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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교육 -- 무엇인가? (Christian Education -- What Is It?)
던칸 L. 로퍼(Duncan L. Roper)
(김 성수 교수 번역)
1. 서 론
우리의 교육제도상황과, 이 교육제도가 지지하고 있는 문화와 사회형태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점차적으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많은 학생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동기의 결여, 권위의 문제, 성적부도덕, 많은 결손가정, 많은 젊은이들이 일하고 있는 직장의 무의미성 등등은 즉각적으로 머리 속에 떠오르는 문제들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 사회가 이전에 어떠한 피상적인 통일성을 견지했다고 하더라도,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사회의 모든 측면에서 부단히 심화되어 가는 분화현상과 함께, 그 복잡성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 의심할 나위 없이 현대생활의 많은 특수한 영역에서 이룩된 엄청난 진보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러한 진보들은 교육에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분명한 사실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있으며, 미래와의 관계에서 볼 때 깊은 절망감과 불안감이 금세기 초엽을 특색 지웠던 희망적 낙관주의에 암영을 던졌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많은 사상가들이 지난 세기동안 “서구의 쇠퇴”(the decline of
the West)에 대해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 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들은 사실상 모든 영역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다음에 한 예로 든 것은 음악학자 윌프레드 멜러스(Wilfred Mellers)가 현대음악의 동향에 대한 연구의 서론에서 인용한 것이다:
오늘날 음악은 어떤 종류의 위기를 맞고 있으며, 이 음악이 한 부분이 되어
있는 현대문화도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보는 신념이 만연해 있다. 우리는 오늘날
변환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모든 시대가 한 세대로부터 다음
세대로의 변천이긴 하지만, 어떤 시대에는 다른 시대보다도 변화의 속도뿐 만
아니라 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도 더 잘 인식할 수 있음이 사실이다. 음악에
있어서 위기의식은 우리 시대에만 독특한 것이 아니다. 14세기 말과 17세기
초엽에도 이와 유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우리 자신들의
위기는 이 초기의 위기들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한 점에서 서로 유사하며 또한
상이한가를 고찰함으로써 무엇인가를 배울 수가 있다. 그러나, 과거 유럽의
위기는, 그 변화의 과정이 사실상 우리를 단절의 상태로 인도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는 것을 믿을 만한 많은 이유들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도
짧은 기간안에 엄청나게 닦아오는 물리적 변화를 심리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던
우리의 무능력에 위기의 원인이 있었다.1)
만약 우리가 공공매체에서 정치가들이 주장하는 강조에 지나치게 주목하게 되면, 우리의 문화적 상황의 주된 실체는 인플레이션과 국제 수지등 경제적 문제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문제라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그것은 보다 광범위한 문제상황의 한 부분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학교와 우리의 보다 광범위한 문화, 그리고 사회를 밀접하게 포함하는 문제상황의 한 부분이며, 인종차별, 폭력, 강간, 절도의 문제 등을 염두에 두어야 만 하는 보다 광범위한 문제상황의 한 부분이다. ”위기“(crisis)라고 하는 단어는 어원적으로 ”판단“(judgement)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유래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해 볼만하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우리 시대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갖고 있는 완전히 구원하시는 은혜에 대한 증인이 되고자 한다면, 우리 시대의 위기에 대한 완전한 성경적 함의점이 무엇인가를 심사숙고해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삶 전체(the whole of life)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에 대한 통찰(insight)과, 지혜(wisdom), 그리고 이해(understanding)를 필요로 한다 (잠언 4: 1-27 참조).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가시와 엉겅퀴를 내지만, 영광스럽게 구속된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한 모퉁이를 돌보며 다스리는 과업을 감당함에 있어서 순종적인 봉사(an obedient service)를 하도록 인간을 부르신다.
