 때 사연을 아주 상세히 적어 놓았다.
그녀가 처음 사진에 매력을 느낀 것은 로버트 프랭크 사진집을 본 순간이라고 했다. '어딘가 불안하고 쓸쓸한 인간들의 모습, 공허하고 황량한 그의 작품세계'를 보면서 이거다, 싶은 감정이 일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스튜디어스인 딸은 비행기 사고로 죽고 하나 남은 아들은 정신병원에 있다는 로버트 프랭크의 개인사는 '슬픔과 우울이 짙게 배인 깊은 존재감'으로 하여금 20대 중반의 신현림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다.
'집 안 살림은 적당히 지저분하고 적당히 낡고 습하고 적당히 우울한 상태에서 얼마든 지낼 수 있다. 작업에선 적당히 라는 건 통하지 않는다. 끝장을 본다는 각오로 일을 해야 뭐 하나라도 건진다.
나는 사진을 찍으며 원하는 이미지를 건졌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건강을 건져올렸다. 물고기처럼 펄떡이는 싱싱함을.'
시인은 사진을 찍으면서 십여 년 넘게 고생한 불면증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했고, 골방 안에 갇혀 외로움에 시달리며 지낼 때보다 덜 외로웠다고 했다.
또한, 시인은 사진작업실에서 만난 아주 귀여운 S랑 함께 할 때 무척 따뜻했다고 했다.
'아홉 살 아래였던 그녀랑 있으면 나도 아홉 살 젊어진 기분이었다. 푸들 같은 그녀. 나도 푸들이 되는 것 같아. (중략)
기분 좋은 사람과 있다보면 시간도 잘 가고 집에 돌아갈 즈음엔 헤어지기가 싫다. (중략)
"너는 어디로 가지?" "마음 가는 대로……" "마음은 어디로 가는데?" "애인에게로."
아, 갑자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내겐 애인이 없기 때문이고, 그녀가 가면 혼자 남겨진다는 쓸쓸함이 먹구름처럼 드리워졌기 때문이다. (중략)
"그래 잘 가!"
그녀가 떠나도 나에겐 카메라가 있었다. (중략) 카메라를 들면 내가 생생히 살아 있단 기분이 들어. 찍으려는 풍경과 마주할 때 그 두근거리는 가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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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동료를 쳐다보는 물고기들의 표정이 너무나 안쓰럽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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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신현림 |
|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에는 시인의 딸 서윤 사진이 두 컷 들어 있다. 한 컷은 영화 <봄날은 간다> 촬영지인 신흥사에서 28개월 되었을 때의 서윤을 찍은 것이고, 또 한 컷은 집에서 탈을 쓰고 있는 모습을 찍은 것이다. 두 사진 옆에는 각각, 이런 시인의 사색이 더불어 담겨 있다.
'오랜 세월에 닳은 검은 고동빛 목조건물 앞마루에 우연히 내 딸이 턱 괴고 엎드려 있는 모습. (중략) 아이가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은 더없이 매혹적이어서, 아이는 점점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가 되어간다. (중략)
인생은 무거운 짐을 메고 가는 긴 여행이지만, 그나마 흔치 않은 국토 여행으로 인생의 짐은 그리 무거운 것만도 아니다. 그저 그런 일들은 불현듯 소중하게 되살아나는 추억이 된다. 추억이란 것은 굉장한 에너지여서 언제 어디서든 나를 강하고 따뜻한 사람으로 굴려간다.'
'집 물건 중에 아이가 탈에 많은 호기심과 흥미를 느끼나보다. 언젠가 탈을 쓰고는 녀석이 특 던지는 말 한마디!
"엄마, 나는 어딨어?"
나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자기 존재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는 것.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저 세 살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갖고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었다. 사실 이 질문은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 아닌가.'
사진과 더불어 있는 이 단상만 읽어도 시인이 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딸이 있는데 애인이 없다면? 나는 궁금증에 사로잡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혼하셨습니까?" "예, 작년에요."
