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랜드(Neverland): <피터팬> 동화에 나오는 이상의 땅, 꿈의 나라. 최근 <피터팬>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그린 영화<네버랜드를 찾아서>가 상영중이도 함.
교정을 마치고
지창영
교정을 마친 원고가
피바다를 이루고 있다.
한 편의 글을 완성하기까지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나
잘못 심어진 글자들은
사랑니 뽑듯 뽑아 버리고
비계처럼 실없는 말장난은
조이고 조이며
병든 생각은 종양 수술하듯
가차없이 잘라내고
어혈처럼 막힌 글줄
부항으로 뚫으면
검붉은 피가 솟구친다.
뽑아내고 깎아내고
조이고 잘라낸 자리에
전장처럼 흥건한 잉크 자국들
하루하루가 아픈 까닭은
교정의 연속인 까닭인가
메스처럼 겨누고 있는 펜 앞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나를 죽이고
또 다른 나를 심고 있는가
송전탑 (13)
- 노을 속에서
지 창 영
천 년 같은 하루가 무너져 내릴 때
선혈이 낭자한 서쪽 하늘 지고
산마루에 버티어 서 있다.
어둠이 채찍처럼 감겨들기 전
썰물처럼 내려간 사람들은
꿈 속인 듯 먼 산 바라보고
몽유병 속에서 오가는 이들이
아름답다 찬양의 말
한 마디씩 남기고
서둘러 귀가를 준비하는 시간
그 뿌리 깊은 떨림을 짐작하고
눈물 흘리는 이도 간혹 있어
아름다움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천 년의 죄 홀로 짊어지고
하늘로 하늘로 피를 뿜는다.
다시 맞는 첫날에
이오장
달려온 한 해가 풀리지 않고
마주하는 바람 매섭기 그지없다.
짧아진 햇살 아래
허공에 기댄 겨울나무는
차가운 그림자 품고
서릿발 돋친 비탈에 깨금발 섰구나.
강 건너 저 멀리 언덕엔 무슨 꽃밭일까
향기 품어 들려오는 웃음소리
어지럽게 흩날리는 구름으로 건너와
허물어진 내 언덕을 일으켜 세운다.
어떻게 물을 건널까
띠배 한 척 엮지 못하고 건널 다리를 찾지만
산 그림자 내린 둑 위엔
철새들이 먼저 자리 잡았다.
이젠 어디로 갈 줄 몰라
하루 종일 강가를 서성이다 한밤 지새우고
별빛 찬란한 새벽하늘 우러러
창공을 향해 홰치는
닭울음소리 듣는다.
섬은 이름만 남고
-이무기 우화
이오장
청량산※ 기슭에 숨어살던 이무기가
슬금슬금 내려오던 날부터
인천 송도 앞 바닷물은 말라간다.
소금밭엔 함초가 새빨갛게 돋아나고
우짖던 갈매기들 보이지 않는다.
파도소리에 잠들었다가
뱃고동 따라 아침을 열던 갯말 사람들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꺾인 돛대에 걸친 그물이 안개 피워 올린다.
바다를 삼켜가는 이무기 머리에
우람한 뿔 하나 둘 돋아나고
하늘 향해 불길 뿜어내는 날
날아가던 철새 우수수 떨어져
한 줌 재로 날리는가.
이제 섬은 이름만 고이 남았고
갯벌은 황토로 매워져
줄긋는 깃발 펄럭인다.
어디를 둘러봐도
바닷물 보이지 않는 바닷가
용을 잡으려 사방에서 몰려든 사냥꾼들이
제 발자국 세여 가며
박은 말뚝 무수히 솟아나
저녁놀 붉게 피워 올린다.
※청량산 - 인천시 연수구에서 승도를 내려다보는 산
푸른 꽃병
유회숙
꽃병 하나
홀로 외롭다
목에 걸린 노을이
무심결에 입을 열면
생기는 거리
내면의 입덧도 거리가 있음일까.
우울에 갇힌 잃어버린 시간들
전부를 담을 수 없는
마치 문신같은 눈물을
돌아본다, 소리없이
노을 속에 묻어야 하리.
슬픔도 익으면 꽃이 되는 줄
그날이 오면
향기도 빛깔도 다 스며든
아름다운 상처
슬픔은 꽃이 되리라.
그만큼의 거리에서
유회숙
서해로 가는
창 너머를 본다
바닷물 빠진 갯벌에
한 마리 게가 되어
한나절을 간다.
