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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동, 열여섯 꽃망울 피고 진 동네
오도엽
바냇들에 굴뚝이 들어서고
외지 사람들이 마산에 와서 가장 먼저 만나는 동네가 어딜까?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리면 양덕동이다. 기차를 타고 와서 찻길을 건너면 양덕동이 맞이한다. 양덕동은 마산의 첫 인상이다.
마산에 사는 사람에게 양덕동을 물으면 뭐라고 할까?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의 공장을 먼저 떠올린다.
바냇들을 아시나요
양덕동은 산호천을 중심으로 논과 밭이 펼쳐진 농촌 마을이었다. 지금 한일합섬과 마산종합운동장이 들어선 자리가 ‘바냇들’이라고 불리던 논이다. 이곳에서 나서 자란 이 사장이라고 부르면 된다는 양덕동 토박이를 만났다. 그는 산호천 주변의 빈 땅에 텃밭을 일구고 있다. 그에게 들은 5,60년대 양덕동은 농촌 그대로다.
“여기가 다 논이야. (우성 아파트쪽을 가리키며) 저기는 밭이고. 50년대는 율림이라 했제. 마산역 아래쪽을…. 밤 율, 수풀 림을 써서. 밤나무 숲이야. 지금 (마산)MBC자리는 산이야. 소 미러(풀 먹이러) 다닌 곳이라. 저길 가면 소똥에 많이 미끄러지고 그랬제.”
그 시절을 생생히 떠올리며 향수에 젖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한다. 어린교 근처에서는 해삼도 잡아먹었다. 물이 깨끗했다는 말이다. 학교를 갈 때는 산호천을 건너서 갔다. 비 온 날은 물이 불어 징검다리가 물에 잠기기 일쑤다. 그 날도 비가 왔다. 징검다리를 건너 학교에 가려는데, 돌을 밟는 순간 짝 미끄러졌다. 물살에 몸이 떠내려간다. 이제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 목숨이 그리 쉽지는 않는다. 좀 떠밀려 내려가다가 정신을 차렸다.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팔과 다리를 마구 휘저었다. “그렇게 허우적 대다보니 물 밖으로 나온 거야. ‘살았다’라는 생각보다 ‘아, 수영을 했네.’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수영을 그 때 배웠어.”
이 사장은 양덕동에 들어선 건물들이 지어진 내력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저 ‘타워맨션’은 절대 안 무너질 기라. 저기가 지금은 평지지만 자그마한 산이었어. 아, 포크레인이 와서 산을 깨려고 하니 뿌사지나. 완전 돌인 기라. 무턱대고 지으려다 애 많이 묵었다. 돈도 많이 들고. 기반이 젤 튼튼한데 세워진 기 그래서 타워맨션이라.”
지금 봉덕초등학교는 그때에는 합포초등학교 분교였다. 봉덕초등학교 지을 때 주민들이 나서서 함께 일을 했다. 대야에 흙을 퍼다 날라 운동장을 만들었다.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3.15 마산 항쟁 때, 지금 한일합섬 로터리 앞으로 시위대가 지나간 일이라고 한다. “어릴 때 일인데도 그 기억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라. 이상하제.”
공장이 들어서고 골목이 생기다
바냇들이라 불리던 양덕동의 논과 밭도 산업화의 물결은 가만히 두지 않았다. 1960년대 중후반 한일합섬이 양덕동에 마산 공장을 짓기 시작한다. 양덕동의 바냇들은 공장으로 탈바꿈을 한다. 한일합섬을 끼고 도는 산호천 건너편에 수은탕(목욕탕)을 시작으로 집들이 지어지고, 가게들이 들어선다. 모두 한일합섬과 뗄래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시작된다.
집마다 다닥다닥 벌집 같은 셋방을 만들어 가난한 노동자를 부른다. 한참 배고플 한일합섬 기숙사 학생들을 겨냥해 떡볶이 튀김을 파는 포장마차와 분식집이 들어선다. 공장 일에 지쳐 컬컬해진 목을 찬 소주로 달래주는 선술집이 문을 연다. 봉지쌀을 파는 쌀집과 낱장 연탄을 파는 연탄가게가 간판을 단다. 한일합섬 마산공장이 제 모습을 갖춘 칠십 년대에 양덕동의 길고도 구불구불한 골목의 인생도 시작된다.
또한 양덕동 끄트머리 마산만도 매립에 들어간다. 1966년 마산시는 임해공업단지 조성을 위해 41만평의 매립 허가를 받는다. 삼양산업에 도급을 주어 준설 작업을 했다. 1970년 1월 수출자유지역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마산 양덕동이 그 첫 지역이 된다. 마산시는 임해공업단지로 조성하던 양덕동과 봉암동에 걸친 매립지에 수출자유지역 공단을 조성한다.
양덕동은 이제 농촌에서 노동집약적 경공업 중심의 공업단지로 변신을 한다. 나락이 익고, 배추와 콩이 자라던 양덕동에 높은 굴뚝이 들어선다.
1972년부터 양덕동에 사신 황갑술(78세) 할아버지의 기억을 들어본다.
“그 때 72년에 내가 (집 건축) 허가를 받았지. 여기가 전부 논 아이가. 전부 논이라고. 우리 왔을 때 목욕탕(수은탕) 집하고, 이영두 집, 두 집밖에 없었다. 73년부터 많이 들어섰지. 여기 본토배기(토박이)는 지금은 한 사람 있지. 지무영이라고. 그 사람이 오래 있었고, 그 사람이 본토배기고 우리는 객지에서 온 사람이지.”
할아버지 댁은 한일합섬 앞에 처음 들어섰다는 수은탕과 마주보고 있다. 1972년에 집을 짓고 할머니가 73년부터 쌀가게를 열었다. 할아버지는 당시 최고의 직장으로 알려졌던 진해화학을 다녔다.