시인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왜 이혼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대신에,
"하여간에 문인들이란 참……"
하고 대단한 발견을 한 듯한 어리석은 말을 하고 말았다. 그러고 확실하게 한 방 얻어맞았다.
"어디 문인만 그런가요? 누구나 다 그렇죠."
이혼한 유명문인이 더러 있어서 그게 과장돼 보이긴 하지만, 실은 각박한 살림을 하면서도 가정을 잘 꾸려가고 있는 문인도 많지 않은가. 이혼율이 다른 지식인층에 비해 크게 다르지도 않을 거였다.
시인은 '자신의 작업을 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부엌일에 바쳐야 하는' 여성들의 일상의 고통을 이렇게 시로 풀어내었다.
세상의 남자들, 당신들은 잘 모를 거야 깊이 생각하지 않았을 거야 모든 어머니의 유적지인 부엌을 바람 부는 밥상 일구는 노동과 피로를
부엌은 고래 같아 하루 종일 고래 입을 닫고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여인을 상상해 봐 마실 술이 없을 때처럼 여자 없을 때도 생각하고 고래 속 여자가 얼마나 작아지는지 얼마나 답답하고 고무장갑처럼 쓸쓸해지는지 (중략)
하수구로 시들어버린 한 여인이 흘러간다
-신현림 '부엌' 일부
시인은 어떤 사정에 이르러 이혼하게 되었고, 이혼하는 날의 느낌을 이렇게 시로 이야기했다.
가정 법률 상담소를 다녀오는 길 겨울 하늘을 나는 청둥오리 한 쌍을 보았다 거리를 지키며 날아가는 균형감이 놀라웠다 지옥에나 있을 괴로운 사건도 없이 가족의 둥근 고리를 만들어갔다
반대쪽에 있었다 황혼 이혼을 하러 온 칠순 할머니나 나나 스스로 어둠을 살면서 물과 해가 끓는 곳을 보지 못하고 마룻바닥을 지날 때처럼 삐걱거리는 소리를 먹으며 결혼에 잔뜩 병들어서 이제 구멍을 내려는 거다
구멍 난 하늘에서 푸른 사과들이 떨어지고 있었다'
-신현림 '여자의 집으로 가는 길' 전문
'그림'과 '시'와 '사진'으로 꿈을 키우고 스스로를 위안하고 독자와 관객들에게 '예술 읽기의 참맛'을 선사해 온 그 동안, 쉬지 않고 이어져 온 시인의 '가난'과 '고통'과 '절망'은, 그러기에 '어쩌다'가 아니라 '버릇처럼'이었다.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의 머리말을 좀더 들여다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가장 인상 깊은 일은 어머니께서 해주신 아파트 전세비를 빼서 사진 공방을 다닌 일로 인해 생긴 인생의 고난들이다. 그 나머지 돈으로 흉가 같은 낡은 아파트로 이사 가게 된 일. 이사한 다음날, 한밤중 두 시에 24시간 편의점에서 물과 간식을 사오는 길에 아파트 층계에서 복면 쓴 강도를 만난 것. 다행히 초범이라서 그랬을까. 과일칼로 찌를 듯이 흉내만 냈지 나를 향해 직접 공격하진 않았다. 비명소리도 나오지 않고 앓는 목소리로 뒷걸음질치며 도망치다 현관 앞 공사중인 구덩이에 빠진 일.(중략)
아이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 두 팀 중에 한 팀이 끝나, 생계의 위협을 느껴 너무 깊이 고민한 나머지 택시에다 카메라를 잊고, 그만 두고 내렸다. 유일한 내 재산이자 꿈꾸는 미래를 함께 만들어갈 니콘 FM2. (중략)
절망과 낙담의 쇼크 속에서 어머니가 담가주신 김치 한 통을 빈속에 다 먹어버렸던 기억이 난다.