라이스(Rice)와 웨버(Webber)의 ”슈퍼스타“(Superstar)에 나오는 사도의 노래(the
Apostle's song)를 혹시 기억하는가?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왜들 떠들석거리는지 말해주세요.“1)
비록 라이스(Rice)와 웨버(Webber)가 사도들을 통찰력이 부족한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긴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고 공언하는 우리들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너무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사회와 우리의 문화, 그리고 우리의 교육제도는 선지자의 목소리(a prophetic voice)가 없어서 죽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의 문화에 없어서는 안될 비판과 대안적 방향을 제시하는데 필요한 통찰과, 지혜, 및 이해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따라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효과적인 비판은 오히려 맑스주의자들로부터 나오고 있다. 비록 소수이긴 하지만, 이들은 해박한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실제적 문제들에 대해서 때로 적절한 지적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는 맑스주의자들의 비판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문제들을 보다 기술공학적인 변통의 수단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 처럼 자처하는 실용주의의 덮개아래 감출려고 한다. 크리스챤들 역시도 이러한 방식에 대체로 적응해 오고 있는 상황에서, 기독교의 복음은 일반적으로 소금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설탕과 같은 맛을 내고 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현재의 교육상황에 대해서 좀 정직할려고 하면, 현재의 학교제도를 위선적으로 비난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선지자적 소명을 감당하는데 너무도 구비되어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 교육의 영역에 있어서 우리들 자신의 빈곤함에 대한 증거이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교육의 현재상황을 우리의 문화와 사회 일반상황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여기에 연루되어있는 위기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의 조명하에서 보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우리 시대의 실용주의라는 지평은 우리의 시야를 우리들 주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즉각적이며 구체적인 실재에다 제한시킨다. 그 결과로서 우리는 콘크리트와 강철의 큰 덩어리가 우리의 시야를 제한시키기 때문에 도시(city)를 보는데 큰 어려움을 갖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문제의 원인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적으로 반응하지 못하는 인간의 실패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아니한다. 문제의 원인은 여기 저기에 좀 임시변통적으로 수선될 수 있는 기술적인 어떤 걸림(장해)때문이라고 본다.
헤리 블레마이어(Harry Blamires)는 인간정신의 이와같은 실용주의적 전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요컨데, 우리는 공적인 수준과 사적인 수준 모두에서, 관념들과 이상들과
이론들에 대하여 부정적 태도를 가지도록 적극적으로 교육해 왔다. 우리의
정치적 생활의 건강함과 시민적 불화와 동요가 없다는 사실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의 국가로서 존경을 받는다면, 그것은 주로 격렬한 논쟁을 야기시킬 수
있는 이론적인 문제들을 무시해 버리고서 눈앞에 있는 일을 순조롭게 계속해
나가는 영국적 실용주의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서 영국 철학은 단순한 철학
이다. 만약 여섯 명의 사람이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에 대하여 격렬한 의견의
불일치가 있으면, 최선의 할 일은 마침내 그들이 갈 수 있는 어딘가에 까지
(they can go somewhere) 쉽고 편하게 갈 수 있는 차를 만드는 일을 일단
시키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사람들은 이 목적지가 아니라 저 목적지로
가야할 분명한 이유를 제공할 수 있는 외적인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희망한다.
혹은 실제로 완성된 차가, 어떤 행운에 의해서, 편리하게도 이쪽 방향으로
가기 보다는 저쪽 방향으로 가도록 핸들장치에 어떤 예기치 못했던 기술적
편견을 나타내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해 결정하는
시간이 올 때까지 그 차를 만들고 있는 여섯 사람 사이에, 그 차를 앞으로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의 언급도 그들의 대화로부터 철저하게 배제
하자는 묵시적인 이해관계가 성립된다. 그들은 제조상의 기계학적인 문제와
여러가지 가솔린, 윤활유, 플러그, 그리고 건전지의 상대적인 장점에 관하여
신속하고도 요란하게 이야기 함으로써, 이 자동차를 만드는 이유에 대한 모든
좌절감을 보상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이러한 합의가 일단
받아들여지면 우리는 어디로 가고자 하는 것인가, 도데체 차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차 대신에 세탁기를 만들지 않는가와 같은 어색한
질문을 고집스럽게 제기하는 사람은 자기의 동료들로부터, 버릇이 없고,
바보같이 융통성이 없으며, 불합리한 공론가이며, 완전히 비실제적이며,
결국 따분한 사람이라고 간주되고 경멸을 받게 된다. 마침내, 그는 영국
정신으로부터 궁극적인 정죄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는 사람
들과 함께 지낼 수 없게 될 것이다.1)
이와 대조적으로, 이사야서 일장 전장을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모든 삶은 언약(covenant)의 맥락안에서 주 여호와의 얼굴앞에서 살아가는 삶이며, 여기서 인간은 풍요하고 다양한 창조세계의 모든 자원들의 대해 청지기직을 감당함에 있어서 주님께 책임을 지는 청지기(steward)이며 동산의 관리자(gardener)라는 원리적 사실과 실재, 그리고 어떤 담력감같은 것을 갖게 된다.
이사야서 1: 1-20을 읽어보라.
2. 기독교교육이란 무엇인가? (What Is Christian Education?)
전술한 내용의 조명하에서 우리는 논쟁중에 있는 기본적인 문제, 즉 기독교교육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한다.
기독교교육이란 우리가 주일학교나 성경공부시간, 또는 교회에서 얻는 어떤 것인가?
