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경신학연구소의 신학지인「성경의 신학」에는 그동안 소중한 글들이 실렸다. 「진리의 성령」을 필두(筆頭)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그리스도인의 예배」, 「이스라엘의 율법」(통권 4호-2권 2집) 등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 사는 삶에서 중심되는 주제들을 논하였다. 이제 다시「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현 철학이나 교의신학의 '인간론'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는 성경의 표현방식에 집중되었음을 미리 밝혀 둔다.
그것은 먼저 '인간(人間)이란 무엇인가'와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나누는데서 출발한다. 인간이라는 말은 세간(世間) 혹은 민간(民間)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세상(世上)과 세간(世間)이 다르고, 백성(百性)과 민간(民間)이 다르듯이 사람과 인간이 다름에서 이 글은 시작한다. 이에 본 호의 주제는 '사람이란 무엇인가'로 사람의 유무형적 형질에 관한 논의를 다루려고 한다. 그리고 언제가 될 지 모르지만 기회가 닿는대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루게 될 것이다.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통해서 사람의 유무형적 형질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곧 본 논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희랍어 성경에서 자주 회자된 '소마', '프쉬케', '사르크스', '프뉴마'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사람의 형질과 관련된 이러한 표현은 물론 희랍어어로 표현되었지만 희랍사상과는 다소 거리를 보이고 있으며, 필자는 희랍어 성경에 나타난 개념을 좇아 정리하였음을 미리 밝혀 두고자 한다.
희랍어 성경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확신 속에서 우리는 사람에 대한 이러한 표현들 역시 그릇됨이 없음을 확신한다. 물론 성경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이 기록된 진리의 지식 체계라는 논증을 한 바 있다. 이에 우리는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통해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몸으로 번역되는 소마와, 육체로 번역되는 사르크스, 목숨으로 번역되는 프쉬케, 그리고 영으로 번역되는 프뉴마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물론 이러한 주제를 개별적으로 다루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곧 소마(몸)가 무엇인지를 그 자체로는 도저히 알수 없다. 이것은 성경은 물리학과 같은 류의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소마와 사르크스, 소마와 프쉬케, 소마의 프뉴마, 사르크스와 프뉴마의 상호관련된 방식을 통해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 이는 녹색칠판에 흰분필로 쓰느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이러한 이해에 대해 필자는 사람의 유무형적 형질이라 명명했다. 다시말해 사람의 유형적 실체로서 소마와 사르크스를, 그리고 불가시적 실체로서 프뉴마와 프쉬케를 구분하였다. 이후에 논의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를 통해서는 이런 형질과는 다르게 사람의 의식 혹은 내적 현상과 관련된 누스, 프로네오, 카르디아, 디아노이아, 에피두미아 등에 대해서 고찰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사람과 인간을 구분하여 논의하는 방식은 지금까지 철학이나 신학적 이해와는 다른 것이다. 이렇게 구분짓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 한국성경신학연구소를 아껴주시는 정명숙 집사님께서 필자가 본 논의의 주제를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삼은 것에 '사람이란 무엇인가'로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는 하신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필자 곁에는 많은 사람이 있지만 정집사님과 김옥수 권사님과 같이 여러모로 진리이해에 도움을 주시는 경우는 드물다. 따라서 이 자리를 빌어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이 일에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조금은 어려워 보이기도 하는 이 논의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희랍어 성경은 물론이려니와 히브리어 성경에서 너무도 자주 사용되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무슨 내용이든지 이해하려면 가장 먼저 낱말풀이가 되어야 한다. 이는 그 낱말의 뜻이 명료하지 않으면 한 문장도 제대로 이해되기는 커녕 도리어 곡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대말, 비슷한말 등을 고려하여 내용이해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르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원어 성경에 입각해서 그 본래의 뜻을 가감없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이 누구나 쉽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교회의 현 상황에서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말에 대해 '목사가 될 것도 아닌데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반문할 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라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최우선 과제는 누구나 성경을 읽고 해석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거짓 목사나, 무식한 목사나, 혹은 여러 이단들에 대해 미혹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덮어넣고 믿기만 하면 된다는 무식한 자들의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도행전에 나타난 베뢰아 교인들과 같이 가장 신사적인 모습의 그리스도인이 다 되어야 마땅하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김기동을 주축으로한 베뢰아 집단이 문제가 되지만, 희랍어 성경에 나타난 베뢰아 교회의 성도들에 관한 누가의 기록에 따르면「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니라」(행17)와 같이 사도들의 전한 말씀을 간절히 받기는 하나 이를 확신에까지 이르기 위해 성경을 상고하는 아름다운 모습은 만대에 귀감이 될 만한다.
