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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호동네식구들 원문보기 글쓴이: 서울 그랜드파..
자인의 문화
1. 계정숲
●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제123호
● 소재지 : 자인면 서부리
● 면 적 : 50,158㎡ (15,173평)
계정숲은 구릉지(丘陵地)에 남아있는 천연임군락(天然林群落)으로서 경상북도는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보기 드문 자연숲이다.
이팝나무, 말채나무, 느티나무, 참느릅나무 등의 향토 수목들로 낙엽활엽혼효림(落葉闊葉混淆林)을 이루고 있다.
이 숲은 과거 경산시 일대에 어떤 나무들이 울창하게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자연 유적지이며, 미래에 이 일대에 자연을 복구시킬 때 어떠한 나무들을 심어 가꾸어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시범림이다. 또한 우리 조상들의 자연애호사상을 엿보고 배울 수 있는 살아 있는 현장 교육장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숲에는 한장군묘(韓將軍墓), 시중당(使衆堂), 진충묘(盡忠廟) 등의 문화재와 체육공원, 한장군놀이 전수회관이 위치하고 있다.
계정숲은 이러한 가치 때문에 1997년 12월 1일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제123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팝나무 자생지로서 개화기 무렵인 6월엔 멀리서 보면 마치 흰눈이 내린 듯한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
- 계정숲 -
2. 계정숲 공덕비군 (功德碑群)
● 소재지 : 자인면 서부리 계정숲
계정숲에는 자인현 당시의 현령 등과 자인면민들에게 칭송 받은 이들의 공덕비 내지 선행비, 선정비 30여기가 옛 자인현청 등에서 거두어져 보존되고 있다.
여기에 군집되어 있는 비석의 건립연대는 1587년에서 1937년에 이르며, 그 중 가장 오래된 비는 비석 앞면에 ‘통정대부 부윤 이령공현배 인정비(通政大夫府尹李令公玄培仁政碑)’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에 ‘만력 15년 정해 동계(萬曆十五年丁亥冬季)’라고 새긴 연대가 보인다.
옆면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글씨는 긴 세월의 풍우에 마멸되어 판독하기 어렵다. 만력 15년에 세워졌다 하여 ‘만력비(萬曆碑)’로 불리는데, ‘만력’은 명나라 신종(神宗)의 연호이고 그 15년은 1587년(선조20년)으로 임란 5년 전인 조선 선조 20년에 해당되어 자인이 경주의 속현일때 부윤 이현배의 선정을 기념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바람에 깎이고 비에 씻겨서 비문을 알아 볼 수 없게 되어 건립연호를 따 ‘만력비(萬曆碑)’라고만 불리고 있다.
크기는 총 높이 177cm, 비신 높이 120cm, 비신 폭 57cm, 1매석에 비신과 옥개석을 같이 조성했다.
3. 한장군묘비
● 소재지 : 자인면 서부리 계정숲
자인 고장의 추앙을 받아 온 한장군의 구국 충혼을 위로하고, 호국 애민의 귀감을 길이 보전하기 위한 주민의 한결같은 염원으로 1970년 한장군의 묘비 건립이 이루어졌다.
○ 비문 내용
(뒷면) 여기는 압독국 옛 터, 빛나는 신라의 일군들을 길러 낸 보금자리.
고승 원효대사를 낳고 석학 설총선생이 나서 자랐고 김유신 장군이 백제를
가늠하여 민족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고장. 한장군 오누이는 크나큰
이 얼들이 얽혀서 이룩된 상징
이요, 믿음이요, 수호신이다.
나라를 엿보고 평화를 깨트리는
무리를 참을 수 없었기에 그
꽃다운 젊음들을 겨레에 바쳤
던가. 하늘이 닿는 꽃탈 속에
호국의 칼을 품고 원화의 여원
무로 오랑캐를 꾀여 무찔렀네.
그 정성 바위도 짜개었고 버들못
깊은 물은 원수의 핏빛으로 얼
비쳤으니 참왜석 칼자국은 지금에
닳고 물 그림자에 옛 자취 가시
어도 갸륵한 그 넋이야 이 나라
아들딸에 여원무 둥근 춤다이
길이 길이 살으리. - 한장군 묘비 -
서기 1970년 단오날
영남대학교 총장 문학박사 이 선 근 지음
박 태 준 글씨
4. 시중당 (使衆堂)
● 소재지 : 자인면 서부리 계정숲
시중당은 조선조 자인현의 정청(政廳)으로서 1637년(인조 15년) 당시의 자인 현감 임선백(任善伯)에 의하여 지금의 신관리에 세워졌다.
일명 무금헌(撫琴軒)으로도 불러 왔으며, 고을터가 옮겨짐에 따라 원당리, 북사리로 이건되었고 지금의 시중당 건물은 1870년(고종 7년)에 신축되었다.
