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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張旭鎭, 1918. 1. 8. - 1990. 12. 29.)
◇ <폐허 속에서 다시 날아오르다>
전쟁을 겪으면서 장욱진은 폭주의 습관을 들이게 되었고, "산다는 것은 소모하는 것, 나는 내 몸과 마음과 모든 것을 죽는 날까지 그림을 위해 다 써버려야겠다. 남는 시간은 술로 휴식하면서." 장욱진에게 술은 고통을 외면하는 방법이거나 잊게 하는 방법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그림을 그리다 잠깐 동안의 휴식을 위한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화가 장욱진이 매일 술만 마시고 살았던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장욱진은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술을 일절 입에도 대지 않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엔 몇 달 동안 혹은 몇 년간 일절 술을 마시지 않고(때로는 식음을 전폐한 채로) 그림만 그렸다.
장욱진이 피난에서 돌아와 집을 찾으니 살던 집은 죄다 부서지고, 화가의 그림들은 모두 불타 없어져 버렸다. 전쟁통에 오랫동안 모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했기 때문에 장욱진과 부인은 가족들이 모두 함께 살도록 하기 위해 매우 열심히 일해야 했다. 화가는 잡지에 삽화를 그렸고, 부인은 조그만 책방을 차려 살림을 꾸려나간다. 전쟁을 통해 화가 장욱진에게 집이란 각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 되었다. 장욱진은 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에도 장욱진은 화백이나 교수보다는 집 가(家)자가 붙은 화가로 불리기를 항상 희망했다. 그에게 그림은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것이었고 집은 그의 마음에 들어앉은 하나의 완성체였는지 모른다.
◇ <강가의 아뜰리에>
자청해서 교수직을 사임한 장욱진은 몇 년 뒤 자신의 화실을 덕소에 꾸리게 된다. 지금은 옛날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었지만 화가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이사할 무렵만 하더라도 덕소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이었다. 화가의 작업실인 아뜰리에에 이르는 동안 사람이 사는 집이라곤 면장집 하나뿐인 시골, 전기도, 수도도 들어오지 않는 그저 자연을 벗삼아 살아야 하는 오지에서 장욱진은 혼자 살았다. 화가는 훗날 회상하며 말하길 "나는 천성적으로 서울이 싫다. 서울로 표상되는 문명이 싫은 것이다."라고 한다. 하지만 장욱진은 사람들을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낭떠러지 같은 한강가 언덕에 집을 짓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이곳 덕소의 비와 달, 바람 그리고 덕소의 모든 것을 얘기해길 즐겨했다.
그는 스스로 입버릇처럼 늘 "나는 심플하다. 때문에 겸손보다는 교만이 좋고 격식보다는 소탈이 좋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거짓으로 겸손한 척 하기보다는 정직한 교만 쪽이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그의 평소 생각이기도 했다. 장욱진은 거짓을 미워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스페인의 유명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세계와 화풍의 변모를 가리켜 사람들은 청색 시대니 장밋빛 시대니 하고 구분하듯이, 나무가 사시사철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있지 않는 것처럼 사람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변모해가듯이 화가 장욱진의 작품 세계도 여러 차례 변해갔다. 그런데 장욱진의 변화가 다른 화가들과 좀 특이한 것은 사는 집이 달라질 때마다 그 세계가 조금씩 변해갔다는 것이다.