할머니는 연탄을 사러 리어카를 끌고 신마산까지 다녔다. 연탄파동이 나자 연탄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성이 난 할머니는 연탄 공장을 찾아 가 단판을 짓고 쌀집 한 귀퉁이에 연탄가게도 문을 열었다.
지금은 연탄은 팔지 않고 쌀만 팔고 있다. 대형 마트와 빵에 밀려 이젠 하루 종일 문을 열고 있어도 쌀을 사러 오는 사람은 드물다.
쌀가게를 세 번 찾아갔는데 한 번도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가게 앞의 평상은 마을 사랑방 구실을 한다. 오가는 사람들이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고, 때론 소주를 나눠 마신다. 이젠 장사보다 사람이 그리워 문을 열고 있는지 모른다. 청소부 아저씨가 지나가자 할머니는 소주를 한 잔 하고 가라고 붙잡는다.
할머니는 사십 년을 장사를 하신 분답게 성격도 밝고 목소리도 커렁커렁 하다. 소주에 매실 음료수를 타서 내게도 한 잔 주신다.
“뭐, 무슨 얘기요? 우리요? 내요? 첨에 쌀만 했지. 연탄은 오자마자 안 했지. 칠십육 년도에 했지. 연탄 파동이 나가지고 연탄이 있어야제. 신마산 가서러 뭐꼬 다라이 가지고 가서러 여덟 장 가져와서 한 번 때고. 그래 리어카 가(가져) 가서러, 그래 저 저 제일극장 있는데 거 가서러, 제일여고 더 나가갔고, 그래 한번 가 가지고 한 리어카 가 가와서 그래 때고. 그래 가꼬 얼마나 보골이 난지, 연탄공장 가서 연탄 달라 안 했나.”
할머니는 직접 연탄을 배달했다. 많을 땐 사람을 쓰기고 했다. 리어카로 하루 삼천 장을 배달한다. 한손에 넉 장씩 들고 다닌다. 연탄 한 장이 1kg이니 4kg을 한손으로 들어 하루 3톤을 나른 거다.
쌀도 하고 연탄도 하셨으니 돈은 많이 버셨겠네요?
“그래도 개코도 뭐 여태 한(쌀, 연탄 장사) 꼬랑탱이가 요 모양 요 꼬라지지. (살림이) 늘도 안하고. 그래도 한일합섬 잘 돌아갈 때는 됐지만 지금은 안 돼에.”
언제 오셨는지 황 할아버지도 옆에서 듣다 흥분한 목소리로 거든다.
“한일 아(직원)들 일 할제, (장사) 참 끝발 날리고 좋았제. 한일이 떠나고 다 죽었다. 다 다 죽었어. 올해 공장 문 닫으면 끝난다. 아무 것도 없다. 요새는 쌀 안 먹나. 문딩이 자식들 뭐들 쳐먹는지. 문딩이 자식들 빵만 먹는지.”
할아버지는 한일합섬이 문을 닫고 그 자리에 공장이 들어서는 일을 몹시 못마땅해 한다.
“공장 뭉개고 아파트 들어섰제. 지랄이고. 아파트 들어갈 놈 누가 있노? 아파트 한 번 생각을 해 봐라. 아파트 좋은 게 뭐 있노. 자, 관리비가 암만 못 들어도 이런 (한일타운) 이차니 사차니 들어가면 암만 못 줘도 한 달에 돈 십만 원 이상 줄 거 아니가. 십오만 원 치면, 십오만 원 같으면 우리 할머니랑 한 달 생활비라. 그러게 소소한 월급쟁이는 이런데 못 들어간단 말이야. 이런데는, 관리비 주라하제, 뭐 주라하제 안 되는 기라. 안돼. 있는 놈이나 들어가제. 없는 놈들 들어가라 해도 못 들어가제. 공장을 만들어야제. 젊은 놈들 일자리 없어 빌빌 하제. 실업률 줄었다 하제. 다 거짓말이라. 노는 젊은 놈들 쌔버렸다.”
어디 쌀가게 연탄가게의 이야기겠는가. 일층엔 가게를 만들어 세를 주고, 이층을 달아 올려 셋방을 만들었다. 한때 양덕동 골목은 마산 어느 곳보다 삶의 활기가 넘친 곳이다. 이젠 그 때 만든 일층 가게는 셔터가 내려지고 ‘점포세 있음’의 매직글씨는 누렇게 바랜 종이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아직 철거되지 않은 칠팔십 년대 간판만이 이 곳의 어제를 떠오르게 한다.
마산의 희망찬 미래를 열어 줄 거라 믿었던 저임금 중심의 노동집약적 산업단지였던 수출자유지역의 공장들과 한일합섬 마산공장은 1990년대에 들어 더 싼 노동력을 찾아 철수를 시작한다. 자연히 양덕동도 방황을 한다.
공장이 들어서며 농촌 문화를 흔적 없이 쓸어간 양덕동, 이젠 공장이 철수를 하자 도시 서민의 골목 문화를 깡그리 청소하려고 한다.
부동산 업자들은 유통(홈 플러스, 신세계 백화점), 언론(문화방송, 도민일보), 문화(3.15 시민회관, 삼각지 공원)의 중심지 양덕동을 캐치프레이즈로 마산의 중심으로 도약한다고 선전하며 땅값을 올리려고 힘을 쏟는다.
양덕동은 몸살을 앓고 있다
이천오년 팔월, 변화의 몸살을 앓고 있을 양덕동을 찾아 나선다.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합성동을 지나 가톨릭 여성회관 앞으로 갔다. 건널목을 건너면 양덕동의 시작이다. ‘지방하천 2급 산호천’이라는 간판이 보인다. 산호천가에 어지럽게 자란 풀숲 사이로 초등학교 아이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뛰어 다닌다.
