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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찾아가는 문화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土堂
한국 최초의 성당, 성공회, 교회 답사
* 성공회 성당 건물에 왠 한옥대문?
덕수궁 돌담을 끼고 좁은 골목길 사이에 자리한 성공회는 영국의 정교회로 고종27년, 1대 주교인 코프의 전도활동의 기초가 잡히게 되자 3대 주교인 마르트롤코프가 영국인 딕스의 설계, 브록크의 감독으로 1992년의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6년 5월 완성하였다. 로마네스크(로마)양식으로 70여년이 지난 건물이다. 얼마전 중간 설계도가 발견되어 성당 보수를 하는데 크게 참고가 되엇다. 성가 수녀원으로 일제 침략시 서양인에 의해 건립된 신부가 주거하지 않는 "공소" 성당이었다. 선교시 우리나라 토소과의 부딪침을 피해 지은 건물로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했으며 실내는 창문이 크지 않아 어두운 편이어서 진중한 맛이 있다.
세실 신부님 이름을 딴 '세실극장'은 한때 연극 활동이 활발했던 곳이며 6.10 항쟁 사건이 일어났을때 이곳에서 민주화의 기틀이 뿌리 내린곳이며, 조선시대 성종임금의 형인 월산대군이 살던 궁으로 임진왜란때는 의주로 피난갔던 선조가 잠시 지내기도한 역사의 한 장이 남겨 있는 곳이다. 개인적으로는 시누님 가족과 친구가 성당에 예배 드리러 오는 곳이라 여러번 성당에 왔던 곳이다. 어느 해 겨울 성당 주변 '조선일보 화랑'을 다녀 가던 날 포장마차 아줌마가 손녀에게 쏘세지 를 건네면서 막내 따님, 참 예쁘게 생겼네요 하는 말에 손녀와 함께 박장대소 하며 꽃비 같은 추억하나 뿌리고 지나간 성공회 건물은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으로 창문 크기가 크지 않아 실내는 진중한 느낌을 준다.
주변 성공회 왼편 앞쪽의 시의회 회관은 부민관(일제시 일제 찬양공연)으로 해방 후에는 미군정이 사용하였고, 한때 국회(현재는 여의도)가 이곳에 있었으며 현재는 서울 시 시의회가 사용하고 있다.
시의회 건물에서 곧장 내려오니 덕수궁이 보인다. 옛 병사(군졸)들의 교대식(보초 교대식)이 끝나서 일까, 관람객이 이 별로 없다. 마카오에서 여행온 마리아와 덕수궁을 지날때 군졸들의 교대식이 있어 마라아가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며 흥미로워 했던 기억을 떠 올리며 금천교를 건너 연못을 지나 세종대왕 동상앞으로 다가갔다. 동상옆에 소나무 두루가 대왕의 호위무사 인듯 버티고 섰다. 소나무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수종으로 우리 조상은 소나무에 선비에 품격을 부여했다.
1898년 덕수궁을 설게한 존 레지널드 하딩 (JOhn Reginald Harding 1858~1921년)의 설계도가 얼마전 발견되어 신문 에 입면도와 평면도가 세세히 보도된 일이 있다. 덕수궁은 조선 왕궁 중 규모가 작았다. 덕수궁의 석조전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팔라디언(Palladin) 건물로 1988년 2월 20일 작성됐으며, "Imperail Palace. Seoul " 서울의 활궁" 이라 이름 붙였다. 왼쪽 아래에는 설계자인 하당의 서명이 있다.
경운궁"이 관심을 모으게 된 것은 1896년 고종이 정동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 이후이다.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을 나온 고종은 바로 이웃인 경운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전각을 새로 세웠으며 그 해 9월 "대한제국'을 선포한 후 경운궁은 정궁이 됐다.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것은 1907년이다. 서거당, 준명당, 즉조단의 세곳은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 했던 곳이며 선조가 승하한 곳이고, 고종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서거당는 이층의 목조건물로 단청이 되어있지 않다. 화재로 소멸된 후 증축된곳이다.
