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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자 보내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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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출판
가) 필사본(筆寫本)
필사본은 한지에 붓으로 베껴 만든 책으로 책 크기의 배가 되는 종이를 반을 접어 양면에 필사하였다. 사본(寫本) ·수서본(手書本) ·서사본(書寫本) ·초사본(鈔寫本:중국) 등으로 불리운다. 필사본은 성격상 한 번에 한 권 밖에는 베낄 수 없다.
필사본으로 가장 많이 나온 작품은 여성 취향의 소설이었다. 여성독자들은 특히 <사씨남정기>와 <박씨전>을 좋아하였다.
필사본의 글씨체는 매우 다양한데 전아한 궁궐체에서부터 아녀자들이 쓴 유치한 필적까지 베낀 사람에 따라 독특한 서체를 보인다.
46장으로 된 가람본 <심청전>은 네 사람의 필체가 보여 흥미롭다. 네 사람이 돌려가며 필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소설을 공동으로 필사하였다는 점에서 혹, 전문 필사점에서 필사자들을 두고 필사를 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책을 묶는 장정법(裝幀法)은 대부분 오침안정법을 썼다. 오침안정법이란, 책의 등 쪽에 다섯개의 구멍을 뚫고 (무명)실로 꿰매는 방식이다. 우리나라의 전형적인 장정법으로 중국의 장정이나 일본의 장정 양식과 확연히 구별된다. 우리 것이 홀수였던 것에 반하여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짝수의 철법으로 나타난다.
시대가 지나고 합방되기 이전부터 양장본이 일본을 통해 소개되면서부터 한장본 스타일의 장정이 양장본과 혼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 두드러진 특징이 있다면 오침안정법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침안정법으로 변했다는 점이다. 사침안정법을 취하고 있는 이유로는 판형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필사본에 따라서는 6침, 7침, 10침도 있었다.
이렇게 인쇄된 면이 밖으로 나오도록 책장의 가운데를 접고 책의 등 부분을 끈으로 튼튼하게 묶는 것을 선장(線裝)이라한다. 선장본은 낱장들을 한장 한장 접어 우측을 실로 꿰매는 형식의 장정법으로 대부분의 고서가 이렇다. 표기상으로는 국문본, 한문본, 국한문혼용본 등이 있다. 조선 중기까지는 한문본이, 후기로 갈수록 국문본이 많아졌다.
필사 말미에는 흔히 간지(干支)가 있는데 필사연대이다.
<황릉묘요얼탕평전> 같은 소설은 1928년에도 필사된 기록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일제치하에도 고소설이 꾸준히 필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필사본으로 대체해야겠습니다.
선장본의 각종 명칭
권수제: 책의 제목.
계선 : 본문의 각 줄 사이를 구분하기 위해 그은 선.
광곽 : 책장의 네 변에 돌려진 검은 선.
판심 : 책장의 가운데를 접어서 양면으로 나눌 때에 그 접힌 가운데 부분.
어미(판심어미(版心魚尾): 판심에 인쇄하는 물고기 꼬리 모양의 도형. 위쪽에 있고 그 아래에 책명(冊名)을 넣고 그 아래 부분에는 권차와 장차를 인쇄한다.
판심제 : 판심에 표시된 책의 이름.
권차 : 권의 차례.
장차 : 장의 차례.
백원 : 문장의 마디가 끊어지고 새로운 마디가 시작되거나 새로운 주석이 시작되는 첫 머리에 구분을 위하여 하는 표시.
1) 낙선재본(樂善齋本)
고종의 명으로 중국소설을 번역하다
소설필사는 가정집과 서사에서 되었을 터이니, 딱히 소설 필사지를 정확히 지목할 수는 없다. 다만 낙선재소설은 필사된 곳이 분명하다. ‘낙선재’는 조선 헌종 13년(1847)에 창경궁 안에 지은 전각이기 때문이다. 헌종이 후궁 김 씨를 위해서 지었다 하며 주로 왕비들이 거처하면서 일종의 왕립 도서관 역할도 하였다. 이 낙선재에 소장된 소설을 ‘낙선재소설’이라 하는데, 주로 국문소설들이다. 그런데 낙선재소설들은 주로 알려지지 않은 작품, 그것도 중국 작품을 번역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우리의 소설도 있다.
이병기는 「조선어문학명저해제」(문장1940.10)에서 ‘1888년(고종 21년)을 전후하여 이종태(李鍾泰)라는 자가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문사 여러 명을 동원하여 중국 소설을 번역한 것이 근 100종이 되었다. 이러한 번역소설은 그전부터 내려오던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낙선재소설의 상당수가 이 이종태의 휘하에서 번역된 것이며, 그 이전부터도 이러한 번역행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궁중에서 소설필사 작업이 꽤 오랜 시간을 두고 면면이 이어져 온 ‘궁중의 한 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연구에 따르면 낙선재본소설은 83종에 이르며, 우리 고소설이 49종, 중국소설을 번역한 것이 33종이라 하지만 유실된 것도 있고 하여 정확한 통계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83종이란 숫자가 낙선재본소설 모두도 아니며, 우리 소설이라 보는 49종과 중국소설을 번역한 것이라 보는 33종의 숫자도 연구에 따라서는 얼마든 달라질 수 있는 숫자이다.
낙선재에 갊아 있던 고소설로는 <홍루몽>․<고금기관>․<삼국지연의>․<수호지>․<서주연의>․<북송연의>․<평요지>․<한조삼성기봉>․<청백운>․<현몽상룡기>․<낙천등운>․<화정선행록>․<화문록>․<위씨오세삼난현행록>․<천수석>․<태평광기> 등을 들 수 있다.
물론 낙선재소설 모두가 고종의 명으로 번역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18-19세기의 세책본 고소설이 궁중으로 흘러들어가 다시 깨끗하게 필사된 것이 주류를 이루고 여기에 궁중 내에서 일부의 중국소설을 번역한 것이 섞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예를 들자면 낙선재 에 수장된 소설들 중에는 <위생전>이나 <주생전> 같은 우리의 소설도 보이기 때문이다. 낙선재소설들은 한결같이 글씨체가 수려하고 단정하여 그 자체로도 예술적인 가치가 높다.
참고: 박재연, 『조선시대 중국 통속소설 번역본의 연구』, 한국외국어대학교 박사논문, 1993.