장욱진에게 있어 집이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에게 집이란 사랑하는 가족들이 모여 사는 곳이자, 사람의 영혼이 깃드는 곳이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살 집에 대해서 끊임없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화가에게는 자신이 살 집을 짓는 일도 곧 예술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욱진은 집을 짓는 동안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만큼 집에 대해 애정을 보였다(그에게는 집도 작품이었지만 안타깝게도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거나 보존상태가 매우 나쁜 형국이다). 화가 장욱진은 덕소에서, 서울 명륜동으로, 다시 수안보로, 용인으로 이사하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화가는 덕소의 풍경 속에서 자신의 그림이 어떤 세계를 만들 것인가 고민했다. 화가는 동경 유학 시절, 서양화풍을 모방하는 일본 화풍을 따르지 않았고, 외국의 미술을 직접 살펴보면서 자신의 세계, 자신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리려고 했다.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곳에 몰아 세워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 것도 욕망과 불신과 배타적 감정 등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달콤하게 해주는 마력을 간직한 것이다.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바람이 나의 전신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석양의 정적이 저멀리 산기슭을 타고 내려와 수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저멀리 노을이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 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
무엇인가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 강가의 아뜰리에 ..., <1965. 8. 현대문학>
◇ <그림을 통한 구도자와 동반자 진진묘>
장욱진은 덕소가 예전의 풍경을 잃게 되자 결국 정들었던 강가의 아뜰리에를 떠나 다시 서울 명륜동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도시를 좋아하지 않았던 화가는 틈만 나면 시골의 자연을 찾아 여행을 다녔다. 장욱진은 산 속의 사찰과 자연 속에서 마음의 평안함을 구했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남편과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해야 했지만 부부 사이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다고 한다. 장욱진은 부인 이순경에게 옛날 만공선사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들려주곤 했다고 하는데 "머리를 깍여 불자를 만들고 싶다. 하지만 네가 하는 공부나 우리가 하는 공부나 모두 같은 길이니라. 마누라를 잘 얻으면 재미있게 살겠다." 고 말이다. 장욱진은 자신의 작품을 팔지 않는 걸 원칙으로 했던 사람이었다. 늘 그리기만 하고, 전시회를 열어도 작품을 팔기보다는 정말 그림을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이 거저 달라고 하면 그냥 집어주길 좋아했다.
화가로 생활해 나가기 어렵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던 그였기에 아내에 대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던 장욱진은 "마누라를 잘 얻으면 재미있게 살겠다"던 만공선사의 말을 아내에게 들려주어 미안함을 전했던 것이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장욱진은 불기 하나 없는 한 겨울의 덕소 화실에서 일주일간 밥을 굶어가며 아내 이순경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이 아내의 법명을 따서 제목을 정한 <진진묘(眞眞妙)>였다. 그림을 완성하고 화가는 3개월간 앓아 누웠다고 한다.
장욱진이 평생을 두고 즐겨 그린 주제 중 하나는 가족이었다. 슬하에 2남 4녀의 아이들을 두었는데, "예술 작품은 인간의 생명처럼 무한한 고독"이라고 말했던 그에게 가족은 더할 나위 없는 방패였고, 버팀목이었다. 아내가 그러했고, 그의 자녀들이 그랬다. 장욱진의 가족은 화목했고 행복했다. 그러나 나이 오십이 다 될 무렵 얻은 막내 아들은 화가의 마음을 매우 아프게 만들었다. 뒤늦게 얻은 맏둥이 자식인지라 애지중지하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석달이 지날 무렵 아이가 정신지체아임을 알게 된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둥이 자식이 병을 앓기 시작하자 화가는 사찰을 찾아다니며 더욱 불교의 세계에 빠져들게 된다.
◇ <마음의 눈을 얻은 화가>
아들이 병을 앓을 무렵 화가는 연이어서 가족과 아이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병으로 고통받는 자식을 위한 그의 노력이었다. 화가 부부는 아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5살 되던 1979년 결국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즈음 안국동 거리에서 미술사학자 김철순이 화가 내외를 만났다. 어딜 가느냐는 물음에 화가는 아무런 내색없이 태연자약하게 죽은 아이 사망 신고하러 간다고 말하더라고 회상하며, 하도 태연하게 말하길래, 역시 달관한 사람은 자식의 죽음도 저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구나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야 그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화가 역시 자식의 죽음을 몹시 가슴 아파했던 것이다. 장욱진은 자신이 죽기 직전에야 자신이 죽으면 아들을 화장해 뿌린 곳에 함께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이승에서 못다한 부자간의 정을 나누고 싶었기 때문이었을까.
사랑하는 막내아들을 잃은 장욱진에게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왔다. 화가에게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눈에 백내장이란 병이 생기면서 점점 시력을 약화되어 갔던 것이다. 마치 베토벤이 난청으로 결국 귀가 멀었던 것처럼 화가는 눈에 백내장이 생기면서 수술을 받아야 했다. 전시회를 앞둔 장욱진은 자신이 제대로 점을 찍고, 바르게 선을 그었는지에 대해 염려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력이 약화되는 와중에 그린 그의 작품들은 화가의 염려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수 십 년을 그림만 그려왔던 그의 손은 시력의 장애를 극복했던 것이다. 화가는 몸의 눈이 아니라 늘 마음의 눈으로 사람과 사물을 보아왔다. 그는 마음의 눈으로 그리는 화가였다.
