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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럴까? 죽음은 그저 한 순간일 뿐일까?
'욱아, 보고싶구나. 다시 널 볼 수 있으면 좋겠구나"
이처럼 간절한 소망의 말씀이 외할머니께서 제게 남긴 마지막 말씀이 될 줄 몰랐습니다. 1998년 여름 외삼촌으로 부터 한 통의 다급한 전화가 왔습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단다." 오랜 세월 우리 옆에서 말동무도 해주고 맛나는 음식도 만들어 주시던 꼬부랑 할머니와는 이 세상에서 다시는 못 만난다는 서글픈 통지였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갈까요? 죽는 것은 그저 한 순간일 수 있지만, 죽은 자가 가야할 길이 멀고 멀듯이, 산 자에게 남겨진 죽은 이와의 추억도 먼먼 길을 더듬어 가야합니다.
지금이야 그러지 않지만, 돌이켜 보니 어린 시절 저는 죽는다는 것을 서글퍼하고 죽음 너머의 것을 떠올릴 때는 목덜미가 서늘해지곤 했습니다. 간혹 식은땀에 흠뻣 젖어 꿈에서 깨어나 건너방에서 주무시고 계신 엄마 아빠의 곤한 모습을 확인하고야 안심하고 다시 잠에 들 수 있었으니까요.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나면서 뭔가 남겨놓고 떠나게 되면 유령이 되어 헤매인다죠? 안식하지 못한 영혼이 지상에 남겨둔 것을 찾아 간혹 우리들의 일상 속에 찾아와도 우리는 유령과 조우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이 온 것 조차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데 상상해보세요. 추억을 더듬으며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고 있을 때, 조용히 옆에 앉으며 "괜찮다. 애야. 다 좋은 추억이였어. 미안해 할 것 없단다. 그래도 넌 내 귀여운 손녀딸이야. 울지마라."라고 말씀하시며 등을 쓸어주시는 할머니의 영혼이 곁에 와 있다고 상상해보세요. 그저 무섭기만 한가요? 아님 그렇게라도 꼭 다시 한 번 재회하고 싶을 정도로 그리움이 사무치시나요?
그래요. 사랑하던 사람이 죽고 나면, 산 자들과 정을 떼기 위해 으스스한 기운이 남아있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스민하고들 하지요. 그래야 애절한 마음도 접고 산 자들은 산 자들 나름대로, 고인을 저 먼 먼 세상으로 보내드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말이죠. 남아있는 그림움이 울컥 솟구치는 순간들과 맞닥뜨리는 순간들은 어쩔 수 없어요. 제 외할머니는 등이 몹시 굽었어요. 너무 나이가 많으셔서 병원에서는 백내장 수술도 해줄 수 없다고 했지요. 그런 외할머니가 당시의 어두웠던 우리 부엌에서 탕수육을 만들어주시고, 제가 공부할 때는 옆에 앉아 밤도 깍아서 입에 넣어주시곤 했어요. 그런데도 저는 할머니에게 심술만 부렸어요. 할머니의 눈에 자꾸 끼는 고름같은 눈꼽이 싫었고, 할머니가 드시지도 않고 박하사탕을 하얀 거즈 수건에 싸아두시는 것이 싫었어요.
아, 너무 제 이야기만 너무 늘어뜨렸군요. 사실 [유령이 된 할아버지]란 그림책을 소개할까 했는데,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라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잠시 잊어버렸네요.
에스본이란 아이가 있었어요. 그림 속에서 자고 있는 저 아이가 바로 에스본이죠. 그런데 최근 에스본에게는 슬픈 일이 있었지요. 평소 심장이 안 좋았던 에스본의 할아버지가 그만 길을 가다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거예요. 에스본은 펑펑 울었고, 에스본을 달래기 위해 엄마는 "할아버지는 천사가 되어 하늘나라로 가셨단다." 말씀하시며 실의에 빠진 에스본을 달랬어요. 장례식이 있던 날, 에스본의 아빠는 관 속에 누워있는 할아버지를 보고 슬퍼하는 에스본을 위로하며 "땅 속으로 들아가시면 흙이 될거야."라고 말씀하셨지만, 에스본은 천사 이야기도 흙 이야기도 믿을 수 없었지요. 바로 그 날밤, 그림에서와 같이 할아버지가 에스본이 잠든 사이 에스본을 찾아와 서랍장 위에 앉았답니다.
에스본은 눈을 뜨고 할아버지를 보고 놀랐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쟎아요? 할아버지 혹시 유령이세요?" 에스본의 물음에 할아버지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그런가보다." 라고 대답합니다. 에스본은 자신이 갖고 있던 유령책을 꺼내고 유령은 벽을 드나들 수 있다는 구절을 읽고는 할아버지도 벽을 드나들 수 있는지 시험해 보죠. 에스본의 엄마, 아빠가 잠든 옆 방으로도 쑥쑥, 다시 에스본의 방으로도 쑥쑥,,,, 유령이 된 할아버지를 보는 에스본은 잠시 슬픈 기분을 잊었습니다.
그런데요, 그런데요. 할아버지 표정이 정말 어두워요. 무릎에 깍지를 끼우고 앉은 에스본은 슬퍼하는 할아버지를 보고만 있었어요. 그날 잠을 이루지 못한 에스본은 들뜬 마음으로 아침 식사를 하면서 엄마 아빠에게 지난 밤에 할아버지가 오셨다고 말씀드리지만, 엄마 아빠는 에스본의 그리움이 헛것을 보게 했다고 생각하며 유치원을 하루 쉬게 합니다.
