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미디어의 시대다. 각국은 지금 위성 TV를 통한 미디어 전쟁을 벌이고 있다. 어느나라 건 그 나라의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은 음악이라고 한다. 그래서 저마다 위성음악방송을 활성화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일본을 향해 음악 프로그램을 내보내 선의의 경쟁을 벌이는 방법도 생각해 볼 일이다. 바야흐로 지금 세계는 1일 생활권에 살고 있다. 그러다보니 그나라 고유의 문화가 되색되면서 세계 공통문화가 형성되고 있는게 오늘의 현실이며 지구촌 반대편의 소식과 문화를 하루면 접하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우리는 국경이 없는 문화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일본 대중음악이 표면적으로는 수입이 금지됐어도 음성적으로는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강남에는 일본 대중음악 전문 카페들이 수두룩하며 이대 앞에는 일본 CD를 파는 전문점들이 성업중이고 압구정동에서는 어렵지 않게 길거리에서 일본음악 불법복제CD만 취급하는 손수레를 볼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방송에서는 일본 음악을 표절한 노래가 전파를 자주 타고 있지만 방송편성권자는 물론 시청자가 이런 분위기에 익숙해져 있는게 현실이다.
항간에는 일본 음악이 개방되면 우리 음악이 설 땅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제기하였는데 과연 그럴까? 분명 일본 대중음악은 자산규모나 음악적 수준에서 우리보다 한 수 위에 있는 건 사실이다. 이런 일본이라는 공룡이 엄습했을 때 우리 대중음악은 타격을 입으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문제는 일본 대중음악 자체보다 자본과 기술력이 월등한 일본 음반 프로덕션들의 국내 진출이다. 개중에는 아무로 나미에 등 내노라는 톱가수를 배출하고 있는 고무로 데츠야 군단을 필두로 일본의 스타 프로듀서의 프로덕션은 국내 음반사를 통째로 너끈히 삼켜버릴 자본규모를 갖추고 있다. 이들이 한·일 합작 프로젝트나 한국 가수의 발굴 등을 명분으로 들어와 쇼 비즈니스에 나선다면 그 파괴력은 가공할 수준이 될 것이라는 게 가요계나 음반업계에서 보는 공포 섞인 전망이다.
하지만 일본 대중음악에 대한 개방을 전환의 계기로 삼는 시각도 있다.
미국의 팝이 이 땅에 유입된 지가 어언 반세기가 된다. 1988년 이후 외국의 메이저 회사들은 국내에서 직배체제로 들어갔다. 당시 많은 관계자들이 우리 가요의 시대가 막을 내릴 때가 됐다고 야단들이었다. 그리고 한때 음반시장 점유율에서 비중이 6대 4까지 위협을 받았으나 지금은 8대2수준으로 가요가 훨씬 높다. 또 중국어 음반이 90년대 이후 들어왔지만 음반시장에서 5퍼센트를 넘지 못하고 있다. 이미 우리보다 먼저 빗장을 푼 대만이나 동남아시아에서도 일본 가요가 마이너 뮤직으로 전락한 것도 우리가 자신감을 갖게 하는 이유이다. 물론 개방이 되면 처음에는 호기심 때문에 수요가 늘어나겠지만 오래지 않아 일본 음악은 팝이나 중국어권처럼 하나의 외국음악으로 취급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오히려 선의의 경쟁을 펼침으로서 우리 가요가 그동안 만연된 일본 노래의 카피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고 나아가 표절은 못하리라는 긍정론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취사선택만 잘하면 마구잡이식의 유입은 어려울 것이고 일본음악에 맞서는 우리 가요의 질을 높이는 계기를 만드는게 더 바람직하리라는 생각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대중음악에 대한 개방을 확정한 것 같다.
일본 대중음악은 다양하다.
