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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경북시티투어] 붉은 대게먹고, 한우 먹고, 백암온천 즐기기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롯데관광여행사에서 추진한다고 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인터넷 예약을 하였다.
인터네 예약이 쉽지는 않았지만 내가 생각하는 데로 예약을 마칠 수가 있어서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롯데관광여행사가 추진하는 경북시티투어에 동참하게 된 동기는 터키여행을 함께 다녀왔던 여선생님의 전언을 듣고서였다.
품격이 높고 먹거리 여행에 그만한 여행이 없다는 것과 온천욕을 즐기면서 느긋한 삶의 뒤안길을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로운 여행이라는 것이었다.
예약 이틀 후 결재를 하라는 롯데관광여행사 측의 메시지를 받고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218,000원을 우리은행에 입금하고 여행 떠나는 날만 손꼽아 기다려 왔다.
충재 권벌선생이 과거에 응시할 때
답안지 3페이지 중의 1페이지 원안입니다.
지금의 논술과 같은 시.부.표. 책중의 책에해당하는 소과 진사시 과정입니다.
지금의
도지사인 관찰사와
박물관 소장
청암정의 아름다운 모습
기단석의 모양이 살아있는 거북의 모습과 흡사하다.
2014년 4월 28일 저녁이었다.
여행에서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날씨가 요 며칠 기간 동안 고르지 못하였다.
일요일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줄을 모르고 있었고 월요일이 지나가도록 그치지를 않아 모처럼 추진한 여행 계획이 망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내일 떠나야 하는 여행 준비물은 치약과 칫솔, 면도기와 우산만을 대충 준비하기로 하고 배낭에 넣어둔 채 잠을 청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자갈수록 눈만 말똥말똥하여질 뿐 정신은 오히려 초롱초롱하여져서 계속 누어만 있다가 그만 깜박 잠이 들었으나 밤 12:30분에 다시 눈을 뜨고야 말았다.
경주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에 견줄만한
자연과 함께하는 청암정의
동.남.북쪽으로 3개의 문이 있으며
정자 1동외에 공부방인
별채가 있었다.
고요하고 적막하여 충재 권벌선생이 거닐었던 모습이 상상되기도 하고
사색하기에는 너무 적격이었다.
창문에 다가가 창밖의 하늘을 쳐다보니 일요일부터 계속 쏟아지고 있는 억수같은 비는 그칠 줄을 몰랐다.
모처럼만에 예약한 여행이 우중 여행으로 변하지나 않을까 걱정이 눈앞을 가렸고 우산을 들고 우중을 헤매며 여행을 한다는 것도 별로 기분이 내키지 않아 근심이 앞서기도 하였다.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한 나는 29(화요일)일 아침 비몽사몽간에 일어나 컨디션을 살펴보았으나 평일과 다름을 느낄 수 있었고 눈이 까칠까칠하고 얼굴이 푸석푸석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순 생각에 잠겨있는지 케나다에서 온 아주머니는 팜플릿 만지느라 여념이 없고
주인장 아주머니는 관광객에게 한 장이라도 더 사진을 찍어 주기 위하여
노력하는 모습이 아름답기만 하다.
여우비는 오락가락하여 우산을 던져벌 수는 없고.
아침 06:00까지만 하여도 부슬부슬 떨어지던 빗방울이 동쪽 하늘부터 개기 시작하여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비가 오지는 않았으나 하늘은 먹구름과 같은 상태였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조짐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약간 여유 있는 07:00시 경에 배낭을 짊어지고 집사람과 함께 463번 버스를 승차하기 위하여 동원산업 맞은편에 있는 포이동 사거리 승강장으로 걸어갔다.
일기 때문에 발걸음이 가볍거나 여행에 대한 즐거움의 상승효과가 나타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반대로 상쇄되는 기분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하여도 포이동 사거리에서 종합운동정역까지 가는 데는 여간 불편하지가 않았다.
