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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귀의(二歸依) 하는가, 한글삼귀의와 빠알리 예불의식
한글 삼귀의문 문제와 관련하여 글을 두 차례 올렸다. 글을 올리고 난 다음 안 사실이지만 조계종 율장연구회의 토론 기사가 불교관련 신문사이트에 실렸다. 글을 올리면서 “왜 한글삼귀의문은 고치지 않는 것일까?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일까?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 하였는데, 바로 그 날 율장연구회 토론이 열렸다는 기사를 접하였다. 기가 막히는 우연이다. 그런 토론회가 개최될 줄 꿈에도 몰랐는데 글을 올린 날 스스로 문제점에 대하여 토론이 있었다 하니 일말의 기대를 갖게 만든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불교포커스에 실린 율장연구회의 토론에 대한 기사를 유심히 읽어 보았다. ‘혹시나’ 해서 한글삼귀의문에서 승보에 대한 개념을 바꾸는 내용이 있는지 알아 보기 위해서이었다. 그러나 ‘역시나’ 이었다. 아무리 뒤져 보아도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내용을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는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다.
스님들로만 구성된제2회 계율토론회에서 스님들이 승보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구체적으로 삼귀의문의 내용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은 접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중앙승가대 교수 경성스님은 삼보를 “불교를 구성하는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조건인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의지하고 수순하면서 부처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수행하는 승단이야말로 세간과 천상의 보배에 비할 수 없는 수승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간의 보물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율장연구회, ‘삼귀의와 오계’ 토론회, 불교포커스 2013-05-01)
경성스님은 삼귀의 대상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더구나 “세간과 천상의 보배에 비할 수 없는 수승한 존재”라는 말까지 인용하였는데, 이는 라따나경에 나오는 “이 세상과 내세의 그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Yaṃ kiñci vittaṃ idha vā huraṃ vā Saggesu vā yaṃ ratanaṃ paṇītaṃ, Sn2.1)”라는 구절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빠알리니까야에 따른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문승가(savakasangha)와 현전승가(sammukhisangha)
다음으로 덕문스님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덕문스님은 이어 “삼귀의계 가운데 귀의불과 귀의법에 대해서는 별로 이의가 없지만, 승보에 귀의하는 일에서만큼은 조금은 주저하게 되는 현실을 감안해서 볼 때 그 문제점과 해결책을 찾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라면서 “승보란 현인과 성인의 위(位)에 오른 분과, 범부승이라 하더라도 4인 이상의 대중이 결계를 하고 동일설계 동일갈마, 수행생활을 하는 이는 청정승가이고, 청정승가는 승보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밝혔다.
(율장연구회, ‘삼귀의와 오계’ 토론회, 불교포커스 2013-05-01)
영축율학승가대학원장인 덕문스님은 ‘삼귀의계의 역사 및 역할’에서 승보의 개념에 대하여 명확하게 밝혔다. 승보란 사향사과의 성스런 성자의 공동체와 4인 이상의 스님이 계를 지켜가며 사는 청정승가공동체를 승보로 규정하였다. 전자의 경우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성스런 승가, 즉 ‘성문승가(savakasangha)’를 말하고, 후자의 경우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된 사방승가의 지역승가공동체인 ‘현전승가(sammukhisangha)’를 말한다. 모두 결계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그래서 자자와 포살이 이루어진다. 이런 승가가 승보라는 뜻이다.
이렇게 율학연구소 세미나에서 승보에 대하여 승가임을 명확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렇다고 삼귀의문에서 스님들 대신 승가를 집어 넣어야 된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단지 문제점만 제기한 것이다.
한글삼귀의문에 대한 거부감
율사스님들이 지적한 문제점이 개선 되려면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리라 본다. 이는 스님들의 기득권과 관계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동안 지속되어 온 관행을 하루 아침에 허물고 스스로 개혁한다는 것은 보수화된 한국불교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한국불교에서 삼귀의문에 스님들을 승보로 고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스로 개혁하지 않고 단지 스님들의 이익을 위해서인것처럼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 때 우려 되는 현실이 있다.
덕문스님은 “삼귀의계 가운데 귀의불과 귀의법에 대해서는 별로 이의가 없지만, 승보에 귀의하는 일에서만큼은 조금은 주저하게 되는 현실”이라 말하였고, 대회스님은 “삼귀의 대신 불과 법에만 귀의하는 신행단체가 있을 만큼 승가에 대한 믿음이 적어지고 있는 실정이지만”이라고 표현 하였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스님들을 승보로 등재함으로 인하여 한글삼귀의문에 대한 거부가 예상외로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최근 스님들의 범계행위 등으로 인하여 재가신도들의 실망이 삼귀의에서 스님들에 대한 귀의를 거부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가르침, 단 두 개를 귀의처로 삼는 이귀의(二歸依)만 하면 안되는 것일까?