천을 따라 한쪽엔 높다란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맞은쪽엔 리어카가 겨우 다닐 만한 골목이 있다. 다닥다닥 칠십 년대 지어진 양옥들은 주변 세상과는 무관심하다는 듯 벗겨진 수성 페인트를 너덜거린 채 천 건너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다.
산호천 한 쪽을 지배한 아파트는 철조망과 나무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담을 치고 있다. 하지만 낡은 칠십 년대를 입고 사는 맞은쪽 골목은 다르다. 아들 셋 난 어머니가 축 늘어진 젖을 내놓고 감출 것 무엇이냐는 듯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 같다.
푹푹 찔 집에서 나와 골목 앞 천변으로 돗자리를 피고 더위를 쫓는 할머니,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 구멍가게 앞에서 빈 막걸리 통을 쌓고 있는 아저씨, 장기판을 마주한 할아버지와 똥 누듯 엉거주춤 쭈그려 앉아 훈수를 하느라 얼굴이 붉어진 훈수꾼. 그렇게 양덕동은 이천오년 여름을 나고 있다.
천을 따라 이어진 골목은 눈앞에 철거되다만 흉측한 한일합섬 건물을 만나면 끝이 난다. 여기서부터 산호천 오른쪽엔 한일합섬이 왼쪽엔 찻길을 바라보고 단층 건물의 상가들이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한일합섬이 한참 주가를 날릴 때에는 이곳에 포장마차만 열어도 큰돈을 번다고 했는데, 이젠 한가롭기만 하다. 날씨가 더워 모두 피서를 가서 그런가, 중국집에도 손님은 없고, 주방장과 아주머니 한 분이 선풍기도 모자라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다.
업종도 바뀌었다. 한일합섬을 상대로 하는 분식집이나 대폿집은 사라지고, 아파트를 상대로 한 치킨 집, 지물포, 부동산이 자리를 차고 있다.
산호천변 골목을 위협하는 저 아파트 자리가 한일합섬 기숙사 자리다. 이미 기숙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뭔가 흔적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찾았다. 물론 기대로 끝날 거라는 것도 안다.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경상도 곳곳에서 한일합섬을 찾아 이십년 넘게 해마다 수천의 열여섯 처녀들이 이곳으로 왔다. 스물의 꿈을 희망으로 절망으로 지새운 곳이 이곳이다.
산골소녀의 지우고 싶은 이야기
중학교를 졸업한 수천의 소녀들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전국 방방곡곡에서 해마다 양덕동을 찾아왔다.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려고 아침 낮 밤이 바뀌는 삼교대의 노동을 견디며 공부를 한 곳이 양덕동이다.
이제는 한일합섬이 지배하던 기억을 지우려고 몸부림친다. 열여섯 소녀들이 잠을 자던 한일합섬 기숙사를 뭉개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는 한일전산여고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이천오년이 가면 헐리다 남은 한일합섬 공장의 마지막 가쁜 기침도 멈출 것이다.
열여섯에 한일합섬에 입사한 정미자. 이젠 서른다섯, 두 딸을 둔 용감한 아줌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누구에게 들어라, 하며 열여섯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을 거부했다. 두 달에 걸친 설득은 번번이 퇴짜를 맞고, 마지막으로 ‘말하지 않는다고 없어지는 거야, 두고두고 후회 할 거야.’라는 말도 되지 않는 화풀이를 하고 돌아서는 찰라, 그의 짧은 단발머리처럼 다부진 입술이 마침내 열렸다.
열여섯 소녀가 간 곳은 교도소
그는 충청도 월악산 골짝에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둘, 언니가 셋,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칠남매의 여섯째다. 한일합섬에 왜 왔냐고 묻자, “가난해서 왔지.”라고 묻는 나를 민망하게 한다.
“부모님이 가라고 하지는 않았어. 그냥 가야할 것만 같았어. 당연하게 생각했지.” 충북 제천에 있는 신덕중학교에 다녔다. 한 학년이 이백 명 정도다. 인문계나 상업계 고등학교에 가는 학생들은 절반이 조금 넘었다. 나머지는 일하며 공부를 하는 산업체 학교에 가야 했다. 친구들은 충주에 있는 ‘대농’이라는 곳을 많이 갔다. 그는 집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고 싶었다. “한참 반항기잖아.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우리 아버지 술 마시는 모습에서 떠나고 싶었지. 그리고 우리 아버지가 바람을 피웠거든.”
그래서 찾은 곳이 경남 마산에 있는 한일합섬이다. 가을이 되면 전국의 산업체 학교에서 시골 중학교에 사람을 찾는 공고를 붙였다. 그 중 하나가 한일여실(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이다. 집과 멀어지고 싶었던 그는 가장 멀리 있는 한일여실에 지원을 했다.
“한일여실은 아무나 못 와. 시험을 봐야 하거든. 시험에서 떨어지는 애들도 있어.” 그만큼 한일여실은 가난해서 배움의 기회를 빼앗겨야 했던, 열여섯 소녀들에게 선망의 학교이기도 했다.
87년 한일합섬 마산공장의 기숙사는 감방보다 더 힘든 곳으로 기억한다. 한방에 여덟 명이 함께 쓴다. 방이 얼마나 작은지 여덟 명이 나란히 누워 자지 못했다. 양쪽으로 머리를 맞대고 네 명씩 누우면 딱 맞았다.
