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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70년간의 포로생활로 실의에 젖어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고 하십니다(1). 하나님은 그들이 주저앉아 있던 곳에서 일어나기를 원하시고, 거룩한 나라 제사장 백성다운 영광스러운 빛을 비추기 원하십니다. 그런데 70년간 포로 생활하던 그들에게 일어나서 빛을 비추라는 말이 얼마나 막막하게 들릴지 하나님은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생생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의 비전입니다. 비전은 어두운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고 나아갈 방향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부르짖을 수 있는 기도제목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경기대 개척역사의 비전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네 빛으로,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2-9) 2,3절을 보십시오. 영화가 시작되면 모든 조명은 꺼집니다. 영사기에서 나오는 불빛에만 집중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통하여 빛을 비추려 할 때는 어둠이 땅을 덥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립니다. 그래서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통해서 비추는 빛이 보입니다. 그래서 나라들이 그 빛으로 나아오고, 왕들이 비치는 광명으로 나아옵니다. 사람들이 말씀을 공부하러 나올 때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것저것 반짝이는 것들이 있을 때에는 그 빛에 정신이 팔려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다 세상의 빛이 다 꺼지고 캄캄함이 임할 때에야 믿는 자에게 깃들여 있는 빛을 보고 나아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세상에 캄캄함이 임하면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으로 여기고 기뻐해야 합니다. 가정에 어두움이 임하고 직장에 어두움이 임할 때가 바로 하나님이 빛을 발하려 하시는 때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캠퍼스가 점점 어두워져가는 때도 바로 우리가 빛을 발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힘차게 일어나 빛을 발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비춰지는 빛을 보고 무리들이 사방에서 옵니다. 누가 먼저 보입니까? 꿈에도 잊지 못하던 아들이 옵니다. 밤마다 보고 싶어 눈물 흘리던 사랑하는 딸이 ‘아빠’라고 부르며 안기어 옵니다. 그들은 200년 전 앗수르에 의해서 북녘 땅에 흩어졌던 자녀들이고 70년 전 쇠사슬에 매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혈육들입니다. 북한의 김정일은 돈 때문에 이산가족들을 잠깐 만나게 해주고 얼른 데려가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이스라엘의 품에 안기게 하십니다.
5절을 보십시오. 갑작스런 상봉으로 아직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눈이 번쩍 뜨이고 가슴을 전율하게 할 만한 장면이 보입니다. 바다의 부가 돌아오고 이방의 재물이 그에게 오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은 어느 날 죽었던 그의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하였습니다(창 45:26,27) 이와 마찬가지로 이방의 재물이 이스라엘로 오는 것은 비로소 이스라엘 나라를 하나님이 회복시킨다는 것을 실감하게 합니다. 저도 개척을 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런데 싱크대가 들어오고, 이중창이 들어오고 강대상, 마이크, 스피커, 책장 등이 들어오니 실감이 났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이제 이스라엘에 들어오는 물목(物目)을 한번 살펴봅시다. 먼저 허다한 낙타가옵니다. 그 낙타들은 늙은 낙타가 아니라 젊은 낙타고 미디안과 에바의 명품낙타였습니다. 당시 낙타는 중요한 운송수단이었습니다. 낙타는 말보다 많은 짐을 실을 수 있고 장거리의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동서무역이 활발하던 시대에 중국과 유럽을 오갈 수 있었던 것도 낙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낙타는 오늘날의 기차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고 넓게 해석하면 도로와 운송, 즉 기간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70년대 한국에 놓인 경부고속도가 경제발전의 근간이 되었듯이 아마도 낙타는 이스라엘 재건의 든든한 기초가 될 것입니다. 다음에는 스바에서 금과 유향을 가지고 오는데 이는 여호와를 찬송하기 위한 것, 다시 말해 예배를 위해 드려집니다. 금으로는 바벨론에 약탈당했던 성전의 기구들을 만들게 될 것이고, 유향은 제사장이 분향하며 기도하는데 사용될 것입니다. 또 게달의 양과 느바욧의 숫양은 여호와의 제단에 올라 번제와 희생제물이 되는데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예배를 회복하십니다.