기독교교육이란 우리가 성경학교나 신학교에서 얻는 어떤 것인가? 그것은 신학이나 윤리학 처럼 어떤 학과목(disciplines)과 동일시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공인된 어떤 세속적인 과목에다 종교적이거나 도덕적인 가르침을 첨가함으로서 성취되는 것인가? 도데체, 기독교교육이란 무엇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 많은 혼란이 있다. 그래서 혹자는 기독교교육 그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1)
이와같은 문제에 대해서 기독교인들 사이에 존재하는 혼란은 교육에만 제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기독교인들이 대안적인 학교를 세워야하는지 또는 세우지 않아야 하는지와 같은 문제에 제한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것은 인생관-세계관(world and life view)의 기본적인 문제,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맥락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앞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방법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인생관-세계관(a world and life view)은 실재(reality)에 대한 과학적, 신학적, 또는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틀”(framework)이나 “체계”(system)가 아니다.1) 세계관은 또한 인간존재가 개별적으로 소유하는 어떤 것도 아니다. 세계관은 공동체적인 특성(a communal character)을 가지고 있으며 그 비젼(vision)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삶에 방향과 희망을 제공해 준다. 인생관-세계관은 이데올로기(ideology)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예컨데, 나치주의(Nazism)와 공산주의(Communism)같은 이데올로기들은 어떤 엘리트(elite)의 지도하에서 구체적인 사회적, 정치적 행동을 위한 청사진을 구현한다.
인생관-세계관(a world and life view)은 인간의 삶과 이 삶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세계의 총체에 관한 비젼(a vision concerning the totality of man's life and of the world in which he lives that life)이다. 세계관은 그 자체로서 신(the divine)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비젼, 우주(the cosmos)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비젼, 인간사회(human society)와의 관계에서 인간의 비젼, 그리고 인간자신(hismelf)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비젼을 구현한다. 세계관은 그 자체로서 인간이 그 속에서 그들의 삶을 살아가는 구체적 상황(the concrete conditions)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세계관은 요원하거나 추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이와같은 관점에서 볼 때, 비록 종교는 인생관-세계관에 영향을 주는 유일한 요인은 아니라 할 지라도, 많은 점에서 결정적인 요인이다. 종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표현한다. 인간은 타락이후로 지혜와 희망, 그리고 능력을 추구하면서 많은 거짓 신들에게 의지해 왔기 때문에, 인간들은 신(the divine)을 우주 자체안에서, 인간 자신안에서, 또는 완전히 우주 바깥에서 다양하게 추구한다. 한걸음 더 나아가, 신은 신성(divinity)에 참여하는 많은 위대한 사람들(Avatars)을 통해서 중재되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사회제도를 통하여 중재되거나(사제제도), 또는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인간의 마음에 중재되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신(the divine)은 인간의 삶의 공적이며 세속적인 문제(일)에 대해서 하등의 효과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세속주의, 불가지론).1) 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종교는 인간이 자신들의 일상생활사를 영위하며, 그들의 정치, 예술, 예배, 학문, 그리고 교육을 인도하는 이른바 인생과 세계에 대한 비젼의 기본적인 특성을 지도한다.
이제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사회와 문화를 인도하는 인생관-세계관을 분별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참으로 현대사회(세계)가 빠져있는 딜레마에 대한 통찰력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인생관-세계관이라는 뿌리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사회와 문화의 패턴을 지도하는데 있어서 능동적인 인생관-세계관은 기본적으로 세 가지가 있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이들 세 가지 인생관-세계관 사이에 강조점이나 해석에 있어서 많은 변형이 존재한다.