1914년 자인이 경산군에 합군(合郡)된 후 시중당 건물이 자인중학교 교실로 사용된 적이 있었는데 뜻있는 자인 지방인이 유서 있는 건물의 훼손을 안타까이 여겨 1936년 일제 때 계정숲 서편으로 이건하면서 당시 일본 관헌의 트집을 막기 위하여 요산정(樂山亭)이라 이름 붙였다.
그 후, 1980년 계정숲 한장군 사당 옆으로 이건하였는데 넓은 대청과 커다란 방이 곁들어져 굵직굵직한 기둥과 더불어 간결하고 운건한 풍취를 자아낸다.
정면에 붙은 ‘시중당’ 액자 목각의 글은 영조 39년에 자인 현감으로 도임한 정충언(鄭忠彦)이 쓴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옛 자인현 공공 건물로서는 이 밖에 객사(客舍), 풍헌당(風憲堂), 향청(鄕廳), 군관청(軍官廳), 양무당(養武堂), 현사녹청(縣司錄廳), 군기고(軍器庫) 등과 여러 창고가 있었다. 다만 당시 아전의 처소였던 현사녹청의 문에 걸었던 ‘인산현사(仁山縣司)’의 현액만이 남아 있어 지금 시중당 방안에 걸려 있다. 이것은 영조 46년 안일호장 김몽룡의 필적이다.
※ 시중당(使衆堂)의 ‘사(使)’는 ‘시’로 발음하고 명한다는 뜻으로 새긴다.
- 시중당 (使衆堂) -
5. 한장군놀이 전수회관
한장군놀이 전수회관은 1995년 자인면 계정숲 뒷편(자인면 서부리 70번지 소재)에 150평 규모의 2층 건물로 지어졌다.
중요무형문화재 제44호인 ‘한장군놀이’의 전승․보전의 산실인 이 곳은 계정숲의 정취와 고요함이 어우러져 훨씬 운치가 있는 곳으로 징, 꽹과리, 북, 장고 등을 구비하여 지역민들이나 전수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전수 활동을 벌이고 있다.
수용 인원은 300여명이고, 사용 가능한 시간은 09:00~22:00이다.
자인면장에게 허가서를 받아야 하며 사용료는 무료이다.
6. 이팝나무
매년 5월 자인면 계정숲에는 하얀 꽃송이가 온 나무를 덮을 정도로 가득 달려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이팝나무를 볼 수 있다.
계정숲에는 수령 1백년 이상된 이팝나무 10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지난 1999년에는 ‘이팝나무 사랑모임회’가 결성되어 이팝나무 동산을 조성하고 지역민과 출향인사들의 지원으로 200여그루의 이팝나무를 심었다.
또한 경산~자인간 도로에는 시가지 전체를 이팝나무로 심어 우리 고유의 수종을 보호․육성하고, 백의민족으로서의 자긍심과 함께 ‘이팝나무 축제’를 개최하여 그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고자 한다.
- 계정숲 이팝나무 -
7. 도천산 (到天山)
● 소재지 : 자인면 교촌리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 뒷편에 버들못이 위치하고 버들못 북편에 밋밋하게 솟은 해발 262m의 도천산성이 있다. 서편 능선상에 약 20㎞ 길이의 석심토축의 붕괴된 곳만 확인될 뿐 성곽은 대부분 파괴되어 있다.
남아있는 흔적으로 미루어 볼 때 석심토축한 테뫼식 산성으로 추정된다.
일제시대의 조사에서 둘레가 약 450m였다는 기록과 도천산이 자인현 당시에는 주산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산성은 ‘단북리 산성’이라고도 불리우며 주위에는 신도 지석묘군을 비롯해 북사 고분군, 교촌 고분군 등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으며 남서로 흐르는 주위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또한 진량과 자인, 경산시가지를 비롯한 대부분의 지역을 이 산정(山頂)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으므로 고대로부터 군사적 요지로 중시되어 왔다.
도천산은 기러기가 함박꽃을 찾아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옛날 자인현에 한장군이 이 산에서 토성을 쌓아 왜적과 싸웠다고 전해지며, 도천산에는 장군바위가 있는데 한장군이 앉았던 곳은 평평하고 주먹으로 때린 부분에는 주먹 자국이 남아 있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우리 나라의 지도를 펴놓고 보니 장군이 많이 태어날 형상이라 하여 붓으로 혈(穴)을 끓었는데 옛날에 실제로 산허리가 잘록하였으나 요즘은 우거진 수목으로 많이 덮였다.
8. 버들못 (柳堤池)
● 소재지 : 자인면 교촌리
자인면 교촌리 소재 버들못(柳池)의 크기는 1,540척으로 「자인현읍지」에 기록 되어 있다. 버들못의 전설은 신라말경 왜구의 무리가 도천산에 진을 치고 백성을 괴롭히는 것을 한장군과 누이가 왜구를 무찌르기 위해 병사들을 광대와 구경꾼으로 가장하여 숨겨 두고 한장군은 여자로 가장하여 누이와 함께 버들못 둑에 꽃관을 쓰고 흥겨운 춤과 풍악을 울려 흥을 돋우어 도천산에 진을 친 왜구들이 춤과 풍악에 홀려 버들못으로 내려와 정신을 잃고 구경을 하고 있을 때 미리 준비해 두었던 칡그물로 얽어 한꺼번에 섬멸하였다고 전한다.
