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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김용옥이 말하는 노자와 21 세기
21 세기의 3대 과제
나는 21 세기의 3대 과제로 다음의 세가지 화해를 들었다. 그 첫째가 인간과 자연환경의 화해(the Harmonγ between Man and his Environment)요, 그 둘째가 종교와 종교간의 화해(the Harmony between Religions)요, 그 셋째가 지식과 삶의 화해(the Harmonγ between Knowledge and lIfe)다. 이것이야말로 곧 우리가 노자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문제의식을 형성하는 것이다.
1. 인간과 자연환경의 화해
수년 전의 일이다. 아프리카 대륙과의 최초의 해후! 내가 탄 헬리콥터 탕가니카 호수 북단의 호반의 푸른 초원에 내렸다. 내가 탄 헬리콥터가 검은 대륙에 착지하려고 접근을 시도할 때, 주변동네의 어린아이들이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바스라질 듯 해맑은 대기, 바다보다도 더 큰 호수, 호수를 병풍친 밋밋하면서도 웅장한 산맥의 준령, 이 모든 것이 작열하는 태양빛 아래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문화충격이랄까, 삶의 환희라고 해야할까, 생명의 약동이랄까, 강렬하게 다가오는 무엇보다도 내 주변에 바글거리는 까만 아동들의 얼굴이었다. 김서린 새벽 호면을 박차고 튀어 오르는 물고기들의 강렬한 몸짓보다도 더 투명한 빛을 발하는 그들 까아만 얼굴의 질점 하나 하나가 모두 인간의 태고적 발랄함과 원초적 순결성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미대륙에서 경험하는 아메리칸 블랙들의 얼굴과는 전혀 다른, 도저히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강렬한 생명의 발출이었다. 초코렛을 던져주는 덩치 큰 깜등이 자아이 아저씨들 트럭꽁무니를 열심히 뛰어다녔던 나의 추억이 바로 엊그제 같은데... 카사바 베이 대통령 별장을 방문한 국빈이 되어 짙은 초록색 풀밭배경과 앙상블을 이루는 흑인 아동들의 얼굴에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사탕을 나눠주며 그들과 곧 친하게 되었다. 그리곤 그들의 손에 이끌리어 바로 옆에 있는 흑인마을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마을이라고 해봤자 별로 크지도 않은 운동장만한 황토벌 위에, 여인들이 물동이를 이고 모여드는 샘 펌프가 하나 한 가운데 놓여 있고 그 주변으로 초가지붕의 아주 단순한 원통모양의 막사들이 한 열 대여섯개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그 황토 벽돌로 쌓아올린 원통모양의 담의 직경이래야 한 4.5메타될까? 그 지붕은 삿갓 모양으로 풀잎들이 이어져 있고, 그 위에는 호수에서 잡은 고기들을 건조하기 위해 척척 널려놓았다. 대문에 해당되는 네모난 구멍은 거적대기 같은 것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가운데 직경의 7분의 7정도 만큼으로 하나의 사람 키만한 칸막이 담이 처져 있었고 그 담 안쪽으로 나무 평상같은 것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부엌시설은 따로 없고, 큰 깡통 안쪽을 진흙으로 이겨 만든 화덕같것 하나, 그것이 취사시설의 전부였다 빵은 배급받고, 그 깡통에 숯불 피워 지붕에 있는 건어물을 기름에 볶아 빵에 찍어 먹는 모양이었다. 잠은 그 평상 위에서 한 식구가 모두 같이 담요 한장 덮고 자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그나마 대통령관저 옆에서 보호를 받는, 그래도 제대로 된 한 모범적 마을의 모습이었다. 원시라든가, 빈곤이라든가, 미개라든가, 하는 말을 떠올리기 전에 나에게 충격을 준 사실은 인간의 삶의 양태의 단순성(Simplicity)이었다. 인간은 이렇게도 단순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삶이 문명의 어느 구석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발랄하게 약동치는 아동들의 모습을 연출해내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이었던 것이다.
나 자신의 리얼한 삶의 모습을 회상해보았다 내가 어렸을 때만해도, 대부분 국민학교를 다녔지만, 저 동구밖 눈들에 있는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도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서민들이 살고 있던 초가집 단칸방의 모습은 내가 지금 목격하고 아프리카 초원의 가옥과 별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겨울이라는 풍토때문에 벽이 두껍고 부뚜막 부엌이 따로 있었을 뿐이다. 그때만 해도 세멘트는 구경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아낙들의 최고의 꿈은 솥이 걸린 황토 부뚜막이 먼지가 안나는 세멘으로 덮이는 것이었다. 그들은 기름 때를 묻혀 부뚜막의 흙을 굳혔지만, 그것도 몇년 지나면 다시 만들고 다시 만들고 해야만 했다. 수수깡 엮어 흙을 발라놓은 벽은 갈라져 구멍이 숭숭했고, 종이를 발랐어야 흙과 떠서 그 사이엔 곰팡이가 끼어 있었다. 방바닥 황토를 바른 위에 다시 바를 세멘트가 없으니까 장판을 해봤자 뜰 것이고, 아예 왕골자리나 삿자리를 깔았다. 겨울에 왕골자리 단칸방에 시커먼 광목 솜이불 하나 깔아놓으면, 요도 없이 밑으로 엄마.아버지.아기.메느리 할 것 없이 모두 부채살 모앙으로 쑥쑥 들어가 잤다. 애기가 똥이라도 싸는 바엔 아무리 똥을 닦아내어 봤자 왕골 사이사이로 똥은 박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몇년을 지나게 되면 벽에 주렁주렁 매어놓은 메주냄새와 절묘한 하모니를 이루어 매쾌한 내음새를 스물네 시간 발했다. 기절초풍 할 가관은 애기가 똥을 싸면 됫마당으로 나있는 방문을 열어 강아지 이름이라도 부르면 졸랑졸랑 방으로 들어온 강아지는 열심히 애기똥을 핥아먹고 나갔다. 그런데 이런 광경은 정말 우리시대에는 흔히 체험하는 상식적인 것이었다.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우리의 모습. 가끔 산토닌이라도 먹으면 똥구멍으로 삐질삐질 나오는 회충을 손으로 잡아 빼는 것은 물론, 가끔 아악 소리를 지르면 목구멍으로 지렁이같은 회가 한마리 요동을 치며 입안의 허공을 널름거렸다. 저녁에 옷을 벗어 놓으면 엄마는 난닝구 이음매 사이로 기어다니는 이를 잡느라 똑똑 거리고, 목양말은 매일 빵꾸가 나서 전기다마에 끼우고 기우느라 여인들은 손놀림을 쉴 수가 없었다. 아침이면 고운 참빗으로 머리에 낀 서캐를 긁어내느라 정신이 없고, 머리맡 윗목에 놓은 걸레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우리 삶속에 전기라는 에너지가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전기가 우리 삶에 진입한 것은 겨우 70년대였다. 서민들은 등잔불 속에서 살거나, 전기가 들어온다 해도, "보통"이니 "특선"이니 해서 하룻밤에도 전기가 수십번 나갔다. 왜 특선인데 이렇게 전기가 나가냐고 전기회사에 전화걸어 항상 호통치시던 아버지의 모습과 음성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극장에 가도 영화를 한번에 보는 예는 없었다. 꼭 전기가 나가기 때문에 영사기가 멈추었고 그럼 발전기를 돌려 다시 영사기를 돌려야 했다. 그러나 전기가 들어오면 발전기를 껐다가, 또 다시 전기가 나가게 되면 또 블랙아웃! 너무도 멀리 사라진 듯한 우리의 삶의 모습이건만 이것은 불과 수십년 전 우리 삶의 상식적 풍경들이었다. 내가 국민학교 5.6학년 때 비로소 형광등이라는 신기한 작대기 전구가 선을 보이기 시작했고, 그 때쯤 전 읍내에 한 가구 정도 테레비라는 꿈같은 현실이 부잣집 안방을 장식하기 시작했고 밤이면 온 동네사람들이 그곳으로 마실을 왔다. 간편한 볼펜도 중학교 때나 등장하기 시작했고, 학교에선 아동들 사이에는 누가 어떻게 연필을 더 예쁘게 깎느냐는 경기대회가 매일 열리는 판이었다. 말만 듣던 수세식 변소의 존재는 온양 온천 관광호텔에서나 확인할 수 있었고, 슈악 맴도는 변기의 소용돌이가 도대체 어떻게 생길 수 있는지 너무도 희한한 광경을 바라본 듯 감격스럽게 불알을 털럭이며 미소지어야 했다. 집안에서 항상 더운물이 수도꼭지에서 나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비현실이었다.