첫째는, 세속주의적 인생관-세계관(the secularist world-and-life view)이다. 이 세속주의적 인생관-세계관은 인간이 이 땅의 주인(the Lord)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적 행위로 부터 나오는 관점이다. 인간이 법과 가치, 과학, 예술,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은 실재내에서 의미를 주는 의미부여자(the meaning-
giver)이다. 우리는 대체로 이러한 인생관-세계관을 그 영적인 뿌리(spiritual roots)를 감추려고 시도하는 방법에서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을 취하는 이유는 객관성과 통일성의 외관적 모습을 보다 더 잘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지난 세기에 이성(Reason), 과학(Science), 자유(Liberty), 그리고 민주주의(Democracy)를 통하여 문명의 필연적인 발전을 경험했던 자유주의(Liberalism)에토스의 잔재인 실용주의의 유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체로 이러한 인생관-세계관을 영적으로 죽어있는 것으로 경험한다. 이러한 인생관-세계관은 우리의 사회와 문화의 과정을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으로 동기 지우고 인도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러한 인생관-세계관을 맑스주의자들의 선언에서 영적으로 능동적인 형태로서 경험한다. 맑스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분명히 창조세계의 주인(the Lord)이며, 지금 현재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갈등의 뿌리를 폐기한 이루 도래될 무계급의 유토피아에 도달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맑스주의(Marxism)와 자유주의(Liberalism)의 차이점은, 자유주의가 사회를 기본적인 내적 갈등이나 혁명이 없이 필연적인 진보의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았음에 반하여, 맑스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갈등의 수단에 의해서 만 사회가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세기의 쓰라린 현실은 자유주의(Liberalism)를 하나의 잘못된 희망이라고 보았으며, 따라서 미래의 희망과 열망에 공백감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단순히 보수주의적이며 실용주의적인 방법으로 자유주의의 추억을 견지하고 있다. 반면, 맑스주의자들은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 원리적으로 명료하게 말하고 있다.1)
둘째는, 최근에 재출현한 마술적인 인생관-세계관(the magical world and life view)이다. 소위 세로운 종교들, 점성술, 비학(the occult), 신비주의, 마약(drugs)등은 모두 마술적인 인생관-세계관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인생관-세계관은 이 세상을 의미로 가득찬 세상으로 보며, 또한 어느 의미에서는 영들(spirits)로서 살아있는 세상으로 본다. 이것은 인간이 주지주의적 방법이 아니라 신비적-실존적(a mystical-existential)인 방법으로 신(the divine)과 연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관-세계관은 그 자체 반문화운동(the Counter-Culture)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시대의 영지주의(the Gnosticism)와 직접적인 관계를 갖고 있다.
세째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견지하고 있는 적응적인 인생관-세계관(the accommo-
dational world-and-life view)이다. 이러한 인생관-세계관은 인생과 세계를 종교적
(또는 영적)(religious or spiritual)인 부분과 세속적(the secular)인 부분으로 나누는 구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자의 종교적인 영역에서만 찿아볼 수 있으며, 후자의 세속적인 영역에서는 대체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문화적이며 사회적인 패턴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 기독교인들은 사회와 문화가 우리에게 맡겨준 여러 가지 다양한 일들을 감당하는 방법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증인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일반적으로 주장하기는 하지만, 사회, 교육, 예술, 기술공학, 등등에 대하여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접근을 추구한다는 관점에서 인간의 다양한 일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직접적인 감시와 비판하에 두지 아니한다.
여기에 대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문화에서 기독교는 앞서 언급한 세속적인 인생관-세계관의 자유주의에 대체적으로 적응해온 기독교였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은 지금 독특한 선지자적 목소리가 없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아직까지도 이와 같은 적응적인 인생관-세계관의 어떤 삶의 형태를 살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시대의 긴박함을 인식하면서, 맑스주의와 적응하는 어떤 형태를 옹호하고 있다.1) 오늘날 많은 제도교회의 영적인 죽음을 인식하고 있는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카리스마적 부흥(the Charismatic Renewal)같은 데서 소위 “영적인” 생명(spiritual life)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부흥운동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해 성급한 판단은 보류하고, 이 운동의 대표자들에게서 특징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인생관-세계관은 이상에서 언급한 마술적인 인생관-세계관의 마술적 초자연주의(magic supernaturalism)와 혼합되어 있음을 때로 지적할 수도 있다. 이러한 특징은 “세속적인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영적인 것”을 강하게 강조하는데서 분명히 나타나며, 현 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능력을 보기 위하여 인간의 문화적 활동의 중요성을 격하시키려고 하는 기본적 시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나는 자신이 오순절운동(the Pentecostal Movement)에 반대하는 사람으로 이해되어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며, 또한 우리 시대의 제 문제들을 다룰려고 하는 “해방신학”의 시도들을 무시해 버리려고 하는 사람으로 이해되어지기를 원하지도 아니한다. 