그때부터 버들못에는 그 날이 되면 물이 붉게 변한다고 한다.
그 당시 한장군이 춤을 추었던 놀이가 ‘여원무(女圓舞)’이며 광대와 구경꾼으로 가장하여 왜구를 무찌른 놀이가 ‘자인 팔광대’이다.
이렇게 유서 깊은 버들못이 자인산업단지 부지로 편입되게 되어 원형 보존은 어렵더라도 흔적을 남기고자 버들못 흔적을 조성하였다.
- 자인면 교촌리 버들못 흔적 -
9. 검흔석 (劍痕石)
● 소재지 : 자인면 교촌리
한장군이 도천산성에 은거한 왜구들을 유인한 곳이 ‘버들못’이며, 사로잡은 왜구의 목을 베었을 때 남은 칼자국으로 돌의 상단부가 갈라져 금이 나 있고 옆에는 핏자국인 붉은 빛깔이 뚜렷이 나타나 보이는 높이 120㎝가량의 돌이 검흔석(劍痕石) 또는 참왜석(斬倭石)이다.
예전 단오제 때는 버들못에 위치한 검흔석에서도 제사를 모셨지만 지금은 버들못이 공단조성부지에 편입되면서 버들못 흔적만 남겨 두고 그 자리에 검흔석의 영구적인 시설을 위한 좌대를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자인 출신 의병장이었던 성재 최문병(崔文炳)선생이 1593년 단오날 제사를 모신 뒤 검흔석 앞에서 시를 읊었는데 자인 단오제에 관한 민간인의 기록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 검흔석(劍痕石), 참왜석(斬倭石) -
10. 제석사 (帝釋寺)
● 소재지 : 자인면 북사리 150번지
경산 지역에 여러 사찰이 현전하고 있지만 원효선사의 탄생지로 인연을 갖고 있는 사찰은 ‘제석사’이다. KBS <역사스페셜>에 원효의 탄생지로 방영된 적도 있는 이 절이 현재 위치에 중창된 것은 1960년대로 대웅전(1962년 준공), 칠성각(1965년 준공), 요사채 등이 있다.
이 제석사는 원래 이 곳으로부터 약 3㎞ 떨어진 도천산에 있었는데, 그때는 제석암이라 불렀다. 이 제석암이 물이 좋지 않아 현재의 제석사로 옮겼다는 구전(口傳)이 있다. 1977년 현 칠성각 옆 담장공사를 위해 작업하던 중 60㎝의 땅 속 기와 조각 사이에서 금동관음입상(金銅觀音立像)이 출토되었다고 당시 목격자들이 전하나 그 유물의 행방을 알 수 없어 매우 안타깝다.
현재 제석사에는 중수 기념비와 헌답공덕비가 있다.
제석사에서는 1990년부터 매년 음력 5월 4일『원효 성사 추모다례제』를 봉행하니 원효 성사에 대한 추모의 념과 성사의 일깨움이 새롭게 느껴진다
- 제석사 (帝釋寺) -
11. 자인향교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06호
● 소재지 : 자인면 교촌리
□ 연 혁
자인향교의 창건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현존하는 자료에서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향교의 역사는 그 고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자인의 연혁을 통해 그 대강을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자인현은 본래 노사화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자인으로 고쳐 장산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의 전국적 군현개편에 즈음하여 자인현은 동경유수관인 경주의 속읍이 되었다. 고려시대 이래 경주의 속읍으로서 가혹한 수탈의 대상이 된 자인은 조선 인조때에 이르러 복현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인조 11년(1633) 백렴(白廉)이 홀로 궐문 앞에서 복현을 주청하였고, 이어 이광후(李光後), 김응명(金應鳴) 등이 읍민 300여명과 함께 상경하여 복현을 진정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고종 32년 군으로 승격되었다가 1914년에 경산군에 합병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연혁을 가진 자인은 조선조 명종 17년(1562)에 자인의 주읍인 경주의 부윤 이정(李楨)에 의해 향교가 건립된 것이다. 이 때 고려조 옛터에 건립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첫 향교의 건립이 이미 고려때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명종 17년(1562)에 건립한 자인향교는 임진왜란 때 병화로 인해 불타 버렸고, 인조 15년(1637)에 자인에 현이 설치되어 현감이 파견된 뒤 현종 13년(1672)에 와서야 현인 이춘복 등이 향교를 다시 지을 것을 청함으로써 비로소 숙종 1년에 도천산 아래에 옮겨 건립될 수 있었다. 그 후 영조 4년(1728)에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이 때 문루의 흥학기문(興學記文)은 조선적(曺善迪)이 찬한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때의 향교가 『영남읍지(嶺南邑誌)』「자인현읍지(慈仁縣邑誌)」학교조에 현의 동쪽 1리에 있다고 한 그것으로서 경산시 자인면 교촌리 230번지에 해당한다.