자아! 한번 생각해 보자! 바로 몇년 전의 우리의 삶의 모습으로 한번 되돌아가 보자!
정확하게 지금으로부터 한 사오십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 삶의 기본 양식이나 보편적 주거 환경이, 고조선시대의 사람들의 주거방식이나 삶의 양식과 거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단칸방짜리 온돌방식의 가옥구조가 우리 인간의 문명의 세기 사천년 동안 거의 변화없는 연속성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4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삶은 4,000년 전의 이 땅의 사람들의 삶과 별 차이가 없었다. 마르코 폴로가 목격한 중국문명의 찬란함은 당대의 서양의 문명에 비해 더 화려한 것이었다. 이미 청자기와를 해올린 신라의 고도 서라벌 경주, 불국사나 석굴암의 모습만 연상해도 그 웅장함과 단아한 문명의 아취는 쉽게 그려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문명들은 결코 우리가 이 땅에서 한 40년 동안 자연을 착취한 방식으로 에너지를 사용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즉 대중적인 인간 삶의 기본적인 연속성이 크게 흩트러진 적은 없다는 것이다. 그 연속성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라는 화해의 연속성이었던 것이다.
20세기 인류사를 특징지우는 희대의 사건은 20세기를 통하여 기술(테크놀로지)과 과학(사이언스)이 본격적인 랑데뷰를 시도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기술과 과학을 동일한 것으로 착각하고 "기술과학"이니, "과학기술"이니 하고 무분별하게 말을 뭉뚱그려 사용하지만, 과학과 기술은 개념적으로 확연한 구분이있는 것이다.
기술이란 본시 삶의 예술(the art of living)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즉 기술이란 살아가는 방편으로서 필요한 모든 예술 즉 기예(테크닉)를 말하는 것이다 까치가 휘엉청거리는 나뭇가지 끝에 태풍에도 견디는 견고한 집을 짓는 것은 분명 까치의 "기술"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까치의 "과학"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과학이란, 인간의 지식을 특징지우는 어떠한 측면이다. 과학이란 본시 기술과는 무관한 인간의 사변, 이성의 산물인 것이다. 과학의 특징은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를 법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때 "법칙적"이라는 것은 대강 희랍인들에 의하여 "연역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는데, 이 연역적인 인간의 사유의 방법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수학"이라는 것이다. 더 이상 깊게 이야기는 하지 않겠는데, 이 과학이라는 것은 기술의 전제 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과학은 인간의 사변이 고도화되면서 생겨난 하나의 철학체계요, 지식체계와도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원시인들이 토기를 굽는 것은 "기술"이다. 그러나 그들이 토기를 구을 때 과학이라는 연역적 전제를 꼭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흙과 불에 대한 과학적 일반이론을 전혀 몰랐을지라도, 놀랍게 훌륭한 토기를 구워 내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류의 역사에서 과학과 기술은 따로 따로 발전한 것이다. 기술의 역사, 그 정밀성과 고도성을 운운한다면, 아마 중국문명이나 우리 한국문명이 훨씬 더 서양문명을 앞질렀을 것이다. 몇백년전만 거슬러 올라가도 이 지구상에서 도자기를 굽는 기술은 우리 조선의 기술이 세계 최고의 수준을 과시하고 있었다.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수준은 기술적 측면에서 분명 송자나 명대의 자기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그리고 당대 유럽은 1,300도에 가까운 가마의 기술을 상상할 수도 없었다. 나의 최근의 희곡 작품인 "그, 불"(1997년 6월 11일∼77일, 동숭동 문예회관 대극장 초연)의 내용이 말해주듯이, 일본의 아리타 야키라든가 사쯔마 야키가 모두 정확하게
당대 일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우리나라의 고도의 불의 예술이 전수되어 발전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활판인쇄술만 하더라도, 서양사람들이 아무리 구구한 이설을 내어도 소용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그 자체로서 당대의 최고 · 최초의 기술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고려시대에 이미 성행했던 주자 인쇄는 차치하고서라도, 세종조의 갑인자 같은 것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도무지 그 아름다움에 도취하여 눈을 땔수가 없을 정도로 정치하고 단초로운 품위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우리나라 조선조의 목공예품을 보아도 그것은 디자인적으로나 크래프트맨십의 정밀성으로나 가히 세계 최고의 가품들이다.
그런데 이렇게 명백히 세계최고의 기술의 대국인 조선의 후손들의 나라인 대한민국은 왜 이다지도 기술의 시대에 뒤진 모습을 하고 있는가? 왜 테크놀로지에 있어서 조차 일본의 꽁무니도 따라가기 어려운 수준에 머물고 있는가? 바로 여기에 대답할 수 있는 결정적 열쇠가,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라는 이 한마디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자부하던 과거의 찬란한 기술은 곧 과학의 전제없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삶의 방편으로 개발된 것이다. 그것은 삶의 예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소위 개화를 통하여 경험해야만 했던 서양 콤플렉스는 바로, 과학과 기술이 본격적인 랑데뷰를 시작하여 구성한 새로운 문명에 대한 콤플렉스였던 것이다.19세기초까지만 하더래도 동양과 서양은 소위 과학기술문명 전반에 있어서 그리 큰 차이를 보이는 문명의 양태들이 아니었다. 서양 역시 우리보다 앞선다 할 것이 별로 없는,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종교적으로 매우 미신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그런 문명이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래 서양의 문명의 모습은 완전히 그 이전과는 다른 단절의 양상을 과시하기 시작했다. 기술 속으로 과학이 진입하고, 또 과학 속으로 기술이 진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 가끔 강냉이를 튀기는 아저씨가 오면 흥미진진하다 쌀토락이나 강냉이나 누룽갱이 말린 것, 아무거나 갖다 주기만 하면 기다란 쇠통에 집어놓고 불위에 뎅글뎅글 돌리는 그 태연스러운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한참을 지난 후 거대한 철망통을 씌우고, 으앗! 철통같이 닫힌 아구리를 지렛대로 후악 제치는
순간! 우리는 얼마나 간이 콩알만해져 가지고 고사리손으로 귀를 막고 몸을 옹크려야 했던가? 갑자기 구수한 냄새가 천지에 진동을 하고 망탱이 주변에 떨어진 강냉이라도 주어먹을 국물이 있을까 하고 몰려드는 어린아이들! 뻥튀겨진 변모된 쌀보풀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 아기들의 눈은 경이와 호기심에 찬 그런 눈이었다.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 이것은 순식간에 우리가 살고 있는 문명의 모습을 뻥 튀겨 놓았다. 이미 예전의 쌀토락이 아니고 예전의 누룽갱이가 아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노름인 것이다. 과학의 성과는 놀라운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다. 기술의 진보는 놀라웁게 우리의 과학적 사유의 영역을 넓혀갔다.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개발의 영역이 아니던 것이 마구 개발될 수 있게 되고, 인간사유의 대상조차 아니었던 것들이 마구 인간사유의 영역 속으로 들어왔다. 공상이 마구 현실로 변모해갔던 것이다. 꿈이 현실로 된다는 것은 매우 즐거운 것이다. 매우 기쁜 것이다. 그러나 인류는 이 기쁨에 도취하여 매우 중요한 사실을 망각했다. 그들은 꿈 그 자체를 하나 둘
잃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꿈은 무한히 꿀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그 자체가 하나의 망상이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지나친 신뢰다. 꿈의 상실은 인간 그 자체의 도덕적 파멸인 것이다.