◇ <새처럼 살다 훌훌 떠나간 화가>
수안보에서 용인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화가는 늘 변함없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화가는 마치 다 자란 새가 자리를 털고 둥지를 떠나는 것처럼 훌훌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만다. 화가의 부인 이순경은 남편의 죽음에 대해서 "당신 성질처럼 푸드득, 그렇게 금방 돌아가셨다"고 회고한다. 푸드득, 그렇게 말이다. 화가는 생전에 "난 죽음에 대해 두려운 게 없어요. 오래 사는 게 장한 것은 아니나 생명을 줄일 수는 없는 거고, 기능 없으면 죽어 버리는 게 좋아. 내 기능은 그림 그리는 거니까 죽는 날까지 그려야죠."라고 말해 왔다. 그의 이런 죽음에 대한 생각은 사막을 떠도는 유목민의 세계관과 닮아 있다. 자연 속에서 나고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순환의 한 고리일 뿐 특별히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장욱진은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죽기 하루 전에 해묵은 종이 뭉치 속에서 먹그림을 가려내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아무런 미련없이 태워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유골은 화장해서 앞서 간 자식이 있는 곳에 뿌려달라고 말한다. 원래부터 특별히 정리할 만한 짐이나 세간이 없는 단촐한 그의 방이었는데도 그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늘 깔끔하게 정리해두길 좋아했다. 그런 성정 탓인지 아니면 정말 고승대덕들이 그러했다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던 탓인지 그는 자신의 그림들과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훌훌 떠났다. 하지만 장욱진의 유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생전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차마 그의 유골을 뿌릴 수가 없어서 고향 마을에 탑비를 세우고 그 안에 유골을 모시게 했다. 그 탑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심플한 그림을 찾아 나섰던 구도의 긴 여로 끝에 선생은 마침내 고향땅 송룡 마을에 돌아와 영생처로 삼았다. 천구백구십년 세모의 귀천이니 태어나서 칠십삼년 만이었다. 선생은 타고난 화가였다. 어린 날 까치를 그리자 집안의 반대는 열화같았고 세상은 천형으로 알았지만 그림이 생명이라 믿었던 마음은 드깊어갔다. 일제 땅 무사시노 대학의 양화 공부로 오히려 한국 미술에 빛나는 정수를 깨쳤다. 선생은 타고난 자유인이었다. 가정의 안락이나 서울대학 교수 같은 세속의 명리는 도무지 인연이 없었다. 오로지 아름다움에다 착함을 더한 데에 진실이 있음을 믿고 그것을 찾아 평생 쉼없이 정진했다. 세속으로부터 자유를 누린 대신, 그림에 자연의 넉넉함을 담아 세상을 감쌌고 일상의 따뜻함을 담아 가족 사랑을 실천했다. 맑고 푸근한 인품이 꼭 그림 같았던 선생을 기리는 문하의 뜻을 모아 최종태는 돌을 쪼았고 김형국은 글을 적었다. 천구백구실일년 사월.
◇ <동심의 시선으로 발견한 우리의 아름다움>
화가 장욱진은 생전에 불교의 세계와 좀더 가까운 사람이긴 했지만 늘 기독교의 진리와 불교의 진리는 다르지 않다는 말을 했다. 예수는 어린이의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 화가는 늘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었다. 화가는 늘 나이는 먹는 것이 아니라 뱉아내는 것이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일곱 살이라고 말하며 살았다. 그런 화가였기 때문에 장욱진의 그림은 작고 소박한 화폭에 단순한 주제로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그는 "작은 그림은 친절하고, 치밀하다" 며 어린이의 마음으로 바라볼 때 오히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림들을 그렸다. 그는 서양화를 공부했지만 한국화와 서양화의 구분이나 회화와 도자기, 판화의 구분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이 모든 것은 다만 예술과 생활 안에 이미 한 몸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리라.
