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6. 27일 김포지구.
12연대 2대대의 방어.
1950. 6. 27일 전날 밤에서 새벽 사이에 ③지역의 적은 참호를 구축하고,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또한, 적은 27일 날이 새자 122mm 포를 동원하여, 아군 12연대 1, 4중대 지역을 포격하면서, ③지역
으로 대규모 도하를 감행하였다. 이에 따라 아군 12연대 2대대 1, 3, 4중대 지역의 병력이 분산되었고,
장갑차 소대들은 대대본부가 있는 통진으로 집결한다.
적의 강행도하에 아군의 분산으로 통진에 있던 12연대 2대대 본부와 2중대는 27일 0800시에 반격을
시도하였는데, 문수산 근처에서 적의 저항에 직면하여 통진으로 철수하였다.
제 1장갑차 대대의 방어.
12연대 2대대가 반격 시작할 무렵, 기갑연대 7, 9중대 지역에도 120mm 박격포의 도하지원 사격 하에
어선을 이용한 적의 도하가 시작되었는데, 적의 도하를 저지하고자 하였으나, 전일 보국대대에 타격을
가한 적이 후방에서 위협해왔고, ③지역에서 적의 도하를 의식하여, 0900시경 통진으로 철수하였다.
12연대 2대대와 제 1장갑차대대는 통진에 집결 후, 바로 퇴로를 차단한 소규모의 적과 교전하면서
6Km 후방의 장림으로 철수하여 1100시에 장림에 집결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는데, 12연대 2대대는
대대본부와 2중대 병력만 건재하였을 뿐 나머지는 분산되었고, 제 1장갑차 대대는 전부 건재하였으나
제 2장갑차중대만 장림에 남기고 제 7, 9중대는 김포로 철수하였다.
보병학교대대의 방어.
0800시경 대대의 대대 우측방 1중대 지역으로 전일 보국대대를 공격한 적의 1개 소대가 공격을 가해와
서 소총사격으로 저항하였으나, 곧이어 대대의 좌측방 3중대 지역과 대대 후방의 화기 중대 지역으로도
전날 상륙한 적이 공격해왔기 때문에 맥없이 철수하여 1100시에 장림에 집결하였다.
장림선의 방어.
12연대 2대대 2중대는 장림 남쪽 60고지인 천마산에 진지를 급편 장림-양곡간 도로를 차단하였고,
보병학교대대의 4개 중대는 장림 삼거리 북방의 구릉을 점거 장림-김포간 도로를 차단하였으나,
이어지는 적의 공격에 이 2개 부대는 역부족으로 1300시 철수하여, 12연대 2대대 2중대는 양곡으로
보병학교대대와 장갑차 중대는 김포로 철수하였다. (양곡은 전원일기로 유명한 지금의 양촌리이다.)
김포선의 방어.
보병학교 대대는 1500시에 김포읍 서북방 5Km지점의 110고지인 운유산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는데,
자연지형을 이용한 급편진지의 배치가 끝나기도 전에 북한군의 급습하여, 혼전을 벌이게 되었다. 보병
학교 후보생 대대는 부대원들이 입대한지 얼마 안되어 이제 막 사격훈련만을 마친 햇병아리 부대였기
때문에 적의 공격에 전의를 잃고 진지를 이탈하는 자가 속출하였는데, 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진두에
서서 대대를 지휘하던 대대장 장영문 소령이 적의 저격으로 두부에 총상을 입고 전사하였다.
대대장의 전사에 부대는 전열이 일시에 무너지게 되었는데, 이를 틈탄 적의 기병대가 김포가도를 따라
김포읍으로 돌격하였다. 이에 사령부가 위치하던 김포읍이 위협을 받게 되었는데 김포읍에 집결해있던
제 2장갑차중대와 제 9도보수색중대에 의해 격퇴되었다.
보병학교 후보생대대의 4개 중대는 이 전투 후 분산되어 김포에서 수습되었다.
보병학교 후보생대대는 1950. 4월~6월에 입교한 인원들로 아직 사격훈련조차 받지 못한 인원도
있었고, 전투경험은 물론 군생활 자체가 생소한 인원이 많았다. 또한, 이들은 M1소총으로 교육을 받았으나,
이들에게 지급된 총기는 조선 독립 후 일본군에게 회수하여, 창고에 방치하였던 일제 38식, 99식 소총이
지급되었다. 이 소총은 오랜 방치로 손질이 되어 있지 않아, 격발에 장애가 많아서 이들 부대는 사실상
맨주먹으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재 정 비.
다행히 북한군은 더 이상의 공격을 중지하고 이날 오후부터 그 다음날까지 장림선에서 전열을 재정비하
고 있었는데, 김포지역에 넘어온 북한군의 규모와 한국군의 규모를 비교해 볼 때, 이해 할 수 없는 행동
이다. 이는 아마도 통신체계의 미비로 상급부대와의 연락이 원활하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무튼, 북한군의 공격이 중지되어 김포지구 전투사령부도 전열을 재정비하게 되는데, 26일 분산된
보국대대의 중대는 27일 오후 김포에서 약 30여명이 수습되어 본대로 복귀하였고, 27일 오전에 분산된
남산학교 소대는 김포에서 수습되어 김포사령부에 흡수된다. 또한, 27일 오전에 분산된 12연대 2대대
1, 3, 4중대는 극소수의 인원이 수습되어, 27일 오후 양곡에 집결했다가 당일 밤 김포에 집결한 2중대
에 흡수되었다. 보병학교 대대도 분산되었다가 김포에서 수습되어 부대의 총기를 M1소총으로 교체하는
등 재정비하였다.
전투가 중지되었을 때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의 병력.
독립 기갑연대 제 1장갑차대대. (대대본부, 2, 7, 9중대)
제 12보병연대 2대대. (대대본부, 2중대)
육군 보병학교 갑종 간부후보생대대. (?)
육군 공병학교의 일부.
병력의 증강.
27일 전투로 김포지구의 2개 대대가 전력이 약화되어, 27일 저녁 다시 2개 대대가 증강되었는데,
대구에 주둔하던 3사단 22연대 3대대가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에 도착하여, 운유산 동쪽 3.5Km
▲73고지에 배치되었고, 수경사 8연대 3대대와 독립기갑연대 3대대 8중대가 운유산 진지에 투입되었다.
이와 별도로 부평-김포선의 계양산에 제 1공병단 일부병력이, 김포비행장 북방 4Km 지점 전호리에
병기학교 교관단 일부병력이 배치되었다.
김포북방의 공군 2개 중대도 계속 김포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참고자료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제 1권 개정판), 국방부전편위, 19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