낙선재에서 번역 필사된 낙선재본 <쥬뎐>․<위뎐>
김일근 소장
<쥬뎐>․<위뎐>이 궁중 소장이라는 점은 <쥬뎐> 첫 장에는 ‘초액보장(椒掖寶藏)’이라는 장서인이 찍혀있다. ‘초액’은 왕후의 궁을 이름이니, 이 번역집이 ‘왕후의 궁전에 잘 간수해 둔 책’임을 알려준다.
이에 대해서 더 자세한 것은 간호윤, 『<주생전>․<위생전>의 자료와 해석』(박이정, 2008) 참조.
2) 세책본(貰冊本)
내가 결단코 이러한 관습을 엄금하겠다
“我가 決斷코 此等 慣習을 嚴禁다”
1906년 <만세보>에 실린 기사 중, 한 문장이다. ‘이러한 관습’이란 세책 소설을 보는 것이니, 세책 소설을 보는 풍조를 엄금하겠다는 말이다. 이 말이 누구 입에서 나왔는가하면 경무사 박승조란 이이다. 경무사란 지금으로 치자면 경찰청의 가장 우두머리라고 보면 된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저 시절 경찰총수의 위세란 좀 고약한 것인가. 그러한 그가 한 말이니 가볍게 넘길 문제는 아니다. 신문 기사의 내용을 현대말로 고쳐 따라 잡아보자.
‘국민의 지식이 발달하지 못함은 교육이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일반 인민이 실심과 실념을 유지하려면 불가불 급선무가 나태하고 오락만하여 바탕도 없이 요행으로 행복과 이익을 바라고 구하는 관습부터 금해야한다. 내 평생에 가증스럽고 가련한 것은 여인들과 일반 백성들이 사는 골목 어귀의 길가에서 소위 언문 세책본 소설인 <홍길동전>․<춘향전>․<소대성전> 등을 큰 소리로 읽으면서 희희낙락하며 무정한 세월을 공연히 허비하니 언문 세책 등이 인민이 생활하는데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내가 결단코 이러한 관습을 엄금하겠다.’
치안을 책임지는 경찰청 총수의 세책본 고소설에 대한 의식이 이토록 부정적이었으니, 세책 고소설과 당시 사회의 역학관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이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세책본 고소설은 1920년대 후반 서서히 그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제 그 세책본 고소설에 대한 세계로 들어가 보자.
세책(貰冊)은 조선후기 국문소설이 유행하는 시류에 편승하여 주로 필사본을 마련해 놓고 그것을 원하는 고객들에게 대여해주던 책을 말한다. 따라서 이 세책에는 전문 필사자가 있었다. 이 책들은 종이노끈으로 묶어 놓았으며 뒷장에 “보신 후 유치 말고 본댁으로 전할 차”, 혹은 “부디 낙장은 마옵소서” 하는 부탁이 가필되어 있다. 또 남아있는 책들 중엔 “오자낙서가 많은데도 책 삯이 비싸다”는 둥, “세책으로 놓으려면 깨끗한 책을 놓으라”는 둥 세책가에 대한 비난이 낙서로 실려 있는 책도 있다.
세책가(貰冊家)는 영리를 목적으로 책을 빌려주는 사람을 말한다. 세책가는 「한국서지서설」(모리스 쿠랑 저, 박상규 역, 한국의 서지와 문화, 신구문화사, 1974, 18쪽)나 1910년대 새문안교회 2대 당회장으로 조선을 다녀간 벽안의 이방인 쿤스(E.W. Koons)에게도 목격된다.(<The House where Books are given out for Rent>, 『Korea Mission Field』July 1918, p.150) 쿤스는 군예빈(君芮彬)이라는 한국 이름도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대개 상인, 술집주인, 학생, 공장 노동자, 할 일 없는 여인들이 세책점에서 책을 빌려갔다고 적어 놓았다.
최근에 발견된 세책장부를 보면 판서, 승지, 참판, 대장 등 고위층과 협변, 순사, 별감, 국장 등의 관료나 지사, 진사, 생원, 첨지 등 일반 서민층과 여기에 오위장들의 무관이나 군인, 상인계층, 과부, 천민, 노비 계층에까지 다양한 신분과 직업이 보인다. 그야말로 상층부터 하층까지 전 계층이 세책집을 찾았다는 뜻이요, 이 의미는 곧 소설이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천민이나 노비 계층이 세책을 해 간 것이 곧 독서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듯하다. 당시의 문맹률로 미루어 아마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세책점에 오기를 꺼려한 상전들의 심부름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세책본 소설 중 가장 연대가 오랜 것은 <춘향전>의 이본인 <남원고사>로 누동(樓洞)에서 필사한 갑자년인 1864년이다. 누동은 일제 시대 동명으로 이전엔 마을에 다락우물이 있었기 다락우물골, 다락골로 불리던 오늘날 종로구 와룡동과 묘동에 걸친 지역을 말한다. 세책 고소설 필사지로는 향목동, 백운동, 행동, 아현, 한림동, 누동, 묘동, 토정, 약현, 동, 갑동, 운곡, 아현, 향수동, 파곡, 청파, 사직동, 동문 외, 청풍백운동, 송교, 남소동, 옥동, 간동, 뇽셔, 금호, 동호, 등인데, 향목동의 이름이 가장 많이 보인다. 향목동은 오늘날 서울 중구 을지로 인근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세책소설은 이보다 30여년 뒤인 1890년부터 1925년경까지가 전성기였다. 현재 학계에 보고된 것으로 가장 늦은 세책 고소설은 1925년에 필사된 <숙향전>이다. 지역적으로는 경성에만 한정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세책본 고소설의 특징이 빌려 주던 책이라 그런지 낙서가 많다는 점이다. 그 중 재미있는 낙서 몇을 보면, “이 집 책을 세 번만 갔다보면 책 보는 사람의 집 기둥뿌리가 간 데 없고 네 번만 보면 거지되어 쪽박을 차고서…”(<구운몽>)나, “이 책 보시는 양반은 남자는 좆이 꼴리거든 용두질을 하고 여자는 씹에다 손을 넣고 용두질을 치오.”(<옥단춘전>) 등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써 놓았다. 이러하니 세책 주인 또한 “이 책에다 욕설을 쓰거나 잡설을 쓰는 폐단이 있으면 벌금을 낼 것이오니 이후로 깨끗이 보시고 보내주소서.”(<김윤전>)라는 등의 경고성 문구나, “이 세책 보는 사람은 곱게 보고 책에다 칙칙하게 글씨를 쓰지 마시고 그 무식하게 욕설을 기록하지 마시기를 천만 번 바랍니다.”라고 당부성 글을 적어놓기도 하였다. 때로는 음화(불알 그림)같은 것도 그려 놓았다. 세책에 이런 욕설을 적어놓거나 음화를 그린 것으로 미루어 세책본 고소설의 독자를 남성들이라고 추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19세기말 이전까지만 하여도 대다수였던 여성독자가 이후 교양수준이 떨어지는 서민 남성들로 바뀌었다는 소리이다.