화가는 평생을 두고 새와 나무와 가족을 그렸다. 우리 미술에서 나무를 즐겨 그린 화가는 장욱진 말고 박수근도 있었다. 박수근이 캔버스에 여러 번 유화물감을 덧칠하는 마티에르 기법이란 것을 사용해 나무를 그린 것과 달리 장욱진은 이미 칠해 논 물감을 다시 긁어내는 방법으로 나무를 그렸다. 하지만 박수근의 나무들이 잎사귀가 모두 떨어진 헐벗은 나무였던 것과 달리 장욱진의 나무들은 풍성한 잎사귀로 넘치는 생명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또다른 화가 이중섭과 장욱진은 모두 가족을 즐겨 그렸다. 두 사람은 모두 가난했지만 이중섭의 아내는 일본인이었고, 그런 탓에 이중섭은 부인과 함께 살 수 없었다. 하지만 장욱진은 가족과 아내의 돌봄 속에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장욱진은 이중섭보다는 행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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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작품소개-
1) 진진묘(眞眞妙)/1970 / 캔버스에 유채 / 33×24cm - 그림 명제인 〈진진묘〉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장욱진 화백의 부인 이 여사의 법명(法名)이다. 1970년 1월 3일, 명륜동 집에서 부인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장 화백은 별안간 덕소로 가야겠다며 집을 나섰다. 장 화백의 뇌리에는 언젠가 부인이 내 얼굴도 하나 그려주세요 했던 일이 떠올라 연초인데도 화실로 간 것이다. 화상(畵想)을 안고 덕소 화실에 온 장화백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침식을 잊고 〈진진묘〉 제작에 여념이 없었다. 1주일 작업 끝에 완성된 작품을 들고 명륜동 집에 돌아온 장 화백은 부인에게 그림을 내밀어 놓고는 쓰러져 3개월 동안이나 앓아누웠다.
2) 가족, 캔버스에 유채,17.5×20.0㎝, 1973 - 장욱진의 그림에 등장하는 주요 주제들이 거의 다 등장한 그림이다. 그가 중요시 했던 가족, 네 마리의 새, 집과 나무, 길, 붉은 해와 산 등은 단순화 시킨 십장생도의 한 단면 같기도 하다.
3) 밤과 노인, 1990, 캔버스에 유채, 41x32cm, 개인소장 - 이 작품은 오랫동안 장욱진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과 다르다. 1951년에 그려진 작품인 자화상 <보리밭>에서 서양식 모던한 신사 복장을 하고 있던 화가는 그후 40여년이 흐른 뒤 74세가 되어 여전히 인생행로를 걷고 있는 모습으로 보인다.
4) 부엌과 방, 캔버스에 유채, 22.0×27.0㎝, 1973 -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한 부분을 보는 것처럼 단순화시킨 그림이다. 방에 있는 남편과 아이는 밥을 기다리고 있지만 부엌에 있는 아내는 더 이상 먹을거리가 없어 시름에 젖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 같다.
5) 노인, 1988, 캔버스에 유채, 35x35cm- 해와 달과 소와 화가 자신으로 보이는 노인이 각기 네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 한 가운데에는 거대한 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모든 삼라만상은 공존함을 새삼 일깨워주는 것 같다.
6) 수하(樹下), 1954, 캔버스에 유채, 33x24.7cm, 개인소장 - 장욱진은 평생을 두고 새와 나무, 가족을 즐겨 그렸다. 위 그림을 보면 풍성한 잎사귀가 매달린 나무와 그 나뭇가지에 앉은 네 마리 새 그리고 그 나무 밑에서 편하게 누워 있는 사람이 있다.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나무그늘 아래누워 자연이 지닌 신비한 생명력과 나무가 주는 혜택에 감동하고 있는 듯 하다.
7) 수탉 / 1990 / 캔버스에 유화 / 41.0x32.0cm - 동물들과 아이들의 등장으로 자유롭고 천진스러운 상상의 세계로 인도한다.
8) 아기부처 / 1980 / 동판+세리그래프 / 25. 0x18.3cm - 단순하지만 왠지 마음이 정갈해지는 느낌이다.
9) 나무 / 1986 / 캔버스에 유화 /33.5x24.4cm -바랜듯한 나무의 색감, 코발트블루와 울트라마린 블루의 느낌이 직접 보면 훨씬 좋을 듯 싶다.