8,9절을 보십시오. 눈을 들어 서쪽을 보니 구름같이 허다한 무리들이 비둘기 같이 빠른 속도로 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스에서 만든 커다란 배에 흩어졌던 이스라엘 자손들과 은금을 함께 싣고 예배하러 오는 행렬입니다. 예배가 회복되고 이스라엘이 영화롭게 되니 먼 곳 다시스에서 귀신 같이 알고 예배를 드리러 왔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라고 말했습니다(마태 5;14). 예배가 회복되고 하나님의 백성의 영광이 회복되면 그 빛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 빛은 당시 세계의 끝이라고 하는 다시스, 즉 스페인 땅까지 비추어졌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회복되고 우리의 예배가 회복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그때 비추는 빛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빛이 비추면 사방에서 알고 예배하러 나오되 사모함으로 나올 것입니다.
경기센타가 학교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빛이 비추면 가장 멀리 떨어져있는 공대, 미대에서도 양들이 올 것입니다. 경기대학교에 서울, 파주, 일산, 인천, 천안 등 먼데서 통학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빛이 비추면 사모함으로 나올 것입니다. 그냥 나오지 않고 Mp3,DMB 사려고 알바하며 모아두었던 돈, 장학금으로 받은 돈 등을 예물로 들고 나아올 것입니다. 또 은금보다 귀한 그들의 젊음과 열정을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입니다. 가장 하나님을 믿지 않을 것 같은 국제학부 학생들도 빛을 보고 예배하러 나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일어나 빛을 발함으로 먼데에 있는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여호와의 성읍이라,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10-14) 10,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진노하여 유다를 쳤을 때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은 불에 타버렸고 그들은 고향을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의지하고 마음 둘 곳 없었던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성벽을 다시 쌓아 올립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방인들을 통해서 그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후일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할 때에 고레스의 지원을 받음으로 이 일은 일부 성취되었지만 이방민족들의 방해는 여전하여 한손으로는 일을 하고 한 손으로는 병기를 잡았었습니다(느 4:17).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신 때에는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않습니다. 성문은 적에게 공격을 받을 때에 굳게 닫아 방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전쟁을 했다하면 이기고 또 수비가 아닌 공격을 하기 때문에 성문을 닫아 둘 필요가 없습니다. 밤낮 성문을 열어두어야 전리품과 전쟁 포로들이 들어오고, 이방나라들이 바치는 조공이 항상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국력이 약한 나라들은 관세를 먹이고 법적인 제재를 가함으로 성문을 단단히 걸어 두어야 보호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이 금융이나 의료 또 농산물, 학교, 영화산업 등에서 성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라의 위상이 올라가고 국력이 세어지면 오히려 성문을 열어두는 것이 유리하게 됩니다. 그 성문으로 전리품이 들어오고 이방의 재물들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12절은 그 성읍의 위상이 어떤가를 말해줍니다.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이 말은 그들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동맹을 맺지 않는 나라들은 망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나라든지 이스라엘을 섬기지 않으면 진멸된다고 하니 이는 세계의 초강대국이 된다는 말입니다. 미국은 과거 어떤 제국도 누리지 못했고 오늘날 어떤 나라도 넘보지 못하는 초강대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런 우월한 위치에 서게 하십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방나라를 통해서 성벽을 세우고 나서 이제 성전을 건축합니다. 그때 세계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레바논의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이 운반되고 하나님의 성전을 아름답게 합니다. 재료만 좋은 것이 아니라 아마도 세계 최고의 장인들이 와서 조각을 하고 색칠을 함으로 마치 예술작품과 같이 뛰어난 성전이 만들어집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성전을 짓는 순서입니다. 열왕기상 5장부터 8장까지에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5장을 보면 두로 왕 히람이 레바논의 백향목과 잣나무를 보내는 것으로 성전건축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6장에서 성전을 건축하고 내부 장식을 시작합니다. 7장 중반부에서 바다와 놋받침, 수레와 물두멍을 비롯한 성전 기구들을 만들고 8장에서 언약궤를 옮깁니다. 그 후 기도하고 봉헌식을 올림으로 모든 성전건축이 완성됩니다. 