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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 정신 스크랩 중국무협사-발자취를 좇아서 2
entropy 추천 0 조회 54 06.04.06 05: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중국무협사 - 발자취를 좇아서 (2)  

  


최초의 무사, 최초의 협객은 누구인가? (춘추편)


1.

역사에 등장하는 최초의 무사는 누굴까? 그걸 보려면 먼저 역사시대가 언제부터

인지 알아야겠다.


중국에서 역사시대로 인정하는 것은 상(商)나라부터다. 흔히 은(殷)나라로 알려

져 있는데, 원래는 상 땅에서 개국했으나 중도에 은 땅으로 천도를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기도 하는 것이다. 중국의 왕조 이름은 개국한 땅의 이름을 붙이는

관행이 있어 벌어진 일이다.

전편에 대충 이야기한 바, 삼황 오제의 시대가 끝나고 정통은 치수(治水)의 공을

세운 우(禹)임금에게 넘어갔다. 우임금이 세운 나라가 하(夏)나라인데 이것까지

는 아직 신화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930년부터 그 이듬해에 걸쳐서 대규모의 유적이 산동성(山東城) 역산현(歷山縣)

용산진(龍山鎭)에서 발견되었다. 이 유적들은 신석기 시대의 만기(晩期) 문화를

보여주는데 용산문화라고 불려지며 시기상 하나라와 합치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

나라의 유적이라고 확정할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하나라까지는 아직 신화시대

로 보는 것이다.


1932년부터 34년까지는 하남성(河南城) 안양(安陽)의 소둔(小屯)에서 은허(殷墟)

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여기에서는 능묘(陵墓)와 왕묘(王墓)등 왕조의 유적임이

분명한 것들이 발견되었고, 대량의 갑골편(甲骨片)이 출토되었는데, 거기 기록된

것이 사마천의 사기(史記) 은본기(殷本記)의 기록과 일치한다는 것이 확인되었

다. 그래서 은나라부터 역사상 실존한 왕조로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유물이니 유적이니 하는 이야기를 한참하고 있으니 지루하다. 골자만 간단히 말

하면 중국의 역사는 하나라 은나라 주(周)나라에 이어 춘추전국시대로 넘어가는

데 은나라부터 역사시대로 인정하고, 최초의 무사로 짐작되는 사람은 춘추전국시

대에 등장한다는 거다.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고 바로 그 문제의 기록으로 넘어

가자.


중국사를 다룬 어떤 책도 이 시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몇 종의 책을 검토해본

느낌으로는 중국계 일본인이고 지금 우리나라에도 꽤나 유명한 진순신이 쓴 <중

국의 역사(한길사 간)>이 가장 재미있고, 도움이 되는 듯하다. 3권짜리로 축약된

것도 있지만 16권짜리로 나온 게 나은 것 같다.

유물, 유적에 관한 이야기로는 역시 진순신이 쓴 <중국 고적 발굴기(대원사 간)>

이 재미있다.


2.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의 유왕이 견융에게 살해당한 기원전 771년부터 시작해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라고 칭한 기원전 221년 사이의 550년간을 가리킨

다.

원래는 유왕의 아들 평왕이 낙양으로 피신한 것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서주(西

周), 이후를 동주(東周)라고 부르고 이 동주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한 것인데,

중국의 이야기 책으로 <동주열국지(東周列國志)>가 이 시대의 이야기를 다뤄 널

리 인기를 끌기도 했다.


이 시대에는 주나라 왕의 권위가 형편없이 추락하여 없는 것과 다름 없이 되고

각지의 제후가 패권을 다투었다. 이것을 춘추시대와 전국시대로 나누기도 하는데

그것은 공자가 쓴 역사서인 <춘추(春秋)>가 다루는 시대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전국시대는 <전국책(戰國策)>이라는 역사서에서 이름이 기원했다.


그러나 사실 공자의 <춘추>라는 것은 모국인 노(魯)나라의 연대기로 은공(隱公)

원년(기원전 722)부터 애공(哀公) 14년(기원전 481)년까지만 다루고 있다. 그 전

의 48년간도 춘추시대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끝도 애매하다.


전국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은 아무래도 오와 월이 싸워 오나라가 멸망한 기원

전 471년이나 아니면 그보다도 68년 후인 기원전 403년으로 보는 게 옳을 것 같

다고 진순신은 말한다. 이 해에 전국칠웅이라 불리는 일곱 나라가 확정되었기 때

문이다. 사마광의 <자치통감>은 이 때를 기준으로 춘추와 전국을 나누고 있다.