본인이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운동 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물려받고 있는 자유주의적 기독교전통체계와 복음주의적 기독교전통체계가 모두 “종합”(synthesis)의 정신으로 특색지워져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바로 자유주의적 기독교전통과 복음주의적 기독교전통이 모두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방법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사명을 인식하지 못하는 인생관-세계관으로부터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방식은 물론 다른 인생관-세계관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으나, 그러한 인생관-세계관을 종합하는 입장보다는 오히려 대항하는(against)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기독교교육을 신학이나 윤리학과 같은 과목에 연결될 수 있는 어떤 것과 동일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기독교교육을 어떤 특정한 기간에, 또는 성경학교나 신학교와 같은 특수한 대학에서만 제공될 수 있는 것으로 말하는 것은, 본인이 성경적으로 불완전하다고 판단하는 어떤 인생관-세계관을 표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고백적인 크리스챤들이 이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것이 실제상황이라고 할지라도, 크리스챤들이 이들 문제들에 대해서 단순한 의견의 불일치를 보이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의견의 불일치는 성격상의 차이에서 올 수도 있고, 상이한 문화적 또는 교회적 전통에서 기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어떤 특정 경우에 있어서 사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Lord)이시며, 그 분의 주 되심(Lordship)은 모든 권세(all authority)(마 28:18)에 대한 통치를 수반하는 것임을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에 신실하려고 하면, 우리는 모두 우리의 가장 심오한 확신(deepest convictions)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검증해 보려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어떠한 이상이라도 그것이 진정으로 기독교적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우리 세대에서 이러한 일을 기꺼이 감당하려고 할 때에 만 우리 각자의 전통에 얽매어진 속박의 굴레가 깨어지고, 성령의 예리한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적인 인생관-세계관의 발전을 지도하게 될 것이다. 이 성경적인 인생관-세계관은 우리의 문화와 사회의 삶을 위한 진정한 이상을 가질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모두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교육이라고 알고, 또 그렇게 경험하고 있는 전체에다 내용을 부여해 주는 기독교적인 인생관-세계관에 대한 고찰을 떠나서는 기독교 교육 (Christian Education)에 대해 논의할 수가 없다. 이제 이러한 문제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3. 창조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 (Man's Place In Creation)
태초에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하며, 만물을 존재케 하신 이 동일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계속적으로 섭리하시고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 (창 1:1-2:4; 요 1:1-4; 골 1:16-17). 나아가, 우상과 죄악의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운혜와 자비의 말씀을 보내셔서 상실되고 타락한 창조세계를 다시금 충만케 하셨다 (요 1:1-18; 골 1:15-20; 히 1:1-4).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리가 한 부분이 되어 있는 이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피조물들이다. 우리의 경배와 봉사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와의 언약적 관계의 맥락 안에서 (within the context of God's covenantal relation with His creation) 이루어지는 것이다. 비록 이 관계가 하나님 편에 의해서 제정된 것이긴 하지만, 그 구조는 인간편의 순종과 불순종을 포함하고 있는 양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 언약적 관계(covenantal relationship)의 맥락 안에서 하나님께 대한 봉사의 한 부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개현(unfolding)하고 돌보는 것이다. 인간은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 (창 1: 26). 그래서 아담(Adam)은 동산을 경작하고 돌보았으며,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반응으로 그는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경작하는 임무를 감당하였다.
나아가, 인간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 부모와 자녀의 관계, 통치자들과 국민의 관계,
장로들과 교회구성원들의 관계, 고용자들과 피고용자들의 관계 등, 인간사회의 맥락 안에서 행사될 수 있는 권위를 부여받았다 (엡 5:21-6:9; 롬 13:1-7). 그러나. 이러한 권위는 결코 절대화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권위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며(마 28:18),그리스도께서 이러한 권위가 행사되는 방법에 대해서 인간들로 하여금 책임을 지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 안에 주신 이러한 권위의 목적은 권위를 가진 사람과 권위아래 있는 사람 모두가 그 사회적 관계가 허용하는 맥락 안에서 직업을 감당함에 있어서도(vocationally) 하나님을 봉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권위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회적 관계의 맥락 안에서 자신들의 자질을 적절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솔선하여 제공하는 것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즉, 남편은 아내를 사랑(love)해야 하고, 부모는 그들의 자녀를 양육하고 훈련(nurture and discipline)해야 하며; 고용자들은 피고용자들에게 의미 있고 동시에 자아실현적인 (both meaningful and fulfilling)일을 제공해 주어서 보다 넓은 공동체에 유익(beneficial)을 주는 것은 물론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제 자원에 대한 책임적인 청지기직 (a responsible stewardship)을 구현할 수 있게 해야하며; 교회의 장로들은 교인들의 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일들을 분별하면서 말씀의 전파(the preaching of the word)에 수종들므로서 양떼들의 필요를 돌아보아야 한다; 국가는 공의와 공공의 법적 질서 ( a just and public legal order)를 유지함으로 보다 큰 국가의 생활을 확립하고 통치해야 한다.
권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과업에 대한 이상의 관점을 염두에 두고 볼때, 이러한 권위의 행사가 왜 그 권위 아래 있는 사람들을 고려하여 수행되어야 하는지 이유가 분명해진다. 권위아래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을 수행함에 있어서(vocationally) 하나님을 봉사해야 하는 사명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목전의 과업에 대한 그들의 통찰력과 그들의 인간적 요구에 대한 평가 등등이 그 과업이 수행되는 계속적인 사회적 관계 안에서 적절한 비중을 부여받아야 한다.
