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편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본문 말씀은 ‘다윗의 시편’ 이다. 우리는 본문 말씀을 묵상하기 앞서, 본문 말씀이 지어진 배경을 명확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다.
본(本) 시편이 지어진 배경이 성경에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 지은 시’라고 친절하게 설명 되어져 있다. 당시의 배경은 사무엘하 15장과 16장을 읽어보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젊은 날 다윗은 무척이나 용감하고 진취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매우 겸손하고, 하나님 앞에서 항상 근신하는 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지은 이 후에 (삼하 11장), 다윗의 영성은 이전만 같지 못하였던 것 같다.
혹자는 압살롬의 배역사건도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본문 말씀의 배경이 되는 압살롬의 반역사건은 이미 다윗의 범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하심(삼하 12:13), 그리고 심판(삼하 12:14)이 이미 매듭지어진 이후의 일이었다.
이러므로 본문의 사건이 꼭 다윗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심판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무리가 있다. 단, 앞 서 언급한대로 범죄 이후에, 다윗의 영성에 심각한 장애가 온 것임에는 틀림 없어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그냥 내어버려 두지 않으셨다. 시편 3편은, 이제 왕국이 거의 안정되어가고, 부족함이 없는 것 같은 때에, 다윗이 가장 총애하던 아들 중에 한 명인 압살롬의 배신과 반역을 겪으면서 씌어진 예사롭지 않은 고백이다.
비록 자신의 영적 둔함과 우매함이 원인이 된 사건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고 계셨으며, 여전히 다윗 편에 서 계셨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믿음과 신뢰 속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다윗의 정서를 살펴야 하겠다. 이러한 뜨거운 정서 속에는 자신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 달렸고, 지금의 위기를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시다는 확신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오해하지 말 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나서 겪게 된 자신의 어려움과 처지를, 감히 본문 말씀에 비교하면서 하나님이 '회개하지도 않은 자신'의 편에 서 주실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확신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절대로 그러한 차원이 아니다. 앞 서 언급한대로 다윗은 자신의 범죄에 대한 회개와 심판을 이미 치룬 상태다. 비록 둔감해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하나님과 다윗 사이에는 변하지 않는 영적 관계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가 주의 해야 할 또 다른 하나의 측면은, 비록 이 사건이 다윗 개인적으로는 인간적으로 매우 치욕적이고 슬픈 사건이었으나, 다윗의 영혼에게는 너무나도 큰 축복이 되어졌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은 이 비극적인 일로 인하여 오히려 그 동안의 깊은 잠에서 깨어나, 젊은 날의 초심(初心)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영적 충격’이 되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다윗에게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괴로운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와 같은 어려움과 곤란을 겪을 때에, 다윗과 같이 반응하는 사람은 찾아 볼 수 없는 것 같다. 하나님과의 특이한 불화는 없는 것 같은데, 지금 당신이 원인 모를 어떤 극심한 고통 속에 있다면, 그것은 사실 상, 당신의 영혼이 둔감해져서 초래 된 일은 아닌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자 이제부터 시편 3편을 묵상하면서, 다윗의 심정으로 깨어 일어나, 첫사랑을 회복하며, 근신하며,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지금의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겠다.
1. 다윗은 그의 사랑하는 3번째 아들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한다. 인간적으로 보면, 배신도 이런 배신이 있을 수 없다. 배신의 정도가 ‘아들이 그 아버지의 목숨을 노리는 것’ 이었다. (삼하 17:1~4) 이 때, 다윗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 (삼하 15:30, 16:5~13)
2. 다윗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무엇이라 빈정거렸는가? (삼하 16:5~8,13, 시편 3:2)
3. 시편 42편을 묵상해 보라. 시편 3편은 다윗이, 42편은 고라자손이 기록한 것이지만 이 두 시편에는 동일한 정서가 흐르고 있다. 이 두 시편기자의 마음을 제일 상하게 하는 대적의 빈정거림은 무엇이었는가? (시3:2, 42:3)
4. 사단이 마음이 약한 성도를 쓰러뜨리는 제일 큰 무기는 무엇인가? (신20:8, 갈6:9, 골3:21, 살후3:13, 히12:3,5,)
5. 다윗은 무섭도록 냉혹한 현실 앞에서 처음에는 당황 했던 것 같다. (1~2절 말씀) 그러나 이내, 어떻게 하고 있는가? (3~4절 말씀)
6.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상황의 변화’ 보다는 그러한 상황에 반응하는 ‘마음과 자세의 변화’가 선행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음과 자세의 변화란 어떤 종류의 변화를 말하는가? (5~8절 말씀)
* 시편에 나온 다윗의 기도를 주목해 보자.(3~8절 말씀) 다윗은 먼저 상황을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자신을 배신한 무리에 대하여 앙갚음해 달라고도, 자신을 빨리 예루살렘 궁으로 복귀시켜 달라고 기도한 적도 전혀 없다.