종합운동장역까지 직접 가는 시내버스가 없었을 뿐 아니라 버스도 지하철과 연계되어 멀리 우회하였기 때문에 시간과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식당에서 먹은 봉화 한약우 불고기는 한없이 당기만하고
소주 한 잔이 두봐 이백이 부럽지 않았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463번 시내버스 노선이 새로 신설되어 시민들의 편리성이 점점 확대되더니 2호선 지하철과 연결되는 시간이 훨씬 단축되어 쉽게 종합운동역까지 갈 수 있게 되었다.
조금 여유 있게 집에서 나선 것이 종합운동장역 6번 출구에 도착한 것은 여행 출발시간 30분 전이었다.
그러나 출발 시각인 08:30분이 다되어가도 롯데관광 버스는 6번 출구에 나타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관광버스가 주차되어있는 위치도 전혀 알 수 없어서 일부 여행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잡담을 하고 있었다.
계서당 이몽룡 생가라고 하는데, 13대 성이성 후손의 열성적인 설명에 조용하기만 하다.
집에 들어오는 손님 그냥 보낼 수 없다는 주인장,
너무 겸손하게 따끈한 차 한 잔을 억지로 들이 내미니
인정이 넘치고 시골의 소박한 내면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지에 달려있은 금낭화처럼 주인장이 소박한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고, 계서당의 추억을 영원히 가슴에
간직하고 싶은 생각이 내내
지워지지 않았다.
계서당 뒷편에 서있는 소나무 ,기개인가 지조인가?
성이성이 거닐었던 옛 모습
어려풋이 보이는 듯하고
성춘향의 절개 아름답기만 하구나.
시간을 알아본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혹시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6번 출구가 여행사와의 미팅장소가 맞나 틀리나 긴가민가하여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아도 롯데관광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출발시간 2~3분 전에야 우연히 종합운동장 안으로 들어가는 일부 사람들을 보고 따라가 들어가 보니 롯데관광버스 두 대가 주차되어 있었다.
약간의 화가 치밀어 올라 한마디 하고 싶었으나 기분 좋은 날에 하면서 참고 말았다
아무리 대형 여행사라 할지라도 가이드의 여행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있었어야 하였음에도 사소한 장소문제를 놓고 소홀히 취급한 것 같아 언짢은 기분이 들었으며 처음으로 여행에 동참하게 된 나에게 불안하고 초조감을 안겨주는 여행이 되고 말았다.
여행 전날에 전화는 아니더라도 문자메시지라도 6번 출구 어디라는 것을 명확히 명시하였어야 하였다.
막연하게 6번 출구라고만 결재당시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전날에 비가 오는 등 일기가 고르지 못하였음에도 전혀 연락이 없었다면 6번 출구에서 서성이는 여행자들은 시간이 거의 다되어가도록 버스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당연히 당황하고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생각이 들었다.
사소한 장소 문제라 할지라도 위치문제의 명확성을 가볍게 생각한 가이드의 행동이 약간 미숙한 느낌이 들었으나 차후 개선하려는 세심하고 배려하려는 자세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종합운동장 안에 주차되어 있는 버스를 발견하여 승차할 수는 있었지만 약간의 불쾌한 기분은 여간 가시지 않았다.
소나기가 지나간 후의 불영사 정자의 고요한 모습,
쓸쓸하고 외롭기만 하다.
비구니 승 모습 보일 것도 같은데 어디로 숨어 버렸는지 조용하기만 하고,
비구니 승의 도량 천년 고찰
9구룡이 지켜주리라.
29일 08:30분 정시에 종합운동장역을 출발한 버스는 미끄러지듯 서울 시내를 빠져나가 중부고소도로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약간의 불쾌한 감정과 우천이 여행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까 생각이 들었으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하였고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은 느낌이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일기가 불안정하여 하늘은 먹구름으로 덮여있는 상태였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등 종잡을 수 없는 오늘의 날씨가 여행 일정에 영향을 미칠 까봐 희비가 엇갈리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다시 영동고속도를 달리다가 만종에서 중앙고속도로로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맛깔스런 붉은 대게, 울진과 영덕에서만 대게 맛을 볼 수 있는 건지
사람들은 현지로만 몰리고 나도 바람따라 구름따라 인파를 쫒아 가서 보니
삶은 붉은 대게 상다리 휘어지게 하는구나.