서주가 망하고 춘추전국시대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앞에서도 언급한 <동주열국

지>에서 재미있게 이야기로 풀어나가고 있는데, 은나라의 멸망을 배경으로 <봉신

연의>가 있고, 거기 구천현녀(九天玄女)가 주왕을 미혹시키기 위해 보낸 미녀 달

기(?己)가 있는 것처럼 여기에는 포사(褒?)가 등장한다. 만화로 쉽게 풀어놓은

고우영의 <십팔사략>을 보시라.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도 이 시기의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3.

골자만 추려 말하자면 ‘최초의 협객, 무사가 누군가’라는 어찌보면 우문(愚問)

으로 시작한 무협사의 시작에 대해서는 데에는 검(劍)과 사(士), 그리고 협(俠)

이라는 세 글자를 중심으로 정리할 수 있다.

검이 상징하는 상무(尙武)의 습속과 정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 부여한

초월적 의미, 사(士)라는 전문가 집단의 등장과 그들이 상층계급을 형성함으로써

갖추게 된 독특한 윤리, 그리고 검과 사가 결합되어 진화된 형태로 등장하는 협,

이 협의 이상과 좌절을 말하는 것이다.


4.

간혹 역사소설 같은 것을 읽다보면 삼군(三軍)의 장수니 삼군을 통수하는 이라는

표현을 보게된다. 이때 삼군이 무엇일까? 바로 주나라의 군사 편제를 말하는 것

이다.

주나라에서는 전차병, 사병, 보병의 세 가지로 군사들을 분류하고 이 셋을 삼군

이라 불렀다. 고대전에서 전차의 효용이란 대단한 것이었다. 말을 모는 자가 있

고, 양옆으로 창을 든 자가 있어서 전차가 지나가는 길에 적병을 친다. 그들 모

두는 허리에 검을 차고 창으로 상대할 수 없을 정도의 지근거리에 접근하는 적을

찌른다.



당시에는 근접전 무기로는 검밖에 없었다. 구조가 단순하여 만들기 쉽기 때문이

기도 하고, 이 시대의 제련기술로는 베기 무기인 도(刀)를 실용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제련기술이 발달한 것은 춘추시대에 가장 유명한 격전을 벌인 오나라와 월나라에

서부터다. 오나라에서 간장(干將), 월나라에서 구야자(歐冶子)가 탄생한 것도 무

리는 아니다. 이 두 나라에서부터 철제무기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양국에서도 철제무기는 드문 것이었다. 필자가 년전에 월왕 구천이 썼

다는 검을 본 적이 있는데, 길이는 60cm가 안되고 몸체에는 ‘월왕구천자작용검

’이라고 명문이 새겨져 있는 청동검이었다.


청동으로 무기를 만들면 그 길이에 제한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보다 길면 만드

는 과정에서 부러지는 것이 이 시대의 기술수준이었다. 하물며 전쟁에 나가 적의

무기에 부딪히면 어떻게 될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후기로 오게되면 제련기술과 전술의 발달에 따라 검은 점차 다른 무기로 대체되

게 된다. 그러나 검이 상징하는 상무정신은 오히려 더해서 당시의 귀족과 평민이

모두 좋아하는 무기가 되었다.


등(騰)나라의 군주는 “짐은 지난날 학문을 익히지 않고 말 달리기와 활쏘기, 칼

쓰기만을 좋아했다”고 말했고, 영(營)나라의 군주는 “성격이 포악하고 검을 좋

아하여 새로 만든 검은 사람의 목을 베어 예리함을 시험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혜문왕도 검을 몹시 사랑하여 3천여 명이나 되는 검사(劍

士)들이 그의 주위에 모여들었다고 하여 <장자, 설검(設劍)>편에까지 다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역사상 완전한 기록이 남아있는 최초의 검객을 소개하자. 중국의 설화에

오랫동안 전해졌으며 김용도 그 전설을 토대로 소설화한 적이 있는 월녀(越女)

다.