다윗은 오직 한 가지만을 구하였다. 만유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이 되어 주시고, 자신도 오직 하나님의 편에 서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그러면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것이 충분하다는 믿음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8. ‘의로운 고난’ 이나 ‘애매한 고난’ (벧전 3:18,19) 속에서 사단은 끊임없이 성도를 낙심하게 한다. ‘너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지 못할 거야!’ 라고 속삭이는 사단의 공격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 성경은 사단을 ‘참소자(讒訴者)’ 라고 가르쳐주고 있다. (계 12:10)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보혈’ 과,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은총’ 만이 이 참소로부터 벗어 날 길을 열어주실 수 있다. (롬 8:1,2)
낙심치 말라. 낙심은 하나님의 뜻도 아니요, 십자가를 지신 이유도 아니다. 성경은 ‘낙심’과의 반대어로서 ‘기도’를 제시하고 계시다. (눅 18:1)
9. 다윗은 예루살렘 궁에서 쫓겨나와, 광야로 들어가 버린다. (삼하 15:23, 16:14) 아마도, 다윗에게는 이때가 가장 비참하고, 극도의 위기감을 느끼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언제 아들의 군대가 자기를 찾아와 덮칠지도 모르는 어두운 광야 한복판..., 자신을 보호해 줄 튼튼한 성벽도 없는, 급히 친 장막 속에서…, 바로 그런 곳에서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다윗을 상상해 보자.
하나님을 신뢰하였기에 다윗은 그날 밤 아주 편한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떴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침상에서 간절히 기도하였던 다윗에게 있어서는, 자신에게 숨이 붙어있었던 이유는 오직 한 가지였던 것이다. (5절 말씀)
이러한 확신은 오직 하나님과 다윗만이 알 수 있는 ‘비밀한 확신’ 인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극도의 위기의 순간이지만, 하나님과 함께하는 마음의 평화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도의 응답이다. 당신에게는 이런 경험이 있는가?
10. 하나님과의 막힘없는 교통(진실한 믿음의 기도)은 모든 현실적이고 강력한 위협 속에서도 전혀 굴하지 않는 담대함을 가져다준다. (6절 말씀) 왜냐하면, 만유의 하나님께서 친히 참된 기도자의 편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당신은 세상을 대할 때, 혹은 세상으로부터 어떤 위협을 당할 때, 이런 종류의 담대함이 있는가?
10-2. 만약 그런 믿음과 용기가 없다면, 당신은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11. 평안한 잠을 자고 난 후에, 다윗의 기도는 더욱 더 확신 있고, 권세 있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7,8절 말씀) 이러한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유다서 1:19, 엡 6: 10~18)
* 7절 말씀의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라는 다윗의 고백은, 지나온 삶에 대한 다윗의 신앙적 간증이다. 그러나 이 고백은 개인적인 원한(怨恨)에 대한 앙갚음을 하기를 원한다는 의도가 아니다. 다윗은 오히려 반역의 주동자인 자신의 아들 압살롬을 염려하였으며, 죽지 않고 살아있기를 바랬다. (삼하18:5)
그러나 다윗의 의도와는 다르게, 압살롬이 죽자,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으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운다. (삼하18:33)
본문말씀에 나오는 ‘나의 모든 원수’ 란, 개인적(個人的)인 원한(怨恨)에 기초한 원수(怨讐)라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공적(公的)인 원수, 곧 하나님의 모든 대적을 의미하며, 신약시대에는 이 뜻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어 사탄, 혹은 마귀의 모든 세력을 의미한다.
11. 당신이 이 말씀을 통해서 깨달은 바가 무엇이고, 적용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적어보고 발표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