하얗게 무리지어
꽃처럼 피어나는 파도
풍경너머 허공은
풍경을 감싸안고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의 거리에서
풍경이 되고
그만큼의 거리에서
허공이 되고
그만큼의 거리에서
그대와 나
돌아보는 모습은 겹쳐있다.
눈 감아버린 장승
오정수
동구 밖 고갯길에 마을 지키던 장승
언제부턴가 눈을 감아 버렸다.
돌무덤도 무너진 지 오래고
그 날 이후 이 고개를 넘는 이는 없었나보다.
대대로 꿀벌을 치면서 살던 사람들
아카시 꽃향기 그윽한 산길 따라
읍내 장에 갔던 참봉댁 머슴
흉흉한 소식 전한 지 얼마 안돼
해방시켜 주겠다며 찾아온 한무리
다급히 물러간 후
이번에는 자유를 지켜주겠다며 먼 곳에서
달려온 외국 군인
아녀자는 무서움에 떨고 먹거리를 서로 숨기기 바빴다
삼촌이 조카 뒤통수를 가리키면
포승에 묶인 채 이 고개 넘어
어디론지 끌려가기도 했고
빈통 들고 이 고개 넘나들던 애띤 그 애가
저보다 긴 총을 멘 채 이곳을 넘어간 후
이 길은 저승 가는 길목이 되어 버렸는가.
해 마디 봄이 되어 아카시 꽃향기 재 넘어 퍼져가도
한번 떠난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고
장승은 영영 눈을 감아 버리고 말았는지.
봄이 오는 산
오정수
산등성이에 어둠이 깊어지면
앞산은 새벽이 올 때까지 별들을 헤아린다.
간간이 보이던 잔설
낙엽 사이로 흐르는 도랑 되고
언제 적엔가 느꼈던 흙내음
바람결에 실려온다.
칡넝쿨 뒤엉킨 숲속 둥지
이제 갓 품은 얼룩베기 새알들
밤 늦게 돌아온 어미새
품었던 알 바라보는 눈빛이 초롱하다
떡갈나무 가지 사이 희미한 햇살 아래
다람쥐는 도토리 찾아 내달리고
잎새엔 밤새 머금은 이슬이 눈시리다.
아침, 건널목
김혜경
이른 새벽 건널목에서
형광 상의를 입은 인부들이 엎드려
벗겨져 나간 칠을 되살린다.
어둠을 헤치고 차례차례
빗살무늬 하얗게 살아나
길 위에 뻗어난다.
비켜 갈 수 없는 얼레빗살 무늬 건널목
시간이 먼저 발을 벗고 건너가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
멈춰선 차들을
조심스럽게 건네준다.
다른 길로 돌아갈까 틈을 엿보면
낮보다 밝은
망대 위 탐조등에 금세 들키고 말아
멈출 수 없는 길 위에
찍힌 쉼표
다시금 정지선 앞에서
광야를 내딛는 출발의 손짓을 기다린다.
작은 경대
김혜경
모두 떠나가버려 빈 둥지
지금 나의 측근은
떠나온 제 고향의 이름일까
'까사미아'라는 금속활자를 이마에 붙이고
곁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아주 작은 몸집
오로지 고개를 숙였다 젖혔다
내 얼굴만 비춰준다.
붙어 있는 작은 서랍 열고
살붙이 같아 버릴 수 없는
잡동사니 꾸미개 가득 채워
할 일 하나 더 일러준다.
구석에 비켜서 고즈넉이 보낸 결 위에도
더께가 앉아
이젠 제법 고목의 때깔을 낸다.
오래 전 반포동 지나다
눈에 끌려 사 들였더니
이제와 측근이 될 줄이야
분 바르고 입술 칠하며, 부쩍
제 앞에 다가앉는 일, 잦아지니
이내 눈치 채고
들여다 볼 적 마다
아직 어여쁘다며
주름살 비켜주는 너의 최면에
잠깐씩 나는 행복하구나.
황태덕장
송선애
속을 다 내어주고
몸통만 덕대에 걸린 채,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질긴 끈에 묶여
바다를 하늘에 풀어놓고
때로는 햇살에 풀리는 매무새를
혹독한 칼바람에도
정신을 가다듬어야 했다.
속살 겹겹이 파고드는
냉기 언저리의 햇살……
빈 마음에
세속의 비린내 가셔지고
눈의 나라 백성이 된다.