이귀의(二歸依)의 경전적 근거
가장 고층경전이라 불리우는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Te mayaṃ vicarissāma gāmā
gāmaṃ nagā nagaṃ,
Namassamānā sambuddhaṃ
dhammassa ca sudhammatanti.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과
잘 설해진 뛰어난 가르침에 예경하면서
저희들은 마을에서 마을로,
산에서 산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Hemavatasutta-헤마와따경, 숫따니빠따 Sn1.9, 전재성님역)
헤마와따경은 설산야차 헤마와따와 부처님과 대화이다. 부처님의 설법이 끝나자 설산야차헤마와따는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에 귀의하는 장면이다. 상가에 대한 귀의가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성자들의 승단이 구성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부처님과 가르침에 이귀의(二歸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헤마와따경이 매우 고층경전이기 떄문이다. 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숫따니빠따가 왜 고층경전일까?
숫따니빠따가 고층경전인 이유
전재성박사의 법구경 해제에 따르면 “숫따니빠따가 정각을 이루신 직후에 아직 승단이 구성되기 전의 은둔자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면”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은둔자적 성격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숫따니빠따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숫따니빠따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원시적인 상태에 있는 불교공동체에 대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
2) 두타행이나 바라밀과 같은 후대의 불교적인 교리가 없고 열반에 대해서도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구별이 없다.
3) 후대의 불교의 신들이 이름 가운데 등장하지 않는 고대의 불분명한 신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4) 탑묘라든가 유골에 대한 언급이 없다.
5) 아타르바 베다(Atharva Veda)의 학습이 선호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6) 바라문의 희생제는 흔한 일이었고, 소들도 그러한 희생제에서 도살된 것을 알 수 있다.
7) 숫타니파타의 시들은 후대의 다른 경전들, 소송경(Kuddakapatha),법구경(Dhammapada), 자설경(Udana),여시어경(Itivuttaka), 장로게(Theragatha) 등 뿐만 아니라 범문 불교경전에도 분명히 등장한다.
8) 고층적인 언어와 문체가 사용되고 있다.
9) 고층적인 시형들을 채택하고 있다.
(숫따니빠따 해제, 전재성박사)
숫따니빠따의 아홉가지 특징을 보면 매우 소박하고 꾸밈없는 순수한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승단이 본격적으로 구성되기 이전의 행적에 대한 게송도 있는데, 그것이 헤마와따 경에서 볼 수 있는 이귀의에 대한 내용이다.
믿을만한 스승이 없을 때
이귀의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경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이라도 있습니까?”
[장자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도 없습니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들이여,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맛지마니까야 아빤나까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믿을만한 스승이 없다면 가르침에 의존하라고 하였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살아 있는 부처님은 열반하였고,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빠알리니까야로 전승되어 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성자의 공동체가 부재하다면, 불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경전으로 전승되어온 가르침 뿐이다. 어쩌면 가르침 일귀의(一歸依)만 남아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고층으로 분류되는 숫따니빠따에서 이귀의 대한 구절이 한 번 보이지만 대부분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되어 있다.
Abhikkantaṃ bho gotama abhīkkantaṃ bho gotama seyyathāpi bho gotama nikkujjitaṃ vā ukkujjeyya paṭicchannaṃ vā vivareyya mūḷhassa vā maggaṃ ācikkheyya andhakāre vā telapajjātaṃ dhāreyya cakkhumanto rūpāni dakkhintīti, evamevaṃ bhotā gotamena anekapariyāyena dhammo pakāsito. Esāhaṃ bhavantaṃ gotamaṃ saraṇaṃ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ṅghañca. Upāsakaṃ maṃ bhavaṃ gotamā dharetu ajjatagge pāṇupetaṃ saraṇaṃ gatanti.
[바라드와자]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오늘부터 목숨 받쳐 귀의하오니 고따마께서는 재가의 신자로서 받아 주십시오”
(와살라경-Vasala sutta-천한사람의 경, 숫따니빠따 Sn1.7,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아홉가문 중의 하나이었던 바라드와자(bhāradvāja)가문의 바라문 바라드와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귀의 하는 장면이다.