현재의 자인향교는 1813년에서부터 1838년까지의 『향교사적(鄕校事蹟)』이 남아 전한다. 이에 의하면 우선 1813년에는 교생 이만기(李萬基) 등이 예전(例錢)으로 제복과 향로를 다시 갖추었으며, 1814년에는 신교생(新校生)인 문광억(文光億), 김종철(金宗喆) 2명으로부터 받은 예전으로 성전 담장 및 기와보수에 쓰고나머지는 향교의 빚을 상환하는데 사용하였다. 1815년 3월에는 신교생 김도운(金道雲)으로부터 받은 예전(例錢)으로 전내의 의자를 새로 갖추고 나머지는 교채(校債)의 상환에 충당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교중(校中)에서 16량을 마련하여 명륜당 기와와 동재청사 판자를 주즙하였다. 1819년에는 성전, 1821년에는 문루, 1832년에는 명륜당의 보수를 하였다. 1834년에는 명륜당 정로(正路)를 신설하였다. 1836년에는 성전기와를 보수하고, 건물내 자리를 다시 갖추었으며, 유루답(遺漏畓) 사두오도락(肆斗伍刀落)과 밭 오두락(伍斗落) 및 학위전답도록(學位田畓都錄)을 다시 갖추었다.
□ 소장자료
1) 『향교청금록(鄕校靑衿錄)』3책 : 표제에 ‘청금록(靑衿錄)’이라고 하였
으나 실제 교임록에 해당한다.
① (30×48, 31명, 1881~1887년)
② (30×31, 49면, 1887~1909년)
③ (29×30, 9면, 1923~1945년)
2) ① ≪향교교생안(鄕校校生案)≫ (19×27, 5면, 계해(癸亥) 11월)
② ≪교생개안책(校生改案冊)≫ (23×29, 6면, 병인(丙寅) 정월)
③ ≪향교교생안(鄕校校生案)≫ (21×27, 5면, 을해(乙亥) 2월)
3) 『향교사적(鄕校事蹟)』(30×36, 19면, 1813~1838년)
주요 향교사적과 당시의 교임명을 수록하고 있다.
4) 『교생납답안(校生納畓案)』(18×25, 3면, 계미(癸未) 11월)
이광춘 등 7명의 납답자 명단을 수록한 것이다.
5) 『향교전직서원하전안(鄕校殿直書員下典案)』(22×26, 5면, 기묘(己卯))
향교의 사역인인 전직(殿直) 9명, 서원(書員) 2명, 도하전(都下典) 2명,
지유사기역하전(紙油沙器役下典) 9명의 명단과 그들의 파정(罷定) 및
도망(逃亡)을 부기한 자료이다.
6) 『향교전여책(鄕校傳與冊)』(22×27, 8면, 신미(辛未) 8월)
최경두(崔敬斗), 김세위(金世胃)가 이세섭(李世涉), 최호(崔鎬)에게
향교의 문서 및 신납답질(新納畓秩), 원납안(願納案), 기물 등을 인수인계한 자료이다.
□ 건축현황
자인향교는 얕은 구릉지에 자리잡고 있는데, 이층 누각인 모성루(慕聖樓)에 들어서면 정면하여 명륜당(明倫堂)이 자리잡고 있고 명륜당의 정면에는 동,서재가 있었으나 지금은 동재만 남아있다. 명륜당 뒤에는 내삼문이 있고 내삼문을 들어서면 정면하여 대성전이 있으며 좌측에는 제기고(祭器庫)를 두었다.
전체적인 배치는 모성루, 명륜당, 대성전이 동일축선상에 놓이는 전학휴묘(前學後廟)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1) 대성전(大聖殿) : 자연석 쌓기하여 기단을 조성하였는데 정면은 강회다짐하였으며, 이 위에 자연석 주초를 놓고 원주를 세웠다. 정면은 3간인데 어간(御間)이 양측간보다 다소 넓으며 각 간에는 쌍여닫이 굽널띠살문을 설치하였다. 내부는 통간인데 바닥은 모르타르로 마감하였다. 외일출목(外一出目)의 주심포계(柱心包系) 이익공(二翼工)집인데 쇠서의 형상은 예리하게 뻗어있다. 우주(隅柱)에는 까치발 형태의 활주를 세웠는데 활주의 상부는 외목도리의 장설(長舌)을 받고 있으며 하부에는 별도의 초석을 두었다. 가구(架構)는 이고주(二高柱) 오량가(五樑架)인데 대량(大樑) 위에 동자주(童子柱) 세워 종량(宗樑)을 받았으며, 종량 위에는 파련대공 세워 마룻대를 받았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이 위에 맛배기와지붕을 얹었다. 박공지붕의 양쪽 박공부에는 풍판을 달았으며 박공널에는 게눈을 새겼다.