지난 80년대까지 우리 가요를 크게 트로트와 비 트로트로 나눴다. 그러나 비 트로트라고 해야 고작 포크와 발라드가 전부였고 90년대에 넘어와서야 댄스뮤직이 한 장르로 자리 매김했으며 근자에는 펑크다 얼터너티브다 하여 예전보다 조금 세분되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아직도 우리 대중음악은 다양하지 못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일본의 대중음악은 아주 다양하다는데서 우리와 차이를 보인다. 물론 요즘은 일본 역시 댄스뮤직이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여타 장르에서 퍽 다양성을 보이고 있어 이런 요소들이 일본 대중음악을 발전시키는 중요 요인이 되고 있다. 그 이면에는 음악을 공급하는 레코드업자, 음악을 전달하는 방송, 메신저인 뮤지션, 그리고 오디언스 등 모두가 유행보다는 자신의 개성과 색깔을 더 우선하는데서 다양성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획일적이고 유행에만 치우치다보니 '한마리 개가 짖으면 동네 개 모두가 따라 짓는'격이 돼 지금처럼 온통 댄스뮤직이 판을 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면 90년대 초반, 국내 대중음악계는 느닷없이 레게와 재즈의 바람이 불어왔으나 역시 일시적인 바람으로 그치고 말았다. 기초 토양이 없는 상황에서 반짝 유행이다보니 그 생명력이 길지 못한건 뻔한 이치이다. 그런데 일본은 어떤가? 일본이 오늘날 세계 제 2의 재즈의 보고가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일본의 재즈 역사는 2차대전 패망 이후 지금까지 줄곧 이어져 50년이나 되는 역사를 갖고 있다. 재즈 전문 FM방송이 200여 개가 넘으며 수천 개의 재클럽이 성업중이고 재즈만 전문으로 하는 레코드사도 있다. 그런가하면 레게도 확고한 뿌리를 내려 매년 정규적인 레게 페스티벌이 열리고 있다. 이런 일본인들의 자세가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내는 토양이 되는 것이다. 솔직히 일본의 전통음악이라는 엔카를 제외하고는 일본만의 것은 없다. 그러나 전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밑거름으로 재창조하여 동남아 등의 나라에 수출한지 오래이며, 이제는 거대한 나라 중국 시장을 석권하기 위한 작업에 접어들었고 이제는 한국 시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일본에서 제일 잘 나가는 최고의 레코드 프로듀서 고무로 데츠야는 테크노를 바탕으로 한 댄스뮤직으로 하여 헐리우드 영화 음악에도 손을 대고 있는가하면, 지난 98년 월드컵 대회의 전야제에 프랑스의 장 미셀 자르와 함께 음악을 다룰만큼 입지를 강화하고 있으며 바야흐로 본격적으로 미국 팝시장 진출을 겨냥하고 있다. 그런가하면 라우드니스는 하드 록 씬에서 확고한 위치를 쌓고 있으며 카시오페아는 재즈계에서 내노라는 밴드로 행세하고 있고, 미스터 칠드런, 스피츠 등이 선봉인 컬리지 록은 비틀즈 성향의 모던 록과 뉴 포크 록, 여기에다 펑크의 요소까지 뒤섞은 형태를 창조했으며 또 라르크엔시엘, 글레이 등이 앞장선 영국의 뉴 웨이브와 재팬 팝이 조화를 이룬 비주얼 록을 만들었다. 이 두 장르는 일본에서 꽤 대중음악 판도를 잠식했다.
이렇듯 일본의 대중음악은 세계의 다양한 장르의 유행음악을 자기네 스타일로 재창조하여 괄목할 만한 활동 무대를 넓히고 있는데 우리는 이제 조금 시도를 시작하고 있는 상태이며 아직도 댄스뮤직이 주종을 이뤄 판치고 있어 안타깝다.
우리가요계에 번진 일본화 바람
<댄스뮤직>
원래 일본의 레코드 회사들은 70년대초 까지만 해도 댄스뮤직이 팔리지 않는다고 판단해 이 분야에 신경을 그다지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80년대 초 유로 댄스가 유행했을 때도 기본적으로 외국음악 그 자체를 수입했을 뿐 일본 내에서 그런 음악을 만들지도 않았고 댄스뮤직을 구사하는 가수나 작곡가도 없었다.