예로부터 지식이 없는 민족이나 사람은 대부분 주체적인 삶을 살지 못하고 겨우 목숨 부지하며 사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다. 중국은 주전 1000년경부터 역사이해를 책을 통해 전해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가장 오래된 책이 주후 1145년(인종 23) 무렵 김부식(金富軾)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삼국사기가 한국 최초의 역사서이다. 물론 야사로 전해내려 오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그러나 성경은 자신의 무지를 정당화 시키기 위해 지식을 무시한 예는 결코 한 번도 없다. 16세기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에 버금가는 한나를 생각해 보라. 한나는 신사임당보다 2500여년 전 사람으로 이미 앞선 지식인이었다. 그도「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했을 정도로 당대에 앞선 지식인(知識人)이었다.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어부 베드로조차도「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분명 성경은 지식이 없어 망하는 경우에 대해서 경고를 보내고 있다. 곧「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를 잊어버리리라」(호4)하셨으며, 또한 이스라엘이 그리스도를 배척한 일과 관련해서 바울도「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다」(롬10)라 한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들이다. 만약 이들이 진리의 지식에 대해 무식하고 더군다나 세상의 초등학문에서조차 무식하다면 결코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배워야 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진리의 지식에 착념하여 배우고 확신한 가운데 살아감이 마땅하다. 그리스도인들의 배움은 이론과 실천으로 구분된 이론을 배우는 것이 아니다. 오직 경건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배우므로 항상 시대를 앞서가는 그 시대의 참 지식인 상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진리의 성령이 함께 하시므로 언제든지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된 자들이다. 따라서 앞으로 논의되는 주제에 대해 차근차근 읽어 나가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이해될 수 있도록 쉽게 쓰였다. 사실 어렵다고 하는 것은 알지 못한다는 것과 일치한다. 알면 쉬운 법이다. 다만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렵게 느끼게 된 것이다. 따라서 쉽기 위해서 알아야 하고, 알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사(基督敎史)를 돌아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무식하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부패되고, 또 이단들이 속출하여 사람들을 미혹하므로 사회문제가 된 예가 많다. 또 세상에서 진리의 기둥과 토대가 되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인들에 의해 온갖 손가락질과 구설에 올라 수모를 당한 것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배우고 확신한 거해야 한다.
이제부터라도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이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과 같이 하지 말고 풍성한 결실을 맺는 좋은 밭들이어야 할 것이다. 내일의 소망은 오직 진리에 있다. 이성적 인간을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할 궁극적 가치인 진리의 지식에 착념하여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는 자들만이 소망이 있다. 이에 한국성경신학연구소(韓國聖經神學硏究所)는 오직 진리의 지식에 착념하는 학술 단체라는 점이다. 따라서 배우지 않는 사람은 확신에 이르기는 커녕 도리어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트러블메이커만 될 뿐이다.
이 점을 명심하고 사람의 유무형적 형질과 관련하여 참된 지식을 얻어 진리의 지식에서 자라 가기를 바란다. 물론 이 연구가 전부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현재로서 최선일 따름이다. 본 논의와 다른 것이 성경을 통해서 확인되고 밝혀진다면 언제든지 개혁되고 수정되어야 마땅하다. 이에 거리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므로 바라는 것은 이 글을 대하는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진리의 성령을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을 제대로 깨달아 가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05. 3. 13. 月悟 남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