황태처럼
세상 끈에 매달려 살더라도
비린내가 다 가셔지도록
인생이 맛 들어라 하고
하늘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홍살문이 서있는 풍경
송선애
절개로 늙은 청상이
러브호텔에 눈 흘기고 있다.
종갓집 맏며느리로 와서
백발이 되도록
서릿발 같은 세월
열쇠꾸러미 물려받아
마음 잠그고 살았는데,
환락의 도시에
은장도는 간 곳 없고
하늘을 찌르는 십자가들
할렐루야 할렐루야
곰의 후예라는
환웅의 후손들이
익모초 맛을 잃어가고 있다.
명시 감상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나룻배와 행인(行人)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 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후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 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 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永遠)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그리움 속에 숨은 그림자
한용운
눈물같은 형상으로 아롱진
동그라미 그 속에
고운 숨결 가두고
언제나 채우며 채워도
이내 비워지는
빛깔 같이
그것뿐이면
또 몰라도
비워진 가슴 밑은
파란 꿈인데
밀려오고
다시 밀려오며
끝없이 채워지는
숨겨진 그대 그림자
세월에 찢긴
상혼(喪魂)을 안고
일렁이는 그리움 갈피에
속살을 섞어도
그리움
그리움은
왠지 슬프다
❃ 작가 약력 ❃
한용운(韓龍雲: 1879 - 1944)
충남 홍성 출생. 호는 만해(萬海). 어렸을 때 한학을 배우고 동학 과 의병 활동에 가담한 후 불문에 들어가 중이 됨. 1919년 3.1 운동 때는 민족 대표 33 인의 하나로 독립 선언서에 서명했으며, 옥고를 치르면서 항일 독립 운동의 투사로 활 약함. 연 구분이 거의 없는 사설조의 서정성 짙은 노래로 철학적, 종교적이면서도 연가 풍의 특징을 지닌 시가 많음. 시집 '님의 침묵'(1926)과 소설 '흑풍' 등이 있음.
■ 다시 찾아 읽는 글(수필)
무소유(無所有)
법 정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제2차 원탁회의(圓卓會議)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엮은 《간디 어록(語錄)》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사실,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의 적(籍)에서 사라져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살다 보니 이것저것 내 몫이 생기게 된 것이다. 물론 일상에 소용되는 물건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정도로 꼭 요긴한 것들 만일까? 살펴볼수록 없어도 좋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고 되어 있지만, 그마만큼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蘭草) 두 분(盆)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 뿐이었다. 그애들을 위해 관계서적을 구해다 읽었고, 그애들의 건강을 위해 하이포넥슨가 하는 비료를 바다 건너가는 친지들에게 부탁하여 구해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필요 이상으로 실내 온도를 높이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청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蘭)을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아차! 이때에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가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버린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끼게 되었다. 집착(執着)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해버린 것이다. 이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했다. 난을 가꾸면서는 산철(僧家의 遊行期)에도 나그네 길을 떠나지 못한 채 꼼짝 못 하고 말았다. 밖에 볼일이 있어 잠시 방을 비울 때면 환기가 되도록 들창문을 조금 열어놓아야 했고, 분(盆)을 내놓은 채 나가다가 뒤미처 생각하고는 되돌아와 들여놓고 나간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지독한 집착이었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듯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허전함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인간의 역사는 어떻게 보면 소유사(所有史)처럼 느껴진다. 보다 많은 자기네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고 있는 것 같다. 소유욕(所有欲)에는 한정도 없고 휴일도 없다. 그저 하나라도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출렁거리고 있는 것이다. 물건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사람까지 소유하려든다. 그 사람이 제 뜻대로 되지 않을 경우는 끔찍한 비극도 불사(不辭)하면서, 제 정신도 갖지 못한 처지에 남을 가지려 하는 것이다.
소유욕은 이해(利害)와 정비례한다. 그것은 개인뿐 아니라 국가간의 관계도 마찬가지. 어제의 맹방(盟邦)들이 오늘에는 맞서게 되는가 하면, 서로 으르렁대던 나라끼리 친선사절을 교환하는 사례를 우리는 얼마든지 보고 있다. 그것은 오로지 소유에 바탕을 둔 이해관계 때문인 것이다. 만약 인간의 역사가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싸우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주지 못해 싸운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간디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소유관념이 때로는 우리들의 눈을 멀게 한다. 그래서 자기의 분수까지도 돌볼 새 없이 들뜨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 한 번은 빈손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 이 육신마저 버리고 홀홀히 떠나갈 것이다. 하고많은 물량일지라도 우리를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