2) 명륜당(明倫堂) : 기단은 모두 모르타르로 마감하였으며 기단의 정면에는 역시 시멘트로 7단의 계단을 두었다. 기단 위에는 덤벙주초 놓고 원주를 세웠다. 평면은 어간 3간을 통한 우물마루로 꾸미고 양측간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인데, 전․후면에도 모두 유리창문을 끼워 옛 모습을 잃었다. 이 건물에서 특이한 것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측면에도 익공(翼工) 쇠서가 붙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활주(活柱)이다. 활주는 자연곡재(自然曲材)를 사용하였으며 하부는 기둥에 붙이고 초석이 따로 없는 것으로 보아, 언뜻 보아서는 까치발과 구분이 되지 않으나 초석이 워낙 크기 때문에 별도의 초석이 필요치 않았던 것으로 생각되어 활주로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 생각된다.
3) 모성루(慕聖樓) : 외일출목(外一出目) 이익공(二翼工)의 이층 누각이다. 평평하고 넓은 초석을 놓고 원주를 세웠는데 기둥은 이층주로 하부의 기둥이 상부의 것보다 굵은 부재(部材)를 사용하였다. 하층은 통로로 사용되는데 각 간마다에는 쌍여닫이 판문을 설치하였다. 이층은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주위에는 계자각을 둘렀다. 모성루에도 명륜당, 대성전과 마찬가지로 활주를 세웠다. 가구(架構)는 오량가(五樑架)인데 대량(大樑) 위에는 키가 매우 큰 동자주를 세웠으며 양측에는 충량을 걸었다.
4) 동재(東齋) : 정면 3간, 측면 1간 규모인데 평면은 좌측에 2간의 온돌방을 두고 우측에 1간의 마루를 두었다. 3량가의 홑처마집인데 지붕은 맛배지붕이나 용마루만 한식기와이고 지붕면은 왜식기와로 이었다.
5) 내삼문(內三門) : 대성전으로 통하는 신문이다. 삼문은 각 간마다 쌍여닫이 띠장널문을 달았으며 양측면에는 벽으로 막았다. 삼량가(三樑架)의 초익공(初翼工)집인데 익공쇠서는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예리하게 뻗어있다. 처마는 겹치마이며 이 위에 맛배기와지붕을 얹었다.
자인향교는 진량읍, 남산면, 용성면, 압량면 일대에서 유일한 향교로써 보존 가치가 있다.
12. 용계서원
● 소재지 : 자인면 원당리
용계서원(龍溪書院)은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에 소재하며 정조 10년(1786) 3월 12일 조정의 명령에 따라 ‘용계서원’이라 이름하였다.
이보다 먼저, 숙종 38년(1712)에 충현사(忠賢詞)를 지어 의병장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선생을 모셨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손되고 위패는 사당터에 묻었다고 한다. 서원복원을 위해 그의 후손인 최기열과 문중의 후예들이 적극 활동하여 1978년에 충현사 복원을 완성하여 해마다 봄(음력 3월 15일)에는 향사를 받들고 그의 학덕과 충효 정신을 본받고 있다.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선생은 1557년(명종12년)에 자인면 울옥리(자연부락 ‘외기’) 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은 영천이며 성재(省齋)는 그의 아호이다. 일찍이 외숙인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퇴계의 제자)에게서 학문과 대의를 배우면서도 오직 경학(經學)에만 전념하여 벼슬에는 뜻이 없는 순수한 유학자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을의 의병들을 규합하여 의병장으로서 왜적들을 크게 무찔러 자인현만 아니라 인근 청도, 군위, 하양 등을 지켰다
선생은 많은 공으로 인해 난중(亂中)에 조정으로부터 조산대부(朝散大夫), 장기현감, 별제어모장군(別提禦侮將軍), 훈련첨정감목관(訓練僉正監牧官)의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선생은 선조 32년(1559)에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조정에서 수선대부한성부우윤(壽善大夫漢城府右尹)을 증직하였고, 후손들은 자인 원당리 뒷산에 충현사를 세워 우국충정의 숭고한 선생의 뜻을 기리고 있다.
선생의 유품으로는 보물 제747호인 전시(戰時)에 사용하던 말안장 1좌, 궁구(弓具) 2점, 책상 1개, 책장 1개, 병풍서 8매, 하사 받은 벼루 1좌, 서화(書畵) 20매, 교지(敎旨) 5매, 성재선생실기 문집목판 60매 등이 있다.
그 중 보물 제747호 말안장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안장에 새겨진 무늬가 아름답고 실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특징이다.
이 안장의 크기는 56×39×34Cm로 등자, 배띠, 고드개 등 부속품을 모두 갖추었다.
앞 뒤 안교(鞍橋)는 나무로 윤곽을 잡고 가는 골제(骨製)로 복륜(覆輪)을 붙였으며 쇠로 고정시켰다.