외양은 호텔이라기보다는 모텔 급인 듯
미국에서 온 자매 교포, 행복하고 따뜻한 고국이 되었기를 기대해보면서
조국의 온정과 산하를 사진에 담아 추억에 남기도록 마음은 자꾸만 이끌려 가기만 하고
즐거운 여행이 되었기를 기원해 보았다.
경북 영주에서 봉화로 진입할 때는 장마 시즌을 연상할 정도로 폭우가 계속 쏟아져서 이번 여행은 예상치 않게 즐겁고 행복한 여행이라기보다는 버스 안에 앉아서 여행을 해야 하는 괴로움의 연속이 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였다.
경북 봉화군 봉화읍은 인구가 3만5천이어서 서울 어느 아파트단지 사람 수 보다도 적다고 하는 가이드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하였다.
산업화의 현실을 실감하면서 직장을 따라 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들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남아도는 농촌의 넓은 토지를 잘 경작하고 활용한다면 도시 생활 못지않게 경제적, 문화적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곳이 봉화군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특산물인 송이버섯이 봉화군을 대표하는 상표가 되었고 은어축제가 진행될 때면 전국적으로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하니 여기가 마지막 청정지역으로 꿈의 무릉도원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나 주거지들이 반듯반듯하고 형색이 밝고 부지런하여 경제적 수준은 대도시 못지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덧 버스는 달실 마을로 진입하고 있었다.
봉화군 달실 마을이 눈에 띄기 시작하여 모두들 일어서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나도 덩달아 일어나 마을의 형태와 멋스런 한옥의 구조물들을 바라보면서 감탄을 연발하였다.
낮은 산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이 들었고 배산임수장점을 거의 갖춘 명당으로 보였다.
1,013m 구주령에서 내려다 본 산하
아름답고 신비롭기만 하였다.
녹색의 옷으로 갈아입은 산하
탄생의 신비를 만끽하고 생명의 소중함을 느껴보았다.
고국 방문이 행복하고 즐거운 추억이 되었기를 기대해 보았다.
옛날 평해 고을의 해산물과 영양 고을의 농산물이 오가던 보부상들의 주요 통행로였다고 하는
이 고개는 원래 구실령으로 불렸던 모양이다.
한자어로 표기하기 위하여 구실령을 구주령으로 바꿔치기 하였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마을 뒤로는 개천이 있어 냇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마을 앞에는 넓은 평야는 아니었지만 조그마한 들이 있어서 취락형성 조건을 모두 갖춘 듯 보였으며 자급자족의 넉넉함을 유지하면서 오랜 역사를 지닌 마을이라는 것을 쉽게 간파할 수 있었다.
풍수지리설에서는 낮은 산이 마을을 감싸고 있는 지형을 금계포란형이라고 하는데 달실 마을이 그렇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가이드가 마을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닭실을 달실로 자꾸 표현하는 것을 듣고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설명을 계속 들어보니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본래 경북 지방 사람들은 닭이라는 발음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였던 듯 대다수 사람들이 닭을 달로 발음하였기 때문에 발음이 쉽게 되어 나오는 그대로인 달실로 표기하여오다가 국어 표준어법 적용 문제로 닭실로 수정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통을 강조한 경북 봉화 지역 주민들은 옛 선조들이 사용하여왔던 달실을 다시 복원하여 원래대로 표기할 것을 주장하여 현재는 닭실을 달실로 다시 수정하여 표기하고 있었다.
고유명사인 경우 표준어법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국어표준어법 규정을 어기지 않으면서도 전통적 고유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나는 대대적인 환영을 하는 바였다.
달실이라는 전통 고유 언어가 경북 일부지방의 방언임에도 굳이 달실로 표기할 것을 주장한 것은 고집스러운 일면도 엿볼 수 있었으나 전통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였을 때 매우 호감이 들었고 오늘 이후부터 나는 달실로 표기하여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솟구치기도 하였다.