기숙사에는 5층 건물이 여러 동 있었다. 계단을 올라서면 시멘트 복도가 있고 양쪽으로 방들이 쭉 있다. 화장실과 씻는 곳은 복도 끝 쪽에 있어, 그 층에 사는 사람들이 함께 쓴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신발과 세면도구 놓는 곳이 있어. 왼쪽 벽에는 빨래 줄이 걸쳐있고 그 아래로 모포 개비 놓는 곳과 가방 놓는 데가 있지. 방문 맞은쪽에는 창문이 있어. 오른쪽에는 옷장이 있지. 방문 반 만한가? 그런 게 다섯 칸씩 위아래로 있거든. 여덟 명이서 한 칸 씩 나눠 쓰고, 두 개가 남잖아, 그걸 실장이 한 개 더 쓰고 이런 식이야.”
옷장은 개인 사물함을 겸한다. 거기에 열여섯 사춘기 소녀의 모든 것을 담아야 한다. 옷장을 열면 책상으로 쓰는 조그마한 상이 있고, 그 위고 책꽂이가 있다. 상 아래에 소쿠리를 두고 속옷이랑 티셔츠를 개어 넣어둔다. 바지는 옷장 문에 접착식 걸이를 달아 건다.
사물함이 비좁지 않아?
“뭐, 가진 게 있어야지. 옷도 별로 없어. 바지 두 개, 티 한두 장이 전부야.”
좁았지만 그 이상 지닐 것도, 감출 것도 없었다.
열여섯이면 한참 사춘기가 아닌가? 하지만 그에겐 사춘기의 고민이 들어 설 자리도 없었다.
“삼교대하며, 기숙사 학교 공장을 오가다 보면 그런 것 생각할 겨를도 없어. 오직 한 가지 빨리 졸업장 받아 이곳을 벗어나자, 뭐 이게 꿈이지. 자취하는 애들 방에 가보는 게 소원이고. 혼자 뭔가 …, 밥을 해 먹고 …, 자유스럽게 혼자 있다는 게…, 그게 ….”
말을 끊고 창문을 바라본다. 지금도 그 여고시절처럼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조심스럽게 앞에 놓인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싼다. 사르륵 찻물이 흔들린다. 찻잔으로 옮긴 눈에서 감옥으로 여겨야 했던 열여섯 소녀의 아픔이 맺힌다.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던 찻잔을 내려두고 말을 잇는다. 졸업식이 일요일이었다. 졸업식을 하루 앞둔 토요일에 사직서를 쓰고, ‘퇴사를 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졸업장을 줄 수 없다.’고 펄쩍 뛰더란다. 그래서 일요일 졸업식을 하고, 월요일 아침에 사직서를 내고 짐을 챙겨 공장을 나왔다. 얼마나 정미자 씨가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루라도 먼저 벗어나고 싶었던 공장과 기숙사, 왜 그는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을까.
기숙사의 점호
기숙사는 출입통제가 심했다. 기숙사 밖으로 나가려면 외출증을 끊어야 한다. 기숙사 사감이 있고, 각 동마다 동장이 있다. 외출증은 동장에게 말을 하고 받아야 한다. 동장은 외출 이유를 꼬치꼬치 캐묻고 허락을 한다. 평소 동장 눈에 난 학생들은 외출 허락 받는 게 무척 까다롭다. 동장 도장이 찍힌 외출증을 경비실에 보여줘야 기숙사 문을 나설 수 있다.
외출을 나가면 취침 점호가 시작되는 밤 열 시전에 들어와야 한다. 만약 시간을 조금이라도 어기는 날에는 경을 치게 된다.
외출을 나갔다 늦게 들어오면 어떻게 해?
“얻어맞지. 동장이 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 꿇고 손들게 하고, 세워 놓고 뺨도 때리고, 빗자루를 가지고 때리기도 하지. 벌 청소도 많이 해. 풀 뽑는 것 많이 시킨다. 그 다음 복도 청소.”
점호는 어떻게 하는데?
“동장이 각 방을 도는 거야. 우리는 두 명씩 줄을 맞춰가지고 앉아 있어. 동장이 방 앞을 지나가면, 방장이 ‘몇 명에 현재 인원 몇 명.’ 없는 사람이 있는지를 큰 소리로 보고를 해. 줄이 틀리면 막 뭐라고 야단을 쳐.”
기숙사 전체 대청소를 하는 날은 점호가 더 살벌해 진다. 개인 세숫대야가 깨끗한지 검사를 한다. 물때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안 된다.
“한 방에 여덟 명이 사니까 세숫대야도 여덟 개잖아. 방 앞에 여덟 개를 따따다닥 놓아 둬. 그럼 동장이 검사를 해. 지저분하잖아. 그럼 발로 냅다 차는 거야. 복도로 짜르륵 굴러가. 꼭 내가 발길질 당하는 것 같아. 눈물이 막 나. 이해할 수 없어. 군대도 아니고. 일을 하고 공부하는 우리가 왜 심하게 통제를 받아야 했는지 모르겠어. 수용소가 아니잖아.”
점호가 끝나면 기숙사 방의 불을 꺼야 한다. 기숙사 동마다 현관문도 걸어 잠근다. 군대나 교도소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기숙사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졸업식을 하루 앞두고 사직서를 내고 싶었던 마음을 알 것 같다.
공장에서 일도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어 온 학생이잖아. 일하고, 학교 갔다 오고, 열 시에 불을 끄면 공부는 언제 해?
“복도에는 불을 켜 둬. 방문을 열고 복도에서 들어오는 불빛으로 공부를 했어.”
글자가 보여?
“문 앞쪽은 괜찮은데, 뒤에 애들은 책이 안 보여. 그러면 복도에 나가. 복도에 담요 깔고 책을 봐.”
건의를 해보지 그랬어?
“(말을) 꺼내지도 못하지. 다른 동에는 졸업한 언니들도 있거든. 성인이고 직장인이잖아. 그 언니들 사는 기숙사도 불을 꺼야 해. 그런데 우리는 엄두도 못 내지.”
불은 왜 끄게 하지.