다시 한번 옛날로 돌아가 보자 40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일상적인 현실적 삶이 4,000년 전의 삶의 양태와 연속성을 과시하고 있었다는 그 사실은 바로, 40년 동안의 변화가 4,000년 동안의 연속성을 근원적으로 단절시켜 놓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4,000년 동안 유지해왔던 옥수수 알갱이가 불과 40년 동안에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는 전혀 다른 성질의 강냉이로 뻥튀겨져 버린 것이다. 그 뻥 튀김의 실체가 바로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라는 사건이다. 과학은 물론 우리 조선민족의 창안이 아니다. 그것은 희랍인들의 놀라운 사변, 이성이 이룩한 인류 최고의 씨앗이 르네상스 이래 발아한 것이다. 우리는 20세기를 통해 단지 그것을 정확하게 배울려고 힘썼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서구문명이 두세기 동안 달성한 것을 곧 사오십년 안에 달성하려고 몸부림쳤던 것이다. 그것이 과연 달성된 것인지 안된 것인지는 지금 내가 단안을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외면적으로 우리의 삶의 변화는 최소한 그 과학문명을 이룩한 주축의 문명의 삶의 양태의 변화보다도 더 철저하고 근원적이고 더 그 변화의 폭이 큰 것이다.
4,000년 동안 인간이 건드릴 수 없었던 성역이 40년 동안에 무너졌다면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연의 에너지를 문명의 에너지로 전환하는 방식이 여태까지의 인류의 문명사의 어떠한 방식과도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에너지의 전환이 바로 모든 에너지의 근원을 고갈시키고 파괴시키고 있다는 가공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자연의 에너지란 천지의 에너지며, 이 천지의 에너지란 곧 생명의 에너지인 것이다. 자연의 에너지의 고갈이나 파괴는 곧 생명의 고갈과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다.
저 사막에 우뚝 서 있는 스핑크스나 피라밋은 한없이 신비롭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지구상의 문명의 소치라고 말한다면 지금도 풀 수 없을 정도의 어떤 문명 에너지의 비약적 형태를 가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나일의 사막 위에 아무리 피라밋이 수백개 들어섰다 할지라도 지구 전체의 기상상태를 파괴시킬만한 환경의 오염이나 생태의 변화를 초래한 바는 없다. 피라밋이나 만리장성은 인간의 인위적 장난의 극치라 말해도, 그것은 지금도 묵묵히 관광객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는 고요한 자연의 돌더미일 뿐이다. 그러나 63 빌딩 하나가 저지르고 있는 하천의 오염은 결코 묵묵한 한강의 석양의 아름다운 반사로 가리워질 수 있는 그러한 것은 아닌 것이다.
밥을 급작스레 먹으면 체하는 것은 정한 이치다. 그리고 조금씩 먹지 않고 과식을 해도 반드시 부작용은 뒤따른다. 소식을 하거나 적당히 먹어서 나쁠 것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지만 가련한 인간은 그것 하나를 지키지 못한다. 맛있으면 과식하게 마련이고, 과식하면 설사나 배탈의 부작용이나, 장기적으로는 비만. 고혈압. 당뇨 등의 지병이 생기게 마련이다. 4,000년 동안 건드리지 않았던 성역들을 40년에 다 건드려 버렸다면, 4억만년 동안 순결한 처녀의 살결처럼 인간의 때가 묻지 않았던 도봉의 만장봉이 불과 몇십년 사이에 알피니스트들의 핫켄이나 볼트, 온갖 인공 확보물로 상처투성이가 되었다면, 해방후 불과 4.50년 동안에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로 인한 산업사회의 진보가 우리 문명의 모습을 되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뻥튀겨놓았다고 한다면, 이러한 역사의 과식 과속.과욕이 여러가지 병적 부작용을 초래할 것은 뻔한 이치인 것이다.
요즈음 사방에서 지진이 터지고 있다. 일본에서 LA에서 중국에서 터키에서 파키스탄에서, 그리스, 대만에서... 어마어마한 인간세의 불행을 초래하는 규모로 여기저기서 지진이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지진의 발생은 역시 지각의 이동이라는 지질학적 법칙의 사실에서, 그 개연성을 지배하는 일반론에서 그 원인을 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천지를 하나의 가이아로 본다면, 거대한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로 본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화적 상상력을 여기 도입해서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지구상에 건설한 문명이 오죽이나 형편없는 것이었으면 저렇게 지신의 진노를 불러일으켰을까? 얼마나 지신을 화나게 만들었길래 자신의 몸뚱이를 더럽힌 저 문명의 장난을 저렇게 털어버리실까? 물론 지각의 판들(Plates)간의 충돌은(요번 대만지진은 북쪽의 두꺼운 유라시안판이 필리핀해 판을 밀어덮쳐 생겨난 것이다.) 예측불가능한 개연적 사태이며 지구 내적 조건과 더 인과적으로 밀착되어있는 사태일 것이지만 그러한 변화조차 단순한 해프닝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 일산.분당지구에 단 5도 정도의 지진이라도 발생한다면 "삼국지사"를 보면 우리나라 또한 지진이 잦은 나라로서 작고 큰 주기적인 지진의 사례가 계속 등재되어 있는데? 과연 안전할까? 지신의 진노? 우리는 지장보살님께 무어라 해야할까?
지신의 진노에 필요한 것은 화해의 요청이다. 여기 인간과 지신과의 화해, 인간과 자연과의 화해, 인간과 그의 환경과의 화해라는 21세기의 제1주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천,지,인을 일컬어 삼신이라고 한다면, 인이라는 일신은 천,지의 2신에게 화해를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 천지의 멸망은 곧 인의 멸망이기 때문이다. 단군이래 4,700년 동안의 연속성을 우리 한민족이 불과 40년 동안에 불연속성으로 바꾸어 놓았다면 21세기 우리문명의 과제는 너무도 명약관화하다. 이제 우리는 그 40년의 죄업, 그 과욕과 과속과 과식과 과용의 부작용을 해소시켜야 하는 과제 상황을 떠안고 있는 것이다.
2. 종교와 종교간의 화해
다음의 주제는 종교와 종교간의 화해다. 얼마전에 참으로 놀라운 기사를 하나 읽었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현각이라는 이름의 미국인 승려의 컬럼이었다.(1999년 9월 28일) 현각은 얼마전 KBS의 다큐멘타리, "만행"이라는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도 우리에게 낯익은 인물이었다. 해맑은 얼굴, 거침없이 말하는 그의 명료한 자세가 수도인의 기품을 물씬 풍긴다. 미국 동부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하바드대학에서 신학.철학을 공부한 나의 후배이기도 한데 참 사려깊은 인물이다. 그런데 그 컬럼의 제목이 "화계사의 불"이었다. 얘기인 즉, 기독교 광신도들이 화계사가 마귀사는 곳이라고 여러 차례 와서 몰래 방화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배타적 전도주의(the exclusive evangelism)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과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메세지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아연실색해지지 않을 수 없다.