앞 뒤 안교 바깥쪽에는 고슴도치 가죽을 씌우고, 세곳에 역시 골편(骨片)으로 꽃모양을 만들어 붙였다. 안교의 아래쪽은 둥글려서 파내고 그 테두리에도 골편을 붙였으며, 말다래가 달린 안장자리는 가죽으로 만들었다. 등자는 철제이고 발디딤은 원형으로 되었으며 배띠와 고들개는 마제(禡祭)와 면직(綿織)이다. 비교적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희귀한 마구(馬具)로서 괴목제(槐木製)책상과 저지제지함(楮紙製紙函)이 함께 전한다.
- 최문병 의병장 안장 (보물 747호) -
13. 자인의 역대인물 (歷代人物)
♣ 삼성현 (원효, 설총, 일연)
ㅇ 원효 (元曉 : 617~686)
한국 불교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고승이며 사상가인 원효대사는 진평왕 39년 압량군(押梁郡) 남불지촌(南佛地村) 또는 발지촌(發智村), 불등을촌(弗等乙村), 블들믈 북쪽 밤실(栗谷) 사라수(娑羅樹)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이 이 고을 서남쪽에 있었는데 어미가 만삭일 때 그 아비와 같이 외출하여 이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별안간 산기가 있어 미처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 남편이 옷을 벗어 나무에 걸어 가리고 여기서 해산하였다.
그래서, 그 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 하고 그 나무의 밤은 사라율(娑羅栗)이라 하여 유명했다.
속세의 성은 설(薜)씨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서당(誓幢), 혹은 신당(新幢)이라 하였고 어려서 불교에 들어가 글을 배웠으며, 화랑에 속한 승려 랑도(僧侶 郞徒)가 되어 무예와 수련을 닦아 儒․佛․仙 삼교에 통달하였다.
29세에 출가한 후 원효(元曉)라 이름하였고, 32세에 황룡사에서 중이 되어 불교를 전심으로 공부하였다.
원효는 스스로 경전을 연구하고 수도에 정진하다가 랑지(郞智)스님과 보덕화상(普德和尙)을 섬기면서 구법(求法)했고, 당나라 불교의 신학풍을 열망하여 45세 때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을 떠났다가 도중에 해골 바가지의 썩은 물을 마신 뒤에 “진리는 결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터득하고 성자가 되어 유학을 포기하고 홀로 귀국했다.
그 후 초인적인 분방한 활동으로 전국을 누비며 대중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설법하고,「金剛三昧經論」을 집필하는 등 우리나라 대승불교(大乘佛敎)의 선구자로서 주옥같은 저서들을 남겼다.
그는 학승(學僧)으로 높이 평가될 뿐 아니라 민중 교화가로서도 많은 일화를 남겼으며,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파계(破戒)를 하고 아들 설총을 낳은 뒤로는 무애박을 치면서 거리를 돌며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그의 이러한 행위는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깨트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시키려 하였으니 신라의 삼국통일 전후 어려운 시기에는 화쟁(和諍), 정토사상(淨土思想)으로 국론을 합일하는데 큰 역할을 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그는 해동종(海東宗)이라는 독자적인 총화불교이론을 제창했으며, 불교의 연구와 저술로 일생을 보내는 동안 99부 240여권의 방대한 저작을 남겼다.
저서에《대혜도경종요:大慧度經宗要》《법화경종요:法華經宗要》《화엄경소:華嚴經疏》《대열반경종요:大涅槃經宗要》《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대승기신론소:大乘起信論疏》《대승기신론별기:大乘起信論別記》《대무량수경종요:大無量壽經宗要》《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미륵상생경종요:彌勒上生經宗要》《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보살영락본업경소:菩薩瓔珞本業經疏》《범강경보살:梵綱經菩薩》《계본사기:戒本私記》《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중변분별론소:中邊分別論疏》《판량비론:判量比論》《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유심안락도:遊心安樂道》《십문화정론:十門和諍論》등이 있다.
ㅇ 설총 (薛聰)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 자는 총지(聰智), 원효의 아들,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 신라 3문장(强首․薛聰․崔致遠)의 한사람으로 벼슬은 한림(翰林)을 지냈고 경사(經史)에 정통했으며 박사로서 구경(九經)을 처음으로 구결(口訣)로써 강론하여 후학을 지도하였다 한다.
이두를 창제하였다고 하나 그가 생존하기 전인 579~631년(眞平王)의 《서동요:薯童謠》, 632~647년(善德女王)의 《풍요:風謠》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화왕계:花王戒》를 지어 신문왕을 충고한 일화가 전한다.
ㅇ 일연 (一然)
고려의 후기인 1206년(희종 2년)에 태어난 장산(경산) 출신의 고승이다.
고려 말기에는 자인과 하양이 따로 현으로 불리기도 할 무렵에 장산 출신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경산읍 부근 에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일연은 중으로서 고승이기도 하였지만 오늘에 있어서는 유명한《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로서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일연의 성은 김(金)씨이고, 이름은 견명(見明), 호는 무극(無極) 또는 목암(睦庵)이라 하였고 일연은 그의 자이다. 아버지는 언필(彦弼)이다.
