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씨는 고대 주나라 태전의 후예라고 전하며, 일설에는 발해국왕 대조영의 10세손 대광현이 발해가 망하자 수만명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로 망명하니 태조가 그를 예우하고 태씨의 성을 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관은 문헌에 23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모두가 동원분파이므로 중국 속말(송화강) 출신의 태중상을 도시조로 하고 있다. 태씨는 고대 주나라 태전(太顚)의 후예라고 전하며
본관은 협계(浹溪)를 대종(大宗)으로 하고
그 밖에 영순(永順), 밀양(密陽), 남원(南原), 통천(通川) 등이 전해진다.
협계태씨는 주(周)나라 태전(太顚)의 후예라고도 하고
기록상에는 발해국왕 대조영(大祚榮)의 후예라고도 한다.
발해의 왕성(王姓)이라면 대씨(大氏)이므로
발해가 거란에게 멸망당하던 무렵 고려에 귀화하여
태씨로 변성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발해의 태자 대광현(大光顯)이
수만의 유민을 이끌고 고려에 투화(投化)
태조로부터 왕계(王繼)로 이름을 하사받은 일이 있을 뿐이다.
역사상 대표적 인물은 조선시대 두남(斗南)으로
그는 중종 때 춘추관 편수관을 지냈다.
또 구련(九連)은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이순신의 장검 두 자루를 만든 사람이다.
1930년도 국세조사 때에는 총 1,043가구가 있었는데
그 과반수인 568가구가 함경도에 거주하고 있었고
특히 478가구가 집중되어 있던 점으로 미루어
북방에서 이주해 온 씨족의 후예임을 짐작할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통천태씨 중국투화인(通川太氏中國投化人)’이라
나와 있는 점으로도 발해 유민의 후예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또 태씨(太氏)의 본관은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의
문헌에 23본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8개의 본관 ( 김천, 남원, 순천, 양주, 영순, 인천, 합천, 협계 ) 이
있으며 그런데 본관이 이렇게 많은이유는 자기거주지을 본관으로 쓴경우가 많기때문에 정확히 본은 3개본이있다 1985년 인구 및 주택 센서스에서는
1,795가구에 7,40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산 대씨(大山 大氏)
대씨는 본래 발해를 세운 대조영의 성씨이다. 발해가 거란에 의해 망하자 그의 후손 대광현이 926년에 고려에 투화하여 왕씨를 사서받았다는 것은 알려지고 있으나 오늘날에 전하는 대산 대씨와 발대 대씨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상고할 수 없다. 1930년 국세조사 때 밝혀진 것을 보면 전남 영광에 10여 가구등 12가구가 있는 것으로 안다.
밀양 대씨(密陽 大氏)
밀양(密陽)은 경남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 법흥왕때 추화군이 되었다가
후에 밀성군으로 개칭되었다. 고려때에는 밀주로 하였고, 그후 여러 변천을거쳐 공양왕때
밀양으로 개칭되었다.
대씨(大氏)는 중국 동래에서 계출된 성씨로서 연해주와 한반도 동북에 걸쳐 있었던 발해국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문헌에 의하면 당나라 무장인 중상(仲象)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동모산에서 발해국을 세우고 228년간 왕권을 이어 오다가 요나라에게 멸망하자
발해왕국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고려에 망명한 것이 우리나라 대씨(大氏)의 시초가된다고 한다. 그러나 대씨에서 태씨로 변성했기때문에 맞지않다
더정확한것은 발해의 마지막 왕인 애왕의후손 흥료국대연림 아들 대탁(大鐸)이 발해국이 망하자 자손들을 거느리고
밀양에 토착하여 밀양대씨의 연원을 이룬 것으로 전한것이 가장 신빙성이있다.
대씨의 본관은 밀양(密陽)을 비롯하여 대산(大山)이 있는것으로 전해지나 선계와 연원에
대해서는 미상이다.