화계사하면 우리는 숭산스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숭산스님과 나와의 해후에 관해서는 나의 책 "나는 불교를 이렇게본다"(1777)에 소상히 밝혀져 있다. 세계적으로 달라이 라마와 더불어 4대 생불의 한사람으로 꼽히고 있는 숭산스님의 위대한 진면을 우리 국내 불교계나 종교계에서는 너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분의 가치가 그렇게 세속적인 평가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새삼 왈가왈부 할 건덕지가 없다. 그러나 나와 화계사와의 관계는 참으로 먼 옛날, 나의 영혼이 순결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 감싸여져 있었던 그 푸릇푸릇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 간다. 화계사는 바로 내가 다닌 한국신학대학에서 엎드리면 코닿는 이웃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한국신학대학 입학원서를 사러 처음 방문했을 때 생각이 난다. 수유리 종점 못미처 마찻길 같은데서 버스를 내리면 그 신학대학 들어가는 길은 미루나무가 일렬로 쪼르란히 서 있는 아주 시골 동구밖 기다란 논두렁같이 생긴 그런 길이었다 그 미루나무 길을 따라 한참을 울창한 북악기슭 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탁 트인 화창한
공간에 아주 아담한 금잔디의 동산이 나오고 그 동산 위로 하이얀 니은자 모양의 건물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우뚝 솟은 탑꼭대기에는 히브리어로 "임마누엘"이라는, 조형적으로 참 인상깊은 글씨가 눈에 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앞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자그마한 다리가 있었는데 그 다리밑으로는 아름다운 개울이 졸졸 흘렀다. 그 개울은 바로 화계사를 돌아 흘러내리는 수유계곡의 청청한 물이었다. 그 하이얀 임마누엘 탑을 들어섰을 때, 나는 갑자기 어떤 광채에 쏘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까만 두루마기를 입은 어떤 노신사가 우뚝 서 있었다. 흰 동정에 옅은 뼈테 안경을 쓴 얼굴에서 발하는 빛의 느낌이 나를 어지럽게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키가 훤칠했고, 얼굴은 웃음이 만면하고, 추운 겨울이었지만 화색이 화창한 봄날씨보다 더 환했다. 옆에서 누구와 유쾌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 노신사의 모습에서 나는 신앙인의 삶의 어떤 영감같은 것을 읽고 있었다. 그때 나는 그 분이 누구인줄도 몰랐고 감히 말도 걸 생각도 못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그 얼굴에서 받은 해맑은 느낌이 나로 하여금 신학대학 입학의 결심을 굳건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이다. 그 분이 바로 문익환목사님이었던 것이다. 당대 구약학의 대가! 그리고 내가 뵈웠을 그 당시 그 선생님은 구약성경 공동번역판 원고집필에 몰두하고 계셨을 때였다. 많은 사람이 지금 문익환하면, 맹렬한 공산주의 운동가며 물불을 가리지 않는 반정부 데모의 투사, 최루탄의 혼탁한 공기속을 홀로 거니는 거친 얼굴을 연상하기 쉽다. 내가 처음 뵈웠을 때의 문익환선생은 정말 완벽하게 그런 분위기와는 무관한 정신세계에 사시고 계셨던 진정한 수도인의 한사람이었다. 그 뒤 나는 그 분에게서 구약개론을 들었다. 그리고 물론 그 분의 강의는 매우 듣기 쉬었고, 또 히브리 원전을 완전히 소화한데서 우러나오는 내용이 풍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깨끗한 영적 체험담으로 우리 수강자들을 감동시키곤 했던 것이다. 저 멀리 교단에서 계신 모습은 항상 광채나는 해맑은 모습이었다.
나는 그 당시 관절염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내가 고려대학교 다니던 것을 중퇴하고,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게 된 동기는 관절염이라는 극심한 신체적 고통과의 투쟁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가치관의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었기도 하겠지만, 또 한편으로로는 지극히 단순한 물리적 동기와 맞물려 있었다. 한국신학대학은 당시 전교생이
캠퍼스에서 사는 거의 유일한 기숙사 대학이었다. 따라서 관절염으로 고통받는 나로서는 기숙사와 학교 강의실이 얼마 떨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별 불편없이 학교를 왔다갔다 할 수 있겠다는 계산은 하나의 구원이었다. 당시 나는 구보나 오래 서있는 것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버스타고 학교를 통학하는 것이 매우 고통스러웠고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국신학대학은 나에게 더 없는 배움과 삶의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당시의 한신의 캠퍼스는 정말 아름다웠다. 학생들 뿐만 아니라 교수 전원이 캠퍼스 안에서 같이 살았다. 조그마한 낮은 1.2층짜리 후생주택이 수유리 화계의 송림둔덕 위로 아름답게 배열되어 있었다. 한 집에 보통 학생들이 7.8명 같이 살았다. 그리고 새벽 먼동이 트면, 학생들이 모두 소나무 숲의 새벽 기운을 헤치고 성스러운 본관의 채플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채플가는 언덕 위의 등성이 오솔길에서 만났다. 여기저기 여명을 헤치고 나온 그들은 만나면 찬송가를 흥얼거렸다. 그러면 모두 교회에서 성가대의 경험이 있는 남녀였기 때문에 꼭 한사람이 멜로디를 시작하면 테너.소프라노.
알토.바리톤의 사중주가 자연스럽게 울려 펴졌다. 푸르른 새벽 기운, 여명이 입김을 붉게 물들이는 그 새벽, 우리들은 이러한 성스러운 합창 속에서 만나고 헤어졌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한신대 학생들의 합창의 배경으로 저 멀리서 들려오는 화계사의 범종소리나 목탁소리가 같이 하모니를 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체험 속에서 성스럽게 살지라도 멀리서 울려 퍼지는 범종의 소리를 그 어느 누구도 불경스럽게 들은 적이 없다.
우리 한국신학대학 학생들은 때로 윗동네 화계사에 가끔 놀러가기도 했다 그리고 스님들을 한신대 마당으로 초청하여 졸졸 흐르는 시냇물 앞에서 축구대회를 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나의 과거 추억을 더듬을 때, 도무지 기독교인들이(물론 한신대와는 관련없다.) 화계사에 불을 지른다는 이야기는 상상할 수도 없다. 스님과 친구지간이래도, 신도와 신도끼리는 잘 싸운다는 달라이 라마의 얘기가 얼핏 생각난다.내가 솜니 원광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들은 이야기이지만, 어느 이리 교회에서는 그 지역에서 오래 터전을 일궈온 원불교가 망하기를 기원하는 저주의 대기도회가 열리기도 한다고 들었다. 물론 내가 잘못들은 풍문이기를 바라지만, 그러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그 교회 목사님은 교회사를 크게 잘못 배웠다. 기독교의 교회사는 바로 탄압 속에서 강성해진 역사인 것이다 로마제국 속에서 "쿼바디스 도미네"를 외친 사람들의 역사가 그러했고, 모든 밋션 속에서 순교한 사람들의 역사가 그러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원불교가 망하기를 저주하는 동시에 곧, 원불교의 강성해짐을 돕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바로 원불교에 하나님의 은총을 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들은 매우 하찮은 애기이지만, 만약 이런 사소한 얘기들이 자칫 감정싸움으로 번져 우리나라 종교신도들간에 대규모의 폭동사태가 일어난다면 우리나라는 어떻게 될까? 사실 이러한 우려가 없는는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모든 종교형태가 그 종교 중에서도 가장 극렬한 보수성과 광신성 즉 펀더멘탈리즘(Fundamentalism) 이라고 총칭되는 신령주의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인되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프로테스탄티즘처럼 단시간내에 폭발적인 교회조직을 확보한 사례는 이 지구상의 모든 기독교 전도사에 유례가 없는 사실이다. 세계사의 한 기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광신적 성격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도박으로
신도들의 헌금을 날려버리는 목사님의 명예를 위하여 일국의 최대 방송조직을 장악하는 쿠데타 군단의 조직력을 과시할 정도로 흉포하다. 뿐만인가? 조계종 총무원이라는 것이 도무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때만 되면 스님들이 창칼을 휘두르며 싸우는 모습이 위성을 타고 전세계로 방영되곤 하는 것이다. 내가 뉴욕에서 침구학 강의를 하는데 그 곳에서 듣고 있던 점잖은 미국 의사 한 분이 일어나서 갑자기 질문하기를, 한국의 스님들이 낫.칼을 들고 막 싸우는 모습이 미국 테레비 뉴스에 나오는데, 도대체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으냐고 묻는 것이었다. 불교의 비폭력적 평화주의의 모습에 대한 평소의 인상과 한국의 불교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권승들의 광란 이면에는 아주 깊이있는 수행불교의 전통이 우리 한국에는 살아있다고 강변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맥락없이 던져지는 이런 인상발언에 대해 나는 구차스러운 변명 이상의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 미국사회를 끊임없이 들끓게 하고 있는 한국산 종교의 갖가지 활약상, 신흥종교라고 보통 범주화되는 대부분의 한국의 민간종교단체가 뉴스메디아를 장식하는 정보형태를 종합해 보면 우리나라는 역시 지나치게 성스럽고 지나치게 영적이다. 역시 신령스러운 샤만들의 나라라고해야 할까?