가이드, 의사, 스승으로서 부처님
바라드와자는 경의 말미에 고따마(gotama)와 가르침(dhamma)과 비구상가(bhikkhusaṅgha)에 귀의 한다고 하였다. 분명히 상가에 귀의 한다고 하였다. 비구들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비구들의 공동체인 상가를 말한다.
경에서 “부처님에 대하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모두 스승으로서의 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초월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안내자로 보는 것이다. 여행할 때 가이드와 같은 역할이다. 그리고 병을 처방하는 의사와도 같다. 그런 부처님은 스승으로서의 부처님이다.
따라서 빠알리경전을 접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이드로서, 의사로서, 스승으로서 부처님도 접하기 때문에 비록 부처님이 지금 실재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의지처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귀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공동체가 존재한다면 하나 더 추가 할 수 있다. 그래서 삼귀의가 되는 것이다.
이보(二寶)만 인정하는 한글삼귀의문
한글삼귀의문에서 스님을 승보로 간주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상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불교인들이 보았을 때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상가를 귀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스님들을 귀의 대상으로 삼는 다는 것은 한국불교에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승가가 없는 불교를 불교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한국불교에는 부처님과 가르침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부처님과 가르침에만 귀의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한글삼귀의문을 부처님, 가르침, 승가로 고치지 않는 한 한국불교에는 이보만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종단에서 스스로 승가를 삼보 중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자들이 이보에만 귀의해도 아무런 할말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님들을 승가와 같은 의미라고 우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일본의 하나마츠리(불탄절)행사에서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 불교는 재가승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불교와 똑 같은 것이다. 계율이 무너진 일본불교에서는 더 이상 승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승가는 없어도 재가승가는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스스로 ‘재가승’가라 한다. 그런 재가승가에 스님들에게 귀의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예를 일본의 삼귀의문에서 보았다.
공익재단법인 전일본불교회의 삼귀의문 의례 동영상이 있다. 지난 2011년 올렸던 글 ‘승(僧)은 스님들이 아니라 상가(Sangha), 보디찌따의 삼귀의(Tisarana)’에 실려 있는 것이다.
일본의 부처님오신날 행사
花まつり(花御堂灌仏法要)a Buddhist memorial service_NO2
2009년 유튜브 동영상에 올려져 전일본불교회 주관으로 일본에서의 부처님오신날 행사에 대한 것이다. 전일본불교회(全日本仏教会)는 홈페이의 설명에 따르면 59개의 종파, 36개의 도도부현(都道府県)불교회, 10개의 불교단체, 합계 105단체가 가맹된 일본불교를 대표하는 유일의 연합체라 한다.
그런데 동영상을 보면 놀라운 장면이 있다. 각종종파들이 각종 승복을 입고 참석한 불탄절 행사에서 빠알리삼귀의를 낭송하고 있는 것이다. 동영상을 보면 분명히 “붓당사라낭 갓차미, 담망사라낭 갓차미, 상강사라낭 갓차미”라고 하고 있다. 단 한차례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우리와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빠알리삼귀의를 낭송하는 일본불교
메이지시대 폐불훼석 정책에 따라 대처와 육식이 허용되고, 승려는 직업에 지나지 않고 더구나 주지직은 세습되는 것이 일본불교의 현실이다. 승가의 계율이 국가권력의 힘에 무너진 것이다. 그것도 폐불훼석정책이 실시된지 30년 만에 일본불교에서는 승가가 사라졌다. 남았다면 재가승가라 불리는 승가일 뿐이다.
그런 일본불교에서 양력 4월 8일 치루어지는 하나마츠리라 불리우는 불탄절 행사에서 놀랍게도 귀의의 대상이 상가로 되어 있다. 그것도 빠알리삼귀로 낭송하는 것이다. 일본불교가 비록 재가승가이긴 하지만 빠알리어로 ‘상강사라낭 갓차미’하는 것은 그나마 양심은 남아 있는 것 같다. 재가승가이면서 우리와 같이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양심 없는 행위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불교도연맹(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일본불교에서 불탄절 행사에서 빠알어 삼귀의 띠사라나(tisarana)를 낭송하는 것이 궁금하다. 그 근거로서 전일본불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日本からは全日本仏教会(JBF)が、日本仏教界を代表して加盟し、最高顧問・副会長・執行役員・人道支援委員長・人道支援基金運営委員長を務めています。”라는 문구에 주목한다. “일본에서는 전일본불교회가 일본불교계를 대표하여 가맹하여, 최고고문-부회장-집행위원-인도지원위원장-인도지원기금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일본불교는 ‘세계불교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불교도연맹이란 무엇일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세계불교도연맹(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계불교도우의회(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은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 불교 단체이다. 1950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27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되었다.