밀양대씨(密陽大氏)는 1세조인 이부상서 탁(鐸)의 아들 덕세(德歲)가 조선조에서 밀양군에
봉해졌으며 그의아들 문기(文記)는 한성판윤을 역임하여 가맥을 이었고,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중택(重澤)은 호조판서를 역임한 국언(國彦)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밀양대씨(密陽大氏)는 남한에 총 115가구,
499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전남 영광군 백수면 일원
전북 이리시 신룡동
전남 영광군 낙월면 상낙월리
협계 태씨(陜溪 太氏)
협계(陜溪)는 황해도 신계군(新溪郡)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수곡성이라 하다가
통일 신라 때인 758년(경덕왕17)에 단계현(檀溪縣)으로 고쳤다.
그러다가 940년(고려 태조23)에 협계로 고쳐져
곡주에 예속되기는 하였으나
1396년(태조5) 신은현(新恩縣)에 통합하기까지 그 지명이 지속되었다.
감무(監務)를 두었던 신은현(新恩縣)과 협계현(陜溪縣)의 지명을
한 자씩 따서 신계군(新溪郡)이 되었다.
그런데 협계태씨족보에 의하면 협계는 옥천의 옛지명이라구 하기도 한다 아무튼 앞으로 풀어야할숙제이다
협계태씨(陜溪太氏)의 시조(始祖)는
고구려 속말(속末) 출신인 태중상(太仲象)이다.
협계태씨족보(陜溪太氏族譜)에 의하면 중상(仲象)은
천문(天文), 지리(地理)와 병법(兵法)에 능통(能通)했으며
서기 696년(당나라 중종 사성13, 신하 효소왕5) 고구려의 유민(遺民)을
이끌고 요수(遼水)를 건너 태백산(太白山) 동북(東北)으로
본거(本據)를 옮겨 말갈(靺鞨)과 통합(統合)하여 대진국(震國)을 세웠다.
중상(仲象)의 18세손 집성(集成)이 고려 고종(高宗) 때
어사대부(御史大夫)로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1231년(고종18) 몽고군(蒙古軍)이 내침하자
서북면 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이를 격파하는데
크게 공을 세워 협계군(陜溪君)에 봉해지고 사공(司空)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집성(集成)을 중시조(中始祖:일세조)로 하고
본관(本貫)을 협계(陜溪)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묘소는 충북 옥천군 청성면에 위치해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집성(集成)의 아들 정취(貞就)가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事)를 지냈으며
손자(孫子) 영재(永財)는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올랐고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지내고 청성군(靑城君)에 봉해진
경후(慶後)와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조에서는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지낸 경후(慶後)의
아들 응진(應辰)이 정종(定宗) 때 담양 도호사(潭陽都護使)를 거쳐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고, 그의 손자(孫子) 이(異)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
함평현감(咸平縣監), 제주목사(濟州牧師) 등을 역임하여
당대에 이름을 떨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낸 맹인(孟仁)과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한 맹의(孟義),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른
우림(雨霖) 등이 유명했으며 일민(逸民)은 승사랑(承仕郞)을
지내고 숙종(肅宗) 때 통훈대부(通訓大夫),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추증되어 용양위 부사과(龍 衛副司果)를 지낸 희(熙)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한 윤민(潤民)
부총관(副摠管)을 지낸 홍묵(弘默)
상주(相周), 학두(學斗),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역임한 석항(碩恒)
등과 함께 명문 가문을 빛냈고
효자(孝子) 원풍(元豊)과 학자(學者) 언중(彦中)이 선조(先祖)의
위업을 받들어 명망높은 가문을 더욱 유명하게 하였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협계 태씨(陜溪太氏)는 남한에 총 258가구
1,124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시조 태중상은 천문, 지리와 병법에 능통하였으며 696년(신라 효소왕 5년)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요수를 건너 태백산 동쪽에 말갈과 통합하여 진국(후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그 후 10세손인 태광현이 발해가 망한 뒤 934년(고려 태조 14년) 고려로 망명하자 태조가 그를 예우하고 태씨 성을 하사하였다.