사람들이 종교를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상은 모든 종교가 나쁜 것이다. 종교는 선이 아니라 악이다. 나의 갑작스러운 충격적 발언에 많은 사람이 의아스럽게 생각하겠지만, 한번 마음을 놓고 생각해보라! 인간세상에 아예 종교라는 것이 있는 것이 좋겠는가, 없는 것이 좋겠는가. 개미사회에 목사개미와 개미교회가 있는 것이 좋겠는가, 없는 것이 좋겠는가? 사실 인간세에 종교라는 것이 없어서 생기는 불선보다는, 있어서 생기는 불선이 더 큰 것이다. 인류역사를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인류가 이 지구상에서 저지른 모든 끔찍한 대규모 죄악상은 거의 99.95% 종교라는 명분아래 자행된 것이다. 멀리 눈을 안돌려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규모의 살상전쟁이 모두 종교 때문에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란, 이라크, 이스라엘, 아랍, 코소보, 보스니아, 도오쿄오 지하철의 독극물 살인...셀 수도 없는 우리시대의 모든 비극, 인간이 개인적으로 저지를래야 저지를 수도 없는 흉악한 대규모 악들이 모두 종교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다. 생각해보라! 과연 종교가 좋은 것인가?
인간이 감내하기 어려운, 신체적 고통을 수반하는 고대사회의 모든 제식이 종교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종교 때문에 인간을 희생하는 제물(human ,Sacrifice)이 생겨나고, 사제와 비사제간의 계급적 불평등이 생겨나고, 인간이 노예처럼 어떤 권위 앞에 종속되는 모든 모습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적 사유를 마비시키는 모든 기만적 행태가 종교에 속하는 것이다. 인간의 해방과 평등을 부르짓는 모든 종교의 슬로건의 이면에 반드시 종교라는 권위조직에로의 인간의 복속이 있지 아니한 예를 우리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해방. 평등의 실천만으로는 근원적으로 종교라는 조직이 유지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종교가 뭐가 좋은가? 없는 것보다는 있어서 해악이 더 큰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 아닌가? 우리나라 신흥종교의 모든 형태가 "사기성"을 지니지 아니한 예를 본 적이 있는가? 카메라 조작으로 성령이 내리는 것을 사진으로 찍어대고, 연보돈으로 축재하여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탁명환선생을 살해할 정도로 그 내면에는 확인되지 않은 의문사들이 비일비재하고, 항상 검찰도 두려워 손을 대기 꺼려하는 암막의 베일이 종교가 아닌가? 도대체 종교가 뭐가 좋은가? 어떻게 종교를 선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러한 나의 항변은 도무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아무리 내가 이렇게 항변해도 종교는 인간세에서 없어질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니이체는 이 종교란 놈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 그리고 이 종교란 놈의 주범인 신을 살해하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1900년에 신의 막을 내린 20세기의 예언자 니이체는 드높이 선포했다. "신은 죽었다."(God Is Dead!) 그런데 니이체는 헛지랄을 한 것이다. 도무지 죽일 수 없는 것을 죽인 것이다.신은 결코 사살될 수가 없는 것이다. 니이체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20세기는 인류사상 가장 종교가 보편화되고 성행했으며, 인류사상 가장 많은 종교적 죄악이 저질러진 세기였다. 20세기는 인류사상 가장 많은 신흥종교들이 발생했으며, 20세기야말로 모든 신들의 그야말로 신나는 축제장이었던 것이다. 니이체의 신의 사망선고는 결국 니이체라는 개인의 서구문명에 대한 양심선언에 불과했던 것이다.
종교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허점을 파고든다. 인간의 의지가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그 이면에 생기는 공허를 파고든다. 인간은 강하지만 때로 한없이 나약하고, 혈기왕성하지만 때로 한없이 가냘프고 감상적이다. 항상 사회라는 군집을 형성하여 북적북적 비벼대지만 그럴수록 고독하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을 추구하지만 때로는 비합리적 감성에 호소한다. 치밀한 분석에 열을 올리다가도 맹목적 믿음에 호소한다. 종교는 바로 이러한 인간의 내면에 구조적으로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 이러한 내면이 있는 한 종교는 사라질 수가 없는 것이다. 종교는, 문학이나 시가 인간에게서 사라질 수 없는 것처럼, 그것 또한 인간존재의 본원적 측면을 형성하는 것이다.
종교는 분명히 악이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필요악이다. 그럼 이 악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악을 제거할 방도가 있는가? 니이체의 실패를 계속 반복해야 할까? 종교는 악이다. 그리고 종교는 근원적으로 인간에게서 제거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종교라는 악의 내면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종교적 악은 엄청난 선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평소 때 할 수 없었던 희생을 가능케 하고, 개인의 욕망을 뛰어넘는 보편적 행위를 가능케 하며, 인간을 절망에서 구원하며, 죄의식을 씻어주고, 모든 인간을 사랑과 화합으로 인도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월자의 믿음 안에서 한 몸이 되며, 서로의 생명의 가능성을 극대화 시켜주며 아름다운 공동체 생활을 가능케 하는 질서와 극기와 이념을 제공한다. 종교는 악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간세의 모든 악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선의 가능성, 그 에너지 때문인 것이다.