나아가. 인간의 경작하는 손길아래서, 사회자체가 발전을 향한 진정한 경향성을 나타내 보여준다. 이것은 성경자체가 명백하게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아브라함(Abraham)과, 이삭(Isaac), 야곱(Jacob)하에서 하나님 백성의 족장중심 공동사회 (the Patriarchal community)가 이스라엘이라는 영토 안에서 하나님 백성의 국가공동체 (a national community)로 발전해간 방법을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공동체는 제사장(Priesthood), 장로제도(Eldership) 또는 왕(King), 부모와 선지자들(Parents and Prophets)에 의한 권위의 분화(a differentiation of authority)로서 특징지워지고 있다. 족장들의 통치 하에서는 모든 권위가 족장들에게 집중되어지는 경향이 있었다. 지금은 비록 성경에서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는 많은 종류의 사회형태들 (예컨대, 대학교, 노동조합, 학교 등)이 존재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 모든 사회형태들을 역사적 분화과정의 계속적인 경로 안에서 발전해 오고 있는 창조 구조 속에 내재해 있는 제 가능성을 인간이 형성한 것(the human shaping)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회형태들은 그 자체로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책임을 지는 합법적 권위를 구현하고 있다(마 28:18, 골 1:16,20). 나아가, 이 사회형태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직접적으로 책임을 진다. 즉, 이 사회형태들이 교회나, 국가, 가정으로부터 유래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관점은 성경에 예시되어 있는 바와 같은 분화의 역동적인 패턴과 일치되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적(cultivation)과업을 통하여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에 어떤 흔적을 만든다. 따라서 이러한 문화적 과업이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서 주변적인 것이 아님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하나님을 조력하여 하나님의 모든 말씀에 기쁘게 순종하면서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개현(unfolding)하고 경작(cultivating)하는 일을 수행하여야 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경작해야 하는 창조세계를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는 그것을 물리적인 세계(physical creation)에만 제한시키지 않아야 한다. 인간이 경작해야 하는 창조세계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배 하에 두신 것 전체를 포괄하고 있다. 언어, 예술, 과학, 상업, 농업, 여가, 철학, 정치학 등 인간의 형성적인 활동 전체(the whole of human form-giving activity)가 창조세계의 부분(part of creation)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인식해야 할 중요한 것은 창조 세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는 의미부여자( a meaning-giver)의 위치가 아니라 의미 개현자( a meaning-unfolder)이며, 의미형성자( a meaning-shaper)라는 사실이다. 하나님 한 분만이 의미부여자 이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서 인간주의(humanism)에서 인간을 의미부여자의 위치에 두는 오만은 우상 숭배적 이라고 판단되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언약적인 존재라는 맥락 안에서 인간은 창조세계의 풍부한 잠재력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적인 방향으로 형성하고 개현하여야 한다. 그래서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 충만한 상태로 인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조력자임을 나타내 보여야 한다(롬 11: 36).
4. 두 갈래의 길 (Two Paths)
그러므로, 창조 세계 안에서 인간의 위치는 하나님의 집에서 청지기(a steward)의 위치이다. 비록 그것이 자신에게 속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은 그것을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순종적으로 돌보고 형성하는 책임을 부여받았다 (마 4: 4, 신 27-
31). 그러므로 언약의 맥락 안에서 인간은 그의 문화적 사명(cultivating task)의 모든 국면에 있어서 하나님께 책임을 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예컨대 구약성경에서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말하는 방법에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 1장과 아모스는 그 메세지에 있어서 윤리적이며 의식적인 차원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차원도 포함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위치해 있는 언약적 관계가 삶 전체의 부분(all-of-life proportions)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 방법으로, 롬 1:18-3:20 에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죄책을 확증함에 있어서 바울이 제기하는 논점의 주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총제적인 언약적 상황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반응에서 두 가지 길을 따를 수 있다.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에 순종하는 길과 불순종하는 길이다. 이러한 양자택일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선택에 따라 축복이나 저주의 보응을 받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아주 분명한 것은 “위기”(crisis)의 형태로서 심판(judgment)이란 바로 인간이 기독교인이거나 비 기독교인이거나 간에 그들의 문화(경작)활동(cultivating activity)을 불순종의 방향으로 수행하게 될 때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로 돌아와 용서를 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순종의 길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희망과 구원(deliverance)을 약속하신다 (신 30:1-5, 느 1:7-11).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담(Adam)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바울(Paul)이 새로운 아담(The New Adam)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롬 5:12-21)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갱신되었다. 이러한 언약의 갱신은 복음의 선포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포함하고 있다 (막1:15).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새롭게 되었으며, 인간은 회개하고 왕 되신 주님편을 들어 어두움의 세력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가하도록 격려해 주는 신앙을 갖도록 요청받고 있다. 따라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과, 동일한 사회 질서 내에서 상이한 사회형태간의 갈등이 하나님의 나라와 흑암의 나라간의 갈등이라는 무대 안에서 일어난다. 비록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이루어 질 것이지만, 우리 남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에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초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적인 삶을 살도록 요청 받고 있다는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분명히 현재적인 실재이다. 그럼으로,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9-20)고 하셨다.