이런 분위기속에 많은 가수와 작곡가들이 댄스뮤직을 수준 이하의 음악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유독 댄스뮤직만을 고집하는 두 명이 있었다. 한 사람은 뮤지션이 아닌 레코드 대여점을 경영하던 마츠우라 라는 사람으로 그는 댄스뮤직 신보에 내용 소개를 싣거나 직접 선정한 댄스뮤직을 추천하는 등 댄스뮤직의 매니어로 솜씨를 유감없이 발휘하면서 차츰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해 성공을 거둔후에 유명한 AVEX 레코드사 공동 사장이 되었다.
또 한 사람은 아까 언급한 고무로 데츠야란 프로듀서로 그는 TM네트워크라는 시스템을 만들어 마치 영국의 듀란듀란의 경우처럼 팝적인 댄스뮤직 장르를 시도해 성공을 거둔 인물로 오로지 댄스뮤직만을 만들고 작곡했다. 이처럼 고무로는 작곡가겸 레코드 프로듀서로 그가 제작한 CD23장 전부가 밀리언셀러를 기록했으며 총판매량도 1억장이 넘는다. 그는 지난해만 해도 5천만장 이상을 팔았으며 일본내 개인 납세부문 4위에 랭크될 정도로 일본 대중 문화인으로서는 절대적인 인물이다. 고무로의 곡은 아무로 나미에를 비롯하여 가하라 도모미, 글로브, 맥스, 스피드 등 주로 10대 여성 댄스 가수들에 의해 불리우고 있는데 직설적이며 자극적인 가사들은 극히 단조로운 멜로디에 담겨 새로운 멋을 풍긴다.
이로 인해 오늘날 일본은 댄스 뮤직의 왕국이 되었고 이에 영향을 받아 한국도 90년대 초중반부터 댄스뮤직이 발라드의 세력을 초토화 해버린 것. 그 선봉장이 '한국의 고무로'로 비견되는 김창환이다. 그는 원래 디스코텍 DJ를 거쳐 김건모, 노이즈, 박미경, 클론, 골라 등의 앨범에 작곡은 물론 제작을 맡음으로써 댄스뮤직에 관한 한 독보적인 위치를 쌓았다.
여기에 주영훈, 윤일상 등 해외파가 가세했으며 또 가수 출신의 이수만이 가세해 현재 국내 댄스 뮤직의 전성시대를 구축하고 있다. 특히 이수만은 고무로식의 SM기획이라는 독자적인 시스템을 둬 가수 출신의 프로듀서 유영진과 함께 여기서 공개 스카웃한 H.O.T와 S.E.S 신화라는 그룹까지 전문 댄스 팀만을 육성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밖에 대학에서 클래식을 전공한 김형석도 수완을 보이고 있고 철이와 미애의 신철이 프로듀서로 전향해 DJ-DOC,유승준 등의 댄스 뮤직에서 보여주듯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댄스뮤직이 판쳤던 구미의 팝은 바야흐로 모던 록이나 테크노 뮤직 등 새로운 장르의 대두로 인해 힙합으로 명맥을 유직하고 있지만 유독 일본과 우리 나라만은 그 열기가 식을 줄 모르는 건 아마도 두 나라의 음악산업이 비슷한 구조도 있겠으나 일본의 TV쇼 프로그램을 그대로 배껴대는 국내 방송의 무책임한 행동이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일본 취향으로 동화되가게 하는 것 같다.