세책은 주로 통속적 국문소설이었지마는 일부 서양소설을 번역한 것도 있어 흥미롭다.
세책 가격은 한 권당 약 5전 정도였는데 당시 물가로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돈이 없으면 반지, 은비녀, 귀걸이, 대접, 주발, 놋그릇에 심지어는 주걱, 이쑤시개, 귀이개, 족집게, 안경, 담배쌈지, 담요, 방석 따위를 저당 잡히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온갖 생활 물품이 모두 소설을 빌리는데 소용된 셈이었다.
연구에 의하면 현재 이 세책본 고소설은 70%정도가 일본의 도쿄대학도서관과 동양문고, 천리대 도서관, 교토대와 미국의 하버드대 옌칭 도서관, 프랑스의 동양어학교와 기메 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에 흩어져 있다. 일본의 동양문고에는 가장 많은 세책본 고소설에 있는데, 모두 구한말 이 땅이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었을 때 소설 또한 이리저리 낯선 배에 태워진 것이다. 민족의 비운을 소설이라고 비껴가지는 못하였다.
세책은 사실 우리나라만의 현상은 아니었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서유럽에서도 보였다. 중국에는 방물을 팔러 다니는 화랑(貨朗)이 그 역할을 하였으나 그다지 성행하지는 못한 듯하고, 영국은 우리의 경우와 흡사한 것이 흥미롭다. 영국은 18세기 중엽쯤 세책집(circulating library)이 있었는데, 출판자 겸 서적 판매업자(book seller)가 이때 등장하였다 한다. 18세기 초 독일에도 이 세책점이 보인다. 일본은 에도(江戶)시대부터 있어서 ‘카시혼야(貸本屋)’라는 세책집이 유명하였다.
세책본 고소설이 있기 전부터 영리를 목적으로 책을 빌려주는 세책가는 있었고, 이 세책가는 수입한 서적도 다루었다. 서적의 수입은 주로 역관을 통해서였으며, 역관이 수입한 서적은 서쾌(書儈,서적중계상)가 국내에서 유통을 담당하였다. 이 서쾌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정약용과 조수삼, 조희룡은 조신선(曹神仙)이라는 서쾌의 전까지 남기고 있을 정도이다.
여하간 소설 독서문화를 가능케 한데에는 세책가(貰冊家)의 등장이 가장 크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부르는 세책가는 조선후기에 국문소설이 유행하는 시류에 편승하여 주로 필사본을 마련해 놓고 그것을 원하는 고객들에게 대여하는 것을 업으로 했던 사람들을 말한다. 세책가는 가난하지만 식자층인 하층 양반이거나 중인층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술집 주인이나 여관 주인도 있었다. 아마도 세책이 안정된 수입원이 아니기에 전당포나 잡화점 같은 것과 함께 운영해서인 듯하다.
이들이 이른바 ‘세책가’로 전기수 다음 단계에 출현했던 소설유통업자였다. 책쾌冊儈라고도 한다.
참고: 이윤석 외, 『세책 고소설 연구』, 혜안, 2003.
나) 판각본(板刻本:방각본)
‘두 나무가 또한 원통해할 것이다(二木亦寃矣).’
떡갈나무로 판목을 만들고, 닥나무로 종이를 만들어 천하디 천한 방각본 소설을 찍어냈으니 두 나무가 원통해한다는 내용이다.
이글은 이옥(李鈺, 1760 ~1813)의 『담정총서』 권28, 「봉성문여」에 보이는데 재미있어 소개하고 넘어간다.
대개 패사를 짓는 자는 … 황당함으로 황당함을 만들어 스스로 망령된 부류에 속해서 단지 한 번 웃음거리가 되는 것과 같겠는가? 그러나 떡갈나무 판목에 새겨서 닥나무 종이에 찍어 냈으니, 두 나무가 또한 원통해할 것이다.
일단 방각본에 대한 정황을 일별하자.
일찍이 16세기에 그 모습을 드러낸 방각본은 독서계의 문풍을 서서히 변화시켜 18~19세기를 거쳐 20세기 초, 구활자본에 자리를 넘길 때가지 긴 여정 속에서 독서문화 전반에 걸친 신기원을 써내려갔다. 방각본 소설은 특히 남성 독자층의 취향과 가까웠다. 남성 독서인들은 방각본 <구운몽>과 <임경업전>․<조웅전>을 많이 읽었다. 여성 독자층은 주로 <사씨남정기>와 <박씨전>․<창선감의록> 등과 같은 필사본 소설을 즐겨 읽어 성별의 차이를 확연히 가늠케 하였다. 신분적으로는 서리 중심의 중인 계층이 대거 소설의 독자로 편입 되었으니, 이제 소설은 더 이상 금기의 대상이 아니었다.
소설이 대중들에 의해 소비되자 급격히 조선 독서문화를 장악하였다. 급기야는 조선 후기의 주류적인 사회현상으로까지 이어지니, 이에 대한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채제공의 <여사서서>, 이덕무의 <사소절>․<청장관전서>, 이학규의 <낙화생> 같은 책들은 전근대적 독서문풍에 대한 애착과 소설에서 오는 폐단을 지적하고 이를 막고자 한 지식층의 고민들이었다.
조선시대에 사가(私家)에서 판매할 목적으로 간행한 책으로 처음에는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므로 방각본坊刻本(방간본坊刊本)이라고 한다. 이 용어는 중국의 남송 때 서방(書坊) 또는 방사(坊肆)에서 민간이 판매의 목적으로 책을 목판에 새겨 찍어낸 데서 쓰인 것이지만, 일본인 한국학자 마에마 교오사쿠(前間恭作)가 『조선의 판본』으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 까지 이른 말임도 알고는 있어야겠다. 나무에 글씨를 새긴다는 의미의 재래의 명칭 판각본(板刻本)을 사용했으면 하나, 이미 방각본이란 용어가 굳어진 형태이기에 고치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건 그렇고, 방각본은 필사본으로 전하여 오던 고소설을 영리 목적으로 국문(대부분)으로 판각(版刻)하여 출판한 것인데, 현재 가장 이른 것은 1725년에 나주에서 간행된 한문본 <구운몽>이다. 이후 1780년 <임경업전>, 1847년 <전운치전>, 1848년 <삼설기> 등으로 이어졌으며, 1937년 양책방(梁冊房) 간행본이 가장 늦다.