그런데 이사야 60장에서는 말씀이 가장 먼저 임하고, 사람들이 돌아오고 그 다음에 성전의 기구들이 만들어지고 예배가 회복된 후 맨 마지막에 성전에 쓰일 나무가 보내지고 성전의 외관이 세워집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용이 다 채워진 뒤에 외관이 만들어졌고 영적인 것이 먼저 이루어진 뒤에야 외형적인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사도행전 7:48,49절을 보면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보좌로 삼으시고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시는 분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위하여 성전을 지을 수 없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잠시 머물러 사람들과 만나는 곳이요 여호와 하나님의 발을 둘 곳에 불과합니다(13). 고로 성전에서 중요한 것은 나무로 만들 성전의 외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는 솔로몬 성전은 무너지고 불타버렸습니다. 헤롯이 만들었던 크고 화려했던 성전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져 내린 것은 하나님이 그 안에 거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마가 13:2).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2가지 콤플렉스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숫자 콤플렉스고 나머지 하나가 건물 콤플렉스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 많이 모으려 하다가 교회의 질적인 성장이 떨어지고 건물 짓는 일에 모든 힘을 쏟다가 목회를 망치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모으고 건물의 외형을 세우는 일보다 먼저 힘써야 할 것이 말씀을 회복하는 일이고,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빛을 발할 수 있고 빛을 발할 때 이방인들이 와서 모든 일을 대신 다 해줍니다. 우리가 하는 일대일 제자양성은 한사람의 신앙을 성숙하게 하고 신앙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빛을 발하게 하는 일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많은 숫자를 모으려하거나 외형적인 일들을 이루는데 관심을 가지기보다 나 한사람이 빛을 발하고 또 빛을 발하는 한사람을 키우기 위한 일대일 제자양성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모임의 위상은 숫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질에서 나오고 영광은 건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에서 나오는 것을 믿습니다.
14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인하여 그 빛을 찬란하게 비추일 때 그들을 괴롭히고 멸시하던 이방인들이 그 발아래 와서 엎드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여호와의 성읍이란 여호와께서 소유하신 성읍이요 여호와께서 다스리는 성읍이란 말입니다. 여호와의 성읍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나라요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나라, 세상 모든 나라의 모델이 곳입니다. 거룩한 이의 시온이란 말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만나는 신앙의 중심지라는 의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여호와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에 세상 만민이 그곳에 모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원하며 그곳에서 여호와를 경배하기 원하는 성지입니다(사 2:3).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신앙이 회복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임재하심으로 우리가 여호와의 성읍이라, 거룩한 자의 시온이라는 불리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리라(15-20) 1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역사에서 부흥기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할 때 그들은 가나안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 떠는 강대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다윗 왕과 솔로몬 왕 때에 넓은 영토를 가졌고 영광스러운 성전이 완성됨으로 스바의 여왕이 와서 보고는 ‘정신이 현황’하였고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개역한글판 왕상10:5~10). 문제는 그 영광이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시대이후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고 사사기의 어두운 터널을 지났습니다. 솔로몬이후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왕국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사람들에게는 미움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역사는 잠깐 반짝하고 빛나다가는 이내 어둠속으로 빠져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의 아름다움은 영원한 아름다움이 되고 대대의 기쁨이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젖줄이 끊어지면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처럼 몸이 마르고 생명이 위태로워집니다. 그러나 엄마의 젖을 항상 물고 있는 아이는 토실토실 살이 오르고 무럭무럭 자라게 됩니다. 한국의 엄마들은 아기에게 좋은 분유를 먹이기 위해서 유기농, 프리미엄골드, 임페리얼 등의 분유를 먹이는데 하나님은 수입 명품 젖과 Royal Family의 젖을 물립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자기 백성의 필요를 채우십니다. 젖이 끊어지지 않도록 계속하여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구원자요, 구속자, 야곱의 전능자라는 것을 나타내십니다. 오늘날 모든 나라에게 중요한 젖줄은 석유입니다. 석유자원이 고갈된다면 아마도 인류가 쌓아 놓은 문화 문명은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좋은 것으로 젖을 물리십니다. 