5. 기독교 교육 (Christian Education)
이상에서 고찰한 바의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의 과제는 아동의 삶을 형성하는 일을 도와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동역자들(God's co-workers)이 되게 하여, 이들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과업을 보다 더 잘 감당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교육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1) 교육자(educator)와 피교육자(educatee) 간의 인격적 관계 (a personal
relationship)
2)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칙을 계시해 보여주는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구조(the
structure of God's creation)와 교육자 및 피교육자와의 관계
3) 교육자 및 피교육자가 공유하는 특정의 문화적-사회적 형태 (cultural and social
form)와 교육자 및 피교육자와의 관계
4)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양육하기 위해 노력하는 실제적인 교육과정내용
(a positive curriculum content)
그러나, 이러한 전체 문제에 대해서 어떤 결정적인 차이점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하다. 첫째는, 교육(education)과 학교교육(schooling)간의 차이이다. 교육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것(giving of guidance)이며, 그 내용은 이러한 인도의 구조와 본질, 그리고 목적에 대한 비젼에 의하여 결정된다. 우리는 가정에서의 자녀교육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으며, 간호교육, 책임성교육, 교통질서교육, 국가교육, 주일학교교육, 교회교육, 대학교육, 직업교육, 일반교육 등등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있다. 학교교육이란 우리가 학교라고 알고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실체(social entity)에 적절한 교육을 의미한다.
이상의 용어들은 모두 그 의미에 있어서 어떤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모두 어떤 공통적인 것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교육(education)이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 모든 용어들은 각각 창조구조(the structure of creation)안에서의 인간관계(a relationship of persons)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 관계에서 교육자 편에 요구되어지는 것은 달성해야만 하는 목적들과 관련된 교육자의 통찰력이다. 학교교육(schooling)은 결코 교육(education)과 동일시 될 수 없음은 너무도 분명하다. 학교에 속하지 않는 교육적 과업을 학교가 떠 맡으려고 하는 경향은 저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하나의 교육기관으로서 학교의 올바른 과업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야기시킨다. 이러한 문제는 물론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뒷 부분에 가서 좀 살펴보기로 하자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두 번째 중요한 차이는 교육(education)과 교화(indoctrination)간의 차이이다. 이 양자간의 차이를 고찰해 보는 것은 우리들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인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학교에 대한 아이디어를 교화(indoctrination)의 문제와 절망적으로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화(敎化)는 피교육자에 대한 교육자의 권위와, 교육과정의 내용을 구성하는 교리 및 신념의 내용을 절대화하는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교화는 인간에 대한 존중감의 결핍과 인간의 지식에 대한 우상적인 관점을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화는 일반적으로 교육의 힘을 정치적, 경제적, 또는 교회적 목적을 위해서 우상적으로 사용하는 일을 내포하고 있다. 교화는 일반적으로 이데올로기(ideology)와 제휴하여 이루어진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교화는 선전(propaganda)과 유사하다. 그러나, 교화가 학교교육의 조작과 관계되는데 반해서, 선전은 공공매체(the public media)의 조작과 관계된다.
세계관(a world and life view)과 이데올로기(ideology)를 구분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데올로기가 되고자 하는 모든 시도들을 단호히 거절해야만 한다. 이러한 거절은 기독교세계관이 삶의 제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형성하고 문화적 활동에 대한 지도(guidance)를 제공하려는 기독교세계관의 모든 시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적으로 반응하고자 하는 이른바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인간의 시도임을 인식할 때에 만 가능하다. 따라서, 기독교세계관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의 판단아래 서 있어야 하며, 비판에 대해 기꺼이 개방적임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the Pharisees)이 범한 중요한 잘못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점을 지적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너희 유전(tradition)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 6-7)라고 비난하셨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교육적 상황(the educational situation)을 다음과 같은 용어와 도표로 그려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의 섭리하에 있는
창조의 구조(the structure of cretion)--이 창조구조는
또한 하나님의 법칙(God's Law)의 규범적 요구를 촉진한다.