달실 마을은 500년 전에 형성된 마을이었으며 현재 마을의 호구 수와 마을의 형태는 옛 모습 그대로일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으나 가옥의 구조나 겉모습은 거의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고 경주의 양동마을이나 전주의 한옥마을처럼 현대식 건물위에 기와를 올려놓고 있는 무의미한 건물들이었다.
고택다운 느낌도 덜하고 조선시대 마을이라고 하기 에는 너무 정형화되어 보인 것이 옥에 티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조선 중기에 형성된 달실 마을은 안동 권씨 집성촌이었다.
충재 권벌이 직접 지은 충암정이 있었고, 큰 아들 청암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이 있었으며 소나무 숲과 기암으로 이루어진 석천 계곡 등이 있었는데 아주 잘 보존되고 있었다.
우산이 필요한 우중을 걸어서 충재 권벌의 유물이 보관되어있었던 박물관을 관람하고 한 사람의 유물이 이렇게 많음에 놀라움과 감탄을 금할 수 없었고 개인 소장의 유물들이었지만 종가의 각별한 관심 속에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잘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박물관에 입실한 관광객들에게 종가 후손이 직접 설명하는 열정과 가문에 대한 주인의식은 우리 모두가 본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충재 권벌의 본관은 안동이고 호는 충재였다.
연산군 2년에 소과 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 때 대과에 합격하여 사관과 삼사 및 승정원을 고루 섭렵하는 등 주요 요직을 거친 인재였다.
그의 국가관과 시국관은 좌우와 동서를 떠나 중용의 도를 강조하려 하였으며 파벌에 휩싸인 당쟁을 바로 잡아보려 노력하였던 흔적들이 그의 유품과 고서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고위직에 있었을 때는 대의를 위하여 일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으며 그로 인하여 기묘사화와 을사사화의 화를 입는 등 고통의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음에도 나라를 사랑하는 충정은 한 치의 흩으러 짐이 없었고 감히 비판할 수 없었던 성역의 과오를 시정하도록 간언을 하였으나 자신에게 돌아왔던 것은 관직삭탈과 유배의 길이었고 먼 이국 같은 오지에서 생을 마감하여야하였던 충절의 일면을 보는 듯 애틋한 생각이 가슴을 쓸어내리게 하였다.
울련산 등산길이다.
산 넘어에는 금강송 소나무들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올라가려 하였으나 관리원이 못 올라가도록 차단하고 있었다.
적송 소나무는 신비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주었다.
누가 감히 조선왕조 명종 때 최고의 세도가인 외척 윤원형을 비판할 수 있었으며 왕위계승에서 완승을 거두고 절대 권력을 거머쥔 1인 지하 천하를 호령하고 서슬이 시퍼렇던 소윤의 거두 여걸 문정왕후 앞에 나아가 소윤의 전횡을 피력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조선왕조 뿐 아니라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상상할 수도 없는 초유의 사건이었다.
충재 권벌은 당시 사헌부와 사간원, 홍문관을 두루 섭렵하였던 언간으로 당연히 관리의 비리나 파벌적 전횡을 조사하고 비판해야할 위치에 있었다.
감히 누구도 선뜻 나설 수 없었던 을사사화의 정치적 격변을 바로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도 모두 말문을 닫아버리거나 낙향하여 몸보신하는데 치중하였으며 와신상담하며 정치적 상황을 저울질 하고 있었던 불안한 시기였다.
달실 마을 츨신 충재 권벌은 을사사화 때 주변에서 만류하였음도 불구하고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을 비판하고 인종의 외숙인 윤임 등 대신들을 구하는 논지를 강력히 주장하였다가 평안도 삭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울분을 참을 길이 없었다.
화가 나 온몸이 열기로 달아오른 나는 인내심을 박차고 박물관에서 밖으로 나와 충재 권벌 종택 바로 옆에 있는 청암정이라는 정자로 올라갔다.