“다음 날 공장 일에 지장을 줄 까봐 그런 거지.”
공부를 하러 집 떠나온 열여섯 소녀는 여고생이 아니라 여공이 되어가고 있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사생활을 통제를 받고, 공장 일을 위해 공부마저 통제를 하는 곳이 기숙사였다.
멈추지 않는 물레
공장에서는 물레 일을 했다. 처음 입사를 하면 한 주 동안 교육을 받는다. 안전 교육과 실이 뽑아져 나오는 과정을 배운다. 교육이 끝나면 부서로 배치된다. 자기 부서로 가면 작업교육을 한다. 한 달 동안 서서 매듭을 배웠다. 실이 물레에서 내려오다 끊어지면 매듭을 지어 엮어줘야 한다. 나비매듭이라고 하는데, 한 달 내내 서서 매듭을 배워 익숙해지면 기계 앞에 선다.
타래실을 큰 자루에 담아 갔다 준다. 이 타래실이 얽히지 않게 탈탈 털어 물레에 걸어 준다. 실 끝을 찾아 매듭을 지어 이어주고, 엉키면 걷어 내주고 한다. 물레에 실이 감길 때 한쪽에 치우쳐 감기면 안 된다. 오른쪽 왼쪽을 옮겨가며 고르게 감아줘야 한다. 집에서 실타래를 발에 걸고, 실패에 감아주는 일을 큰 기계가 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일합섬에서 물레일은 수월한 일에 속한다. 물레를 한 사람이 스물네 개를 본다. 실이 가늘면 물레에 감기는 시간이 길어 편하다. 하지만 두꺼운 실을 감을 땐 정신이 없다. 기계에 실을 채 걸기도 전에 처음 건 물레에 실이 떨어진다.
“굵은 실을 거는 날은 정신이 없어. 여덟 시간 쉴 참이 어딨어. 키가 작은 애들은 더 고생이 심해. 손이 물레에 닿지를 않아. 물레를 댕기면서 일을 하지. 자연히 빨리 걸지 못하지. 물레가 돌지 않고 서 있으면 욕을 많이 얻어먹거든.”
그래서 주간에 일을 하는 것보다 야간 일이 맘이 편하다. 낮에는 상사들이 공장에 자주 다니기 때문이다. 그 때 물레가 서 있으면 욕을 얻어먹으니,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한다. 밤에는 작업자밖에 없으니, 주어진 일만 해내면 잠깐씩 기계가 멈춰도 욕먹을 일은 없다.
색깔이 있는 실을 돌리면 작업복이 그 색깔로 바뀐다. 실에 먼지가 많다는 거다. 빨간 실을 돌리면 머리카락이 빨갛게 염색을 하는 것 같고, 파란 실을 돌리면 파란 머리가 된다.
환풍은 잘 됐어?
“작업장이 늘 뿌옇지. 가는 실을 감을 땐 먼지도 작아 잘 모르지만, 실이 굵으면 먼지가 떠다니는 게 눈에 보여.”
그 먼지를 마시며 살았겠네.
“그랬지. 당시에 우리는 직업병이 뭔지를 몰랐잖아. 그 일은 계속했으면 진폐증에 걸렸겠지.”
아픈 사람은 없었어?
“당장 (증상이) 나타나는 게 아니니까 모르지. 아니 증상이 있어도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겠지. 잘 몰랐잖아. 지금 생각하니, 그 먼지 영향이 있는 것 같아. 계속 몸이 피곤했거든. 그리고 삼년 내내 구내염을 달고 살았어. 마산에 오기 전에는 그런 적이 없었거든.”
실에 색깔이 있으면 염색을 한 거네?
“화공 염색을 하지. 먼지보다 실에서 나는 냄새가 나를 더 괴롭혔어. 아주 고약한 냄새거든. 실을 담은 자루를 지게차로 실어 옮겨주면 우리가 자루를 열거든. 뜨거운 김이 얼굴을 확 덮치며, 사람을 굉장히 기분 나쁘게 하는 역겨운 냄새가 풍겨.”
물레는 다행히 기계가 위험하지는 않다. 방적과나 소목과는 안전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손을 잘리는 일이 많다.
“그냥 실이 되는 게 아니잖아. 솜 같은 걸로 오잖아. 합섬섬유는 화학약품이 들어가 만들고. 첫 공정엔 큰 기계가 많아. 큰 기계가 도는 데 손이 말려들어 가. 순간에 (손이) 잘리는 거지.”
손이 잘리면 다른 부서로 발령을 보낸다. 청소나 포장하는 일을 시킨다.
나는 여고생이에요
정미자 씨는 87년에 입사를 했다. 입사한 여름, 노동자 대투쟁을 겪게 된다. 그 회오리는 한일합섬에도 불어 닥쳤다. 그는 자신을 노동자라고 생각하지를 않았다. 공부를 하는 동안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여겼다. 노동자가 아니라 학생이라고 생각했다. 파업이 일어났지만 무관심했다.
“한일합섬이 수자(수출자유지역)나 창원공단에 비해 월급이 형편없었거든. 아마 임금인상이 큰 목적이었을 거야. 파업 뒤에 많이 좋아졌지. 월급이 올랐거든.”
87년 입사할 때 월급은 7만원 정도였다. 한 달에 특근 두 번하고, 삼교대를 하니 야간 수당이 더한 월급이다. 한달에 칠만원씩 재형저축을 학교에서 단체로 들었다. 저축을 하고 나면 남은 돈이 몇 천원이거나, 어떤 때는 마이너스가 되기도 한다.
여성 노동자가 많았던 수출자유지역을 비교해 보자. 80년 여성 평균 임금은 8만 2천원, 85년에는 15만 6천원이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월급을 받은 거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겪고 나니 월급이 십만 원이 넘었고, 졸업할 때(1990년)는 이십만 원 쯤 되었다. 수출자유지역에는 1990년도 여성평균 임금이 47만 7천원이었다. 여전히 절반도 되지 않는다.