교육과정
교육자 피교육자
이러한 상황에서, 교육과정은 교육자와 피교육자 모두가 속해 있는 문화적 전통에 의해서 발전되어 온 문화와 사회형태의 제 특징을 구현해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육과정을 오류의 가능성이 있으며, 동시에 세계관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세계관은 항상 교육과정의 발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교육자는 피교육자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동료인간 (a fellow image-bearer) 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하며, 어느 정도의 책임성(responsibility)과 신실성(integrity)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로 존중해야 한다. 교육자는 피교육자를 지도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a co-worker with God)일 뿐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교육자는 그들의 과업이 구조적인 창조세계(a structured creation)의 맥락 안에서 수행되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 구조적인 창조세계는 모든 곳에서 그 법칙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에 종속되어 있다. 따라서 피교육자에 대한 교육자의 합법적인 권위는 제한되어 있다. 나아가 교육자가 피교육자에게 전수해 줄려고 노력하는 지식의 총체를 구성하고 있는 실제적인 교육과정의 내용(the positive curriculum content)은,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구조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려는 이른바 오류의 가능성이 있는 시도라는 사실을 인정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창조세계의 구조는 하나님의 품성과 의지를 계시해 보여주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기능을 발휘한다.1) 부모로서, 교사로서, 목사로서 그들의 권위를 행사함에 있어서 교육자는 피교육자와의 관계에 있어서 죄를 범할 수도 있다. 피교육자는 교육자의 권위를 존중하여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실현과정에 항상 현존해 있는 오류(fallibility)와 죄성(sinfulness)을 동시에 인식하여야 한다.
이러한 고찰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형성된 교육철학의 어떤 딜레마를 인식할 수가 있다. 스튜어트 화울러(Stuart Fowler)가 지적한 바와 같이 서구의 교육을 지배해 온 두 가지의 주요 흐름(경향)이 있다. 하나는 교육과정중심교육(curriculum-centred education)이고 다른 하나는, 보다 최근의 경향으로서 아동중심교육(child-centred education)이다. 교육과정중심교육은 교육과정을 고정된 지식체(a fixed body of knowledge)로 보면서 그것을 절대화하며, 피교육자가 실재(reality)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여 사회(세계)에서 효율적인 삶을 살아가는 능력에 있어서 핵심적인 열쇠로 생각한다. 아동중심교육은 피교육자의 자유를 절대화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피교육자는 비록 많은 선택과 기회를 만나긴 하지만, 피교육자가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책임(responsibility)과 책무성(accountability) 을 인정하지 아니한다. 이것은 피교육자들이 그들 스스로의 발견활동과 탐구활동을 수행해 감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패턴을 만들어 나갈 때 피교육자의 자유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위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피교육자와 교육자 사이에 존재하는 인격적 관계 안에 있는 교육자의 권위에 대한 멸시감을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6. 결 론
기독교교육은 윤리학이나 신학과 같은 과목과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교육을 세속적인 교육과정(secular curriculum)에 추가하는 어떤 것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기독교교육의 문제는 기독교학교를 설립하는 문제에로 환원될 수도 없는 것이다. 먼저, 학교교육(schooling)이란 교육의 한 부분일 뿐이다. 둘째로, 기독교교육은 기독교적인 인생관-세계관으로부터, 우리의 문화에 주는 어떤 진정한 형성적인 공헌이 있을 때에 비로소 가능하다. 교육자가 부모이건, 교사이건, 또는 목사이건 간에, 교육자(the educator)의 권위를 절대화하거나 아니면 교육과정(the curriculum)(교파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는 교육과정이던지 아니면 과학주의적인 편견을 가진 교육과정이던지 간에 )을 절대화 하거나, 또 아니면 피교육자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상호 상반된 정신으로 교육적 과업에 종사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비록 교육과정(curriculum)을 절대화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거기에 기독교적인 인생관-세계관의 특색을 갖도록 해야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른바 고도로 발달된 문화의 맥락 안에서 이러한 과업은 이와 같은 특질을 소유하고 있는 학문적이며 이론적인 통찰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본 논문에서 필자가 제시한 어떤 방향을 따라 교육에 대한 기독교적인 접근방법을 발전시켜 나가는 일에 진지한 마음을 갖는다고 하면, 그 때는 보다 넓은 기독교공동체(Christian Community)에 큰 책임이 지워지게 된다. 실제로 이 기독교공동체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그리스도의 총체적 권위를 공통으로 인정하는 가운데 그들의 구체적인 공헌을 이루어 갈 때에만 이 과업을 의미있는 방법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독교교육의 발전은 단지 “기독교적”(Christian)이라는 이름만 갖고 있는 학교를 설립함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앞에 놓여있는 문제는 이와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 앞에 제기되어 있는 문제는 기독교적인 인생관-세계관의 관점에서부터 우리의 문화에 대해 형성적인 영향력을 행사해야 하는 소명에 우리가 반응하는 정도의 문제이다. 기독교학교라는 이름에 걸맞는 진정한 기독교학교는 이러한 우리의 반응이 일어나는 정도에 따라서만 가능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