우리는 영원히 종교를 제거할 수는 없다. 그것은 용렬한 무신론자의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바로 종교를, 선의 가능성, 그 본래적 모습으로 복귀시켜야 하는 것이다. 종교의 모든 죄악은 알고 보면, 종교가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알고 보면 그것은 종교를 빙자한 인간의 탐욕이 저지르는 것이다. 종교가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저지르는 것이요 인간세의 제도가 저지르는 것이다. 종교는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나 승가의 역사로 이해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나 승가의 모습은 기독교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를 가장한 인간세의 조직의 모습이다. 기독교라는 추상체가 그 교회조직에 어떤 구실을 제공했을 뿐인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교회조직의 이해관계를 떠나 그 교회조직을 발생시킨 원초적인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로 회귀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봐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를 듣고 보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20세기가 니이체의 예언과는 달리 종교가 지극히 성행한 시기라고 한다면, 우리의 문제의식은 제1의 주제와 일치한다. 즉 과학과 기술의 랑데뷰로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놀라운 비약이 이루어졌다고 한다면, 그만큼 종교계에도 놀라운 비약과 번영이 이루어진 것이다. 과거에는 종교가 매우 편협한 지역주의(Localism)의 문화적 틀속에 갇혀 있었다. 대부분의 종교는 그 지역의 관습이나 제식의 특성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그리고 일차적으로 종교조직을 구성하는 성원의 삶의 방식, 우리가 문화적 가치라고 부르는 갖가지 형태와 밀착되어 있었다. 종교의 보편화를 막는 일차적인 요소는 그러한 관습체계였다. 기독교가 아직까지도 유태인 특유의 관습체계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그러한 해방이 바로 예수나 사도 바울이 원하던 바였지만, 한국의 목사님들은 아직도 구약과 신약을 구분 못하고, 새로운 약속(신약)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낡아빠진 옛 약속(구약)의 관습을 강요하있는 것이다. 전라도에서 발생한 종교를 보면, 전라도사람의 특유의 풍습과 촌스러운 가치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의 종교는 종교를 형성하고 있는 사회구조 그 자체가 그러한 지역주의를 벗어나기 때문에, 이제는 과거의 그러한 방식의 조직이나 관습이나 율법의 특수성을 강요하기 힘들다. 한번 생각해보자! 일제시대 때 일본사람들이 그 얼마나 한국사람들 입에서 마늘냄새가 난다고 쵸오센진을 경멸했는가? 일본시대 때 케이죠오에서 전차를 타면, 저 뒷문에서 한국사람이 한명 올라와도 앞문에 있던 일본사람이 "닌니쿠 니오이"하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던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식생활이 비교적 담박한 편에 속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들은 한국사람의 마늘.파.생강.고추 운운하는 일곱가지 양념의 강력한 방향성을 감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불과 몇 년전의 일본문화다. 이러한 특수한 일본문화에서는, 예를 들면, 마늘을 저주하는 종교적 금기의 제식이 생겨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인들은 거의 마늘 처먹느라고 환장한 사람들처럼 되어 버렸다. 이제 한국의 "김치"가 세계인의 "킴치"가 되어 버렸고, 일본은 이제 키무치의 대국이 되어가는 것이다. 아지노모토 대신 키무치노모토가 대유행하고, 매운 음식이라면 그렇게도 질색하던 일본사람들이 한국의 신라면을 선호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세계
김치시장을 놓고, 한국의 김치상품과 일본의 키무치상품이 맞대결을 벌려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한국의 김치상품계는 일본의 키무치는 김치로 규정할 수 없다는 선포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케이죠오가 아닌 토오쿄오에서 야마노테센 덴샤 뒷문에 김치냄새를 풍기는 한국인이 올라타면 앞문에 앉아있는 일본인이 어디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고 입맛이라도 쩍쩍 다실 셈인가? 엊그제까지만 해도 날생선을 먹는다 하면 귀신살코기라도 뜯어 먹는 것인냥 질겁을 하던 양키 아저씨들이 이제는 스시바에 가서 사시미를 먹을 줄 모르면 맨하탄 한복판에서도 문화인 행세를 할수가 없다. 기독교 성찬식에 포도주를 쓰는 것은 단순히 예수시대의 유대인들에게 통용되던 술이 포도주였기 때문에 생겨난 관습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성찬의 본질적 의미와는 하등의 연관이 없다. 그렇다면 신부.수녀가 삥 둘러 앉아 걸쭉한 막걸리를 바가지로 퍼잡수면서 성찬제식을 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고 있는가? 4,000년의 연속성이 40년의 불연속성으로 단절되는 변화 대신 우리가 얻은 것은 바로 이러한 보편적 삶의 양식이다. 지역주의의 편협성의 파괴다. 따라서 이제는 종교도 그러한 지역주의적 관습체계로부터 해방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공통적 이해의 폭이 증대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종교와 종교가 싸우는 것은 종교조직과 종교조직간의 진리의 상충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의 상충은 대부분 터무니없는 편견과 몰지각. 선입견과 몰이해에 뿌리박고 있다. 21세기 인류의 최대의 과제는 바로 20세기에 벌린 인류의 종교의 잔치를 통해 21세기에는 서로를 이해하는 공존의 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파티에서 한번이라도 만난 사람은 낯설어지지 않게 마련인 것이다. 모든 종교는 이제 배타적 전도주의를 하루속히 포기해야 한다. 나의 믿음의 방식만이 오로지 인류를 구원한다는 좁은 편견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종교의 공존! 그렇다면 모든 종교는, 사이비종교이든, 신흥종교이든, 저등종교 다 수용해야만 하는가!
종교에 있어서 궁극적으로 사이비와 진짜. 신흥과 구흥, 저등과 고등에 관한 명료한 가치기준을 내세울 수 있는 척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란 사이비라면 다 사이비일 수 있는 것이요, 진짜라면 다 진짜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세의 종교적 현황은 우리가 모든 종교현상을 모두 선으로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측면들이 분명히 엄존한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나 김용옥이 신일 수는 없다. 종교의 고.저등, 다시 말해 신의 고.저등을 판단할 수 있는 신이 아니다. 신을 법정에 세우는 하이에스트 코트의 판사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여기 내가 확연히 고등과 저등을 판단할 수 있는 하나의 기준이 있다. 그것은 모든 고등종교는 "자기비판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독교가 매우 문제점이 많은 종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고등종교로 인정하는 것은 바로 기독교는 역사를 통해서 비판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왔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기독교는 악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다양한 메카니즘을 확보해왔다는 것이다. 이미 기독교는 갈릴레오에게 천동을 강요하고 부루노를 화형에 처하는 그런 종교가 아닌 것이다. 불교 역시 기나긴 인간세의 역사를 통하여 자기비판과 자기성찰의 확고한 대승정신을 함양해왔다. 불교처럼 반불교적 교리들을 자내에 수용하는 폭넓은 종교는 세계적으로 희귀하다. 신만 해도 그것은 불교를 부정하는. 인간의 본연의 깨달음의 성찰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이비종교나 신흥종교의 문제정은 바로 자기비판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비판하는 자들을 적대적 관계로만 설정하며, 자기들의 좁은 편견을 절대화시키고 우상화시킨다. 기독교도 그러한 모랄에 사로잡혀 있는 기독교는 사실 기독교가 아니라 어느 목사 개인의 신흥종교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고등 종교의 조직은 리더십의 교체를 자유롭게 행하는 메카니즘이 장착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이비종교는 리더십이 고착되어 있다. 종교가 자기를 개방할 수 없으면 그것은 종교의 자격이 없다. 어둡고 싸늘한 공기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백설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태양의 밝은 양광아래서 금방 형체도 없이 녹아버리고 마는 그런 백설이 되어서는 아니되는 것이다. 대부분의 순결을 가장한 종교가 그러한 백설의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라는 것도 알고 보면 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종교정신이 위대해도 돈이 없으면 그 조직은 유지될 수 없다. 종교의 돈은 대개가 헌신하는 신도들의 헌금이다. 그 돈에 진실이 있을 때 종교는 위대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돈이 어둡고 폐쇄되고 자만과 독선에 빠지면 결국 그 돈의 모임은 유지될 수가 없다. 종교도 돈이 없으면 끝장이다. 종교도 흥행이 안되면 파장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의 흥망성쇠는 매우 단순한 것이다. 자체의 진실이 확보되면 그것은 자기갱생을 계속하고 그렇지 못하면 자망한다. 우리는 종교의 부흥과 전도를 도울 것이 아니라, 종교의 자망을 도와야 한다. 모든 폐쇄적이고 독선적인 사이비종교들이 자망하도록 우리는 우리민족을 계몽시켜야 하는 것이다. 비판을 수용할 수 없는 모든 종교들이 폐업을 재촉하도록 우리국민이 깨어 있어야 한다. 헌금을 안내면 종교는 자망하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20세기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지나치게 종교의 흥행이 잘 된 한 세기였다고 한다면, 21세기 우리역사는 종교가 흥행이 잘 안되는 세기가 되어야만 종교가 건전해지고, 종교간의 화평과 공존이 이루어질 것이다.
3. 지식과 삶의 화해
21세기 셋째의 주제는 지식과 삶의 화해(the Harmony Betwwen Knowledge and Life)이다. 이것은 노자철학 전반을 흐르는 반주지주의적 색채와 깊은 관련이 있다. 지식이 본시 삶에서 나온 것이요, 삶을 위한 것이라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지식 그 자체가 삶을 괴롭히고, 삶을 위협하고, 삶을 노예화한다면 과연 어쩔 셈인가?