시인은 여러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창조 작업' 덕분에 일어서고 또 일어설 수 있었을 것이다. 하나 더 생겼다면 '딸' 덕분에. 시인이 딸을 사랑하는 맛은 참으로 각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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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공허 속에서 시인의 딸 서윤은 무얼 발견한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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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신현림 |
| '딸'과 '꿈'을 사랑하고, '인연' 낯설게 풀어가기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속의 '또 하나 숨결 위에 숨결'을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온다.
'공휴일엔 어린이집이 휴관이라 매주 일요일이면 아이랑 어딜 갈까 고민하던 차에 나는 오래 머물 곳을 찾았다. (중략) 가는 길이 쉽진 않으나 일단 이곳에 아이를 풀어놓으면 저 혼자서도 맘껏 뛰놀고, 나는 나대로 책을 읽고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에 내 몸을 편히 누일 수가 있어 좋다. (중략)
아이는 쉼터에 앉아 뻐꾸기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숲속에서 아이는 더 싱싱해간다.
그러다가 녀석이 가만히 숲을 응시한다.
"재미없니?" "개미 없어."
(중략) 이런 식의 대화가 애 키우는 묘미 중의 묘미다.'
시인은 딸한테서도 그 동안 몰랐던 새로운 걸 배운다.
"아기한테서 나오는 화두가 있어요."
어느 날 딸이 집에 있는 탈을 쓰고는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엄마, 나는 어딨어?"
시인은 그때의 느낌을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속의 '나는 어딨어요?'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자기 존재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반응한다는 것.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저 세 살 나이에도 본능적으로 갖고 있구나, 하는 놀라움이었다.
사실 이 질문을 죽을 때까지 자신에게 던지는 것이 아닌가.'
"몇 살이죠." "네 살." "참 예쁘겠어요."
40대 중반 나이에 아직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나는, 해외에서 돌아온 조카딸 데리고 도화지에 그림 그려주던 기억, 놀이터 데리고 가 미끄럼틀 타는 걸 바라보던 기억, 문예회관 대극장 데리고 가 무용 공연 보여주던 기억을 떠올렸다.
"딸을 업고서 자전거를 타고 다녔어요. 어린이집 데려다 주고 사진 찍으러 가는 거죠. 하루는 딸을 업지 않은 상태에서 자전거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났어요." "예? 그럼 딸은?"
딸을 업지 않고 자전거 타다가 그랬다고 듣고서도 나는 다급하게 물었다.
"그땐 딸을 업지 않고 있었죠."
시인은 답답해하지 않고, 자신이 그 말을 빼놓았던 것처럼 오히려 자연스럽게 대답해 준다.
그의 자전거 사고는 연작시 '해질녘에 아픈 사람'의 소재가 되었다.
어느 해 가을 자전거를 타다 마티즈의 실수로 6주 진단을 받은 내가 주일 교통사고 사망자에 안 낀 것만 해도 다행이라 생각했다
송화 날리는 봄날 와인 두 잔으로 목 디스크 통증 가라앉히니 세상은 참 느리게 흐르고 붉은 등 같은 두 눈에 눈물 흘러서 보행 명상엔 더없이 좋았다 (이하 생략)
-신현림 '해질녘에 아픈 사람(보행 명상)' 일부
"전시회 준비를 하고 나서부터 몸이 아팠어요."
시인은 에세이가 곁들여진 사진집 발간과 더불어, 얼마 전에 전시회를 치렀다. 아마, 대입 시절의 수험공부보다 힘들었던 모양이다. 전시회에서 사진은 넉 점이 팔렸다고 했다.
"사진의 새 길을 보여주었다. 예술을 살아 있게 해주었다."
박재동 화백은 시인(사진가)의 사진을 이렇게 촌평했다고 한다.
"전시 준비하느라 두 달 동안 요가를 쉬었어요. 이제 또 시작해야죠."