<인디음악,인디레이블>
인디밴드는 기성의 틀이 아닌 다분히 언더그라운드 적인 요소의 음악을 추구하는 그룹을 말하며 인지 레이블은 기존의 메이저나 마이너 레코드 소속이 아닌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직접 제작한 레코드를 통칭한다. 이처럼 인디라는 용어가 갑작스럽게 클로즈업된 배경에는 그 발원지가 미국이지만 우리의 경우 일본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경우 일본에서 더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일본에는 인디 미디어가 유행하고 있는데 인디 미디어란 기존의 출판사나 방송국 산하에 있지 않은 독립된 미디어로서 해적 FM방송과 매스미디어에서 취급하지 않는 거리의 음악까지를 두루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인디 미디어가 각광을 받기까지는 기존의 미디어가 너무 고루하다는 것에 반대해 자유발상의 실험정신에 두고 있기 때문이며 그들의 표현에 자극을 받은 젊은이들이 가세하면서부터 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인디 문화에서 터져나오는 표현들은 대부분 언더그라운드적인 컬러를 지니기 때문에 음악 분야에서도 그 세력이 날로 확장되고 있는데 일본의 인디 음악의 시조는 1978년 고질라 레코드에서 내놓은 밀러즈의 <충격 X>라고 알려져 있다. 이때가 1차 인디 시대이며 2차 인디 붐은 80년대 중반에 있었고 현재가 3차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인디 레이블에서 활약하고 있는 세대의 대부분은 밴드붐이 불었던 80년대 초반, 메이저 음반사들로부터 일찍이 스카웃 됐다가 붐이 사라지면서 버림받은 밴드들로서 그런 연유로 메이저에 대한 불신과 회의가 깊어 자신들의 음반을 직접 제작하기에 이른 것이다.
일본에는 서니데이 서비스, 힉스빌, 마고로 브러더스 등 많은 인디 밴드들이 활동중이며 컬리지 록의 선봉장 그룹 스피츠의 성공은 결국 95년 음악잡지 전문 출판사인 리토르 뮤직에서 '인디즈 매거진'이란 특별한 잡지를 만드는 원동력이 됐으며 CRJ(컬러라디오 재팬)계열의 젊은 방송인들이 목에 힘을 주어 영향력을 행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인디 밴드들이 자비를 들여 음반을 직접 제작하고 직접 유통하는 것이 바로 인디 레이블이다. 서구에서는 오래 전부터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춘 인디 레이블들이 언더그라운드 밴드들을 지상으로 끌어 올렸다. 예를 들면 레드제플린의 스완 송, 비틀즈의 애플, 엘튼 존의 로켓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일본에 X-JAPAN도 처음에는 데모 테입을 메이저 레코드사에 보내봤지만 소식이 없자 스스로 엑스타시라는 인디레이블을 만들어 데뷔음반을 냈으며 팀의 리더인 요시키는 신인 발굴에도 힘을 쏟아 X-JAPAN의 대를 이은 루나 시도 발굴했고 GLAY를 픽업해 인디 레이블에서 플레티넘 레코드도 만들어 메이저와 한판 승부를 겨뤘다.
우리나라는 아직 인디 레이블이 초기 단계로 96년 클럽 드럭이 크라잉 너츠와 옐로우 키친 등 두 펑크 밴드와 이란 공동 앨범을 발매한 것이 처음이다. 그리고 삐삐롱 스타킹의 보컬리스트였던 고구마가 설립한 강아지 문화예술, 삐삐롱 멤버였던 박현준과 펑크 그룹 옐로우 키친, 배드테이스트, 갱톨릭, 아스트로 노이즈 등 9팀이 참가한 ,또 허벅지 밴드, 청년단체, 내 귀에 도청장치, 인디고 등 14팀이 공동으로 사비를 털어 제작한 전형적인 독립 음반 <군대가기 싫어요>도 있으며 역시 클럽 드럭이 으로 번 수입을 바탕으로 노브레인과 위퍼를 동원한 또 다른 클럽 재머스도 허벅지 밴드를 참가시킨 인디 레이블 음반이 나왔고 현재 여러 밴드들이 음반 준비에 열중이다.
<패션 및 차이돌 가수>
일부 댄스가수들의 일본따라하기는 이미 80년대부터 싹텄다.