그날 밤에도 할아버지는 어젯밤에서 에스본 앞에 나타나셨어요. 에스본은 할아버지에게 '우후후후' 소리를 내보라고 부탁합니다. 할아버지가 "우후후후"라고 소리내자 에스본은 다시 깔깔거립니다. "우아, 할아버지 대단해요!" 그렇지만 할아버지는 시큰둥하기만 합니다.
"무얼 빠뜨리고 갔는지 찾아봐야겠다. 에스본아." 할아버지는 이 세상에 남긴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금방 생각해낼 수 없었어요. 그래서 에스본과 함께 전에 살던 집으로 갔습니다. "음, 뭘 빠뜨렸더라?" 할아버지는 골똘히 생각했어요. 그러자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많은 지난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형의 빨간 자전거를 물려받았던 것, 에스본의 할머니와 사랑에 빠져 입맞춤을 했던 일, 에스본의 아빠가 갓난아기였을 때 할아버지의 새 양복에 오줌 쌌던 일.... 그래도 그래도 할아버지가 빠뜨리고 간 것은 이런 것은 아니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옛 추억을 더듬으며 말씀해주실 때, 에스본은 자신이 몰랐던 할아버지를 더 많이 알게 되었어요. 할아버지가 박제된 코끼리가 있던 커다란 박물관을 좋아했던 것, 할머니와 단 둘이서 비행기로 모로코에 가서 낙타를 구경했던 일, 아무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이단 것을 알면서도 빈 병에 편지를 넣어 바다에 띄워 보냈던 일. 하지만 아직도 할아버지가 남겨두고 간 것은 이런 일이 아니였습니다. 이 세상에 남겨둔 것을 찾아온 할아버지 유령을 매일 밤 기다리는 것이 에스본의 즐거움이 되었지만, 에스본의 부모님은 에스본이 헛것을 본다고 믿으면 걱정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할아버지가 밤이 깊었는데도 나타나시지 않자 에스본은 실이에 빠져 기다리다 못해 할아버지를 직접 찾아 밤거리로 나섭니다. "할아버지ㅣ 할아버지 계세요?" 그렇지만 그 어디에도 에스본의 할아버지는 계시지 않았죠. 할 수 없이 자기 방으로 돌아온 에스본은 서랍장 위에 앉아 계시는 할아버지를 보게 되죠. 에스본은 조금 심술이 났는데, 할아버지는 싱글벙글 웃고 계십니다. "할아버지 뭐가 그렇게 좋으세요?"
"응, 우리 에스본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리니 할아버지 마음이 편안해지는구나. 그래 무얼 남겨놓았는지 이제야 기억이 났단다." 에스본은 할아버지가 드디어 잃어버린 것을 찾게 되어 좋았지만, 이것으로 마지막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는 사실에 우울해졌어요. "에스본, 할아버지와 함꼐 했던 즐거운 때를 이야기 해주겠니?" 에스본은 낚시 가서 단 한 마리도 물고기를 잡지 못하고 돌아왔던 추억, 할머니가 간 요리를 해주었지만 내키지 않아 할아버지와 함께 얼굴을 찌푸렸던 기억을 이야기합니다. 가만히 조용한 미소를 띠우며 웃고 계시던 할아버지는 에스본의 손을 잡고 "그래, 바로 그거야. 네가 말한 그 모든 일들, 그리고 말하지 않은 다른 것들". 이라고 말씀하셨지만, 할아버지의 얼굴에서 미소는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추억을 나누고 잠깐 울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에스본에게 착한 아이가 되라고 했고, 에스본은 가끔 할아버지를 생각할거라 약속합니다. 이제 에스본을 찾아올 수 없는 할아버지는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고 에스본의 곁을 떠납니다. 할아버지가 에스본의 귀에 후 하고 바람을 불었고, 그 바람을 에스본은 발가락 끝까지 느끼게 되었죠.
가까운 이의 죽음을 다룬 그림책 중 수작으로 평가받는 [유령이 된 할아버지]는 어린이들에게 죽음이란 어렵고 무거운 문제를 쉽고, 따듯하고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가슴 뭉클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독자가 어린이들이기 때문에 작가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어둡고, 무겁고, 두려운, 대면하기 싫은 문제를 담담하게 보여주기 위해 섬세한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지요. 옛 시간 속의 추억을 꺼내본 뒤 부둥켜 안고 우는 장면에서도 '에스본과 할아버지는 서로 껴안고 잠깐 같이 울었답니다.'라고 '잠깐'이라는 표현을 쓰고, 에스본은 할아버지에게 늘도 자주도 아닌 '가끔' 할아버지를 생각할거라고 약속합니다. 그럼으로써 지나치게 무겁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림 역시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조와 단순화된 윤곽선들로 전체적으로 따듯한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책의 책장을 넘기면서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낍니다. 외할머니가 어둔 눈으로 제가 쓰던 헌 공책에 몽땅 연필로 그리신 자화상, 마치 다섯살 아이가 그린 것처럼 쭈빗쭈빗 머리가 뻗혀있고, 귀가 크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유독 길었던 그림이 떠올랐기에 말입니다. 어리석게도 전 할머니의 유품을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답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제 사진을 거즈 수건에 싸서 베겟속에 넣어두셨다고 하는데도 말입니다.
가끔 할머니가 꿈 속에서만이라도 찾아와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으로 잠에 들곤 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건데, 할머니가 야껴둔 박하사탕, 그거 제가 가끔 몰래 훔쳐먹었어요. "할머니 용서해주실거죠? 사랑해요."
첫댓글 그림을 볼 수가 없어요.
그러게요.... 다시 정리해서 올려야겠어요...
아이에게 죽음을..... 이야기 하고 싶어서 읽어주려고 샀는데.... 아이보다는 제가 감동먹은 책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