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먹다
손 전화기에 “부재중” 이라는 항목에 3자가 떴다. 오전부터 계속 광주에서 온 전화였다. 하루 전에 큰형은 “만일 무슨 일이 생기면 이웃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다”고 의사를 내보였다. 어머님은 작년 7월부터 목포의 병원에서 광주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간병인이 24시간 붙어 식사와 대소변 수발을 들어주고 있었다.
광주로 가는 길도, 집으로 가야하는 길도 이제는 너무 흐릿하다.
사라진 도서관
도서관이 사라졌다
익숙했던 내 의자가 없어졌다
빌려온 책들의 반납 기일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고백컨대
책을 읽는 대신 나는
그 도서관의 책들을 한 장씩 씹어 먹었다
젖을 먹어야 할 때 그림 형제의 삽화를
초경이 시작될 무렵 데미안의 알을
머리에 피가 마르기 시작했을 때 사랑의 기술을
아무리 기다려도 피 다 마르지 않아
북회귀선의 금지된 선을, 위기의 여자를
자근자근 씹어 먹었다
그 낡은 도서관의 책들을
한 권씩 뽑아들 때마다
도서관의 갈빗대가 하나씩 뽑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책은 먹을수록 허기가 져 자꾸 먹어댔고
내가 뜯어 먹는 것이 피와 살덩이인줄
그땐 정말 몰랐다
개정판 사전도 베스트셀러도 없던
사라진 말들의 유적지
폐관시간도 없이 모든 게 무료였던
나의 파라다이스, 책만큼이나 많은 돌무더기
나의 찬란한 폐허, 낡은 도서관 내 어머니
내가 파먹은 그의 부장품들
아직도 입 속에서 우물거리고만 있는
이 경전들은 어쩌라고
사라진 도서관 한 채가 관 속에 누워 있다.(강기원의 ‘사라진 도서관’ 전문)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도서관과 같은 존재일까. 혹은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를 끌어안는 강의 존재일까?
자식들에게 생의 순간순간 밑줄 긋듯 일깨워주며 마음을 헤아려 주던 당신.
학교 진학을 하던 무렵, 광주에서의 방황, 산속의 어설픈 칩거와 목포로의 현실도피, 친구들과의 방랑, 군입대의 모든 전후의 출렁거리는 다리 옆에는 어머니의 아늑한 눈길이 나를 다독거려주었다.
아이가 맨 처음 책을 읽을 때 그 환경은 어머니에서 비롯된다고 하지만 나는 멀어진 젖무덤 대신 동네 형들의 놀이판과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교과서를 들락거렸다. 어머니는 언제나 집과 들녘의 경계에서 쉬임없이 ‘생의 한가운데’를 집필하고 계셨다. 낮에는 감꽃을 헤아리고 밤이면 보릿꺼적에 누워 별을 헤아리며 어머니의 서책장을 쉬이 넘기고 싶었던 소년은 일촌광음도 받지 못하는 어머니의 눈이 감긴 것을 확인할 뿐.
화자는 ‘책들을 한 장씩 씹어 먹’는 것 또한 어머니에서 읽어 들인 나의 삶으로 파악한다. 그러나 자식이 오만한 지식을 쌓아갈수록 어머니는 늙어가고, 그러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어머니를 파먹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의 절정은 죽음으로 장식된다.
감상자는 어머니의 말씀들, 당부들, 그 모든 말들이 내 입 안에서 페이지를 이룬다고 했다. 그리고 나나 당신이나 이때쯤 누군가의 도서관이 되어간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다.
이 끔찍한 ‘사랑의 연속’을 누가 다시 읽어줄 것인가.
5월이 그렇게 가고 있다.
주말 고향집 묵은 텃밭 한쪽. 일 년이 넘어서야 철과 관계없이 안방 장롱에서 빠져나온 고운 옷들은 화염이 되어 제 색들을 지우면서 생의 애욕같은 검은 연기를 피워올린다.
어머니는 사라졌다. 아니 지워졌다. 재빠르게 혹은 천천히 시의 운율을 다 내려놓고 하얀 백지가 되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물려받은 내 도서관 수장고에 무엇을 축적해놓고 열쇠를 누군가에게 넉넉하니 안심하고 건네 줄 것인가?
어머니는 가고 싶었다. 눈을 뜨면 고향의 빈 집을 떠올리고 잠시 눈을 감으면 아버지 곁이 그리웠으리라. 그 도서관 앞 문에는 우리가 서성이고 폐관의 뒤쪽에는 아버지의 그림자가 늘 서성거리고 있었다.