"덕수궁"은 순종이 부왕 고종의 장수를 담아 지은 이름이다. 석조전의 문양은 벚꽃이 아닌 자두의 왕실 문양이며 일정시는 일본 궁으로 사용됐고 , 미소공동위원회가 이곳에서 열렸고, 현재는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대 미술관 ㅡ 근대미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답사를 간 날은 "근현대 미술 걸작품 전"이 열리고 있었다.
작품해설 도움을 받으려 해드폰을 끼고 정해진 한 시간내 관람을 마치기로 하였으나 시간이 짧아 건성건성 관람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동우가 물었다. 나혜석 작품 보셨어요? 최초의 근대 여류 화가라 관심이 많았던 이유도 있었지만 상류가정에서 태어나 명성을 누리다 행려병자로 생을 마감한 그녀의 극적인 삶에 관심이 더 컸는지 모른다.
* 정동교회
한국 최초의 교회였던 정동교회는 구한 말 아펜젤러 감리교 선교사와 언더우드 장로교 선교사가 인천 제물포 항을 거쳐 이 땅에 들어와 아펜젤러는 정동에 제일교회를, 언더우드는 광화문에 새문안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 또한 정동교회 이웃에 이화 학당(이화여고)과 배재학당(배재고)의 교육기관을 만들어 민족의 독립운동과 복음을 전파했다. 이 영향으로 이승만, 서재필등이 협성회를 조직하여 독립활동을 하였고, 독립협회도 이곳에서 만들어 졌다.
정동교회 양식은 고딕풍으로 붉은 벽돌로 지은 서양식 최최의 교회로 삼일운동시 "이주필'목사와 '박동만' 장로가 참여하였고 교회를 세운지는 100년이 된다. 한때 새문안 교회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해 찬양을 했던 기억이 새롭다.
* 명동성당
답사의 끝 장소인 우리나라 " 최초의 서양식 성당" 인 명동 성당에 도착했다. 명동 입구를 지나 언덕을 올라 성당에 가야 하는데 명동 입구부터 인파의 북적거림으로 혼잡하다. 생의 활력을 잃은 사람들이 아침시장 그것도 규모가 큰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에 가면 이것 저것 잡 생각할 틈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인파를 보면서 활력을 찾는다고 하는데 명동 역시 활력을 불어놓는 기가 센 곳이라 하겠다. 내국인 뿐만 아니라 관광, 쇼핑중인 외국인을 잡으려는 점원들의 장사술을 실감한다. 답사중의 편한 복장의 한무리를 보고 일본 관광객으로 착각했나 일본어로 호객을 하는 순간 기분이 나쁘지 않다. 국력이 이만큼, 한류 열풍이 이리 커졌단 말인가!
'최초의 성당'이란 수식어를 붙여 명당 성당을 찾은 날은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시어 영원히 우리곁을 떠난 날이었다.
반세기 전, 천주교 신자인 친구 계순과 자정미사를 보고 인파에 흽쓸렸던 추억이 찌 익 후진을 하며 잠시 머문다. 타임머신에 몸을 삳지 않더라도 카메라의 줌처럼 다가왔다 멀어져 가는 추억이라는 필림이 영사기 없이 돌고 돈다.
명동성당은 "한국천주교의 얼굴", 심장부, 요람, 상징, 중심이란 수식어가 붙는다. 한국 근대사에서 시대의 고난과 아픔을 대변하는 정치, 사회의 중심 무대에서 크나 큰 역활을 하던 곳, 조선왕조는 새로운 서학 사상인 천주신앙을 박해하며 이땅에 1만명의 순교자를 내었다. 명동성당을 세우기는 성립 초기부터 토지 분쟁을 3년 가까이 치렀다.