방각본의 등장은 소설 독자의 증가와 상관성이 있었다. 방각본이 널리 퍼졌다는 사실은, 필사본만으로는 소설독자를 감당키 어려웠고 소설 독자층이 남녀노소, 반상을 가릴 것 없이 광범위하게 퍼졌다는 정황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서체와 판각이 지방에 비해 서울이 정교하였는데 이에 대해 좀 더 소상히 살펴보자.
우선 ‘방각본(坊刻本)’이란, 책의 발행소(發行所)에 따라 분류된 명칭의 하나이다.(책의 발행소를 ‘판원(板元)’이라 하는데 이 역시는 일본 용어이다.) 발행소는 ‘○○동신간(○○洞新刊)’, 혹은 ‘완산(전주)신간’이라고 동리 이름을 기록하였다. ‘방(坊)’은 동네라는 뜻이요, ‘각(刻)’은 새기다의 뜻이니, 책의 발행소가 어떤 한 마을이란 의미이다. 이 마을에서 조판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인 각수(刻手)가 목판에 새긴 판본으로 찍어내는 것이 방각본이다. 방각본은 주로 남성취향의 소설이었고 독자도 역시 남성들이었다. 남성들은 <구운몽>과 <임경업전> 등을 선호하였다.
책의 발행소에 따라 분류하면 관청에서 출판한 관각본(官刻本), 사찰에서 출판한 사각본(寺刻本), 개인이 가정에서 출판한 사각본(私刻本), 그리고 상인인 민간 출판업자가 판매 목적으로 출판한 방각본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특히 조선 후기인 19세기 이후 가장 많이 대중에게 읽히고 유통된 책이 방각본이다. 물론 방각본의 대종은 소설이니, 이 방각본의 출현으로 필사로 이어지던 필사본은 차츰 자리를 감추게 된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방각본이란, 조선 후기에 상인들에 의하여 목판(木板)으로 각서(刻書)되어 서점에서 판매되던 일련의 책자들을 지칭하는 용어인데, 시장성(市場性)을 전제로 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즉 방각본은 그 전면에 이윤을 내세우기 때문에 대중적인 기호에 영합할 수 있는 책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방각본의 특성은 자연히 대중과 긴밀한 연결을 갖고 있는 소설(小說)과 연결된다.
이런 방식으로 간행되고 유통된 소설을 ‘방각본 소설’이라고 부른다. 이 방각본 소설들은 목판본(木版本)이 중심이었고 상인들의 이윤 추구 목적에 부합된 것으로 주된 독자층은 서리, 농민, 부녀자 등 서민층이었다. 따라서 ‘독자의 기호에 영합’이라던가, ‘출판의 질적 저하’ 따위의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일부 양반 지식층에 한정되던 문자의 혜택과 무료함을 달래던 파한적(破閑的) 소설이, 대중성을 획득하여 종래에는 문명을 개화시키고 독서문화를 널리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는 사실은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 저급한 ‘나부랭이’인 소설의 효용성(效用性)은 민중을 개화하려는 선각자들에게까지 이어졌다. 이 점은 우리의 소설사(小說史) 뿐만이 아니라 출판사에도 적지 않은 의의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방각본 소설을 정리하면, 다시 전주를 중심으로 한 완판본(完板本), 안성의 안성본(安城本), 서울의 경판본(京板本)으로 대별된다.
방각본의 판종으로는 목화자본, 목판본, 토판본, 석판본, 연활자본 등이 있다. 대부분의 방각본은 목판본인데 더러 토판이 섞여 있다.
현존 방각본 중에서 토판본은 ① 조웅전(趙雄傳) 삼책 전부, ② 장경전(張景傳) 일책 중 일부, ③ 홍길동전(洪吉童傳) 일책 중 일부에 보이는데 모두 완판본이다.
종로: 최고의 방각본 간행 장소
종로 지역은 우리나라 상층 문화의 집약지이며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문화와 예술의 생성 공간이다. 특히 조선 500년간의 수도요,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문화와 예술의 총본산임이 또렷한 지역이다. 따라서 수십 종의 문화재는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하여 문화유산으로 일찍이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아직도 품만 들인다면 수다한 종류의 문화재를 발굴해 낼 수도 있다.
이를 문화 콘텐츠 산업과 연계한다면 여기저기에 그대로 살아 숨 쉬고 있는 종로의 숨은 문화유산을 발굴․보존․계승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좀 더 체계적이면서도 종합적인 정리를 통하여 문화산업으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일제 치하 종로는 중구의 정동과 대립하면서 민족자존심 차원의 결 곧은 저항 또한 만만치 않은 특이성을 지니고 있음도 살필 수 있다. 이것은 타 지역과 변별점인 동시, ‘종로성(鍾路性)’이라는 지역적 정체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나 고소설과 종로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니, 이제 1900년 어름 종로 출판문화의 어제를 살펴, 오늘과 내일을 이끄는 방편으로 삼고자한다.
종로지역의 출판은 크게 조선시대, 일제시대, 해방 이후로 나눌 수 있다.
조선시대는 각종 출판이 궁궐에서 이루어졌으나, 문학, 지리, 역사 등 관련 출판물은 제외하였다. 일제치하에는 동아일보가 해방이후에는 한국 등의 신문사와 CBS 등의 방송사가 위치하였으며 종로서가 있던 관계로 각종 독립관계 자료를 찾을 수 있는 행정문헌이 출판의 대종을 형성하였다. 특히 일제치하의 출판계는 종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 사실과 방각본 및 구활자본 고소설이 집중 출판되었다는 것은 주목을 요한다. 해방 이후로는 종로의 문화를 기반으로 한 학술지를 찾을 수 있으며, 을지서적, 종로서적, 교보문고 등이 등장하며 우리나라의 출판문화를 이끌었다.