그전형은 아마도 소방차 일 것이다. 소방차는 그 즈음의 일본 댄스그룹 소년대를 흉내냈었다. 김완선은 일본의 소녀대의 옷차림을 그대로 따왔다. 한때 DJ-DOC의 멤버 이하늘이 빡빡 깎은 머리에다 수건으로 질끈 묶은 모습은 과거 일제시대에 인력거를 끄는 일본인의 모습 등에서 흔히 봤던 모습으로 지금도 일본의 기성세대에서 자주 접하는 패션이다. 이에 더떠 일본 고유의 의상인 하오리 같은 의상을 입은 적도 있었다.
예쁘장하고 곱상한 용모를 지닌 소년 소녀형의 가수들은 일본에서는 차이돌(Child Idol)가수라고 지칭한다. 90년대 일본의 최고의 '차이돌'가수로 아무로 나미에와 우타다 히카루등을 들수 있다. 이러한 차이돌 가수들은 무려 800여명에 달하고 있어 차이돌 가수의 위력을 실감케 한다.
그런데 요즈음 우리나라 아이돌 가수들의 상당수가 일본 차이돌 가수의 이미지를 그대로 따라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예를 들면 H.O.T는 일본의 6인조 그룹 스맵과 다를 바가 없고 얼마전 일본시장에서 활약한 S.E.S역시 일본의 여성 차이돌 그룹 스피드를 빼다 박았다. 이들 외에도 젝스키스, 쿨, 터보, 구피, 태사자, N.R.G, A.R.T등 국내에서 잘 나간다는 댄스 그룹들도 마찬가지로 상당수 모방했다.
<영어제목 및 영어가사>
최근 발표되는 우리 가요를 보면 영어 제목의 노래가 부쩍 늘어나고 있다. S.E.S의 ,를 위시하여 R.e.f의 , 진주의 , 박진영의 ,애머랄드 캐슬의 ,조성모의 등이 그런 케이스로 이런 현상은 90년대 문민정부 이후 세계화, 국제화 바람에 편승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일본 대중음악의 유행패턴에서 따온 것이다.
일본은 이미 60년대에 이런 유행이 일어나 지금은 영어제목, 영어가사는 물론 레코드 재킷에서 심지어 콘서트 이름에 이르기까지 어느것 하나 영어를 쓰지 않으면 팬이 쳐다도 안보는 지경에 와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런 제반 행위가 국제화 작업에 의한 다분히 의도적인데 우리는 맹목적으로 일본 따라 하기의 수준에 머무르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일본 음악의 표절 또는 카피>
일본 대중음악의 개방에 대하여 찬·반이 분분한 가운데 찬성하는 측의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개방을 함으로써 일본음악의 표절을 근절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자는 취지이다.
일본음악 베끼기 작업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 60년대에 엔카 풍의 트로트가 인기 있을 때 일부 작곡가 중에는 일본 라디오 방송이 잘 잡히는(당시 위성방송이 없었음) 포항이나 삼천포 등지에 내려가 여관방에서 죽치고 일본방송을 청취하면서 곡의 소재를 도둑질해와 발표하는 웃지 못할 사건이 있었다. 그러다가 70년대에는 한 술 더떠 몇몇 작곡가는 일본으로 건너가 당시 인기있는 일본 레코드를 구입해 와 표절했는가 하면 80년대에 와서는 위성 TV안테나를 달고 일본의 가요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소재를 베끼는 등 표절의 행태는 그치질 않았다. 90년대 이후에는 일본노래, 미국노래를 적당히 짬뽕해서 만드는 표절에서부터 때론 무식하다고 할 정도로 몽땅 카피해서 만들어내는 경우가 왕왕 있고 심지어 레코드 제작자가 작곡가나 편곡자에게 일본 인기가수의 앨범을 주면서 비슷한 분위기의 곡을 만들어 달라는 등 그 방법도 예전과 달리 더욱 교묘하기 짝이 없다. 더욱 악랄한 건 1997년 6월 이후 공윤의 사전심의제가 폐지되면서 표절로 욕을 얻어먹더라도 일단 레코드를 팔고 난 다음에야 표절시비가 일어나는 허점을 악용해 일단 베껴서라도 팔고 보자는 한탕주의가 만연돼 있는게 오늘의 현실이다.
