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담당하시는 집사님이 안 오셨나보네. 오늘은 다른 분한테 잘라야 겠네요”
지난 14일 주일 오후 서울 구로구 조선족교회(서경석 목사) 2층 로비는 미용사 13명이 머리를 손질하는 대형 미용실이 됐다.
세심하고 능숙하게 머리를 만지는 손길은 모두 전문 미용사가 아닌가 싶을 정도지만, 머리 손질을 하고 뒤를 돌아보며 누군가에게 ‘괜찮냐’는 눈빛을 보내는 걸 봐서 이 일이 직업이 아닌 것을 짐작할 뿐이다.
▲미용사 자격증이 있는 분도 있긴 하지만, 모두들 초보에서 지금 실력에 왔다.©뉴스미션 |
조선족동포 “찾아와 주는 마음이 고맙죠…”
매달 둘째 주마다 조선족교회를 찾아 조선족동포들의 머리를 손질하는 이들은 충신교회(박종순 목사) 내 미용봉사 동아리 미사랑 회원들이다.
2008년 마지막 봉사인 14일에는 2시부터 5시까지 무려 60명 이상이 이들의 손에 머리를 맡겼다. 머리를 자르는 봉사자나 이들을 찾아온 조선족 동포나 모두 만족하기는 마찬가지다.
봉사단이 조선족교회를 찾은 후부터 매달 이곳에서 머리를 손질하는 김문식(가명)씨는 그야 말로 ‘단골’이다.
18년 째 한국에 거주하면서 최근에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청소를 하고 있는 그는 “머리 스타일이 맘에 드냐”는 질문에 “스타일도 스타일이지만 이 마음이 얼마나 고맙냐”면서 “깔끔하게 해 주시고 정말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했다.
머리 손질이 끝나자 김 씨는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잔뜩 뽑아서 놓고 간다. 이발소 가면 9천원인데 음료수라도 사드린다면서…
미용 초짜들, 이제는 능숙한 솜씨 자랑
교회 내 봉사 동아리가 많이 있지만 미사랑은 조금 다르다. 의례 의료봉사단은 의사, 간호사, 약사 등 직업전문인들의 봉사단이듯 미용봉사단도 미용사들이 모여야 되는데, 미사랑에는 미용 초짜들이 모였다.
미사랑은 독특하게 처음부터 미용사가 아닌 사람들을 모집해 매주 교육을 하면서 미용 봉사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미용 초짜들이 머리를 자른다니 너무하다’는 우려를 싹 없애는데 걸린 시간은 1년 반.
교회 내에서 미용을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봉사를 시작해 처음에는 손이 덜덜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웬만한 커트와 파마는 문제없다고 자신만만한 이들이다.
자녀들 다 출가시키고 미용을 시작한 권사부터 장로, 집사까지 다른 동아리에 비해 오히려 50대, 60대가 훨씬 많다. 20명 남짓 매주 화요일 저녁마다 모여 1년 반째 미용을 배우는 이들에게 미용은 삶의 활력소다.
▲세심한 손길은 여느 미용사 솜씨 못지 않다.©뉴스미션 |
아내와 자녀들 머리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김종원(68세) 집사는 “미용은 어디가든 할 수 있지 않느냐”며 “봉사하면서 맘이 편하니 너무 좋고 즐겁다”면서 쉴새 없이 남자 손님이 오면 커트를 하고, 여자 손님이 오면 바로 커트할 수 있도록 준비 작업을 했다.
최근 다시 활동을 시작한 그룹 R.ef 멤버 성대현 씨의 모친이기도 한 변정희(58세) 권사는 “자녀들 다 여의고 이렇게 봉사할 수 있는게 큰 기쁨”이라면서 “처음엔 다른 사람 머리를 만진다는 걸 상상도 못했는데 좋은 선생님한테 배워서 이렇게 실력이 좋아졌다”고 선생님에게 감사를 건넸다.
이지연 집사, 봉사 하고픈 강한 열정 미사랑 창립으로 이어져
미용 생초짜들을 데리고 미용 봉사를 시작할 결심한 선생님은 도대체 누굴까? 청년부에서 젊은이들을 모집해 가르쳤다면 모를까, 장로, 권사, 집사들은 배우는 게 아무래도 느릴 수도 있는데 말이다.
미사랑 봉사단 창립의 원동력이 된 선생님은 홍대에서 미용실 ‘The Style’을 운영하기도 있는 이지연 집사(45)다.
이 집사는 크리스천 연예인으로도 잘 알려진 서단비를 비롯해 박미선, 양희은 등 연예인들의 스타일을 담당하고 있는 유명 스타일리스트이기도 하다.
3년 전 절친한 지인 박미선, 송은이, 이성미의 전도로 처음 충신교회에 발을 디딘 뒤 그는 미사랑을 창단할 뿐만 아니라 충신교회 내 연예인 성경공부 모임을 구성하는 등 초신자라고 볼 수 없는 리더십을 보였다.
고집에 센데다 한 달에 한 번씩 강화도 보문사를 찾아 108배를 올릴 정도로 불심이 가득했던 그녀였지만, 한번 복음이 들어가자 그런 열정과 고집이 선한 일에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봉사를 하고 싶은 마음에 의료봉사단과 함께 몽골 해외단기선교를 떠나 현지인 미용을 했는데 반응이 너무 좋아, 미용봉사단 조직을 생각하게 됐다.
▲이날은 연말이라 그런지 유난히 성도들이 많이 찾아, 마감시간 5시 딱 맞춰서 끝났다.©뉴스미션 |
하지만 미용사라고 나서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고, 미용봉사를 원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기로 했다.
그래서 모인 것이 현재 미사랑 멤버들이다. 1년 반 동안 함께 가르치고 배우면서 봉사까지 하고 있는 이들은 베스트 팀웍을 자랑한다.
배우는 이들은 가르치는 이지연 집사의 마음을 고맙게 생각하고, 이지연 집사는 바쁜 중에도 매주 시간을 내 배우는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받으면서 서로에게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이다.
이지연 집사는 “함께 봉사를 하면서 서로의 모습에 더 은혜를 받게 된다”면서 “늘 내 자신이 변화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이 새롭게 해 주시는 걸 기대하니 감사할 뿐”이라고 고백했다.
미사랑은 내년 4월 해외단기봉사를 계획 중에 있고, 국내에서는 앞으로 조선족교회 뿐 아니라 지방교회나 단체 등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고 있다.
연말이라 그런지 평소보다 많은 이들이 찾아 3시간 동안 손 놀릴 틈 없이 가위를 잡고 내내 서 있느라 피곤할 만한데도 전혀 내색 없이 뒷마무리까지 깔끔히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이들이 따뜻한 손길을 필요로 하는 많은 곳에 전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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