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고선
제6회 산행일지 : 경북 상주시 화북면 속리산(눈밭과 바위능선)
일시 : 2003년 2월 17일(월) 11:00-18:00
차량 : 승용차 이용, 대구-구미-상주-화북-시어동 장암리 매표소에서 시작
날씨 : 맑고 포근함
지난 토요일에는 창녕 화왕산에서 정월대보름 행사로 3년만에 열렸던 억새태우기 구경을 다녀왔었다.
거대한 연기를 내뿜는 달집, 드넓은 억새밭의 화려한 불길, 하늘을 수놓은 불꽃놀이 등 모든 것이 감동적이었다.
그리고 더욱 장관인 것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화려한 사람의 물결 그것이었다.
비록 사람에 밀려 하산 시간이 매우 지체되었으나 그 정도의 수고로움은 그리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사연도 많았고 감동도 컸었지만 오늘은 속리산 산행일지에 충실하여야 할 것 같다.
월요일이지만 한달 동안 기다려온 산행을 위하여 아낌없이 휴가를 낸 김생곤 집사 그리고 봄방학을 맞아 모처럼 한가해진 임성운 집사님과 함께 소백산, 도락산 그리고 속리산을 두고 고민하다가 속리산으로 결정하고 9시경 북대구 IC를 통과하였다.
상행 길은 간간이 지체되었으나 김생곤 집사는 처제의 새로 산 경차의 길을 들여야한다는 핑계로 제법 빠른 속도로 몰았다.
특히 구미-상주간의 중부내륙고속도로은 짧은 거리이지만 차량이 한산하여 그 목적(신차길들이기)을 달성하기엔 안성마춤인 듯 하였다.
상주에서 고속도로를 내려 내서-화남-화북을 거쳐 용유에서 라면과 물을 준비하였다.
간간이 길가의 버드나무들은 줄기에 연두빛을 더해가고 있었으며 오늘의 날씨 역시 포근하고 비교적 맑아 산행에는 더없이 좋은 날인 듯 하였다.
곧바로 속리산 방향으로 좌회전을 하니 앞쪽으로 바위산들이 도열한 듯 산세가 확연히 달라지면서 우리들은 우리의 입을 벌려야 했다. 와!!!
상주군 화북면 시어동 장암리 매표소에서 국립공원 입장료로 1인당 1,300원을 지불하였지만 이곳은 다른 국립공원에 입장할 때 따로이 지불하는 문화재 관람료를 내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말이 문화재 관람료이지 등산을 목적으로 온 사람은 대부분이 문화재를 볼 생각도, 시간적 여유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입구에서 일괄적으로 징수하는 못된 편의주의와 돈벌이 속셈 탓에 산행 초반에 기분을 잡치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시작이 좋은 셈이다.
더구나 4,000원(경차는 2,000원)이나 하는 주차비를 아낄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매표소에서 200여미터(찻길로는 500미터) 좌측으로 올라가면 곧바로 넓은 주차장과 관리사무소를 만난다. 이곳에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문장대 3.35km. 11:00 산행을 시작한다.
아직도 눈이 제법 많이 남아 있었으나 그럭저럭 초반엔 평이한 길로 이어진다.
쉴바위를 앞두고 길은 경사도를 더해가며 땀과 가쁜 숨을 배출하게 만든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쉬기를 마음먹고 자리에 앉으면 여기가 쉴바위이다. 다른 이름으로는 풍선대라고도 하나 쉴바위가 더욱 사랑받는 이름이다. 바위 이름을 누가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참으로 산행하는 사람의 입장을 깊게 헤아린 이름이라 여겨진다.
여기까지 1.85km, 소요시간은 40분. 물도 한잔 마시고 가져온 과일도, 그리고 쵸콜렛도 먹고 기운을 가다듬는다. 20분 휴식. 베낭에서 모두들 아이젠을 꺼내어 착용하고는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여기서부터 약 700여미터는 아마 문장대 등반로 중 가장 힘겨운 부분인 듯 하다. 말수는 적어지고 땀은 비오듯하고, 가슴은 터질듯하고.. 언덕을 힘겹게 올라서는 듯 하면 조금의 내리막길이 들어온다.
여기가 백일산제단이다. 문장대까지는 0.8km. 백일산제단 앞에는 지난 겨울 쌓이고 쌓인 눈이 켜켜이 눌려 그 두께를 한자이상이나 더하고 있는 나무다리와 함께 바위틈에는 굵은 고드름과 그 아래로는 물이 흐르고 있다.
김생곤 집사가 고드름을 깨고 물을 담았다. 다리 옆에는 북한의 나라꽃인 함박꽃나무가 한 그루 있다.
다시 조금의 계단을 오르면 이제는 한시름 놓아도 된다. 비교적 편안한 길이다. 마치 봅슬레이 경기장처럼 등산로만이 통로처럼 남겨져 있고 나머지는 온통 눈뿐이다. 12시 40분 문장대 도착. 해발 1,033m.
원래이름은 구름에 잠겨있다는 운장대(雲藏臺) 였으나 세조가 신하와 더불어 시를 나누었다고해서 지금의 문장대(文藏臺)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장대는 내 생각보다는 그 넓이가 작았다. 굉장히 넓은 바위로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만 앞쪽으로 이어지는 칠형제봉과 문수봉(1,031m) 그 뒤쪽의 신선대(1,016m), 입석대, 비로봉(1,032m) 그리고 주봉인 천황봉(1,057m)으로 이어지는 바위능선과 반대편 뒤쪽으로 이어지는 관음봉(985m), 묘봉(874m) 그리고 천황봉을 바라보며 좌측에 있는 경북의 수많은 산봉우리, 우측 충북의 산봉우리들을 한눈에 조망하는 광경은 선계(仙界)를 보는 듯 하였다.