우선 일본음악 표절하면 가장 빈번하게 거론되어 온 가수는 김원준, 녹색지대, 그리고 김민종·손지창의 블루를 꼽을 수 있다. 블루의 경우<나를 위해>는 X-JAPAN의 을 카피했다는 비난을 받았으며, <친구를 위해>는 T.M.N 의 을,<그대와 함께>는 Tube의 를 표절했다하여 망신을 당한 바 있다. 녹색지대 또한 <내가 지켜줄께>도 마찬가지로 X-JAPAN의 을 표절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김원준도 예외가 아니다. <짧은 다짐>은 WANDS의 <고도쿠에노타겟>을 <어제와 다른 오늘>은 SMAP의 <초테노하>를 표절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룰라의 <천상유애>는 그룹 닌자의 <오마쓰리 닌자>,<안녕>은 T.R.F의 를 베꼈다는 혐의이며 신승훈의 <처음 그 느낌처럼>은 TUBE의 ,<밤이 내리면>은 고무로 데쯔야의 를, 전람회의 <유서>는 일본의 만화영화 '천공의 성 랴퓨타'의 배경음악 중 <하늘에서 내려온 소녀>의 주요 부분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받고있다. 이밖에도 표절 혐의를 받고 있는 곡들이 부지기수이다. 이렇듯 표절이 공공연하게 판을 치고 있는 현상은 노력을 안하고 남의 아이디어를 도둑질해도 괜찮다는 불감증으로 국제적인 망신이 아닐 수 없는데 이에 일부 지각있는 사람들에 의해 차라리 일본 대중음악의 개방을 꾀함으로써 표절을 근절하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자는 취지가 설득력을 얻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일본 진출 가능성 모색
현재 일본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음반시장이다. 연간 매출이 60억 달러(약 8조 4천억원)에 달하는 거대 시장으로 누구나 한번쯤은 탐을 낼만해 실제로 구미의 내노라는 가수는 대개가 꼭 일본 시장을 노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한국 가수의 일본시장 진출은 아직 미약하다. 일본에는 재일교포가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 가수보다는 유리한 입장이지만 지금껏 일본에 진출한 가수들 가운데 다섯 손가락 이내만 겨우 체면을 세웠을 뿐 대개는 교포위문 아니면 소규모 3류 술집 등에서 활동한 게 고작이다. 한국 가수의 일본 진출은 이성애로부터 비롯된다. <잃어버린 장미>의 주인공인 이성애는 76년 동경가요제에 참가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일본 NP 프로덕션에 픽업되어 취입한 「열창,이성애」란 앨범에서 남진의 히트곡 <가슴 아프게>를 일본어로 발표해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77년에는 일본 열도에 이성애의 열풍을 몰고 왔다. 그해 12월, 이성애는 전 일본 유선 방송대상에서 특별상을 받아 일본에서 성공한 최초의 한국가수로 기록된다.
그 전에도 정훈희가 <안개>(71년)로, 패티 김이<사랑은 영원히>(74년)로, 정미조가 <파도>(75년)로 동경가요제 참가를 발판삼아 일본 진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한 뒤라서 그녀의 성공은 척 고무적인 사실로서 일본 굴지의 TV방송은 이성애를 출연시키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그후에는 별다른 성공예가 없었다.
그후 80년대에는 "조용피루 상(조용필)"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조용필이 일본에 상륙한다. 그는 'Pax Musica"의 공연 무대를 통해 아시아 정상을 과시하면서 <돌아와요 부산항에>,<허공>,<미워 미워 미워>를 일본 땅에서도 최고 인기곡으로 만들었으며 일본 외상이 직접 그를 찾아와 치하하는 등 민간외교관으로서도 한몫을 했다.