한국사회에서 워낙 미래가 불투명하다보니 우리는 ‘혹시 밥줄 끊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곤 합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밥줄도 확실하게 보장하심으로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게 하실 것을 믿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한번 지은 성벽과 성전을 관리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면 낡아지고 쓸모없이 됩니다. 경희문센타는 90년도에 구입했는데 얼마 전 리모델링하기까지 관리에 신경을 많이 쓰지 못하니 우중충하고 보기에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천장을 뜯어내고 바닥공사를 새로 하는 등 건물의 재료를 바꾸고 보수공사를 하니 한층 아름답고 사용하기 좋은 센타로 변화되었습니다. 성벽과 성전이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하다못해 미니홈피도 배경음악을 자주 바꾸어주고 스킨이나 아바타도 그때그때의 분위기에 맞춰 Update를 해야 생동감이 넘치고 보기에 좋아집니다. 하나님은 놋과 철로 만들었던 것은 더욱 귀하고 아름다운 금과 은으로 바꾸시고 나무와 돌로 만들었던 것은 그보다 더 튼튼한 철과 돌로 바꾸십니다. 하나님은 더욱 귀하고 아름다운 것, 더욱 튼튼하고 견고한 것으로 보수하심으로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도록 하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성벽과 성전보다 더 가꾸고 신경 써야 할 것은 그곳을 다스리는 일꾼들 즉 관원들과 감독들이고 그들이 화평과 공의를 세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건물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이고 사람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정신과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평화와 공의를 사랑하면 그 땅에 강포한 일이 사라지고 황폐와 파멸이 국경 안에 다시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때는 예배가 형식화 되었을 뿐 아니라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패역과 강포가 가득했습니다. 그때 성문은 슬퍼하며 곡을 하였고 시온은 황폐하여 땅에 앉았습니다(사 3:26) 그러나 이제 성벽은 구원이라, 성문을 찬송이라 부를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영원한 빛이 되고 영광이 되기 때문입니다(19). 해와 달은 밝게 비추이지만 영원하지 않습니다. 해는 구름에 가리거나 비가 오면 보이지 않습니다. 또 밤이 되면 사라집니다. 달빛은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이 비추는 빛은 해와 같이 지지 아니하고 달과 같이 물러가지 아니하며 영원토록 자기 백성을 비추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임으로 그들에게는 슬픔의 날이 끝나고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맺는 말 : Stockdale Paradox(21,22) 하나님이 손수 심은 가지는 자라갑니다. 그래서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이 이 일을 이루십니다. 그런데 그 때는 언제입니까?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항상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미래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친 백성들은 신앙을 버리고 자기 삶으로 돌아 가버리곤 하였습니다.
Stockdale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하노이 힐턴’ 전쟁포로 수용소의 미군 최고위 장교였습니다. 그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간의 모진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아 미국의 전쟁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수용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나갈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까지는 나갈 거야’하고 다음에는 추수감사절, 그리고는 다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니다. 그러다가 상심해서 죽지요.” 그리고 이어 말했습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결국에는 성공할 거라는 믿음, 결단코 실패할 리는 없다는 믿음과 그게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규율은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크리스마스때까지는 나가지 못할 겁니다. 그에 대비하십시오” 그리고 그는 생존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한 가지에 모든 것을 집중하였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결국엔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을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게 무엇이든지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한다. 이것이 Stockdale Paradox입니다.
하나님은 경기센타를 반드시 부흥하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과정을 겪을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가 집중하여 빛을 발할 수 있는 한 가지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그런 믿음과 냉혹함과 단순성이 어두운 현실을 이기고 빛을 발하게 하는 비결이라 믿습니다. 저는 성경공부가 우리가 집중해야 할 단순한 한 가지라고 믿습니다. 성경암송과 1:1 노트준비, 주일메시지 준비, 그리고 제자양성이 그것이라 믿습니다. 저희가 이 한 가지에 생명을 걸고 헌신함으로 빛을 비추고 열방이 돌아오고 그래서 영원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