87년에 파업이 있을 때, 공장에서 일은 못했을 거잖아?
“난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어. 3학년 언니들은 관심이 많았지. 졸업하면 곧 자기의 문제잖아. 언니들은 조합도 하고 데모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난 1학년이라 그런 생각은 못했지.”
학생 가운데 참여한 친구도 있었나?
“선생들이 엄포를 놨어. 우리들이 데모에 들어가면 학교 문을 닫겠다는 식으로. 공장에서 학생들은 다 빼내고 기숙사로 보냈어. 교장, 교감 할 것 없이 선생들이 전부 와서 고향에 가라고 차비까지 줘서 집에 보냈어. 공장 다시 돌아가면 부르겠다고.”
학교에서도 여공일 뿐
학교에서는 기숙사나 공장과 달리 학생 대접을 받았을까? 정미자 씨는 “우리를 제자로 보지 않고 돈 버는 여공으로 봤다”고 흥분을 한다. 그에게 선생의 기억은 또 하나의 상처로 남아있다.
담임선생은 대학을 갓 마치고 온 총각 선생이다. 여학교의 총각선생. 말만 들어도 설레게 한다. 거기에다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으니 얼마나 인기가 좋았을까.
“우리 반 반장도 선생을 대개 좋아했거든. 무슨 다른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웃긴 일이 많았어. 선생이 다른 애한테 관심을 나타내면 반장이 선생한테 대들거든. 그러면 선생은 조종례도 들어오지 않아. 마치 사랑싸움 하듯 신경전을 벌이는 거야. 우린 담임이 종례도 오지 않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걱정이 되겠어. 이게 어디 한 두 번 이어야지.”
한 번은 시험기간에 담임의 생일이 있었다. 시험기간이라 학생들이 생일을 챙겨주지 않았다. 담임이 그 일을 가지고 기분 나쁘다고 성을 냈단다.
“우리가 뭔가를 지한테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 지(자기) 좋고 나쁨을 우리에게 감정으로 표현을 하면 안 되지.”
학생들을 무시하며 자존심 상하게 하는 일도 있었다. 시험을 출제하면서 어렵게 문제를 낸 거다. 50점을 넘는 학생이 한 반에 한두 명이 나올까 말까 했다.
“일하는 우리 수준이 뻔하잖아. 공부 할 시간이 어딨어. 근데 지 수준에 맞춰 문제를 낸 거야. 우릴 무시하려고 문제를 일부러 어렵게 낸 거야.”
돈 버는 여공으로 취급당한 일도 있다. 월급은 저금을 하고 금요일에 한번씩 담임에게 신청해 인출을 한다. 자기 돈을 찾아 쓰는 데도 꼬치꼬치 캐묻고, 간섭을 한다. 일주일에 삼천 원 이상을 돈을 꺼낼 수도 없다. 꼭 쓸 일이 있는 데도 자기 돈 빌려주는 것처럼 인출을 해주지 않는다.
“특히 우리 담임이 심해. 한 번은 내 돈을 지가 인출을 하는 거야. 난 필요도 없는데. 지가 빌려 쓰려고 인출 했다는 거야. 어이가 없었어.”
그런데 더 어이없는 일은 그 돈을 끝내 갚지 않은 거다. 돈 얼마를 떠나서 두고두고 괴씸했다고 한다. 그게 어찌 번 돈인가? 어린 나이에 고향 땅 부모님 품 떠나 와 객지에서 공부하며, 일하며 번 돈이 아닌가.
“우리를 제자로 본 게 아니라 돈 버는 여공으로 본 거 아냐.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선생이….”
담임선생 이야기 내내 선생을 ‘지가’라고 부른다. 그의 머리엔 스승으로 자리 잡지 않은 거다. 욕도 많이 하고 강압적인 인상이 많이 남았다.
“지를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대해. ‘등신 같은 것들’ 하면서 한 번도 학생으로 대해 주지 않았어. 총각 선생이라고 좋아하는 애들이 많았는데, 그걸 이용해 먹고. 지금 다시 만나면 한 대 쥐어박고 싶어.”
골목의 기억
공장은 헐려가고, 기숙사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학교는 한일전산여고로 이름이 바뀌었다. 삼교대를 하며 공부하던 학생들은 이제 찾을 수 없다. 정은미 씨가 그 때의 기억을 지우려 하듯, 양덕동은 열여섯 소녀의 흔적을 지워가고 있다. 이젠 헐리다 만 공장의 귀퉁이는 양덕동의 흉물이 되었다.
학교 공장 기숙사를 오가며, 양덕동의 기억은 별로 없다. 기숙사 안에서 모든 걸 해결 했다. 기숙사 안에는 도서관이 하나 있고, 매점, 세탁소, 다리미실이 있다. 기숙사 지하에는 목욕탕이 있다. 밖에 나가 쓸 돈도 없다. 먹고 싶은걸 참을 수 없을 때, 기숙사 밖 떡볶이를 파는 포장마차나 분식집을 간다.
기숙사 밖에는 자주 나갔나?
“아니, 가끔 토요일 오전반 끝나고, 다음 월요일 야간에 일 들어가면 시간이 남아. 그 때 놀러 갔지. 양산 통도사도 가고, 남해 금산에도 갔어. 자주는 나가지 못했어. 휴일도 외출증을 받아야 나갈 수 있거든.”
그 때 포장마차가 양덕동에 많았는데?
“많았지. 그 앞에서 포장마차를 하면 돈 번다고 했어. 떡볶이도 팔고, 튀김도 팔고 했어. 양덕동 골목엔 먹고 싶은 걸 참을 수 없을 때 나가 군것질을 했지.”
