譜學講座를 始作하면서 - 名門華閥 동방이학의 종사이신 김양감선생님, 예학의 태두이며 기호학파의 거두이신 김장생 선생님이 우리 조상이며, 문묘배향이 두분이고, 형제대제학, 3대대제학 배출가문은 우리 광산김씨뿐이다.
광산김씨 역사는 약 1200년쯤 되며, 종족의 숫자는 백만이 넘는다. 조상님들은 학문적으로 畿湖學派이며, 人本을 중시하는 인문학에 뛰어났다. 정치적인 노선은 서인계열이었으나 당리당략에 의한 당쟁에 휘말림이 없었고 공신책록에 의한 勳舊派가 아니고 도덕과 학문을 숭상한 士林派였다. 시조할아버지 金興光은 장차 國亂을 豫知하고 왕자의 지위를 버린 채 무주 서일동 현 담양군 대전면 평장동에 遁世寓居하시어 후손들의 번영을 마련하여 주셨다. 할아버지의 陰德에 기인하여 후손들이 번창하여 三韓甲族, 名門巨族, 禮文宗家로 자리매김되고 있으며 名臣巨儒와 忠義烈士들이 줄을 잇고 東方理學의 宗師 文安公 金良鑑선생님, 조선예학의 泰斗이며 기호학파의 巨頭이신 沙溪 金長生선생님이 우리조상님으로써 儒學의 代統을 계승하고 국민순화와 학문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우리조상님들은 어떠한 역사적인 사건속에서도 대의와 명분을 생명력으로 하여 국가와 사회발전에 기여한 명문의 전통은 역사속에 찬란하다. 겨레의 스승을 제사하는 文廟配享 18賢 중 우리조상님이 두분이나 되고 또한 父子 名賢으로 유명하다. 宗廟에 배향된 補翊功臣이 세분이고 , 전국 쉰한개의 서원에서 여든두분의 조상이 배향을 받고 있다. “三政丞而不如一大提學” 三政丞而不如一大提學(삼정승이불여일대제학) : 정승 세명이 대제학 하나만 못하다. 이라는 대제학이 열한분이며 예문관, 홍문관 양 대제학이 일곱분이고 형제 대제학, 삼대 대제학 배출가문은 우리광산김씨뿐이다. 相臣으로는 고려조 12平章을 비롯하여 조선조에 영의정이 두분, 좌의정이 한분, 우의정이 두분이며, 관리의 표상인 청백리가 네분이고, 인재의 등용문인 湖當이 세분이며 부조묘가 열세분, 시호를 받으신 분이 쉰여섯분이다. 登壇에 오른 대장이 아홉분이요,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의한 經筵官이 열두분이며, 조선조 문과급제자가 이백예순다섯분이다. 仁厚溫和한 婦德이 조선제일의 왕비였음에도 불구하고 짧은 생을 마친 숙종왕비 仁敬王后와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위난을 구하였던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장군을 비롯하여 어머님을 위하여 유배지에서 『九雲夢』을 쓰고 임금의 방탕함을 바로잡기 위하여 『謝氏南征記』를 쓰는 등 목적소설로 우리 근대 소설문학사에 찬연한 업적을 남기신 西浦 金萬重선생님 등이 우리 광산김씨 조상님이다.
현재 중국정부에서 추진중인 東北攻征에 대한 우리 정부의 대응을 보면서 문정공 金台鉉 조상님과 文敏公 金光轍 조상님을 다시한번 생각해본다. 아버지 문정공은 원나라에 외교사절로 가서 원나라 황제와 당당히 맞섰고, 아들 문민공은 원나라 황제의 처족을 杖刑으로 다스려 죽임으로써 불의한 권력 앞에 정의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국왕의 諡號에 원나라에서 충성충자를 붙여야 하던 시대에 屬國의 進貢使가 元帝에 항명했던 문정공과 元皇后의 庇護아래 無所不爲했던 부패권력을 응징한 문민공의 氣槪는 공직자의 참된 도리를 교훈으로 일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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