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자반고등어를 굽는 여자
전 수 림
가을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한 친구가 있어 안부를 물었다. 반색을 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가느다란 전화선을 타고 정겹게 들려온다. 그렇게 어쩌다 주고받는 안부는 자연히 길어질 수밖에 없다. 유독 이번 가을이 쓸쓸하다고 엄살을 떠는 말끝에 우리들은 저녁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 친구는 시를 쓴다. 곧은 성격을 가지고 있어 곧잘 남에게 유감을 사기도 하지만, 심성은 착해서 글에서도 깨끗함이 유난히 강조되는 친구다. 글은 곧 그의 삶이고 인생이고 전부라고 생각하면서도 글이 써지지 않을 때는 좌절을 밥 먹듯 하는 자신이 한심하다며 속내를 드러낸다.
그녀는 자신의 시심을 ‘아직도 자반고등어를 굽는 여자’라 표현 했다. 굽기는 열심히 굽는데, 도대체 자반고등어가 익지 않는다며 아마 끝없이 구워야할지도 모른다고 했다. 자신의 시심을 자반고등어 굽는 일에 비유하는 것이 재미있다.
적당히 시간이 지나자 친구의 선배까지 합석하게 되었다. 여자들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전화를 걸어 집에 있는 아이들을 챙기고 어설프게 웃어 보인다.
그랬다. 그 순간 그녀의 입가에는 해방을 뜻하는 미소가 만발했다. 그리고 그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의 갈증을 풀고싶다는 속내를 드러내기도 했다. 또 그녀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화지에 좀더 고상한 색칠을 하고 싶어 했다. 그것이 가을이든 여행이든 상관없이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그 속으로 밀어 넣고싶어 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어쩌면 그것은 자신을 놓아 주는 일인지도 모른다는 생상을했다.
나름대로 고지식한 자신을 해체해야 한다는 얘기부터 몸부림치는 고독을 잘 갈무리하는 것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더구나 말이 저녁식사지 밥은 제쳐두고 빈속에 마신 술이 흥분 된 분위기로 몰고 갔다. 그것은 여행에서나 맛볼 수 있는 진한 여유, 바로 그것이었다.
바짝 조였던 벨트를 풀어 놓듯 편안하다. 친구의 자반고등어 굽는 얘기는 계속되었다. 다음에 만날 때는 그 고등어를 먹을 수 있느냐고 물으니, 불이 신통치 않아 언제 다 구울지 모르겠다며 헤죽거린다. 거의 판이 끝나갈 즈음 그 선배는 맛나게 구운 시집 한 권을 내게 내밀었다. 자신 있는 태도에 부러운 마음이 먼저 앞섰다. 나는 익지도 않은 생선을 접시에 담고 쑥스러워 고민하고 있는데 말이다.
시어 하나를 가지고 밤을 새고, 몇 달, 아니 몇 년을 고민한다는 것으로 보아 어쩌면 그녀의 자반고등어는 평생 익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익지 않을지도 모를 따뜻한 시를 품고, 평생을 살 수 있다면 그것도 꽤 괜찮은 삶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