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5-12번지
쉴새없이 울어대던 그 격정의 하오들
풀내음, 두엄내음 맡고 자란 세월을 먹으며
문턱 베고 선 잠든
사랑채의 센머리 촌부는
잠결에도 바지가랑이 치켜 올리나보다
울타리 지나 지붕모퉁이에
몸뚱이 늘어뜨린 작은애기 엉덩짝만한
호박덩이는
작아버린 수확의 안타까움만으로
인자한 거친 손의 주인을 기다리고
황소 먹어버린 고구마 순을 캐는
아낙의 마음만은
이랑보다 더 큰 알맹이이고 싶어라
685의 12번지
그 수확의 계절
고통의 결실과 안타까움과 풍만함으로
얼룩진 이마 땀 씻어내는
포근한 마음의 고향이고 싶다.
(1982. 12. 10 )
그 곳은...................
면내에서는 제법 너른 들판, 동네가운데골짜기 여름에도 차가울 정도로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도랑을 따라 올라가면 동네 마지막 집들, 그 가운데 맨 안쪽 집이었다.
토담에 짚으로 지붕을 덮은 그 곳에는 마당가엔 감나무가 있고, 본채 방2개, 부엌하나 아래채는 방하나와 소 마구간이 있었다. 어쩌다 방안엔 노래기, 지네가 나타나기도 했고 집 주변에는 구렁이들이 나타나곤 했었다. 참 언젠가 저녁참에 웬 산토끼가 마당에 나타나 힙합댄스를 추곤 사라진 일이 있다. 집 뒤편에는 소여물과 겨울 땔나무가 쌓여있고 작은 연못엔 언제나 그랬듯이 개구리 몇 마리가 놀고 있다. 옆집 엄나무 옆엔 감나무가 있고, 아랫집 살구나무 위편엔 서로 경쟁하듯 우리 집 감나무가 키 자랑을 하려고 여기저기로 가지를 뻗어가고 앞집과 옆 대밭의 대나무들은 겨울의 짧은 햇빛마저 미리 감추려 애쓰곤 했다.
가을 녘 볏 집을 져다 쌓아둔 마당 한편 위 새로 쌓은 장독대 담장 아래엔 칸나의 빨간 꽃이 동네 사람들의 눈요기 감이 되었고, 연이어 핀 코스모스도 빈곤한 농촌 한 가을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참 중간년도에 심은 장독대 옆 물앵두나무도 우리들의 간식거리를 제공하였고, 그 위편의 남새밭에는 여름철엔 강냉이와 오이가 자랐으며, 가을 녘엔 작은 채소들이 우리 식탁의 입맛을 돋우었다. 그리고 소 마구와 돼지우리에서도 두엄냄새 풍기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도 이 집의 구성원임을 뽐내고 있었다.
아이는 집 옆 대밭의 대나무를 잘라 내고 그 곳을 남새밭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 곳 공터엔 오이와 배추가 자라고 있었고, 뒤편 밭으로 통하는 대밭옆길을 따라 조금을 가면 다소 척박한 밭에서 콩, 수수와 고구마를 가꾸다보면 한 여름 긴 햇살에 이랑의 풀을 맬 때면 아낙의 얼굴은 온통 땀방울로 범벅이 된다. 아이가 나무지게를 짊어지고 뒷산을 오를 때나 비오는 날 우산을 들고 소고삐 잡고 집을 나설 때면 주머니엔 생고구마 한 뿌리도 든든한 간식거리였고, 감나무에서 떨어진 덜 익은 감도 아이의 입을 즐겁게 해주었다.
씨암닭이 먹이를 찾아 밑을 기웃거리는 대나무 평상 위에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밥상이 따로 차려지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가족들에겐 긴 여름의 보리쌀 바구니와 겨울철 고구마 삶은 것들이 맛나게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곤 했다. 혹시라도 동네잔치를 위해 잡은 돼지고기며 5일마다 서는 장날에 갈치를 사오는 날이거나 마을 앞 강가나 개울에서 잡은 물고기라도 상위에 오를라치면 더 이상의 진수성찬이 없는 듯했다. 어느 해 사라호 태풍이 심하게 불던 시절 그 멀건 수제비국도, 가을 첫 추수로 지은 그 맛나던 햇 쌀밥도 우리에겐 언제나 부족하지만 만족해야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일상의 생활일 뿐이었다.
여름날 정자나무 그늘에 앉아 파랗게 자라는 들판을 바라보고, 어둔 밤에는 여자들이 물방앗간 도랑에서 남자들 눈피해 몸을 물에 담그던 그러한 시절도 이제는 한낱 옛날의 먼 추억거리로 사라지고, 이제는 집집마다 텔레비젼과 컴퓨터가 그나마 귀한 동네 아이들의 친구로 자리 잡고 들녘은 온통 비닐하우스로 뒤덮여져 사람들은 그들과 완전히 동화된 듯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다.
바쁜 세상사에 잊혀져버리고 살아온 세월을 이제 서야 돌아보니 그 옛날은 고통 삶에 찌든 시절의 아픈 추억이 아니라, 따스한 어머니의 품속에서 그려보는 동화처럼 느껴질 뿐 다시 되돌리고 싶은 충동마저 허락할 수 없는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자리매김 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