10) 와유 / 1978 / 한지에 마커 / 30x20cm - 이 세상의 주인공은 ‘나’이고 모든 것들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평화로운 오수를 즐기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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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욱진 연보>
1918년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에서 아버지 결성 장씨 기용(基鏞)과 어머니 이기재(李基在)의 차남으로 출생하다.(음력 1917년 11월 26일)
1922년 (5세) 일가가 서울 당주동 한옥으로 이사
1923년 (6세) 부친 별세, 고모 옆집(내수동)으로 이사
1924년 (7세)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현서울사대부초)입학하다. 공부보다 그림에 더 열중하여 다섯 살 위인 형에게 꾸지람을 자주 듣다. 까치를 많이 그리다.
1926년 (9세) 보통학교 3학년생인 그의 그림을 새로 부임한 미술교사가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주최의 <전일본 소학교미전>에 출품, 일등상을 받다. 처음으로 유화를 시작하다. 이후 미쓰코시 백화점 주최.
1930년 (13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입학하다.
1932 (15세) 일본인 교사의 공정치 못한 처사에 격렬히 항의한데 대한 징계로 경성 제2고보를 중퇴.
1933년 (16세) 중퇴 이후 집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성홍열을 앓아 충남 예산 수덕사(만공선사 선실)에서 6개월간 정양. 때마침 수덕사를 찾아왔던 화가 나혜석을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다.
1936년 (19세) 체육특기생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 육상(높이뛰기)과 빙상선수로 활약.
1937년 (20세) 동아일보주최<학생미전>에서 가작상을 두 차례 수상.
1938년 (21세) 조선일보 주최<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공기놀이》를 출품하여 특선과 사장상을 수상하고 상금으로 100원을 받다. 이를 계기로 가족들은 그가 그림그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게 되다.
1939년 (22세)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23회)하다. 4월,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학교)서양화과에 입학.
1940년 (23세)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소녀》로 입선.
1941년 (24세) 4월 12일, 이병도박사의 장녀 이순경과 결혼.
1942년 (25세) 장남 정순 출생.
1943년 (26세) 9월, 일본제국미술학교 졸업. <선전>에《언덕》이 입선.
1944년 (27세)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경기도 평택 비행장 건설작업에 동원. 이후 일본 관동군 해군본부(서울 회현동)의 경리요원으로 배속.
1945년 (28세) 장녀 경수 출생. 해방 후 국립박물관(진열과)에 취직하여 도안과 제도일. 박물관 내 관사에 거주.
1947년 (30세) 차녀 희순 출생. 국립박물관 사직. 덕수상업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 김환기,유영국,이규상 등과 '신사실파'결성.
1948년 (31세) 12월, 동인전<제1회신사실파전>(화신백화점)에 출품.
1949년 (32세) 11월,<제2회신사실파전>(동화백화점)에 《독》,《조춘》, 《面》,《마을,》《까치》,《몽》,《방》,《원두막》,《점경》,《수하》,《아이》등 유화 13점 출품.
1950년 (33세) 6.25발발 후 바로 피난가지 못하고 가족이 먼저 부산으로 피난.
1951년 (34세) 1월 초 부산으로 피난. 여름에 종군화가단(중동부전선 제8사단)에서 그림을 그리고, 종군작가상 수상.
1952년 (35세) 제4회 종군화가단전<3.1절 기념 종군화가미술전>(부산 대도회 다방)에 출품.
1953년 (36세) 피난지 부산에서 어린이 동화책의 컷을 많이 그리다.《자동차 있는 풍경》을 제작. 5월 말<제3회 신사실파전.
1954년 (37세) 3월, <제6회 종군화가전>(부산국제구락부>에 출품. 7월, 대한미협전<한국현대회화 특별전>에 출품.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 교수 취임. 동료 미대교수 노수현과 친분. 4녀 윤미 출생.
1955년 (38세) 「문학예술」지에 "발상과 방법"기고.
1957년 (40세) <동양미술전>(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출품.
1958년 (41세) 11월 20일, 동경제국미술학교 동문전인 <백우회 제1회전>(국립박물관 화랑)에《樹下》를 출품. <한국현대작가전>(미국샌프란시스코)에 출품.
1960년 (43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직 사임. 명륜동(2가 22-2)개천가의 초가집을 양옥으로 개조.
1961년 (44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 출신의 동문화가들인 권옥연, 유영국, 이대원, 김창억, 임완규 등과 '2·9동인회' 조직, 그<제1회 2·9동인전>(국립도서관 화랑)에 《산수》등 유화 2점 출품.