먹고 싶은 게 많았어?
“처음엔 밥을 못 먹었어. 밥을 쪄서 주거든. 찐밥인데 어떤 날은 밥알이 풀풀 날리고, 어떤 날은 밥이 고슬고슬하지 않고 떡이 되어 나와. 주걱으로 떠서 식판에 부으면 주걱 모양이 짝 달라붙어서 있지. 그 밥 먹기가 힘들었어.”
반찬은?
“난 산골에서 왔잖아. 마산은 바닷가고. 반찬이 입에 맞질 않아 적응하느라 고생 했어. 김치에도 청각을 넣잖아. 그게 뭔지를 몰라 김치를 먹지 못했어. 미더덕찜 같은 것도 그랬고.”
골목에 나가면 학교만 다니는 또래 여고생을 볼 텐데, 그 때 기분은 어땠어?
“양덕동에선 별 느낌이 없어. 하지만 고향에 가면 느껴. 일반 학교에 간 친구들은 여고생 대접을 받아. 하지만 우린 직장인으로 알아. 질투심도 나지. 잰 나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뭐 그런 거 있잖아. 우린 고향에 가도 학생이 아니라 여공이야.”
졸업을 하고는 자신의 꿈처럼 자취를 했다. 처음엔 석전동 굴다리 밑에서 살았고, 양덕동에선 92년부터 살았다. 돈이 없다보니 친구들과 함께 자취방을 구했다. 양덕초등학교 뒤쪽에 오리동네라고 부르는 곳에 방을 얻었다. 동경전파에 다니는 언니와 함께 얻었는데, 얼마 살지를 못했다. 방에서 연탄가스가 샜다. 마침 고등학교 동창의 자취방이 옆에 있어 겨울엔 거기에 가서 많이 잤다.
“그래서 집을 옮겼지. 영선 언니랑, 계화, 은주 이렇게 넷이서 방을 구했어. 양덕시장 안쪽 세탁소 이층에. 네 명이 산다고 하면 방을 안 주잖아. 그래서 처음에 둘이 가서 계약을 하고, 한명 더 오고, 한명 더 오고했어.”
생활비는 오만 원씩 내서 함께 썼다. 방세가 한 달에 칠만 원이고, 나머지를 쪼개 생활비로 썼다.
“워낙 짐들이 없었어, 방은 넷이 살아도 좁지 않았어. 화장실은 밖에 있고, 씻는 것은 부엌에 쪼그려 앉아 씻었지.”
전기밥솥이 없어서 석유곤로에 냄비로 밥을 했다. 연탄가스가 새지 않는 건만 해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엄마의 눈물
고향 떠나 올 때 이야기 좀 하지.
“나는 솔직히 마산이 쪼그마한 진짜 충주보다 작은 시골에 한일합섬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 가지고 용감무쌍하게 가방 하나 탁 들고 나왔지. 차가 우리 마을에는 서지 않았거든. 차를 타려면 면 소재지까지 가야 해. 우리 엄마랑 걸어갔지. 울 엄마가 가방을 들어주겠대. 됐다고 하는데도. 그리 걸어가는 데 중간에 차가 지나가. (버스를) 세워 타려고 하는데 우리 엄마가 눈물을 훔치시더라고. 나는 우리 엄마 우는 모습 잘 안 봤거든. 워낙 우리 엄마는 강했고 무뚝뚝 하셨어. 엄마 눈물을 보니 이게 울 일이구나 엄마로서는 그렇겠구나 생각이 들더라. 근데 나는 그 때도 실감이 나지 않았어.”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머니보다 감정은 풍부해. 그 때 기억은 잘 나지 않고, 지금도 날 만나면, ‘니를 거길 보내 참 미안하다.’ 하시지.”
한일합섬에 입사를 할 때는 부모님이랑 함께 간다. 정미자 씨는 부모님 대신 부산에 사는 고모부님과 함께 마산에 갔다. 전국에서 몰려오기 때문에 입사 하는 날이 다르다. 한 학년이 육십 명씩 사십 반이니 무려 이천사백명이 한 해에 들어온다. 그 해에는 충북하고 전북이 제일 먼저 입사를 했다. 여기선 모든 게 입사 날짜가 우선이 된다. 방장을 뽑을 때도 같은 해에 입사해도 입사날짜가 하루라도 빠른 사람이 한다.
“경상도에 오니 전라도보다 충청도 사람들을 좋아하더라. 우리 물레 일이 수월하다고 했지. 그래선지 우리 과로 충북 애들이 많이 왔어.”
다른 지역에선 충북 애들만 수월한데로 보냈다고 수군거리기도 했다.
처음에 도착하면 부모님이랑 교육장에 모인다. 거기서 한일합섬 소개를 받는다.
“고모부랑 가는데 진눈깨비가 왔어. 공장만 소개를 해주고, 부모닌께 기숙사는 어디에 있다는 것만 알려주고, 안에를 보여주지 않았어. 보여줄 수 없었겠지.”
부모님을 돌려보내고 나면, 기숙사 방 배정을 한다. 배정을 받아 방에 가면, 세숫대야, 칫솔, 치약 같은 개인용품을 사오라고 한다. 기숙사 밖에는 나가지 못하니 전부 매점에서 산다. 한꺼번에 매점으로 몰리니 매점 앞은 북새통이다. 긴 줄에 정미자 씨도 섰다. 그 때만 해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왜 울었는지도 막연하게만 느껴지고.
“물품을 사서 방으로 돌아오는데 기분이 뭐라 해야 되노. 아, …. 그래 눈물이 막 나더라. 눈물이. 방문을 열면 신발장이 있고 그 위에 세숫대야를 놓는데…. 막 울음이 나더라. 신발장을 붙잡고 엉엉 울었어. 마구 ….”