흔히 우리가 말하는 "공부"란 것은 "지식의 습득"과 관련된 것으로, 더 구체적으로는 좋은 대학가는데 필요한 지식체계, 대학입시 이후에는 대학에서 가르치는 카리큐럼에 충실한 지식체계를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궁극적으로 그 지식체계계가 과연 우리 삶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매우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부모님들께서 말씀하시는 "공부"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독서"다. "독서"도 만화책을 읽는 것이 이나라, 사려 깊은 책이나 전공에 관련된 책을 읽는 것이다. 손쉽게 얻어지는 쾌락적 도서가 아닌, 쾌락을 희생함으로써 얻어지는 그런 "독서"를 의미하는 것이다.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무엇일까? 맹자는 남녀노소할 것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좋아하는 것으로 다음의 두가지를 들었다. 식과 색. 그것은 참으로 천하의 명언이다. 사람이 일상적으로 사는데 "맛있게 먹는 것" 참 그것 이상으로 재미있는 것은 없다. 하루하루의 일과 중에서 단 한번이라도 정말 맛있는 것을 먹어 보았으면 요새같이 퇴폐적인 외식 문화의 허식 속에서 어쩌다 정말 정성스럽고 특이한, 맛깔스러운 음식을 만나면 정말 먹고 꼴깍 숨이 넘어가도 유감이 없을 정도로 우리는 쾌락을 만끽하게 된다. 음식의 묘미는 청결과 소재의 신선함과 조미의 프레이그런스, 삼립일체의 예술이다. 그런데 요즈음과 같이 하이타이로 그릇을 씻어대고, 공해로 찌든 소재에, 온갖 인공조미료를 퍼붓고 인공적인 된장, 꼬치장을 처넣은 음식이 진미처럼 둔갑되어 나오는 세상엔 정말 향긋한 백미 밥 한그릇이 오히려 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에게 맛있는 것을 먹는다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 못지 않게 인간을 현혹시키는 또 하나의 쾌락이 바로 색인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사랑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 여기서 사랑이란 매우 구체적으로 이성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사랑은 애타는 그리움이다. 사랑은 열정이다. 사랑은 불꽃이다. 아니 그것은 훨훨 타오르는 열화다. 사랑은 내 몸의 케미스트리인 것이다. 내 몸이 불타오르는 화학반응인 것이다.
모든 정신적 사랑도 결국은 신체적 사랑으로 골인한다. 아니 모든 정신적 사랑도 신체적 사랑의 전제가 없다면 그와 같이 열화와 같은 형태를 띨수가 없다. 신체적 사랑이 빠진 정신적 사랑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 해도 그것은 그러한 전제와 가능성 속에서 현존하는 것이나. 이성의 교합의 순간처럼 인간에게 쾌락을 주는 것은 없다. 아무리 부정해도, 그것은 지고의 열락이다. 지고의 황홀경이다. 그러니 길거리가 온통 그러한 케미스트리로 들끓고 있는 환경에서 요즈음 젊은이들이 그러한 열락에 몸을 내맡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짜릿한 몸과 몸의 언어는 아무리 되풀이해도 그 순간만은 어느 무엇도 비견될 수 없는 강렬한 즐거움인 것이다.
몸과 몸의 만남, 규(竅, "구멍"의 뜻인데 동양고전의 표현이다)와 규의 만남, 우리는 그 만남을 통해 인간관계의 자유로움을 획득한다. 세속적 규약으로부터의 해방을 획득한다. 그래서 인간은 성이라는 자유의 매력에 매료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결코 내적으로, 외적으로 모두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자유는 순간이다. 그것은 세속적 규율을 해탈시키는 듯이 보이지만 결국 더 큰 규약과 제재와 규율 속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규약과 규율의 질서를 획득하지 못할 때는 사랑은 파괴적이 되고 만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비극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랑이야말로 인간존재의 파라독스의 조건이다.
저 기사의 손을 빛나게 해주고 있는 저 여인은 누구뇨?
오오 ! 그녀의 아름다움은 정열의 횃불이 더 붉게 타오르는 법을 가르쳐주고 있구나.
마치 검은 에티오피아 황녀의 귀밥에 달려 있는 찬란한 보석처럼,
저 여인은 검은 初夜의 뺨에 달려있는 듯, 저 여인의 아름다움.
만지기엔 너무도 현란하고 그렇다고 이 땅에 내려놓기엔 너무도 고귀하다.
보아라! 주변의 아가씨들 너머로 빛나는 저 자태, 마치 떼지어 다니는 까마귀 속의 백설의 비둘기.
저 춤의 박자가 종료되면 저 여인이 멈출 곳을 내 미리 눈여겨 보아두마.
그리고 그녀를 휘감아 나의 무례한 손길이 축복을 받도록 해야겠군.
나의 가슴이 여태까지 과연 사랑을 알았던가?
지금 불타오르는 나의 시선이 그것을 부정하네!
나는 이 밤까지 진정한 아름다움을 본적이 없었노라.
나는 대학교시절부터 세익스피어를 원서로 암송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나 자신이 동양고전의 학문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너무 한문만 읽다보면 사람이 고리타분해지고 구질구질한 냄새가 날 것 같은 컴플렉스 때문에 세익스피어를 암송하는 취미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익스피어를 원어로 읽을 때 느끼는 그 마제스틱하면서도 인간의 내면의 감정을 후려쳐내는 언어의 마력은 이태백의 분방한 시나 감성적인 고시나, 윤동주의 단아한 시의 맛과도 또 다른 깊이를 간직하고 있었다 상기 인용은 바로 로미오가 줄리엣을 처음 쳐다보는 장면이다. 나의 번역이 세익스피어 원어의 맛을 얼마나 울겨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나라 영문학자들의 현존 번역들은 너무도 살아 있는 예술의 감동을 무시하고 있다. 아 보아라! 그 얼마나 가슴설레이는 순간인가? 한 남자가 한 순결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읽고 황홀경에 빠지는 그 순간의 감동을 어찌 이다지도 아름다운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에게 이 이상의 아름다운 순간이 또 있을 수 있는가?
줄리엣의 손을 잡으면서
로미오, 나의 천하고 무례한 손이 이 거룩한 성소를 더렵혔다면 나의 부드러운 죄업은 이것이외다.
나의 두 입술이여! 얼굴을 붉히는 두 순례자 되어, 여기 수줍게 서 있소이다.
그 거친 만짐을 다시 하느적거리는 키스로써 부드럽게 고르려하오.
줄리엣, 착하신 순례자시여 그대의 손을 너무 비하시키지 마옵소서.
고상한 예절로 나의 성소를 방문했거늘. 성자에게도 순례자의 손이 만질 수 있는 손은 있소이다.
손과 손이 맞닿으면 성스러운 순례자의 키스가 되오이다.
로미오, 성자에게도 거룩한 순례자의 입술이 닿을 수 있는 입술이 있지 않소이까?
줄리엣, 아아~, 순례자이시여! 입술은 기도에 써야하는 법이라오.
로미오, 오~ 그렇다면, 사랑스러운 성자이시여!
이 손이 할 수 있는 것을 이 입술이 할 수 있게 하옵소서.
내 입술은 간구하오이라. 들어주옵소서. 소망이 절망으로 바뀌지 않도록.
줄리엣, 성자는 움직이지 않소. 기도하는 자의 간구는 들을지라도.
로미오, 그렇다면 움직이지 마옵소서. 나의 기도의 효험을 내가 받을 동안. (강렬하게 키스한다)
이로써 나의 입술의 죄가 그대 입술로써 씻어지오리다.
줄리엣, 그렇다면 나의 입술은 그대 입술의 죄를 간직하고 있으오리다.
로미오, 나의 입술의 죄라구요. 아~ 얼마나 감미로운 책망이시오니이까? 나의 죄를 내가 다시 가져가오리다.
(두번째 강렬한 키스)
이 얼마나 미묘한 감정의 묘사인가? 처음 멀리서 바라본 로미오가, 곧바로 줄리엣과 키스를 교환하기까지, 그 성스러운 열화의 순간을 성자와 순례자의 이미지를 가지고 끌어가고 있다. 성자는 움직이지 않는 陰의 이미지요, 순례자는 움직이며 갈구하는 陽의 이미지다. 그런데 나는 이 젊은이들의 열화의 순간을 이다지도 고요하고 성스럽게, 그러면서도 모든 격조와 섬세한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감미롭게 표현하고 있는 세익스피어라는 작가의 언어적 상황이 참으로 궁금했다. 과연 노련한 한 작가의 손에서 그냥 상상과 감정이입만으로 이렇게 리얼한 언어들이 쏟아질 수 있을까? 도대체 세익스피어라는 천재는 어떠한 인간이었을까? (로미오와 줄리엣의 집필연대를 1595년으로 추정하면, 31세의 작품이 된다.)