이제 잠시 과거로 올라가 우리나라 출판의 역사를 잠시만 둘러보자. 출판의 역사, 그것은 우리나라의 교육열과 정확히 비례한다. 세계에서 처음으로 우리는 13세기에 이미 금속활자 인쇄술을 시작하였다. 이 금속으로 만든 활판(活版)은 전래의 방법인 손으로 쓴 사본(寫本)이나, 등재본(登梓本)을 목판에 붙여 만든 판각본(板刻本)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출판의 발달을 꾀하였다.
그리고 이 고려 시대의 금속활자는 1403년(태종 3), 조선 최초의 구리활자인 계미자(癸未字)로 이어진다. 계미자는 왕명으로 주자소를 설치하여 약 10만 자의 활자를 만들었다. 이 계미자는 고려시대에 제작되어 오래 망각되어 오던 금속활자를 거의 독창적으로 복고한 것으로, 이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유럽 최초로 발명한 금속활자보다 40여 년 앞선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미자의 모양이 크고 가지런하지 못하며 주조가 거칠었다. 따라서 인쇄의 능률이 오르지 않자 이를 보완하여, 1420년(세종 20)에 구리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다시 이를 보완하여, 1434년(세종 16;甲寅年)에 동활자(銅活字)인 갑인자(甲寅字)를 만들었다. 이 갑인자는 1420년(세종 2)에 만든 경자자보다 모양이 좀 크고 글자체가 바르고 깨끗한 필서체로 능률이 경자자보다 2배나 되어 하루에 책을 40여 지(紙)나 찍을 수 있었다 한다.
이 갑인자(혹은 위부인자(衛夫人字)라고도 한다.)는 이후 조선 인쇄의 근간을 이룬다. 세종은 이 갑인자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던지, 주자소를 아예 경복궁 안에 옮겨 설치하고 사업을 만전을 기하였다. 이렇게 종로의 출판문화는 시작되었으니 화려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후 우리나라의 인쇄술은 더 이상 발전을 보이지 못하였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인쇄술은 좋은데도 대중과는 등진 책의 인간(印刊)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잠시 조선총독부 참사관 분실에서 정리한 우리나라 인쇄술에 대한 내역을 보자. 위부인자(衛夫人字)와 실록자(實錄字), 한구자(韓構字), 정리자(整理字) 등 다양한 종류로 구성된 금속활자가 53만7247개, 목활자는 34만7172개에 달한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활자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활자 중 일부는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보관됐고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일부 인쇄 관련 도구와 활자가 망실됐지만 금속활자와 목활자는 거의 대부분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온전하게 남아 있다.
안타깝게도 조선 500년의 출판사를 요약한다면, 결국 ‘태산명동(泰山鳴動)’으로 시작하여 종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서일필(鼠一匹)’로 마무리된 형국이다. 조선 말기에는 주자소가 선인문의 북쪽에 있었는데, 의외로 목판이 많으며 그때까지도 조선의 출판물들은 대중의 교화 정도에 관련되거나 사족들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종로의 출판, 아니 조선의 출판은 1880년을 지나며 근대적 활자본의 시대로 들어서며 그 모습을 일신하게 된다.
전술한 바,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운운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고 조선의 인쇄술은 서양 인쇄술의 전래로 비로소 근대로 들어서고 말았으니, 근대 인쇄술에 관한한 종로도 한 발짝 뒤로 물러설 수밖에는 없었다.
만약에 아래에서 다룰 방각본이 없었다면 종로의 출판사(出版史)는 퍽 싱거웠을 듯하다.
경판본의 방각소(坊刻(刊)所)는 주로 종로와 명동에 있었는데 아마도 사통팔달의 요충지였기 때문인 듯하다. 지금까지 밝혀진 간소(刊所)는 21개요, 간기(刊記)를 적은 작품은 72종인데, 그 중 종로의 방각소로는 포동(布洞:지금의 종로 3가 북쪽(?)), 합동(蛤洞:서린동(?)), 송동(宋洞:혜화동과 명륜동 일대), 광통방(廣通坊:지금의 서린동), 홍수동(紅樹洞:창신동) 등을 들 수 있다.
경판본 방각소설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경기(京畿)라는 방각소에서 간행한 <임경업전(1780)>이다. 그러나 이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알 수 없고 위치를 비정할 수 있는 곳으로는 <주해천자문(註解千字文)(1804)>과 <삼략직해(三略直解)(1804)>를 간행한 광통방 간소이다.
방각본은 국문소설이 39종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방각본 소설을 가장 많이 간행한 곳은 홍수동(紅樹洞)(8종)이며, 유동(由洞)(7), 송동(宋洞)(6종), 무교(武橋)(3)로 이어진다. 홍수동 간본을 살펴보면, <장풍운젼(1859)>․<삼국지(1859)>․<숙영낭젼(1960)>․<신미녹(1861)> 등 모두 국문소설이다.
이러한 방각본 출판은 이후, 1880년대를 들어서며 연활자(鉛活字) 인쇄술이 들어와서도 계속 발행되었다. 인사동에 있던 대표적인 방각본 고소설 출판소이자 판매처인 한남서림(翰南書林)에서는 1930년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한남서림을 운영하였던 백두용(白斗鏞)은 야담집인 『동상기찬(東廂記纂)(1918)』이나 한국 역대 필적을 모아 엮은 책인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1926)』를 편찬한 점 따위로 미루어 민족의식을 지닌 종로의 근대적 출판 지식인이었다.
열여츈향슈절가라/龜洞新刊, 戊申/1848/목판본
대중에게 소설의 시대임을 알린 방각본소설은 후일 언문소설 중에서도 천한 존재가 되었다. 최남선은 <조선의 가정문학>(매일신보,1938)에서 당시 언문소설을 셋으로 나누었는데, 이 방각본을 가장 낮추어 보았다. 최남선은 ‘궁중에서 번역하여 보던 것으로 <홍루몽> 같은 소설이 고급이요, 경성에만 있는 세책본이 중간이요, 가장 저급한 것이 방각본소설’이라고 하였다.