1214년(고종 1년) 9세 때 해양(海陽)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14세 때 대웅(大雄)의 영향으로 중이 되었다.
1227년 승과(僧科)에 급제하여 1237년 34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41세에 선사(禪師), 54세에 대선사(大禪師)로 승려의 최고 위계까지 올랐다.
1261년(원종 2년) 왕의 부름으로 송도에 상경하여 선월사(禪月寺) 주지가 되고 목우화상(牧牛和尙-普照國師이며 조개종의 초대조사)의 법통을 이었다.
1268년(원종 9년) 조지(朝旨)를 받고 운해사(雲海寺)에서 선교의 대덕(大德) 100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 落成會)를 개최하고 맹주(盟主)가 되었다.
일연의 덕망을 신임한 원종(元宗)이 그를 서울로 불렀으나 오래 있지 않고 다시 시골로 내려가 설법에 힘쓰는 한편 인흥사(仁興寺)와 불일사(佛日寺)를 중건하였다.
충렬왕 역시 일연에 대한 신임이 두터웠으며 경주에 행행할 때에 그를 수행케 하기도 하였고 1277년(충렬왕 3년) 72세에 왕명으로 운문사(雲門寺) 주지에 취임하게 되었다.
1281년 왕에게 법설을 강론하였고, 1283년 그의 나이 78세 되던 봄에 충렬왕은 승지를 보내어 왕명으로 국사(國師)의 예를 갖추고자 하였으나 일연이 굳이 사양하였으므로 다시 근친의 장군을 보내어 국존(國尊)으로 책봉하고 궁내로 맞이하여 의식을 행하고 국존으로 삼았다.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고, 그가 궁성에 있기를 싫어하여 늙은 어머니의 병환을 빙자하여 고향으로 내려가니 왕은 근시를 시켜 그를 호행케 하는 한편 어머니를 문병토록 하였다.
이듬해 조정으로부터 토지 백경(頃)을 하사받아 경상도 군위군 고로면 화수동에 인각사(麟角寺)를 중수했고, 궁궐에 들어가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했다.
1289년 일연은 병이 들어 7월 8일 제자를 시켜 북을 치게 하고 의자에 걸터앉아 여러 승려들과 신색 자약(自若)하게 선문답(禪問答)을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금강인을 맺고 입적하니 향년 84세요, 출가한 지 71년이었다.
인각사에 탑과 비석이 남아 있으며 보각(普覺고)이라고 시호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일연이 저술하거나 편찬한 불서가 80권이 넘었다고 하나 거의 전해지지 않고 삼국유사만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상보하여 우리의 최고 역사 서적이다.
13세기 전반에 걸쳐 생존한 일연의 시대는 몽고군의 침략으로 강화도에 천도하였다가 마침내 몽고군에 굴복하였고 황룡사의 9층탑이 전란으로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였고, 외세 몽고가 국내를 풍미하는 것을 보았고 그는 비록 속세를 떠났다 하지만 치솟는 분노를 느꼈을 것이다.
일연에 앞선 삼국사기가 다분히 시대적이고 외세에 영합하여 국사를 왜곡한데 반하여, 삼국유사는 당시 세태에 있어서의 자아반성의 정신국풍(國風), 곧 강렬한 민족적 의식에서 편찬 저술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우리나라 고대의 신화(神話)와 민간 설화를 수집하고 특히 희귀한 향가(鄕歌)를 비롯하여 불교관계 기사를 수록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함께 우리나라 고대사(古代史)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되고 있다. 신라의 향가로서 현재 전해지는 25수 가운데 14수가 삼국유사에
실린 것만 보아도 그의 의도와 삼국유사가 오늘날에 있어 남긴 보물적인 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고대 역사, 문화, 풍속, 언어, 지리의 연구에 소중함은 이를 데 없다.
1018년(현종 9년)에 장산현(章山縣)이 격하되어 경주에 속하였고 현령이 아닌 감무(監務)를 두게 되었던 바 1317년(충숙왕 4년)에 이르러 보각국존 일연의 고향이라 하여 현으로 승격되었으니 일연이야 말로 나라의 보물이요, 경산을 빛낸 분이었다.
저서에《어록:語錄》《계승잡저:界乘雜著》《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조도:祖圖》《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제승법수:諸僧法數》《조정사원:祖庭事苑》《선문점송사원》등이 있다.
ㅇ 백현룡 (白見龍)
1601년(선조 34년) 자인면 신관리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사숙(士淑), 호는 성헌(省軒), 자인현을 경주부에서 떼어내어 고려 현종 때 경주의 속현이 된 이후, 615년만에 현청을 세운 전후 5년의 복설운동에 협력하였다. 재종질 백렴의 단독 상소를 신호로 하고, 이듬해의 300여명의 집단 상소 등 잇단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1632년에 상경하여 때마침 청태종이 침입한지라 급거 하향하여 자인 사람의 의거를 부르짖어 남한산성에 당도하였더니 강화 이후였다. 이듬해 이시겸(李時謙) 등과 같이 상소하여 끝내 자인현 복설의 윤허를 받았다.