말이 자주 끊긴다. 눈도 붉어진다. 찻잔을 잠깐 들었다 내려놓는다. 찻잔은 식은 지 오래다. 전기 포트에 물이 끓고 있다.
감잎차 다시 우려 줄까?
“아니 됐어.”
….
“내가 배정 받은 방은 졸업을 앞 둔 언니들이 있던 방이었거든. 전라도 언니가 있었어. ‘아그야, 많이 울어라. 우리도 그랬다. 우리도 첨 왔을 땐 많이 울었다. 근디 내려와서 울그라. 냄새난다.” 그러니까, 옆에 있던 언니들이 와그르 웃는 거야. 내가 신발장을 붙잡고 우니 냄새가 날거란 거지.“
그제야 엄마가 떠나올 때 왜 우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지금 내 앞에 놓인 고생의 문도 보였다.
지우고 싶었던 기억들
처음에 왜 한일합섬 기억이 없다고 했어?
“아냐. 갑자기 물어보니 생각나는 게 없었어. 아니 잊고 지내다 보니 기억에서 사라졌어. 우리 동창끼리 만나도 그 때 이야기는 안 해. 생각하지 않으니 점점 지워진 것 같아.”
처음에 한 학년이 40반이라고 했는데, 졸업 앨범에는 36반밖에 없네.
“견디지 못해 나간 친구도 있고, 남자 친구 사귀어 나간 친구도 있지. 이리 벌어선 집안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으니 다른 일을 찾아나가기도 해. 그 나이에 사회에 나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잖아. 그래서 술집으로 간 친구도 있어. 졸업한 우리는 행복해. 하지만 열 명 중에 한 명은 졸업하지 못했단 말이야. 그 친구들한테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친구가 되어주지 못한 게. 그저 빨리 졸업해 벗어나려고 했던 내가 좀 미워져. 그 때 우리 담임 같은 사람 말고, 스승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그리 많이 떠나지는 않았을 거야. 공장에서도 우리를 여공이 아닌 학생으로, 딸로 봐 준 사람이 있었으면 그러지는 않았을 거야.”
일을 하고 나서 학교를 가니 피곤해서 조는 친구들이 많다. 그러면 선생이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 잠만 잔다.’고 무안을 준다. 전라도 장흥에서 온 친구 하나는 그 말에 짐을 싸들고 나갔다. 친구들이 장흥에 찾아가 달래서 데려오기도 했다. 공장에서는 남자 직원들이 말을 잘 듣지 않으면 싸가지 없다고 때리기도 했다.
예쁘게 생긴 친구들은 주어진 일만 할 수도 없다. 일이 수월한 포장반이나 Q.C로 주임들이 뽑아간다. “내 친구도 옮겨 간 애가 있는데, (주임이) 자기를 쳐다보는 눈이 너무 싫었데. 일을 하고 있으면 옆에 와서 괜히 어깨를 만진데. 회식에 가는 것은 죽는 것보다 싫고.”
그 뿐만이 아니라 신발, 작업복을 빨라고도 한다. 피곤하다며 안마를 시키는 일도 다반사다. 학교에 가면 선생들도 마찬가지다. 그 친구는 예쁘다는 이유로 공장과 학교에서, 노동자도 학생도 아닌 폭력의 희생을 받으며 삼년을 보내야 했다.
그래도 잘 견디고 졸업을 했네.
“난 예쁘게 안 생겼잖아. 교시가 뭔지 알아?”
뭔데?
“이 시련과 곤궁을 이겨내지 못할 사람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
뭐라고?
“잘 지었지. 한일여실은 우리에게 혹독한 시련과 곤궁을 주었지. 교시에 충실하게. 학교도 공장도 기숙사도.”
지우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고 나니 어때?
“굳이 숨길 이야기도 아니야. 왜 잊으며 살려고 했는지 모르겠어. 우리 사회가 한일여실 다니는 우리를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봐 줘야 하는 게 맞잖아.”
말로 한 이야기보다 눈으로 한 이야기가 더 많다. 차마 글로 옮기지 못한 이야기도 있다. 더 묻고 싶었던 이야기도 많았다. 하지만 깊이 파고들고 싶지 않았다. 생채기를 다시 한번 후비는 일이 될 것 같아.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이 열여섯 소녀의 가슴에 무엇을 남겨 주었을까? 물음표로 정미자 씨의 이야기는 멈췄다.
못다 쓴 양덕동
양덕동 골목을 찾아 나섰다가 한일합섬 기숙사에 멈추고 말았다. 수출자유지역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빠지고 말았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의 역사의 현장을 양덕동에서 쓰지 못한 것은 평생 후회할 일이다.
수출자유지역은 당분간 그 자리를 지킬 거다. 하지만 올해를 넘기면 한일합섬 마산공장은 마산시 지도에서 지워진다. 정미자 씨가 어렵게 연 목소리는 양덕동 이야기가 여기서 멈추지 않고 계속되리라는 희망을 준다. 내 몫이었던 양덕동 골목이 이젠 우리의 몫이 된 것은 아닐까.
초고를 쓰고 난 뒤, 한일전산여고를 찾았다. 정미자 씨의 말과 당시 졸업 앨범에 나온 한일여실 교시(이 시련과 곤궁을 이겨내지 못할 사람은 이곳에 들어올 수 없다)가 새겨진 돌을 보기 위해서다.
이게 웬 일인가? 아무리 둘러보아도 보이질 않는다. 정문에 들어서면 왼쪽에 있다고 했는데.
영원히 사라지는 게 있는가 하면, 사람의 기억은 지웠다가도 되찾을 수 있다. 콘크리트 지우개로 하나씩 지워져 가는 양덕동 골목,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