안성: 방각본 간행 장소
안성은 사통팔달의 요지로 상업적으로 거점도시였다. 이러한 지역적 이점으로 방각본 간행 장소에 안성이 이름을 넣을 수 있었다. 안성에는 ‘안성 동문리’로 지칭되는 방각소를 비롯하여 북촌서포, 박성칠서점, 신안서림, 광안서관 등 최소 다섯 곳의 방각본 발행소가 있었다. 안성 동문리에서는 주로 소설본이 출판되었고, 이는 북촌서포도 마찬가지였다. 박성칠서점에 이르러 많은 양의 소설과 여러 교양서적들이 출판되었다. 신안서림과 광안서관은 소설류는 없이 교양서적만을 출판하였다. 북촌서포와 박성칠서점의 발행자였던 박성칠은 안성 동문리의 방각 활동에도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서울에 너무 근접해 있고 또 시장이 크지 않아서인지 판본도 경판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결과적으로 간행된 작품이나 남아있는 작품의 숫자가 많지 않다.
전라북도 전주: 방각본 간행 장소
방각본의 기원을 어느 때로 잡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 확증하기 곤란하다. 다만 밝혀진 바를 따르자면 방각본의 원류는 현존하는 물증으로 보아서는 전주판 <동몽선습(童蒙先習)>이 아닌가 한다. 이 전주판 <동몽선습>이 현존 간기로 보아 가장 오래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다만 ‘전주개판(全州開板)’이라 씌여진 간기가 관각(官刻)인지 아니면 방각(坊刻)인지가 불분명하다. 방각본이라 믿는다면 전주지방이 방각본의 시발지로 볼 수 있다.
사실 전라도는 방각본에 관한한 의미 있는 지역이다. 전주 이외에 태인과 전남의 나주 또한 방각본 간행 장소이기 때문이다. 방각본 장소라야 겨우 5곳에 지나지 않는데, 그 중 3곳이 전라도 이니 말이다. 그 이유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을 터이지만 우선 전라도라는 지역적 특징에서 찾을 수 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비교적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곳이며, 무엇보다도 지리산을 업고 있어 종이의 산지라는 점에서 방각본의 첫 출현지로서는 적합한 곳이다.
전라북도 태인•무성(정읍): 방각본 간행 장소
정읍에 인근한 태인과 무성 또한 방각본 장소였다. 태인에서는 <명심보감초(明心寶鑑秒)>(1664년 泰人孫基祖開刊)가 무성에서는 <고문진보(古文眞寶)>(1676년 武城田以采) , <농가집성서(農家集成書)>(1686년, 武城田以采朴致劉謹)이란 방각본이 만들어졌다.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박(朴), 손(孫), 전(田)씨들에 의하여 방각본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라남도 나주: 방각본 간행 장소
우리나라 사람이 쓴 소설을 최초로 간행한 곳이 나주이다. 때는 영조 1년(1725년) 한문본 <구운몽>이 신간되었다. <구운몽> 뒤에는 ‘숭정재도을사금성오문신간(崇禎再度乙巳錦城午門新刊)’이란 간기가 보인다. ‘숭정’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1628~1644) 때의 연호요, ‘재도’는 또다시, 혹은 재차라는 뜻이다. ‘을사’는 1725년, ‘금성’은 전라남도 나주에 있던 성이요, ‘오문’은 성곽의 남쪽 문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숭정재도을사’는 숭정 원년이 인조6년(1628)무진년이니, 그로부터 1도(度) 을사가 현종6년(1665년), 2도(度) 을사는 영조1년, 즉 1725년이다. 이 1725년(영조 1년) 나주성의 남문쪽에 방각 장소가 있었고 여기서 신간을 찍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전라남도 나주 금성 오문 신간 방각본 <구운몽>’이 지금까지 밝혀진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이고, 또한 방각본소설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참고로 경판본 최초 소설은 1848년 유동(由洞)에서 간행된 한글 단편소설 모음집 『삼설기(三說記)』이다. 전주에서 <구운몽> 방각본이 첫선을 보인지 123년이나 지난 뒤였다.
『삼설기(三說記)』 1848년(현종 14) 방각본(坊刻本)으로 간행되었다. 모두 6편의 고대소설을 싣고 있는데, 제1권에는 삼사횡입황천기(三士橫入黃泉記), 오호대장기(五虎大將記), 제2권에는 서초패왕기(西楚覇王記), 삼자원종계(三子遠從戒), 제3권에 황주목사계(黃州牧使戒), 노처녀가(老處女歌)가 있다. 신구서림(新舊書林)의 신활자본인 별삼설기(別三說記)에는 오호대장기가 빠져 있다.
다) 구활자본(딱지본)
‘듣는 소설’의 시대에서 다시 ‘읽는 소설’의 시대로
조선후기 전기수들이 돌아다니며 들려주던 소설이 사라지며 다시 읽는 소설의 시대를 열었다. 구활자본 시대가 열린 것이다. 장소는 역시 종로.
애석한 것은 구활자본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안성, 전주는 더 이상 소설사에서 그 이름을 감추었다는 점이다.
종로의 출판은 1904년 12월에는 탁지부(度支部)에 새로 인쇄국을 설치하여 전환국의 인쇄 시설과 제지 공장을 이어 받았다. ‘탁지부’는 지금의 종로구 세종로 84번지에 있었던 것으로 1902년 서울지도(KOREA, Vol Ⅱ 부록지도)에 나타나 있다. 슬프게도 한일의정서의 체결로 주권을 빼앗긴 상태에서 일본인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가 탁지부의 고문으로 앉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후 탁지부 인쇄국은 1906년 3월 1일 화재로 각종 인쇄 시설이 모두 불타 버렸다. 그러나 대대적인 복구 작업을 거쳐 1909년에는 인쇄 공장과 제지 공장이 오히려 증축되고 인쇄 및 제지기계, 발전 설비 등이 크게 확충되었다. 더구나 인쇄국에는 활판과 석판 인쇄 시설 외에도 활자 주조 시설, 인쇄잉크 제조 시설 등을 갖추게 되었고, 전기 도금 판과 사진 제판술까지 도입되었다. 1900년대에 종로의 출판은 자의적이든 타의적이든 조선 최고의 위치를 점하였다.
근대식 인쇄기가 도입되었다 하더라도 종로의 출판문화는 신구의 문화가 다양한 형태의 출판을 보인다.
특히 앞에서 살핀 바, 방각본 고소설은 그대로 살아남아서는 활자만 갈아타고 구활자본(舊活字本) 고소설의 시기로 이어진다. ‘구활자본’이란, 현대식 활자를 중심으로 한 명칭이다. 따라서 학자들 간에는 구활자본, 활자본 등으로 부른다. 활자는 연활자를 사용하였다.