건물의 기단석은 자연석 그대로의 거북바위를 활용하였고 거북바위 둘레의 흙을 약간 파서 연못을 만들었으며 정자에 오를 때는 한꺼번에 많은 인원이 올라갈 수 없도록 한 개의 인도교를 만들어 놓았는데 겨우 한 사람씩 줄을 서서 건널 수 있도록 다리의 폭을 아주 좁게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인도교 중앙을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교차하여 순서대로 지나갈 수 있도록 돌 판석 하나를 다리 옆으로 약간 뾰쪽하게 내밀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주 흥미롭고 해학적인 느낌이 들어 웃음을 자아내게 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사소하고 작은 것이었지만 정자를 건너갈 때 혹시나 부주의 하여 떨어지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상대 쪽에서 다리를 건너오면 터널 속의 간이 주차장처럼 비껴 설 수 있도록 약간의 여유 공간을 만들어 놓아 상대 쪽 사람이 지나간 후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하였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이었지만 상대를 배려하고 질서의식을 강조한 우리 조상들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으며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자연친화적인 사고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소박하고 사소한 것들이 바로 한국적인 멋일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으며 사소한 곳까지 꼼꼼함을 배려한 석조 기술은 우리나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석공 예술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또한 청암정의 구조나 배치를 볼 때 자연을 사랑하고 배려하려는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었으며 자연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려 하였던 선현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영양 선바위와 남이포 안내판
청암정은 본래 방이 없었다고 들었다.
처음에는 방 두 칸을 둔 정자였으나 지나가던 승려가 거북바위 위에서 불을 피우게 되면 거북이 생명을 다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방을 없애고 마루만 두었다고 하였다.
실제 정자 아래로 내려가 거북바위를 살펴보니 연못 수면위에 떠서 헤엄을 치는 것처럼 생명감을 느낄 수 있었고 살아서 움직이는 듯 보였다.
돌에 생명을 불어넣으려 하였던 지나가는 승려의 말처럼 기단석 위에서 불을 피어댔더라면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인 거북의 생동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건축에서도 이러한 생명감을 불어넣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려 하였던 것은 우리 조상들의 자연 사랑이며 자연보호의 유래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정자를 둘러싼 단풍나무 한 구루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는 듯 분홍 단풍 잎을 나풀거리며 충재 권벌의 숨결을 휘날리고 있었을 뿐 인걸은 간곳이 없었다.
우리는 봉화읍에서 소문난 한약우 한우고기와 지역의 특색 있는 양념으로 버무린 불고기를 중식으로 대신하고 달실 마을을 뒤로한 채 이몽룡 생가를 찾았다.
전북 남원을 무대로 한 춘향전은 작가와 연대를 알 수 없는 고전소설이다.
남원부사의 아들 이도령과 기생의 딸 춘향이 광한루에서 만나 정을 나누다가 남원부사가 임기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가자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이별하였다.
그 다음 해에 새로 부임한 신관 부사가 춘향의 미모에 반하여 수청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춘향은 일부종사를 앞세워 거절하다 결국 옥에 갇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이도령은 과거에 급제하여 어사가 되어 신관 부사를 탐관오리로 몰아 봉고 파직시키고 춘향을 구출하였다.
이도령은 춘향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하여 백년해로를 한다는 고전 소설의 해피엔딩적 드라마틱한 내용이었지만 사실 이도령이나 성춘향은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
이몽룡이라고 하는 가공의 인물이 실존 인물처럼 등장하는 경북 봉화군 봉화읍 이몽룡 생가 계서당을 들러보고 야릇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지자체의 숨은 꼼수라고나 할까 좋은 의미에서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성이성을 이몽룡으로 대입시킨 내용은 어디까지나 정황이나 추측에 불과한 내용일진데 계서당을 등장시켜 13대 종손이 땀을 흘리며 육성으로 설명하는 의도가 아주 흥미로웠고 재미있어 보였다.
계서당을 빠져나온 우리는 비를 맞으며 동서를 관통하는 태백산을 넘어 36번 도로를 따라 불영 계곡을 넘기 시작하였다.
