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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장사상이 근대의 학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오랫동안 잊혀져 왔던 《보성론》의 산스크리트본이 존스톤에 의해 1950년 출판된 데에서 비롯된다. 산스크리트본 《보성론》의 출판 이후 우이 하쿠쥬의 일본어역,2) 나카무라 쥬류의 산스크리트와 한역의 대조본3), 타카사키 지키도의 영역4) 및 일본어역5) 등이 출판되는 등 《보성론》을 중심으로 하는 여래장사상 연구가 활기를 띠게 되었다. 여래장사상의 체계적 논서인 《보성론》은 우리말로도 번역된 바 있다.6) 그러나 이것은 한역에만 의존하고 있으며 전혀 주를 달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연구자료로 충분히 활용되기 어렵다는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최근 《보성론》에 관한 연구가 발표된 바는 있지만,7) 그것은 대개 《보성론》에 집중되어 있을 따름으로 《보성론》 이후 여래장사상이 후기 인도불교사에서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는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여래장사상이 인도 대승불교에서 하나의 학파로서 독립된 지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우리가 여래장학파라 하지 않고 여래장사상으로 명명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점이 곧 여래장사상이 대승불교 전체에 대한 이해에 긴요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약 우리가 여래장을 소박하게 '우리에게 갖추어져 있는 성불의 가능성'으로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이 경우 여래장은 성불을 궁극목표로 하는 대승불교의 원초적 이상을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여래장사상은 대승불교 <인간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불의 당위성을 대전제로 하면서 한편으로 유식학이 인간의 미혹된 현존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여래장사상은 여래와 다르지 않은 인간의 내재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로부터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다. 또한 유식학이 인간의 앎과 의지 그리고 성불에의 과정을 밝히고 있다면, 여래장사상은 깊은 종교체험에서 드러나는 부처님의 자비 그리고 한없는 인간에의 신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래장사상은 동북아시아 불교에서, 때로는 여래장이라는 명칭 그대로, 때로는 불성이라는 이름으로 불교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래장 또는 불성은 소박하게는 핍박받는 민중의 고통을 위무하기도 하였지만 근본적으로는 깊은 종교적 체험을 촉발시키고 인간의 궁극적 자유와 해방을 일깨우는 가르침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며, 나아가서는 법상종의 일분무성(一分無性)과 열반종의 중생유성(衆生有性) 논쟁, 천태의 성구(性具)와 화엄의 성기(性起) 문제, 그리고 즉심즉불(卽心卽佛)을 강조하는 선종에서 목석(木石) 또한 불성을 지니고 있는가를 둘러싼 논쟁 등을 촉발시키는 기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여래장사상이 5세기 초에 성립된 《보성론》에서 그 사상체계가 확립된 이후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여래장사상이 불교의 전통을 준수하기 보다는 우파니샤드 또는 베단타철학과 습합된 것이라고 하거나8) 심지어는 '여래장사상은 불교가 아니다.'라는 극단적인 주장9)이 일부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기본적으로 여래장사상을 법신(法身)의 일원론 또는 계(界, dha-tu)의 일원론으로 평가하는 데에 따른 것이다. 우파니샤드 및 베단타철학이 브라흐만 일원론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승인된 사항이다. 그런데 이는 여래장사상을 법신 또는 계의 일원론으로 해석함으로써 베단타와 여래장의 사상적 구조에 아무런 차이점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파니샤드베단타가 환원주의적 일원론 또는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에 근거하고 있음에 반하여 여래장사상은 비환원적 불이론 또는 실존적 존재론의 형태를 취하고 있음을 명확히 이해하여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여 우파니샤드의 브라흐만은 만물이 그것으로부터 생성되고 그것에 의해 유지되며 그것으로 귀환하는 바의 것이다. 말하자면 브라흐만 이외의 제2의 것은 없다는 것이다. 베단타는 이러한 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여 세계는 환영(maya)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으로써 우파니샤드베단타에는 실존이 자리잡을 여지가 없게 되는 것이다. 이에 반해 여래장사상은 실존을 배제하지 않는다. 비록 세계가 그리고 중생이 염오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염오되어 있는 사실을 현실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보성론》에 인용되어 있는 《승만경》의 산스크리트문은 여래장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즉 "여래의 법신이 번뇌의 외피(klesakosa)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여래장(tathagatagarbha)이라 한다."10) 여기에서 번뇌를 외피(外皮)라고 한 것은 번뇌가 법신과 구별되며, 나아가서는 번뇌가 법신에 비해 부차적 존재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번뇌가 비실재로 간주됨으로써 그 존재가 전적으로 부정되는 것은 아님을 주목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여야 한다. 즉 번뇌는 비록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하고 있음은 엄연한 현실이며, 나아가 여래장은 번뇌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위 문장의 한역은 이러한 점을 더욱 적극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klesakosa(번뇌의 외피)가 번뇌장으로 번역되고 있음이 바로 그것이다. 산스크리트에 있어 kosa와 garbha는 전혀 다른 낱말이다.11) 그러나 한역자는 이것을 모두 장(藏)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번뇌와 여래장 또는 번뇌와 법신 사이에 위계적 차이를 두는 것이 여래장사상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라는 한역자의 적극적인 해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보성론》에서 여래장의 '존재'가 언급될 때 항상 astitva가 사용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12) '있음'으로 번역될 수 있는 이 말은 `있다'를 의미하는 동사원형 as의 삼인칭 단수 현재(asti)에 추상명사어미(tva)를 결합시킨 것으로, 영어의 is-ness에 상응한다. 그러면 《보성론》은 왜 전통적으로 존재의 의미로 사용되어온 어휘 sat를 사용하지 않고 astitva를 사용하고 있는가? sat는 동사 as의 현재분사로서 영어의 being에 해당된다. 이 경우 sat는 영어의 being과 같이 두 가지의 의미를 갖는 것으로 분석될 수 있다. 