<오월춘추>에 의하면 월녀는 월나라의 깊은 산속에 사는 소녀인데(그래서 이름이

월녀) 격검을 매우 사랑하여 혼자 익혔다. 월나라의 재상 범여는 그녀를 군중(軍

中)의 무사(武師)로 삼고 왕에게 데려가는 도중 노장 검객 원공(袁公)과 겨루게

하였는데, 월녀의 검술이 매우 민첩하고  변화무쌍하였기 때문에 원공은 당하지

못하고 나무 뒤에 숨어버렸다.

월녀는 대단한 검술의 소유자일뿐 아니라 이론까지 정립하고 있어서 월왕 구천에

게 검의 도리를 강론하였다.

“무릇 손으로 겨루는 모든 것은 안으로는 정신이 살아있으며, 겉으로는 편안한

모습을 나타내게 됩니다. 언뜻 보기에는 평범한 아녀자이나 싸움에 임하여는 호

랑이까지 떨게 합니다. 몸을 날려 기운을 기다린 후 정신과 함께 나아갑니다”라

고 하였다.


이 시기에 유명한 검객의 기록은 단편적이긴 하지만 몇 개가 더 전해내려온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즉시 대응할 수 있고, 느끼기만 하면 바로 움직일 수 있으

며, 변화에 형상이 없고, 그림자 같기도 하고 소리 같기도 한” 검객 노석공(魯

石公)의 이야기가 <설원(設苑), 지무(指武)>편에, “일곱 개의 검을 동시에 사용

하며 수차례 뛰어 오르는” 송나라의 예인 난자(蘭子)가 <열자(列子), 설부(設

符)>편에, “조나라에서 검론(劍論) 전술로 이름을 떨친” 사마씨(司馬氏)가 <사

기>에 나오는 것이다.


월녀에서 이들 검객에 이르기까지 출현한 것은 전문 무예를 갖춘 무사집단이 존

재함을, 혹은 탄생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그것이 사(士)의 출현으로 현실화된

다.


5.

사(士)라고 하면 현대에는 유학자, 선비라는 의미로 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학

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 사는 무사집단에 가까웠다. 또한 이 사라는 집단은

후세에 의미가 고정된 것처럼 학문을 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이거나 혹은 조

선시대 사농공상이라는 분류에서 보듯 하나의 사회적 계급이 아니라 특수한 집단

의 명칭이었다. 그리고 이 집단은 간단히 말해 “재능있는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리고 혹자에 의하면 오십 명 백 명을 다스리는 군대의 장을 사(士)라고 했다고

도 한다.


춘추시대를 거치면서 이러한 군사집단으로서의 사는 학문을 하는 집단으로 변화,

정착하게 되는데 공자와 그 제자들을 보면 이러한 과도기의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공자의 부친 숙량흘은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고, 전쟁 중에 두 손으로 성문을 밀

어올려 성안에 갇혀있던 군사를 구출해낸 적이 있다고 한다. 공자도 키가 9척 6

촌으로 전하는 말에 의하면 “공자의 힘이라면 굳게 닫힌 성문을 떠받쳐 열 수

있으나 그는 힘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열자, 설부편>”고 한다.


공자의 제자는 3000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 자로(子路)는 “장검을 좋아했고

<논어, 자한편>”, 염유(?有)는 “방패를 들고 군사를 통솔하였으며<설원>”, 번

지(樊遲)는 “군사를 이끌고 도랑을 건넌 바 있는<좌전>” 무사들이었다. 이들

모두가 공자의 제자 중 현인으로 숭앙되어 성균관에도 그 위패가 모셔져있는 72

현의 일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재미있지 않은가.

그 72명의 현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하게 생각되어 공문십철(孔門十哲)로 거명되

는 자로의 일생은 현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무사로서도 매우 흥미롭다.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기록된 바, 자로는 본명이 중유(仲由), 자가 자로이며

변(卞) 땅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거칠고 용맹을 좋아하였으며 뜻이 강직했다.

수탉의 깃으로 꾸민 갓을 쓰고, 수퇘지 가죽으로 만든 띠를 띠고 다니면서, 공자

를 업신여기고 포악한 짓을 했었다. 그러나 공자가 언제나 예로써 대하며 올바른

길로 이끌어 주었으므로 나중엔 유생의 옷차림을 하고 와서 예물을 바치고 제자

가 되기를 청했다.