1963년 (46세) "덕소시절"(1963-75).
1964년 (47세) 차남 홍순 출생하다. 제1회 개인전(반도화랑, 11월 2일-8일)을 개최.
1967년 (50세) <제5회 앙가주망전>에 출품하는 등 서울대 제자들과 그룹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와 실험에 자극을 받음.
1968년 (51세) <제6회 앙가주망전>(신세계백화점 화랑)에 출품.
1969년 (52세) 3월부터 6월까지 동아일보의 「書舍餘話」란에 수필 발표. ("표현", "죄가 있다면", "발산", "저항", "나의 주변")
1970년 (53세) 정초에 명륜동집에 머물던 중 아내가 불경공부를 하는 모습에 착상, 덕소로 돌아온 후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면서 아내의 초상화《진진묘》. 이 그림을 그린 뒤, 명륜동에 돌아와 3개월간 앓아 눕다.
1972년 (55세) <한국근대미술 60년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에 《모기장》등 4점 출품.
1973년 (56세) <한국현역화가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과 <제11회 앙가주망전>(신세계백화점 화랑)에 출품.
1974년 (57세) 제1회 개인전 이후 십년 만에 제2회 개인전(공간화랑, 4월12일-18일)을 열고, 근작 중심의 유화 32점 출품.
1975년 (58세) 5월, 덕소생활을 청산 "명륜동시절"(1975-79)시작.
1976년 (59세) 불교인 백성욱 박사와 함께 시골의 사찰을 많이 찾아다녔고, 그 영향으로 《팔상도》와 《사찰》등의 작품을 제작. 잡지, 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산문집『강가의 아틀리에』(민음사)를 발간.
1977년 (60세)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스님(1892-1982)을 만나 법명 비공(非空)을 얻다.
1979년 (62세) 차남 홍순 사망. <화집발간 기념전시회>(현대화랑, 10월11일-17일)에 유화25점, 판화 13점, 먹그림 18점 출품.
1980년 (63세) 봄, 수안보의 농가를 고쳐 화실로 사용, "수안보시절" (1980-1985)시작.
1981년 (64세) 개인전 직전에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백내장 수술. <장욱진 개인전>(공간화랑, 10월 11일-17일)에 유화 20여점, 에칭판화 5점 출품. <앙가주망 20년>1,2부에 출품.
1982년 (65세) 7월 중순, 부인과 함께 여류화가들의 미국여행에 동행. 이때 가지고 간 유화, 실크스크린, 에칭판화, 먹그림으로 재미화가 김봉태의 갤러리스코프(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장욱진전>개최.
1983년 (66세) 3-4월, 부인과 함께 처음으로 유럽여행(스페인,영국,이태리,프랑스). 근작 석판화 4점과 함께 판화집 출간기념<장욱진 판화전>(연화랑, 10월 22일-29일)개최.
1985년 (68세) 엔티크 컬러 사용을 중지하다. 수안보 화실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 <한국 양화70년전>(호암갤러리)에 출품. 기관지염으로 술과 담배를 끊다.
1986년 (69세) 겨울동안(1월 중순-2월 말)부산 해운대에서 제작한 유화 8점과 먹그림, 소묘 등으로 개인전<장욱진 작품전>(국제화랑, 6월 12일-19일)개최.
1987년 (70세) 2월, 대만과 태국을 여행. 화집발간 기념 개인전<장욱진전>(두손갤러리, 5월 28일-6월 6일)개최하다. 유화 80여점 출품.
1988년 (71세) 1월에 딸, 며느리와 인도로 여행, 뉴델리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 12월, 발리섬으로 여행.
1989년 (72세) 7월, 경기도 신갈의 한옥 옆에 양옥을 짓고 입주. 가을, <한국현대화전>(미국 뉴저지주 버겐 예술·과학박물관)에 유화8점 출품. <1900년대 한국미술대표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에 출품.
1990년 (73세) 가을, 고향의 생가 방문. 미국 '한정판 출판사'The Limited Editions Club)선정 수제작(水制作) 한국관련 도서의 그림을 맡기로 위촉. 12월 27일 점심식사 후 갑자기 발병, 오후 4시 한국병원에서 타계. 12월 29일 영결식(오후 1시 수원 시립장제장).
1991년 3월, 후학들이 유골을 모신 기념비 건립(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 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