시인은 참 부지런히 산다. 사람 만나기, 여행, 아기랑 놀기, 시와 사진 작업. 그리고 작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어주기 위하여 요가를 한다.
또한 KBS FM <유열의 음악앨범>에 고정출연하고 있고, <중앙일보>에 '삶과 문화'를 연재칼럼으로 쓰고 있으며 <인터넷 엔젤트리>에 '희망블루스'란 산문을 연재하고 있다.
시인(사진가)의 사진세계를, 미술평론가 박영택 교수는 사진집 해설을 통하여 이렇게 평했다.
'신현림의 카메라에 잡힌 사소한 대상, 사물, 풍경은 기억의 저장고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는 신경을 건드리고 추억을 건드리고 마음을 헤집어 놓는다. (중략) 구름과 발자국이 한데 어울렸고 누드와 덮개에 씌워진 자동차와 음식과 만발한 꽃이 서로 한자리에 놓여 있는 식이다. 이러한 '낯설게 하기'의 방법을 통해서, 눈이 본 것을 단순히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뭔가 이상하고 낯설고 기이하게 얽혀 있는 분위기를 만든다. (중략) 이는 꿈이나 무의식, 기억을 더듬게 하고 혹은 다중적으로 얽힌 이미지의 세계를 새삼 다시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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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 구름을 찍으셨네요?" 하고 묻자 "비행기 지나간 자리 찍은 거예요" 하고 시인은 웃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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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신현림 |
| "이미지와 꿈을 수준 높게 그려내는,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사진을 찍고 싶어요."
영상에세이집과 현대미술 에세이집 여러 권을 펴내기도 했던 연구하는 시인 겸 사진가 신현림. 그는 우리나라에 세계적인 사진작가가 드물다고 아쉬워했다. '우물 안에 개구리'처럼 작업하는 사진가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기 위하여 고민할 것이고 작업량을 늘여나갈 것이며, 세계적인 사진가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힘차게 말했다.
또한 "군림하려는 예술가를 거부한다"고 말하는 예술가 신현림. 이따금 매력적으로 눈웃음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인연'이란 화두를 떠올렸다.
그의 사진은 낯설기는 하지만 그의 사진은 오히려 꾸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예술 작업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인연'이란 화두를 끊임없이 던져주고 있지 않은가. 인연의 다양한 모습은 우리들 생명체에 늘 낯설게 다가오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움이지 꾸민 것이 아니지 않은가.
시인과 헤어진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뒷표지에 실려 있는 김경미 시인의 인물 촌평을 다시 한 번 읽어보았다.
'그녀는 늘 '종횡무진'이란 단어를 떠오르게 한다. 시와 산문과 사진 장르만이 아니라 삶과 시간이란 장르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 전면적이고도 열렬한 에너지와, 보통은 에너지에 반비례하기 마련인 감수성은 다 어디서 나오는지,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언제나 맹활약 중이다. 미묘와 돌발, 그런 삶의 순간들을 끝없이 포착한 사진과 이 책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 세상 사람들이여, 신현림과 연애하시라.'
이번엔 시집의 머리말을 다시 한 번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을 이렇게 맺고 있다.
'전부 취향이 다르고, 그 다름을 인정하고 격려하기 힘든 이 세계에서 내 식대로 꿈꾸며 작업하기. 여전히 노자의 도덕경, 그 한 대목을 믿고 사모한다.
그는 만들어내지만 사유화(私有化)하지는 않고 그는 행동하지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자신의 작품을 완성하더라도,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에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그의 작품은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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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해질녘에 아픈 사람> 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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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민음사 | 전동차 안에서 그의 시와 사진 작품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그는 시와 사진을 꾸며 만들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의 시와 시진에는 마침표가 없다는 것이다.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에는 산모 시절 시인의 아름다운 맨몸 사진이 두 컷 들어 있다.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올리지는 않는다. 너무 신비스러워 책 속에 감추어 놓고 싶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