그와 공자의 문답은 <논어>에서 자주 볼 수 있다. 공자의 평도 여러 번 기록되어

있는데, “한 마디 말로써 소송의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유(由: 자로)일

것이다”, “유가 용기를 좋아하는 것은 나보다 앞섰지만 알맞게 쓸줄을 모른다

”, “유와 같은 사람은 제명에 죽지 못한다”, “다 떨어진 솜옷을 입고 여우털

옷이나 담비털옷을 입은 사람과 함께 서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은 유이다

”, “유의 학문이 마루까지는 올라왔지만, 아직 방안에 들어오지 못했다” 등과

같은 이야기다.


공자의 예측대로 자로는 결국 제 명에 죽지 못했는데, 위나라 대신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을 때, 반란이 일어나는 와중에 간언하다가 죽은 것이다. 그는 죽으면

서도 “군자는 죽어도 갓을 벗지 않는다”고 하여 갓끈을 매고야 죽었다는 고사

가 전해 내려온다.

공자는 위나라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슬프다. 유가 죽겠구나”하고

탄식하였는데, 과연 얼마 후에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자로가 이와같이 용맹한

사람이었으므로 공자는 “내가 유를 제자로 얻은 뒤부터는 세상사람들의 비난소

리가 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고도 했다.


6.

사의 집단에 속한 사람으로, 그리고 이 시대의 위대한 사상가의 한 사람으로 또

하나 무사의 기상을 보인 사람이 묵자(墨子)다. 그와 제자들을 묵가(墨家)라고

하는데, 이들의 활동과 주장은 협의 탄생과 성장을 가속화 시켰다고 평가되고 있

다.

묵가는 조직을 갖춘 집단으로, 그 우두머리는 거자(鉅子)라고 불렀다. 거자라는

직위는 집단에서 공인한 어진사람에게 전해졌으며, 거자의 명에는 절대 복종해야

했다. 전해진 바에 따르면 묵자에게 복종한 사람은 모두 180명인데, 그들은 모두

물불을 가리지 않고 한 번 나아가면 죽어도 물러섬이 없었다<회남자>고 했다.



묵가의 이론 중에 협의 정신과 밀접한 관계를 보이는 것이 있어 살펴볼만 하다.

<묵자> <경상(經上)>에는 “임(任)이란 사(士)가 자신을 희생하여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에 대한 주(注)에는 “그러므로 임협(任俠)이

라 일컫는다”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 묵자는 임협관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는 “임협은 사(士) 계층 출신이며, 무협은 사의 일부”라고 하였다. 또 임협

정신의 핵심은 “자신을 희생하여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규정

하였다.

이어 <경성상(經說上)> 중에서 그는 임협정신의 실천방식에 대해 “임이란 자신

이 어려운 일을 하여 남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아무 것도

따지지 않고 남의 어려움을 구제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협의 행위준칙이라는

것이다.

이때는 이미 협의 무리가 생겨났고, 묵자는 이들을 호의적으로 생각하여 이러한

이론적 지지를 보낸 것이라 생각된다.


7.

이제 실제로 협의 무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소개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자객 예양(豫讓)과 형가(荊軻)를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에 대

한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진 것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이번 글에서는 전회의 글에서도 소개했던 진산의 <중국무협사>에 크게 도움을 받

았다. 사실은 몇 부분을 빼고는 거의 거기 나온 내용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관심있는 분들은 직접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사기열전은 번역된 판본이 여러 개 있고, 한번쯤 읽어둘만 하다. 무엇보다도 <사

기>는 중국의 사대명문장으로도 꼽히는 것이니 읽는 재미또한 있다.

묵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적어 자세히 말할 수 없는게 아쉽다. 일본만화 중에 <

묵공>이라는 게 있는데, 마지막 결말의 황당함을 빼면(즉 묵가의 정통이 일본으

로 건너갔다는 식의) 아주 훌륭하다.


7.

이 글을 통해서 나는 협이 무엇인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나도 같이 그 협이

무엇이고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공부한다는 기분으로 부족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감히 글을 시작했다.

협이라는 무리, 그리고 그 정신의 탄생에는 고대로부터 이어온 상무의 정신과 사

회적 배경, 시대가 요구하는 역사적 맥락이 있음을 어렴풋하게라도 표현이 되었

다면 좋겠다.

별로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_-;) 이 글은 여기서 중단하고, 다음 회부터는 방식

을 바꾸어서 중국무협의 걸작들을 소개하는 식으로 진행할 생각이다.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 드린다.




좌백(jwabk@sigong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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