여하간 이 구활자본 고소설은 신식문물과 박래품(舶來品)에 대한 서구적 호기심과 각종 근대적 문화 활동에 따른 서책과 인쇄물, 그리고 문화에 대한 대중의 욕구가 왕성한 출판의 시대, 한 복판을 점유하였다는 점을 예의 주시할 필요가 있다. 즉, 시골 양반 서울 상경과 같은 어근버근한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모던(morden)’이 화두이고 ‘문명 개화꾼’이 종로통을 활보하던 시대가 아닌가. 그런데 굳이 서양식 근대 문물로 매만진 인쇄가(印刷家)의 장자(長子)로 천하고 예스러운 고소설을 근대 문명인에게 내세워 읽힌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 상황이다.
더구나 구활자본 고소설은 무단통치와 토지조사사업으로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노골화되고 조선인의 감정이 극도로 불편하였을 때인 1912년부터의 일이란 점도 간과할 수 없으며, 그것도 조선의 한 중심, 종로 한 복판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더욱 그렇다. 만약 고소설 출판을 일제의 검열에 대한 우회로 추론한다면 그 은유는 무엇일까?
일단 20세기 어름의 출판 상황을 일별하고 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겠다.
20세기 어름의 출판 상황
여하간 고소설을 나라에서 출판하지 않았을 터이니, 민간 업체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근대식 민간 인쇄 업체는 광인사(廣印社)를 기점으로 잡는다. 광인사는 1880년대 설립되었던 출판사 겸 인쇄소인데, 일명 광인국(廣印局)이라고도 불렀다. 이후 민간 기업으로서 규모가 짜인 인쇄업체들은 1900년대에 들어와 비로소 등장하며 부침하였다.
이 무렵에 종로의 대표적인 인쇄소로는 보진재인쇄소(寶晉齋印刷所), 문아당(文雅堂), 광문사(廣文社), 성문사(誠文社), 보성사(普成社), 대동인쇄주식회사(大東印刷株式會社) 등이 있었는데, 모두 우리 출판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1912년 8월, 김진환(金晉桓)에 의해 설립되었다는 보진재인쇄소(寶晉齋印刷所)는 관철동에 있었는데 초창기에는 주로 석판인쇄를 하였다 한다. 보진재인쇄소는 이후 40년대 초기까지 『조광(朝光)』 『춘추(春秋)』 『문장(文章)』 『삼천리(三千里)』 『학풍(學風)』 등의 잡지 표지와 그 잡지의 색도물을 인쇄하였다. 오늘날은 종합인쇄회사로 발전하였고 도서출판도 하는데,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당산동에 있다.
인사동에 있었던 문아당인쇄소(文雅堂印刷所)는 대표적인 석판 인쇄소로 유명하다. 석판과 사진판, 사진동판, 전기판 등의 인쇄와 목판, 구리판 등의 조각까지도 할 수 있는 시설을 완비하였으며 주로 일인들의 서적을 출판하였다고 한다. 문아당인쇄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현재 대한교과서주식회사가 되었다.
광문사는 황성중서하한동(皇城中署下漢洞)에 있었으니 지금의 낙원동이다. 활판 조판과 인쇄 시설을 갖추었는데, 처음 보이는 책이 연활자본(鉛活字本)로 인쇄한 『잠상실험설(蠶桑實驗說)(1901)』이다. 이로 미루어 이 어름에 생겨 1920년대 많은 출판물을 낸 것 같다.
그러나 비교적 좋은 시설을 갖추었던 보진재인쇄소와 문아당에서는 고소설을 출판을 찾기 어렵고 광문사도 두어 편의 고소설만을 인쇄하는데 그쳤다.
홍순필(洪淳泌)이 설립한 성문사(誠文社)는 공평동에 있었는데, <옥중가인(1914)>․<금강취류(1915)>․<소상강(1915)>․<초한젼쟁실긔(1917)>․<현씨양웅쌍린긔(1920)> 등의 고소설을 인쇄하였다.
보성사는 지금의 수송동에 있었는데, 본래 이용익(李容翊)의 투자로 설립된 「천도교월보(天道敎月報)」등을 발행하는 출판 기관이었다. 그러던 것이 천도교 본부에서 이를 경영하면서 후일 기미선언서 33인의 한 사람인 이종일(李鍾一, 1858~1925)을 사장으로 내세워 1905년에 보성사를 설립하였는데 직원이 무려 60명이나 되었다 한다. 이 회사는 8면 활판기 등을 독일에서 수입하고 석판 인쇄시설까지 갖춰 당시 한국인 인쇄소로서는 시설이 가장 좋았다. 「조선독립신문」과 「독립선언서」를 비밀히 찍은 후 출판사의 전면에서 사라졌는데, <수호지(1913)>․<노처녀고독각씨(1916)>․<황장군젼(1917)>․<소운뎐(1918)>․<쟝비마초실긔(1918)>․<현토주해 서상기(1919)> 등 어림잡아도 수십 여 종의 고소설을 발행 및 인쇄하였다. 이종일이라는 민족주의자와 고소설의 친근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대동인쇄주식회사는 공평동에 있었는데, <강태공(1920)>․<졍을션젼(1920)>․<懸吐註解 西廂記(1922)>․<금송아지(1923)>․<츈몽(1924)>․<장화홍년전(1926)>․<초한전(1926)>․<텬졍연분(1926)>․<流行尺牘(1929)> 등의 작품을 꾸준히 인쇄하였다.
이종일의 경우로 미루어 보면 당시의 출판관련 인사들을 단순한 영리 차원의 서적상(書籍商)쯤으로 여길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고소설 발행소로 덕흥서림(德興書林), 박문서관(博文書舘) 등이 눈에 띈다. 김동진(金東縉)이 주인으로 견지동에 있었던 덕흥서림은 <一代勇女 南江月(1915)>․<江陵秋月(1917)>․<懸吐玉樓夢(1917)>․<죠선태죠대왕젼(1926)>․<옥년몽(1913)> 등을 80회에 걸쳐 발행하였으며, 이후 1930년대까지 지속적인 영업을 하였다.