장대같은 비는 한시도 멈추지 않아 불영사에 도착할 때까지 어두움의 밤길을 해쳐나가는 용감한 기사들처럼 난공불락의 어두운 시야를 확보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불영 계곡을 수없이 넘나들었지만 비구니의 전당인 불영사를 직접 들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모처럼만에 비를 맞으며 불영사로 가는 길은 태풍과 같은 비바람이 나무들을 정신없이 뒤흔들었고 폭포수와 같은 계곡 물은 사자의 포효처럼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대며 계곡 옆구리를 사정없이 강타하고 있었다.
도로바닥은 산위에서 흘러 내려온 우수들로 바다처럼 흥건히 고이기 시작하였으며 지체하였다간 119에 구조신청을 하여야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보폭을 크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불영사에 도착한 나는 조용하고 고요한 평화의 세계를 비로소 느낄 수 있었고 비구니승은 물론 개미새끼 한 마리 움직임도 감지하지 못한 채 부처님의 자비와 미소 짓는 모습만을 상상할 수 있었다.
삼라만상의 변화는 저마다 생각 나름이겠지만 불타오르는 정념과 육신을 불살라 불타의 경지에 이르려하였던 비구니승의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 생각이 들었으며 주변의 상황을 외면하고 면벽 수련하느라 인기척에도 꼼짝하지 않고 수련에 정진하는 비구니 승들의 모습이 멀리서 보이는 듯하였다.
불영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연못에 있었던 9마리의 용을 쫒아내고 그 자리에 사찰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어 불용사라 하였으나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질 무려 부처형상을 한 뒷산 바위가 사찰 앞의 연못에 비쳐 불영사로 개명하였다란 전설이 깃든 사찰로 천축산 아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천년 고찰이었다.
불영사는 비구니의 참선 도량이라고 평소에 들어왔으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 이번 여행 때는 꼭 가보리라 마음을 먹고 있었던 차에 하늘도 기뻐서 비를 뿌리며 환대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나의 발자국 소리가 비구니 승 귓가에 들려 수련하는데 되레 방해가 되지는 않을까 염려되어 소리 없이 불영사를 빠져나오면서도 있는 듯 없는 듯이라는 단어들이 새삼스레 귓가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동안 마음속에 찌들었던 묵은 찌꺼기들을 벗겨낼 수 있는 공간으로서는 불영사만한 사찰은 없으리라는 확신이 들었고 나의 숨소리조차도 참선 도량에 방해 될 까하여 숨죽이며 경내에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인생이란 바람 같고 뜬 구름 같으며 있는 듯 없는 듯 스쳐가는 것일 것이라고 평소에 생각을 하고 있었으나 비구니 승들의 삶이 또 다른 자연의 섭리에 충실한 삶의 일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가슴을 뭉클하게 하였고 세상을 등진 채 살아가는 비구니 승들의 삶을 보고 삶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어느 것이 정답이고 어느 것이 오답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까는 알 수 없을 것 같았으며 인생은 수수께끼이며 의문투성이라는 말이 머리를 스치면서 다시 한 번 지난 과거 삶의 의미를 뒤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불영사에서 다시 울진 성류굴로 출발하였다.
쏟아지는 빗줄기는 더욱 굵어져서 요란한 소리가 귀청을 어지럽게 하였으며 주차장은 빗물이 넘쳐 강물처럼 넘실거렸다.
성류굴은 오래전에 가보았기 때문에 억수로 쏟아지는 우중을 뚫고 관람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머리를 혼란스럽게 하여 발걸음이 주춤하여지기 시작하였다.
사실은 우산을 받치고 우중을 뚫고 걸어가야 하는 것이 엄두가 나지 않기도 하였다.
신발은 이미 물이 스며들어 양말이 젖었고 우산은 있었지만 바람과 집중 폭우 앞에서는 촛불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성류굴 관람을 포기하고 차속에 주저앉고 말았다.