언젠가 문장대 철제사다리 아래로 떨어뜨렸다는 금도현 집사의 장갑예기를 나누며 문장대를 내려와 주능선인 천황봉을 향하였다. 이 능선은 충북과 경북의 경계로 왼쪽 발은 경북에 그리고 오른쪽 발은 충북땅을 밟고 지나는 형국이다.
주위 사방이 눈 천지이고 험한 산세여서 점심먹을 만한 적당한 곳을 찾고자 10여분을 진행한 후 문수봉 부근에서 좁은 곳이지만 등산로를 조금 비켜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고펠에 물을 부은 김생곤 집사의 목소리가 다급히 들려왔다. 라이터가 안된다는 것이다. 출발하면서 라이터를 챙겼느냐는 나의 물음에 자신있게 대답하며 가져온 라이터인데 그게 고장일 줄이야.
곧바로 문장댈 돌아간 김생곤 집사는 15분여 후에 어렵사리 불을 빌려왔다. 산에서 불을 켜는 행위는 범칙금 100만원 이하라는 문구가 산행초입에 유난히 눈에 띄었었는데... 아무래도 오늘의 사연 넘버원은 아마도 라이터 건이 될 성싶다.
빌린 라이터이고 또한 비록 비좁은 자리에서 선 채로 먹어야했지만 라면 맛은 변함이 없었다. 오늘은 디저트로 사과대신 시원한 배를 나누고 다시 출발 14:00.
지금까지의 산행에서 대부분 그랬던 것처럼 주 능선에 올라서기만 하면 비교적 편안한 능선길일 것으로 생각하였던 나의 기대는 이곳 능선에서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점심을 먹자마자 내리막 계단으로 시작하더니 신선대, 입석대에 이르는 능선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하여 체력뿐만 아니라 산행시간도 많이 소진하게 만들었다.
원래 오늘 산행의 예상은 문장대에서부터 천황봉까지 종주한 후 다시 입석대까지 돌아와 입석대에서 시어동으로 하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비로봉 부근에 이르자 우리의 계획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천황봉이 700여미터 앞으로 지척인데 우리의 발앞에는 또다시 심한 내리막과 천황봉으로 오르는 오르막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여기까지 많은 시간과 체력을 소비하며 능선길을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천황봉이 바로 손 잡힐만한 곳에 있었지만 왕복하기에는 한시간 정도의 추가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여겨졌다.
시간은 15:00. 천황봉을 배경으로 한 컷, 그리고 남은 밀감(김생곤 집사는 바위아래로 떨어뜨린 한알의 밀감까지 찾아서 먹음)을 먹고는 눈 가득한 겨울산과 그리고 체력적 상황을 고려하여 눈물을 머금고 후퇴하기로 하였다.
오후 세시 20분 오던 발걸음을 되돌려 입석대 좀 못미치자 우측으로 몇 개의 시그널이 보였다.
물론 사람 발자국의 흔적은 찾을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김생곤 집사가 50여미터 앞장섰다. 시그널이 있다며 내려가자는 앞선 사람의 소리를 따라 둘은 뒤따라 눈 밭으로 들었다.
그러나 눈은 무릎이 아니라 곧 허벅지까지 잠기고 앞서가던 김생곤 집사는 불러도 대답도 없다. 어느 곳은 거의 허리까지 눈이 차오르고 드디어 우리의 등대인 시그널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100여미터를 내려왔을까 도저히 안될 것 같아 김생곤 집사의 발길을 좌측 능선쪽으로 돌리게 하였다.
이제는 더욱 힘든 오르막이다. 눈아래 숨어있던 무수히 빽빽하게 밟혀오는 조릿대들이 그나마 걸음에 도움이 되었다.
어렵사리 본래의 등산로에 닿았다. 약 30분 이상을 100여 미터의 눈밭에서 사투를 벌인 셈이다. 시간과 체력을 생각하여 천황봉을 두고 되돌아온 시간과 체력을 다시 소모하면서 난생처음 그리도 깊은 눈밭에서의 산행을 경험한 셈이다.
오늘 산행의 두 번 째 사연이 된 눈밭이다. 신발을 털고 재정비하여 신선대를 거쳐 문장대로 돌아오니 오후 다섯 시를 가르키고 있었다.
비스듬히 누워 낮게 비취는 붉은 빛 햇살을 등지고 하산길에 접어들었다. 낮에 녹았던 길이 저녁기온 탓에 부분적으로 얼어붙고 있었다.
백일산제단, 쉴바위를 지나고 계속해서 쉬지않고 하산하여 관리사무소 앞에 이르니 오후 여섯 시. 길어진 낮시간 덕에 아직은 저녁 햇살의 기운이 남아 있다.
되돌아오는 길은 좌측의 농암방면으로 길을 잡았다.
오늘 산행이 등산길로 하산한 첫 공식등반이어서 섭섭하던 차에 비록 자동차로 돌아오는 길이지만 갔던 길을 되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가은, 마성을 지나 점촌시내에서 약돌삼겹살로 저녁을 먹었다. 상주를 거쳐 북대구에 도착하니 9시. 국립공원 속리산을 가슴에 묻고 오늘의 산행을 마감한다.
등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