성당 건축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뿐만 아니라 서울 장안은 물론 왕 궁안 까지 한눈에 보이는 언덕위에 세워진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꺼림직 했던 것이다. 명동 성당이 축성식을 거행한 것은 1898년 5월 23일이다. 우리나라의 서양식 건묵물로는 2층 벽돌집인 용산 신학교 와 중림동 성당에 이어 세번째 지어진 건물이다. 1900년 이전의 것중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건물로 사적 제 258호로 지정되어 있고 길이가 68.25m, 폭이 20.2m, 높이는 8층 아파트 높이에 맞먹는 23,435M, 종탑의 높이는 46,70M에 수용인원은 3000명에 달한다. 명동성당은 본래 " 종현 성당" 이라는 이름을 썼다. '종현' 이란 종이 있는 언덕이란 뜻이었다.
세조 14년에 설치했던 종긱(지금의 보신각)이 임진왜란으로 불타 없어져 종을 남대문 옆으로 옮겼는데 당시 명나라 장수가 진을 치고 있던 남대문 옆으로 옮겨와 종을 단 이후 '북달재' 또는 북고개라 불리면서 한자 명으로 종현이라 표기 했었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후 종이 지금의 보신각으로 옮긴 다음에도 여전히 종현이라 불렸다.
명동 성당은 프랑스인 코스트 신부의 고향 몽펠리에 성당을 본떠 설계했으며 벽돌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이던 용산 새남터 근처 흙을 퍼다가 찍었으며, 국내에 서양식 건축 기술자와 미장공이 없어 중국인들을 불러다 썼는데 이들이 청일 전쟁때 참가하는 바람에 6년이 걸렸다. 코스트 신부도 이 건물의 준공을 보기 2년 전에 1896년 장티부스에 걸려 갑자스레 선종하였다. 1898년 5월 29일 마침내 명동성당이 완공된 날 뮈텔 주교는 이 성스러운 건물이 수많은 신자들의 피와 노력으로 이루어진 "값비싼 영광"이라고 했다.
황현의 매천야록에 보면 "우뚝 솟은 모습은 마치 산을 자른듯 한데 가히 수만명이 들어갈 수 있다. 성당 구경을 하러 오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으며 " 늙은이는 감탄하여 지팡이 까지 버리고 떠날 줄을 모른다 "라고 기록하였다. 당시 서까래와 대들보도 없이 수십미터 의 집을 짓는다는 것을 이해 할수 있었겠는가! 명동 성당의 외벽은 대부분 붉은 벽돌로 되어있다. 그러나 북측 벽과 기둥등 주요 골조 부분과 돌림띠, 창호테 둘레에는 회흑색 벽돌을 사용하므로써 전체적인 수평과 골조 윤곽을 이루고 있으며 목조 천장은 뼈대선과 함께 전체적인 고딕구조이다.
성당안을 살펴보면 원래의 강대는 1920년 본당 주임인 프와넬 신부가 뮈텔 주교의 25주년 기념으로 만든 것으로 자신의 고향인 프랑스 노르망디에 있는 성당을 본 따서 베네딕도 수도원 목공부에 독일인 수사들이 제작한 것이며 우측의 정교한 목조각의 독서대와 대리석의 성수대, 중앙제대, 성모자 상 뒤로 그리스도 12수사 상본이 화려하게 그려졌는데 제2공화국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총리의 동생인 장발의 작품으로 그는 1925년 5월 로마에서 열린 기해, 병오 박해 순교자 첫 시복전에 복자 시복 대표로 참석하고 돌아와 이 상본을 그렸는데 독일의 전형적인 보아론풍의 성 미술 정신이 담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중앙제대 앞에 설치된 영성체 난간은 본래 금속제로 되어 있던 것이 1943년 경 금속물을 헌납하라는 일제의 강요에 못이여 부득이 떼내어 주고 대신 나무로 설치한 것이다.
성당안을 경건하게 비춰주는 스테인 그라스는 한국전쟁 때 많은 부분이 손상되어 1982년 부터 2년간 화가 이남규에 의해 복원 제작했다. 이 밖에 성당 바닥은 마루 바닥으로 의자가 없었으나 1950년대 말 경 장궤 의자를 설치했고 매일 정오와 삼종기도 때마다 울리는 종 역시 프랑스 선교사들이 기금을 모아 만든 처음의 것이 아니라 1966년 제작한 것이다.