첫째, 그것은 '있다'라는 동사의 현재분사라는 점에서 어떤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현실(act of existence)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둘째, 하나의 명사로서 사용될 때에는 '있는 것' 즉 존재 그 자체(being itself)의 의미를 갖는다.13)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은 이 두 가지 의미 가운데 전적으로 후자의 의미로 사용한다. 이 경우 sat는 결국 현실과는 분리되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본질 또는 실체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여래장사상에서 여래장은 번뇌와 분리되어 있는 본질실체가 아니다. 《보성론》이 존재의 의미로서 astitva를 사용하는 것은 이와 같이 여래장이 현실과 괴리된 본질이 아님을 명백히 하기 위한 것이다. 여래장은 번뇌와 무관계한 실재가 아니다. 여래장은 번뇌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는 것이다. 여래장이 연기의 사상과 관련을 맺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점에서이다. 여래장사상이 소위 불이론(不二論, advayavada)으로 불릴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이다. 우리는 이제까지의 논의에서 여래장사상에 대한 오해가 주로 여래장사상을 환원주의적 일원론 또는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으로 규정하는 데에서 비롯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래장사상은 여래장의 형이상학적 우위를 인정한다. 그러나 여래장사상은 어디까지나 여래장과 번뇌의 불가분리를 확인하며, 그럼으로써 중생을 본질과 실존의 복합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러한 오해가 제기되는 나름대로의 이유는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분석적 사유가 갖는 문제점을 간단히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사물에 대한 앎을 추구할 때 우선 그것을 부분들로 분해하는 데에 익숙하다. 말하자면 어떤 사물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때 그것을 작은 조각으로 쪼개고 그렇게 쪼개어진 조각을 다른 조각과 분리시킨 채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많은 부분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무시하게 된다. 그러나 한 사물의 의미는 언제나 단순한 부분들의 총합 이상이다. 본질주의적 형이상학은 이와 같이 사물을 분할하고 분할된 부분들을 대립시키고 나아가서는 합리적인 사유법칙에 따라 부분들의 양립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지속과 변화라는 한 사물의 두 측면 가운데 변화를 폐기하고 불변성영원성을 이 세계 바깥에 정립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많은 대승경전 특히 《승만경》, 《보성론》 등이 강조하고 있는 불가사의(不可思議, acintya)의 의미를 재음미하여야 할 것이다. 이들 경론에서 불가사의는 단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의미한다. 즉 중생은 여래가 될 가능태로서의 여래장이지만, 동시에 번뇌와 분리되지 않은 존재 즉 번뇌장이라는 점이 합리적 사유로는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이다.14) 이러한 언명은 결국 깨달음과 미혹이 공존하며, 여래가 동시에 중생이라는 역설적 사실을 지칭한다. 그러면 이러한 선언의 참다운 의미는 무엇인가? 다시 말해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명제의 진리성은 어떻게 입증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과 앎과 실천의 문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합리적 사유를 뛰어넘는 지식은 일차적으로 믿음을 통해 수용된다. 그리고 그 믿음의 내용은 우리의 실존적 반성과의 대립, 그리고 그 대립의 극복을 통해 '주체적 앎'으로 전환된다. 만약 믿음의 내용이 단지 우리를 강요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독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만약 우리가 이를 반성없이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굴종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단순한 수동적 인식의 태도가 아니다. 믿음은 진리에의 적극적인 참여이며, 진리의 실천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여래장사상은 '모든 사람은 부처님'임을 선언한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면 우리는 결코 부처님일 수 없다. `나는 미혹된 중생'일 따름인 것이다.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부처님이라는 부처님의 말씀과 나는 중생이라는 나의 실존적 반성은 예리하게 대립된다. 그런데 이 대립은 결코 어느 한쪽으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 부처님으로 환원될 때 그것은 자기기만 또는 과대망상이며, 중생으로 환원될 때 그것은 자기소외 또는 절망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제 대립은 우리가 어느 한쪽에 안주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대립은 끊임없는 긴장이며, 역동적인 활동이다. 그리고 이 활동은 종교적 실천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 종교적 실천 또는 수행이란 바로 '나'의 행위이다. '모든 사람은…'이라는 보편명제가 '나는…'이라는 특칭명제로 전환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수행의 주체적 측면을 통해서이다. 그렇게 하여 '모든 사람은 부처님'이라는 일반적 진리가 수행을 통해 비로소 `나는 부처님'이라는 주체적 진리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중생이 번뇌장이면서 동시에 여래장이라는 불가사의, 합리적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이 믿음과 실천을 통해 궁극적인 진실로 입증되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하여 확인된 앎의 내용은 단순한 객관적 지식이 아니라 나의 전 인격의 참여를 통해 완성된 지식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자성청정심 객진번뇌염(自性淸淨心 客塵煩惱染)'이라는 여래장사상의 근본명제를 하나의 위대한 종교적 진리로 간주한다. 그리고 이 명제는 겸허한 믿음과 역동적인 실천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주체적인 앎을 통해 그 참다운 의미가 드러나는 것임을 확인한다. 이상의 여러 측면을 염두에 둘 때 여래장사상은 단순히 이성적 합리성 차원에서 논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여래장사상은 불교 일반이 그러하듯 합리성을 초월하는 깊은 종교적 진리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 연구 또한 종교적 수행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만 여래장의 존재에 관한 의미가 충분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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