본부는 태국에 있으며, 역대 회장은 모두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배출되는 등 소승불교가 가장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지만, 모든 종파가 WFB에서 활동중이다.
미국,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 등 35개국에 지부가 설립되어 있다. 대한민국에는 1963년에 지부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세계불교도우의회, 위키백과)
세계불교도연맹(WFB)는 전세계적으로 가장영향력있는 불교단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세계불교도우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2012년 여수에서 26차 총회를 가진 바 있다.
WFB가 비록 테라와다 위주국가로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세계불교를 대표한다. 그런데 전일본불교회는 WFB에 가입되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또 전일본불교회는 홈페이지에 따르면 2년 마다 치루어지는 WFB행사를 세 번 개최한 바 있다고 하였다. 2회(1952년), 12회(1978년), 24회(2008년)이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일본불교에서는 삼귀의를 빠알리어로 하고 있고, 스님들이 아닌 승가에 귀의함을 천명하고 있다.
한국은 WFB에 가입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아직까지 스님들 귀의를 천명하고 있는 것일까. 전세계불교도연맹(WFB) 창설된지 60년이 넘었건만 이에 따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승이라서 인정하기 싫어서일까. WFB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서일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기관은 무엇일까. 검색하면 한국불교종단협의회라고 나온다. 종단협의회가 WFB에 가입하였는지에 대하여 검색하였으나 알 수 없다. 홈페이지에서도 확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전일본불교회에서는 가맹국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바로 이런 차이가 빠알리삼귀의를 낭송하고 상가를 승보로 간주 하는 것 아닐까?
전세계적으로 상가를 승보로 보고 있다. 불교를 신봉하는 전 세계의 불자들은 상가가 승보라고 여기는 것은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승가를 승보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스님들을 승보라고 부르고 있다. 오로지 우리나라와 중국불교를 신봉하는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사실을 전세계 불자들이 눈치챈다면 우리나라 불교를 어떻게 볼까. 더구나 승가가 사라지고 재가승가만 남아 있는 일본 불교에서 조차 “상강사라낭 갓차미”라 하는데 우리나라는 언제까지나 “거룩하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해야 하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한국 절에 낭낭히 울려 퍼진 빠알리삼귀의
그러나 일말의 가능성은 엿보인다. 우리나라 부처님오신날 어느 절의 행사에서 빠알리 삼귀의가 낭낭히 퍼졌기 때문이다. 지난 2009년 올린 ‘스리랑카 불자공동체의 예불의식을 보니, 유튜브로 본 ‘2008 코리안 웨삭’’에서 예불동영상을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2008년 부처님오신날 스리랑카 불자공동체에서 부천 석왕사에서 법회한 동영상이다. 이 동영상을 보면 테라와다 불교 예불의식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 같다.
한국내 스리랑카불자공동체의 예불의식(2008년,부처님오신날, 석왕사)
스리랑카 비구의 낭낭하고 독특한 음조로 낭송된 빠알리 예불의식을 정리하였다.
1. 삼귀의
붇당 사라낭 가차미
(Buddham saranam gacchami)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망 사라낭 가차미
(Dhammam saranam gacchami)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강 사라낭 가차미
(Sangham saranam gacchami)
상가에 귀의합니다.
두띠얌삐 붇당 사라낭 가차미
(Dutiyampi buddham saranam gacchami)
두 번째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두띠얌삐 담망 사라낭 가차미
(Dutiyampi dhammam saranam gacchami)
두 번째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두띠얌삐 상강 사라낭 가차미
(Dutiyampi sangham saranam gacchami)
두 번째로 상가에 귀의합니다.
따띠얌삐 붇당 사라낭 가차미
(Tatiyampi buddham saranam gacchami)
세 번째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따띠얌삐 담망 사라낭 가차미
(Tatiyampi dhammam saranam gacchami)
세 번째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따띠얌삐 상강 사라낭 가차미
(Tatiyampi sangham saranam gacchami)
세 번째로 상가에 귀의합니다.
2. 오계
빠나디빠따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Panatipat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아딘나다나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Adinnad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까메수 밋차짜라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Kamesu micchacar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삿된 음행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무사와다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Musavad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거짓말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수라매라야 맛자빠마다타나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Surameraya-majja-pamadatth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먹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3. 부처님께 예경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4. 삼보공덕문
1) 붇다공덕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 삼붇도
Itipiso bhagava araham samma sambuddho
윚자짜라나 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Vijjacarana sampanno sugato lokavidu
아누따로뿌리사 담마사라티
Anuttaropurisa dammasarati
샅타 대와 마누싸낭, 붇도 바가와.