조용필이 이처럼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노래가 엔카의 원류와 통한다는 일본 가요 관계자들의 평처럼 트로트 일색이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트로트 가수가 일본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였지만... 90년대 이후에는 소위 한국의 뉴 뮤직가수들이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그 이유는 93년부터 일본에서 일기 시작한 아시아 바람으로 인해 중국음악을 비롯해 아시아권의 음악이 관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에 고무되어 이선희,박정운,김완선,서태지와 아이들, 강수지,강산에,황신혜 밴드등이 저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일본 진출을 꾀했지만 강산에, 강수지가 명맥을 유지했을 뿐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한편 97년 한국에서 건너간 한 무명가수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박사(본명:이용석)란 색다른 이름의 이 가수는 일본 시장에서 5장의 음반을 냈으며 일본의 톱가수들도 서기 어렵다는 도쿄 무도관에서 데뷔공연을 가질 만큼 유명인으로서 일본 최대의 제약업체인 긴쵸사는 그를 CF모델로 기용하기도 하였다.
오사카,간사이 지방에서부터 일기 시작한 이박사의 선풍에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음악이 국내에서 경박한 음악으로 치부되는 이른바 "뽕짝 메들리"라는 사실로 그는 국내에서 관광가이드로 관광버스에서 마이크를 잡고 승객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것으로 유명해 MBC의 인간시대도 소개됐었다. 요즘에는 댄스그룹 클론과 모던 록 그룹 주주클럽, S.E.S가 일본시장에 진출하여 어느 정도 활약했다. 우리가수들의 일본시장 실패의 이면에는 일본의 음악 수준이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 있다는 면을 간과할 수 없다. 또다른 예로 전반적인 가수의 실력을 생각해 볼수 있다. 외모와 춤솜씨 만으로 나오는 가수가 많은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가수가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없으면 어디 명함을 못 내민다. 소위 일본에서 잘 나간다는 그룹인 X-JAPAN, Luna Sea등 Rock Band는 물론이고 Dreams Come True, Wands, Zard, B'z, Glay등의 멤버들은 모두 기타, 키보드, 드럼 등 한가지 이상 악기는 다 잘 다룬다.
일본에서 성공하는 비결로 TV드라마에 출연하거나 주제가를 부르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몇 년 전부터 나타난 현상이지만 안재욱, 김민종, 엄정화 등 탤런트 겸 가수의 활동이 나타났는데 이는 TV드라마에서의 인기를 업어 가수로서의 프리미엄을 얻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박상민의 <하나의 사랑> 처럼 TV 드라마의 주제가를 불러 히트시키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일본은 우리 나라보다 TV 방송국이 훨씬 더 많다. 도쿄의 경우 NHK가 있고 민영방송 채널로 TBS가 무려 5개, TV아사히가 3개나 있으며 니혼 TV,후지 TV, TV도쿄 등이 있고 와우와우 TV는 24시간 쇼만 방영한다. 그 중에서도 후지 TV는 드라마 왕국으로 감각적인 면을 파고들어 트렌디 드라마란 장르를 만들어 젊은 여성들을 타켓으로 하기 때문에 TV드라마에서 얻는 부가가치가 엄청 크고 파급 효과도 크다. 그래서 많은 가수들이 TV드라마에 출연하거나 주제가를 부르는 게 유행으로 아무로 나미에가 이런 케이스로 성공을 거뒀다.
또 다른 방법으로 일본에서 성공하는 방법은 CM송을 불러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CM송을 통해 인기를 얻은 조장혁과 같은 예가 점점 생겨나고 있다. CM송의 전달효과는 일본에서 특히 크다. 현재 일본의 CM송을 들어보면 누가 인기가수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이다. 예컨대 '드림스 컴 트루'가 시세이도 화장품, Zard가 오츠가 제약, B'z가 도요다 자동차, Wands가 패션 다이아몬드 회사, Zoo가 일본철도(JR)의 기업 CM송을 불렀고 이들 모두 일본서 잘 나가는 수퍼 그룹이다.
현재 일본의 음악은 아주 다양한 음악이 혼재 하고 있어 한계에 달한 느낌으로 그래서 신소재가 필요한 분위기다. 그런 면에서 볼 때 한국의 음악은 일본 음악과 분위기가 비슷하다는 장점을 살리되 민족간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신선함을 심어주면 충분히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