ㅇ 백렴 (白廉 : 1605~?)
자인면 신관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열(仲悅), 호는 동화(桐華)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백인관(白仁寬)의 10세손. 어려서부터 담략과 씩씩한 기개를 가졌다. 1632년(인조 10년) 당시 자인이 경주부의 속현이므로 행정면의 불편, 경주부 이속의 횡포 등에 시달림이 많았으므로 고려 현종 이전과 같이 자인현이 독립할 것을 향인 간에서 숙의한 끝에 재종숙 백현룡(白見龍)의
승낙으로 유생을 대표하여 단독으로 자인현 복설의 상소장을 들고 3일만에 달려서 상경하였다. 그때의 나이 28세. 경주부윤의 지탄을 무릅쓰고 최초의 항의와 건의를 위한 진정이니 거의 늠름한 기상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 조정에서 윤허가 있어 경상도 감사에게 실정을 조사하여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감사가 자인현의 억울한 실정을 올리기 전에 경주부윤이 백렴이 허위 사실을 꾸며 백 가지를 속인다고 상주하였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병자호란에 마침 백현룡이 상소를 위하여 상경 중이었는데 오랑캐의 침입을 알리어 자인 유생이 창의하였다. 백렴도 물론 의거에 가담하여 급거, 남한산성에 달려 갔으나 강화가 이루어졌으므로 돌아왔다.
ㅇ 최문병 (崔文炳 : 1557~1599)
4~5세에 시를 외우고 천지복재(天地福災)의 이치를 알았다 할만큼 총명하였으며 특히 구도서(口倒書 : 입으로 붓글씨를 씀)에 능했다. 또 어느날 향인들과 더불어 주연을 베푸는데 별안간 폭우가 쏟아지며 벼락이 떨어지니 좌중의 향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넘어지며 대경실색하였는데도 오직 최문병은 태연자약하게 여전히 잔을 들고는 추호도 안색의 변함도 없는 의연한 풍채였다 하니 그 담대한 도량을 헤아릴 수 있겠다.
임진에 왜군이 침공하기 2년 전, 경인년 여름 어느 밤에 손님과 함께 앉아 노는데 낯 모르는 장부 한사람이 앞에 나타나서 말하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장차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니 한 고을 수령은 공이 아니면 구제할 수 없을 것이오”하고 말을 마치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평소 문달을 구하지 않고 은거하여 학문에 힘써 오던 중 1592년 36세 때 임란이 발발했다.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는 왜구에 각 고을의 관군이 모양없이 패주하니 최문병은 인근 어느 고을에 앞서서 용약, 향리에 외거를 격려하니 마을마다 장사들이 모여 최문병을 추대하여 의병장으로 삼고 우장산(牛丈山)에 웅거하니 따르는 자가 수천이었다.
왜구가 침범해 오는 요소요소에 모든 의병을 매복시키니 그들이 마음놓고 침공해 오는지라 일격에 무찌르고 적으로 하여금 감히 자인현의 경계를 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청도의 의병장 박경전(朴慶傳)과 합세하여 사곡(社谷)에서 왜적 수백명을 죽이고 선암(仙岩:청도 금천)에 있는 적을 막았다.
갈지현(葛旨峴)에서는 적의 식량과 병기를 약취하여 그들의 활동을 제약하였다. 왜적이 영천에 침공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영천의 의병장 권응수(權應銖)와 합세하여 군위, 하양 등지의 적을 격파하고 3부로 나누어 영천성에 다다르니 우장 정대임(鄭大任)과 더불어 좌장으로서 말을 달리어 방어하는 적 10여명의 목을 베었다. 따르는 장병이 비로소 용기를 얻어 질풍같이 진군하니 적이 일제히 달아났다. 이에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을 모조리 태워죽였다.
병사 박 진(朴 晉)의 전공 상소에 의하여 감목관(監牧官)을 제수받았다.
43세의 나이로 돌아간 뒤 조정에서 가선대부 한성우윤(嘉善大夫漢城右尹)에 증직되었고, 그를 기리기 위해 원당리 뒷산에 충현사(忠賢祠)를 세워 향사하였으나 1868년 철폐되었다가 후손들의 노력으로 1979년 사당, 담장 등을 복원하였다.
그의 묘는 용성면 용전리에 위치하며, 묘 앞에는 상석(床石) 망주(望柱) 2개 및 비(碑)가 있다.
◆ 참고문헌 : 慶山誌 - 김한중 (1989)
慈仁의 脈 - 이종대 (1991)
경산문화유적총람 - 경산대학교 경산문화연구소 (1996)
慶山文化 - 경산문화원 (1997)
慈仁端午 - 경산문화원 (1998)
경산의 지명 유래 - 정호완 (1998)
한장군놀이 - 국립문화재연구소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