Satta deva manussanam buddho bhagava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
2) 담마공덕
쓰왁카또 바가와또 담모
Soakkhato bhagavato dhammo
산띠티꼬 아깔리꼬 에히빠시꼬
sandithiko akaliko ehipassiko
오빠나이꼬 빶짜땅
opaneyiko paccattam
웨디땁보 웬뉴히띠
veditabbo vinnuhiti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3) 상가공덕
수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suppatipanno bhagavato savakasamgho,
우쭈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ujuppatipanno bhagavato savakasamgho,
냐야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nayappatipanno bhagavato savakasamgho,
사미찌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samicippatipanno bhagavato savakasamgho,
야디낭 짣따리 뿌리사유가니 앝타 뿌리사뿍갈라,
yadidam cattari purisayugani attha purisapuggala,
애사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esa bhagavato savakasamgho,
아후네이요, 빠후네이요, 닥키네이요, 안잘리까라니요,
ahuneyyo, pahuneyyo, dakkhineyyo, anjalikaraniyo,
아눋따랑 뿐냑켇땅 로까싸-띠.
anuttaram punnakkhettam lokassati.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한다. 이와 같은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 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식순을 보면 삼귀의, 오계준수, 부처님예경, 삼보공덕찬탄 순으로 되어 있다. 삼귀의를 보면 붇다, 담마, 상가에 대하여 세 번 낭송한다. 우리말에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듯이 ‘두띠얌삐(Dutiyampi, 두번째로), 따띠얌삐(Tatiyampi, 세번째로)하면서 세 번, 총 아홉번 귀의를 다짐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한번씩 독송하는 것으로 그치는 한글삼귀의문과 크게 대조된다.
다음으로 우리나라 법회의식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오계준수낭독이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는 반드시 낭송한다고 한다. 동영상에서도 띠사라나(삼귀의)가 끝나자 바로 오계를 낭송하고 있다.
이어서 부처님에 대한 예경문인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다사’를 삼세번 낭송한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 불교의식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삼보공덕을 찬탄하는 낭송을 갖는다.
삼보공덕은 왜 붇다. 담마, 상가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라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빠알리어로 길게 낭송한다.
비록 빠알리어로 낭송되는 것이긴 하지만 스리랑카 비구의 독특한 음조와 낭낭한 독송은 매우 인상적이다. 한문예불문으로 독송하는 우리나라 예불의식과 다른 분위기이다.
빠알리어도 자주 들으면 생소하지 않다. 마치 한문예불문을 자주 들으면 생소하지 않고 익숙하듯이 빠알리 예불문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빠알리어는 부처님이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언어라고 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스리랑카 비구의 낭낭한 빠알리예불의식이 익숙해질 날도 있을 것이다.
왜 이귀의(二歸依) 하는가
율사스님들은 한국불교 불자들의 ‘이귀의(二歸依)’ 현상에 대하여 우려 하고 있다. 부처님과 가르침에만 귀의하고 스님들에게 귀의 하지 않으려는 현상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스님들이, 종단에서 자초한 결과라 보여진다. 상가(승가)가 승보임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을 승보로 올려 놓았으니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불자들은 그러려니 하며 따를 수 있지만 사실을 아는 불자들은 더 이상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을 승보로 만든 것은 스님들의 이기주의의 발로라 본다. 스님들을 승보로 하였을 때 여러가지 이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기주의 발로는 다름 아닌 ‘스님불교’로 보기 때문이다. 스님과 불자들을 수직적 상하관계, 종속관계로 보기 때문에 한국불교는 스님의 불교, 스님에 의한 불교, 스님을 위한 불교로 되어 버렸다. 사부대중의 두 축인 재가불자가 끼여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전형이 한글삼귀의문에서 보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는 문구이다.
오로지 중국불교를 신봉하는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한글삼귀의문 형태이다.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읽히고 있고, 테라와다 불교가 소개 되어 있는 현실에서 한문경전에 의지하여 중국불교만을 따른다면 시대를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들만의 리그에 만족하다 보면 점차 이귀의가 대세가 될 것이다. 전세계불교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는 일본에서 조차 빠알리삼귀의를 낭송하는 시대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일본에서 승가는 사라졌지만 정신만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삼귀의문에서처럼 승가를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승가가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상황속에서 불자들이 부처님과 가르침에만 의지하는 이귀의 현상 바람이 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출처: 블로그 진흙속의연꽃
201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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