명동 성당이 자랑하는 파이프 오르간은 1920년 전국의 신자들이 모금운동을 벌여 당시 쌀 한가마가 20원 하던 당시 성금 2만원을 들여 마련한 대 풍금이었으나 1960년 발코니를 확장하면서 오르간으로 교체했고, 지금의 독일 보슈사 파이프오르간으로 재 설치 하였으며 종탑의 시계는 1982년 전자시계로 바꿔 설치했다. 성당의 100년 역사와 함께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것은 별로 없는 셈이지만 당시 설립부터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것은 중앙제대 좌우에 위치한 소제제와 석상이 있으며 왼쪽에 있는 예수 석상, "예수 성심상"은 온갖 박해를 무릅쓰고 복음을 전한 성직자들과 순교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모셔진 것이고" 베네딕고 성인상"은 성당을 건축하면서 베네딕도 성인에게 특별한 가호를 청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명동 성당은 대 성당 외에 성당이 하나 더 있다. 사제관을 옆으로 끼고 뒤쪽으로 조금 걸으면 본당 건물 끝자락에 자그마한 문이 있는데 바로 지하 성당으로 들어가는 곳이다. 지하 성당에는 박해 초기 순교한 아홉분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파리 외방 선교회 선교자로 우리나라에 첫 입국하여 기해 박해 때 순교한 앙베를 주교와 모방 신부 , 샤스땅 신부, 역시 기해년에 순교한 최경환, 김성우, 병인 박해 때 순교한 푸르테 신부, 프티니콜라 신부, 그리고 무명 순교자 두분이다. 그렇게 세워진 언덕위에 뽀족당"인 명동 성당은 현대사에서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 소외된 사람등의 등을 두드리고 눈물을 닦아주는 위로와 희망의 상징으로 자라 잡았다.
명동성당을 답사 하던 날, 김수한 축기경님은 낮 12시 40만 인파속에 이곳을 영원히 떠났지만 우리 마음에 그분이 남이 있는 한 영원히 떠나신 것은 아니리... 성당으로 올라가는 층계마다 살아생전의 추기경님의 모습이 사진에 담긴채 우리를 맞아주셨다. 김수환 추기경님은 천주교란 울타리를 넘어 우리 사회의 원로이셨다. 1970년 이후 우리 국민은 신자 여부를 떠나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발생 할 때마다 그분의 입을 처다봤고, 그이 말 한마디는 파급 효과를 냈다. 그의 사목 표어인 "너희와 모든이를 위하여"가 그의 삶이다. 암흙의 시절 '민주화 중심"에 국민들은 그의 입을 처다봤다.
박정희의 유신시절 독재비판, 6.10 사태때 우리사회를 아우른 큰 어른, 소외된 이를 향한 줄기찬 사랑으로 가파른 현대사 굽이굽이에서 어려울 떄 마다 그를 처다보며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안도했다. 소박하고 솔직한 삶, 일생을 가난한 사람, 병든이, 핍박받는 사람에게,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두 눈을 앞 못 보는 사람에게 주고 가셨다.
"세상 속의 교회를 지향하면서 종교인의 양심으로 바른길을 제시해 온 그는 1969년추기경으로 서임 된 이후 40년만에 무거운 짐을 내려논 것이다.
민주화의 "중심" 이였던 곳.
"추기경님 가시는 듯 다시 오셔셔".
성당을 내려 오며 김수환 추기경님의 환한 미소(사진) 옆에서 쭈그러진 얼굴을 폈다.
당신의 웃음은
무기물질(無機物質)이다
불 태워도 타지 않고
땅에 묻어도 변하지 않는
불멸의 악곡(樂曲)이 되어
깊이 깊이 연주되는...
당신의 웃음은
내 거실(居室)의 창(窓)밖이다
내가 당신을 내다 볼 때
당신은 풀이 되고 나무가 되고
바람, 안개도 , 하늘도 되는
어디에 가도 멀리 둘러 싸는
내 풍경(風경)이다
마종기의 "선종"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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