버스는 다시 우중을 뚫고 저녁 식사를 위하여 식당으로 가고 있었지만 여행에 대한 희비가 엇갈려 흥미를 점점 잃어가고 있었다.
저녁식사의 특별 메뉴는 붉은 대게였다.
가이드가 안내한 좌석에 앉아 붉은 대게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바로 앞좌석에 앉은 사람은 재미 교포 자매였다.
언니는 하와이에서 거주한 하상례 교포였고 동생은 캘리포니아에서 거주한 정엔지 교포였다.
교포자매는 성격이 아주 활달하고 쾌활하였으며 막걸리 한 잔 하시겠느냐고 말을 걸어올 정도로 붙임성이 좋았다.
오랫동안 고국을 떠나 타국인 미국에서 거주해서였을까 발랄하면서도 활발하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얼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막걸리 한잔을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여보고 싶고 미국생활의 장단점을 물어보고도 싶었으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것이 아닌가 하여 더 이상 접근은 실례인 것 같았다.
각자 식탁 앞에는 삶은 붉은 대게 두 마리씩이 올라와 있었다.
영덕 대게보다는 작고 색깔은 붉었으나 먹음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 게 등을 열어 젓가락으로 휘저어도 보고 게 발을 잘라 열 손가락을 움직여가면서 속살을 굵어보기도 하였으나 입에 들어온 것은 아주 미미한 게살에 불과하였고 먹은 것 같지 않는 느낌이 들었다.
저녁을 마치고 백암온천 성류파크호텔로 들어갔다.
호텔은 건물 구조와 장식이 호텔이라기보다는 모텔 급의 여관으로 보였으며 오래된 건물의 낡은 시설과 어둡게 장식된 벽지의 색깔은 마음마저 어둡게 만들었다.
그러나 온천수는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상급수로 느껴졌다.
룸의 시설은 노후 되고 낡았으나 팔팔 끓는 온천수를 보일러로 순환시키고 있었는지 방바닥은 뜨끈뜨끈하여 나른한 피곤함을 쉽게 풀어주었고 하룻밤을 더 휴식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였다.
첫날은 비가 억수로 와서 망친 하루였다면 둘째 날은 최고의 화창한 날씨 때문에 인생 최고의 날을 맞이한 듯하였다.
비가 갠 후의 날씨는 모든 만물이 새로 태어난 것처럼 신비로웠고 탄생의 신비를 목격한 듯 자연의 생기를 느꼈으며 여행의 즐거움은 최고의 정점을 달리고 있었다.
백암온천 성류파크호텔에서 1,013m 고지 구주 령을 넘어 영양 쪽으로 올라가는 고개는 최고의 환상적인 경치였으며 내가 산 정상에서 내려다보았던 네팔에서의 광경과 너무 흡사하여 탄성을 지를 번 하였다.
온 산을 덮고 있는 나무들은 녹색의 옷으로 갈아입은 채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으며 햇볕에 달구어져 반사되어 나무 사이로 되돌아오는 빛은 비밀스럽고 신비롭기까지 하였다.
도로 양쪽에는 낙락장송 금강 송 소나무들이 양팔을 벌리고 있었는데 마치 선녀들이 춤을 추는 듯 하늘을 가리고 있었으며 두보가 읊은 천상의 별유천지 무릉도원은 바로 이곳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구절양장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행자들의 탄성에 신이 난 기사는 구주 령 정상에서 잠깐 버스를 멈추었고 사막에서 지친 낙타에게 목을 축이게 하는 카라반(Caravan)처럼 인자한 모습으로 여행자들의 불편한 사항을 긁어주기도 하였다.
다시 버스는 영양 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는데 금강 소나무생태경영림의 장관은 마음을 동요시키고 황홀하게 하였다.
비가 오지 않았다면 울련산 정상으로 더 올라갈 수도 있었고 주변 관망을 감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아쉽기만 하였다.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환상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에 도취하기도 하면서 출렁다리를 건너 울련산 소나무생태경영림에 들어가 빼어난 소나무들의 자태를 더 감상하고 싶었으나 예약된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