그 후 10세손 태집성이 고려 고종 때 대장군으로 서북병마사가 되어 몽고군의 침입을 격퇴한 공으로 협계군에 봉해지고 사공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협계로 하였다. 가장중요한것은 옛날 광개토대왕비을 보면 광개토태왕비라구 나왔을것이다 그것은 대 보다 더크다란의미로 태씨로 쓴것같다 당시 고려왕족은 왕씨였으므로 하나의 자존심대결이었다고 한다
(1985년 경제기획원조사 인구수 : 1,124명)
집성촌 : 전북 남원군 주천면 신촌리
영순 태씨(永順 太氏)
시조 태금룡(일명 태금취)은 발해국 진왕의 후손으로 고려 고종 때 금교에서 몽고군을 격퇴하여 대장군에 오르고 죽은 후에 영순(현 상주)군에 추봉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협계 태씨에서 분적하고 본관을 영순으로 하였다. 영순(永順)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상주(尙州)의 북부(北部)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본래 상주(尙州)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인데
고려 때 영순(永順)으로 고쳐 현(縣)으로 승격하고
상주(尙州)에 속하게 하였다.
지금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문경군(聞慶郡) 영순면(永順面)이다.
영순 태씨(永順太氏)는 태씨(太氏)의 도시조(都始祖) 태중상(太仲象)의
18세손으로 상장군(上將軍)을 지냈고
병마원수(兵馬元帥)로 영천군(永川君)에 봉해진 태웅성(太雄成)의
아들 태금취(太金就:일명 금룡)을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협계태씨족보(陜溪太氏族譜)에 의하면 금취는 고려 고종(高宗) 때
금교(金郊)에서 몽고군(蒙古軍)을 격퇴하는데
공을 세워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영순(永順:경북 상주의 옛 지명) 군(君)에 봉해져
상주군(尙州郡) 북면(北面) 임하촌(林下村)에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협계 태씨(浹溪太氏)에서 분적(分籍)하여
관향(貫鄕)을 영순(永順)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역사상 가문을 빛낸 인물을 살펴보면
효정(孝貞)의 아들 두남(斗南)이 뛰어났다.
그는 일찍이 김진양(金震陽)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워
1513년(중종8)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
같은 해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으며
1536년(중종31) 종부시정이 되어 춘추관 편수관(春秋館編修官)을 겸했으나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사서
성주 목사(星 州牧使)로 좌천되었다.
특히 그는 시문(詩文)에 뛰어나 저서(著書)로 쇄언(蔘言)을 남겼으며
옥천서원(玉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이외 언룡(偃龍)과 순민(舜民)이 진사(進士)를 지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영순 태씨(永順太氏)는 남한에 총 902가구
3,63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경제기획원조사 인구수 : 3,638명)
집성촌 : 경남 상주군 일원
남원 태씨(南原 太氏)
남원(南原)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고룡군(古龍郡)인데 후에 대방군(帶方郡)으로 고쳤고, 신라 신문왕(神文王) 때 소경(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 남원소경(南原小京)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태조조(太祖朝)에 남원부로 삼았다가 다시 대방군으로 하였으며 후에 남원군으로 고치고 1360년(공민왕9) 부(府)로 승격, 1739년(영조15) 일신현(一新縣)이 되었으며 다시 부로 복구, 1895년(고종32) 남원군이 되었다.
남원 태씨(南原太氏)는 조선 단종조(端宗朝)에 진사(進士)에 재직중 화(禍)를 입고 1454년(단종2)
함경도 길주(咸鏡道吉州)로 유배된 태맹례(太孟禮:협계군 집성의 9세손)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협계 태씨(陜溪太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맹례(孟禮)의 아들 지(知)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를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로 공조 참의(工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손자(孫子) 원희(元熙)는 훈련원
판관(訓練院判官)을 역임하여 훈도(訓導)를 지낸 인국(仁國:만호 원령의 아들)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人口調査) 결과에 의하면 남원 태씨(南原太氏)는 남한에 총 371가구, 1,51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