남대문에 있다가 봉래동으로, 그리고 지금의 종로 3가에 정착하였던, 노익형(盧益亨)이 설립한 박문서관에서는, <심쳥젼(1916)>․<졍을션젼(1920)>․<춘몽(1924)>․<슈뎡삼국지(1928)> 등 고소설을 93회에 걸쳐 발행 및 도매(都買), 산매(散賣)를 하였으며, 『오백년기담(五百年奇譚)(1913)』이라는 야담집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견지동의 대창서원(大昌書院)은 72회, 경성서적업조합(京城書籍業組合)은 49회, 조선도서주식회사(朝鮮圖書株式會社)가 31회를 발행하였으며, 종로의 영창서관(永昌書舘)은 51회, 한성서관(漢城書舘)이 46회, 송현동의 광동서국(光東書局)이 34회를 발행하였다. 이외에도 앞에서 언급하였던 한남서림(翰南書林), 견지동에 있던, 고금서해(古今書海), 종로의 광학서포(廣學書鋪), 동양서원(東洋書院), 경성서관(京城書舘) 등의 여러 출판사들이 다투어 1910~1920년대의 고소설을 간행, 판매하였다.
특히 앞에서 발행 횟수를 언급한 출판사는, 30회 이상 고소설을 발행한 출판사 12개 중 8개에 달하며 발행 횟수로도 755회 중 500회를 종로 소재 출판사들이 발행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 출판사들은 발행소(發行所), 발매소(發賣所), 인쇄소(印刷所) 분매소(分賣所), 총발행소(總發行所) 등의 명칭을 사용하였으나 정확하게 분화된 듯 보이지는 않는다.
이 외에도 1910년대에서 20년대를 거치며 수다한 출판사들이 종로에서 성쇠를 겪으며 고소설을 붙들고자 애썼다. 앞 문장을 고딕으로 처리하고 싶다. 이유는 종로의 출판사에서 특히 ‘현재의 출판’과 ‘그 시절의 출판’, ‘현재의 소설’과 ‘그 시절의 소설’은 결코 동음동의어(同音同義語)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이다.
‘현재의 소설’과 ‘그 시절의 소설’
이것은 1910년 8월 29일, 치욕의 ‘일한합방’과 1919년 ‘기미년의 독립선언’이라는 한국 근대사의 큰 역학구도 속에서 생각하여야만 진정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다. 언론 탄압과 민족자본을 말살하려는 식민지의 정책과 민족의식과 역량을 갖춘 피식민 지식인이자 출판인들의 대결 속에서 얻은 가시적 성과이기 때문이다.
1910~20년대의 인쇄소를 설립한 한국인들은 대부분 사회 지도층 인사로서 인쇄시설은 비록 미미했지만 항일사상과 자주의식이 남달리 투철했다. 그들이 발간하는 책들도 민족 자긍을 고취하거나 신문화 보급에 신념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고소설 또한 이와 무관치 않다. 고소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쇄 분야의 한 흐름을 형성하였으니 1910~20년대의 구활자본 고소설과 야담집이 그 반증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언급하는 고소설은 단순한 유희적 차원으로 보기에는 맥없다. 우리의 것에 대한 우회적 표현으로 읽어야해서이다. 또 우리나라 출판사(出版史)를 따져 보아도 민족자존의 상징인 종로에서 가장 많은 고소설이 나왔으니, 일제와의 사회학적 역학관계를 고려하여 ‘나라 구할 비약(秘藥)’으로서 고소설을 챙긴들 ‘과하다’ 나무랄 수는 없다. 그렇기에 ‘일제의 정책에 의해 책의 출간이 어려워지자, 부득이하게 1910년대, 20년대 우리나라의 출판은 고소설 따위를 팔아서 근근이 꾸려나갔다.’ 따위의 출판사(出版史)를 기술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생각한다.
‘온당치 못하다’는 이유를 잠시 들겠다.
한일합방이 되기 전에도 이미 일본인 인쇄소가 10여 개소나 되어 업계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합방 후 불과 2∼3년 내에 30여 개소로 대폭 늘어나, 전체 인쇄업계의 8할 이상을 점유하게 되었다. 총독부는 1910년 11월 16일에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 『대한지지(大韓地誌)』등 51종의 서적을 판매 금지 시키고 이들을 모두 압수하였다. 이와 같이 출판계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총독부 인쇄국은 민수용 인쇄물까지 흡수하여 한국인 민간 인쇄업계는 크나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1910년대는 총독부의 가혹한 언론 출판의 통제 정책 때문에 한국인 인쇄업체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중검열’을 피하기 위하여 고소설을 간행하였다는 논리도 들어보자.
이중검열이란, 일제가 1907년 법률 제1호로 ‘신문지법’을, 1909년 2월 법률 제 6호로 ‘출판법’을 발표한 것을 말한다. 이들 출판 관계법은 모두 언론과 출판을 제한하는 것이었는데 특히 제6호는 원고의 사전검열과 출판 뒤의 납본 검열이라는 ‘이중검열’이었다. 따라서 많은 책이 압수되었으며 출판은 더욱 까다로워지기 시작했다.
이 이중검열을 피하고자 고소설을 출판하였을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당시에 고소설을 부르던 말로 ‘육전소설(六錢小說) 혹은 ‘딱지본’, ‘이야기책’이니 하는 말이 통용되었다. 6전이란 당시의 국수 한 그릇 정도의 값이며, 딱지 또한 아이들이 가볍게 가지고 놀던 놀잇감이니, 결코 고소설에 함량을 부여하는 용어들은 아님이 분명하다. 고소설 출판이 널리 대중화를 꾀함이 아니라, 단지 이윤을 추구하고자한 것이라면 굳이 경박한 소설을 택할 까닭이 없다. 왜냐하면 아직도 소설을 야박하게 대할 때였기 때문이다.
당시 가장 고소설과 가장 근접해 있던 벽안(碧眼)의 친구 모리스 쿠랑(M.courant,1865~1935)은 그의 『한국서지(韓國書誌)』에서 “중류계급의 사람일지라도 그가 이야기책을 들고 있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를 부끄럽게 여겼다.”라고 하였다. 구활자본 고소설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치고는 뒷맛이 영 개운치 않은 평이다.
또 ‘다른 지역은 고소설에 관한 한,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왜 유독 경성, 그것도 종로통에서 반이 넘는 숫자를 박았는가?’도 문제로 남는다. 출판사의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면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볼 밖에 없는 일이다.
육전소설의 한 광고문으로 그 시절 그들의 속살을 어림잡아본다. 고소설 출판이 재물 불리기에 영악한, 혹은 부득이한, 혹은 단순히 돈벌이용이 아님을 간취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고소설에는 저러한 시대적 아픔과 애국이 들어 있음도 놓치지 말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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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륙젼쇼셜』, 신문관, 1913.>
참고: 권순긍, 『1910년대 활자본 고소설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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