오월의 장미는 눈물이 있다던 박봉우 선배의 “석상의 노래”가 그리워진다.
눈물을 삼투압으로 빨아들인 막걸리에 취해 어머니를 괴롭히던 서른살의 구역질나는 길고 긴 밤들의 별빛을 뒤로하고 나는 진도 비끼내 득부들에서 샘축골을 지나 항냇가 밤길을 휘청거리며 돌아오곤 했다. 먹바위골 위 자미성 하늘을 보다 눈길을 돌려 돈짐재를 향하면 할아버지 할머니 묘지 위 소나무숲이 시커멓게 다가오기도 했다. 나는 그 길을 책보를 매고 9년 동안 시오길 산길을 걸어 학교를 다녔었다. 노루도 꿩도 뻐꾸기도 소똥구리 집게도 그 길의 동무였다. 방학이면 소를 몰고 절재 공알재 풀언덕에서 살다시피 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돌아와 고향의 산언덕을 비비며 십년을 보냈다. 아내는 새섬무리의 한 곳 진료소에서 근무를 했다.
그러다 아버지가 먼저 우기의 습윤을 털지 못한 채 도서관을, 왕립도서관을 폐쇄하고 말았다. 목록에 잡히지 않은 채 다 읽지 못한 장서들은 알 길이 없어졌다. 지금도 형들은 산이 어떻고 지번이 어찌하면서 분서갱부의 책임은 회피한다.
생의 수많은 이정표들이 밤바다의 물결처럼 뒤척이다 수몰한다. 오늘(5월22일)은 해인이 다섯돌 생일날이다. 어제 밤 딸기케이크를 하나 사왔다. 서울에서 온 수필가 선생의 부조금 봉투에서 2만원을 덜어 지불했다.
나이든 술동무에서 군의원후보로 첫 유세에 나선 박영상씨의 진도 철마광장은 아직도 우리시대에 광장의 언어를 상기해주었다. 그의 단단한 무기인 정직함이 빛을 잃지 않기를 기원하며 일부러 광주까지 문상을 왔던 에오스 현주네 가게에 잠시 들렸다.
언어의 연금술사들이 6월 초까지 이 광장을 흔들고 비우기를 몇이나 반복할 때 나는 거품이 빠지는 맥주잔을 몇 번이나 비우게 될까.
아내가 미역국을 무지하니 끓였다. 눈을 비비고 상앞에 앉아 축포를 터트린다. 인천에서 막내처제 전화가 왔다. 내 살같은 언어를, 삶의 정정한 페이지를 쉴 새 없이 속독해나갈 해인이를 잘 보살피는지 감시 가득한 언어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전날 첨찰산 쌍계사에 들렸다가 주지 진현스님으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어머니 부음을 알리지 못한 죄다. 홍주를 마시며 요사채만 한바퀴 돌았다.
“읍장은 정기적인 생일날” 이라고 놀리던 조재섭이 형도 전화가 없다. 장에도 가지 않고 전복을 키우는 동네 선배와 막걸리를 들었다.
해인이가 날마다 속독력을 보인다. 내심 불안하다. 울음도 떼씀도 거의 없어진다. 내 장서의 효용성이 떨어지는 걸 벌써 간파한 듯 바깥에서 친구를 사귀어 정보를 얻으려 한다.
동화책은 낡은 잡지에 불과할 뿐이다. 티브이 화면은 잠자리의 눈알처럼 휘황하다. 내 손길은 더욱 허전하고 후라이판에 빵을 데우는 팔은 후둘거린다.
어떤 연속성을 읽는다. 나는 그런 연속성으로부터 끊임없이 탈피하려고만 했었다. 사랑을 탐닉하고 사랑에 밀려난 아픔을 술로 탐닉하고 벌구멍이 늘어나는 고향집 반침 위에서만 푸른 하늘을 바라보려고만 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부터 어머니는 서서히 허물어져가고 계셨다. 예감은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인간사의 그치지 않는 바람과 같은 것. 향년 팔십삼세.
어머니는 이제 한줌의 분말가루로 언어를 분쇄하여 대전 현충원에 안장되셨다.
첫댓글 종호 글 잘 읽었네. 어머니는 영원한 우리들의 종교, 고향, 도서관, 시이고 그 모든것 일것이네. 슬픔을 정제하여 맑은 시 많이 뽑아네게나. 우리카페에 실려있는 이성복 시인의 남해금산을 꼭 읽어보길 추천하네. 남해 금산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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