최근에 한국에도 영화를 통해 선 보인 톰 스토파드의 명작은 바로 이러한 나의 문제의식에서 출발하고있다. 세익스피어의 언어는 죽어있는 상상의 언어가 아니라 살아있는 삶의 언어였던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상상속에서 작품을 쓴 것이 아니라, 바로 젊은이의 열화속에서 붓을 옮긴 것이다. 세익스피어는 열애중이었다 ! '쎄익스피어 인 러브'! 자기 신분을 속이고 남장을 해서 로미오의 역을 맡은 레쎞스가의 딸 비올라와, 당시 무명작가인 세익스피어는 사랑중이었다. 그 애절한 사랑,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업의 굴레속에서 그의 깃털 펜은 굴러갔던 것이다. 그 감미로운 속삭임들은 모두 세익스피어의 삶의 현실적 고뇌에서 우러나온 사랑의 고뇌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20세기의 세익스피어라고까지 불리우는, 우리시대의 탁월한 극작가 스토파드의 고전해석이다. 물론 이 설정은 모두 픽션이다. 그러나 이러한 픽션은 우리에게 사랑의 진실을 가르쳐준다! 사랑! 사랑! 사랑! 사랑보다 더 행복한 삶의 순간이 어디 있으랴!
언젠가 공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색을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우리의 자녀들이 여자를(이성을)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를 좋아한다면 우리의 부모들은 그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말을 하는 공자 역시 색골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체험이 없이 이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 색을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를 좋아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했다 하는 것은, 실제로 보지 못했다 함이 아니요, 그 주제를 강조하기 위한 어법이다. 즉 공자에게서도 공부함의 이상은 호색의 이상이었다. 호색의 강렬함의 자신의 체험을 기준으로 공자는 호덕과 호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 때 바람을 피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많은 주석가들이 이 언급이 공자가 衛靈公의 음탕한 미녀부인 南子를 만났을 때 즈음의 발설로 보고 있다.
그런데 사실 내 경험을 가지고 얘기를 하면 여자를 좋아하는 것만큼 공부하기를 좋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호학의 즐거움이 호색이나 호식의 즐거움에 결코 뒤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평생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런데 사실 공부는 재미있어서 하는 것이다. 재미가 없다면 내가 공부를 할리가 없다. 나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부를 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고, 또 공부를 하다보니까 공부가 재미있어진 것이다. 사실 色食의 즐거움은 너무도 짜릿하고 강렬한 것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도저히 식색만으로는 재미가 없어서 살 수가 없다. 먹기 위해서만 살고, 성교의 쾌감을 누리기 위해서만 산다고 한번 생각해보자 ! 과연 그것이 재미있을까? 과연 그것이 우리에게 지속적인 재미를 줄 수 있을 것인가? 먹는것도, 맛없는 것을 계속 먹다가 어쩌다 미식을을 만날때 우리는 더 없는 감미로움을 느낀다. 색도 어쩌다 미색의 분위기를 만나야 즐길 수 있는 것이고, 로맨스도 뭔가 여운이 감도는 정도래야 감칠 맛이 있는 것이다. 유곽의 여인들에게 있어서 성교가 과연 무슨 재미가 있을까? 매일 매일 닥쳐오는 기나긴 밤이 지리한 엔터테인먼트의 업보라고 한다면 그것이 세익스피어 인 러브의 로맨스는 도저히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확언하건대, 공부하는 것만은 매일 매일 해도 재미있는 것이다. 최소한 식색보다 더 지속적이고 더 짜릿한 재미가 있는 것이다. 미지의 세계를 더듬는 공부의 황홀경은 사실 인디아나 죤스의 갖가지 어드벤처보다도 더 짜릿하고 더 스릴이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현실적 시공에 얽매이지 않는 무궁한 모험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부하는 재미는 지속적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지루하지 않고, 아무리 해도 지칠줄 모르는 것이 공부인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나처럼만 생각하고 느낀다면 얼마나 좋으랴 ! 우리 한국의 부모님들께서는, 우리의 자녀들이 모두 나 도올처럼 생각하고 실천한다면 오죽이나 좋아하실까? 공부하라고 매일 매일 닥달치는 괴로움도 없을 것이요, 노상 어딜 갔다가 그렇게 늦게 들어오냐고 야단칠 시름도 없을 것이다.
왜 우리의 젊은이들은, 공부의 재미를 못 느낄까? 나 도올의 이러한 진실하고 평범한 체험담이 도무지 그들에게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어떻해야 좋을까?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上竅(식)와 下竅(색)의 쾌락에만 방치해 두어야 할 것인가? 오는 21세기는 二竅의 세기가 될 것인가?
자아! 한번 잘 생각해보자! 이런 문제들을 곰곰이 짚어보자! 이런 문제들을!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요즈음의 틴에이저치고 스케이트 보드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고. HOT같은 댄싱가수그룹의 춤같은 것을 흉내내기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그리고 NBA 농구선수. 마이클 죠단 흉내내며 농구코트에서 공을 요리조리 돌리고 굴리며 벼라별 묘기를 다 부리는 것은 다반사!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스케이트 보드를 잘 타는 아이를 쳐다보는 것은 매우 즐겁지만. 실제로 그렇게 스케이트 보드를 잘 타기까지 보드에 들인 그 아이의 공력은 시간적으로도 어마어마한 것이지만, 그 고된 훈련의 과정이 결코 즐겁지만은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즉 열중은 했을지언정, 반드시 그것이 쾌감을 주기 때문에 그 고된 훈련의 시간을 소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힙합댄스만 하더래도 그것이 보기는 즐거울 수 있어도, 그렇게 즐겁게 멋있게 동작을 맞추어 자유자재로 춤을 출 수 있게 되기까지 들이는 몸의 공력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시간과 정력이 소비되는 것이다. 영화관 막간 선전에 나오고 있는 유승준군의 헤드스핀을 쳐다보면 그 정도로 몸을 놀릴 수 있는 노력이라면,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도 독파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요즈음같이 청량한 천고마비의 계절에, 강변이나 해변에서 젊은이들이 요트를 타는 모습이나 물보라를 치면서 수상스키를 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신이 난다. 그런데 문제는 요트를 타고 싶다고 해서 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상스키를 타고 싶다고 해서 스키구두를 발에만 끼면은 끝나버리는 그런 얘기가 아닌 것이다. 공부를 하는 것과, 공부를 안하고 딴 짓을 하는 것, 그 양자는 매우 다른 인간의 행위인 것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지극히 공통의 한 측면을 가지고 있다. 즉 노력과 시간과 훈련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공부를 안하고, 노는 일조차, 노력과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요즈음 젊은이들은 스케이트 보드나 힙합에는 그 쓰잘데 없는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면서, 그 시간을 공부에는 쏟질 않는가? 분명 공부하는 것이 스케이트 보드보다는 더 확실한 효과가 있고, 더 지속적이고 더 다양한 재미를 즐 수 있으며, 더 확실한 삶의 가치와 보람을 확보해준다는 것은 너무도 명약관화한데, 우리의 자식들은 왜 이것을 모를까? 아무리 발을 동동 구르며 안타까웁게 외쳐봐도 소용없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역시 "맹자왈 공자왈""이나 "임마누엘 칸트"에게 보다는, "스케이트보드"나 "힙합" "테크노 댄스"로 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립씽크 힙합보다는 공부가 확실히 더 재미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나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내가 공부가 재미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냥 공부가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공부를 재미있게 느낄 수 있게 되기까지 재미없고 지루할 수도 있는 훈련의 기간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힙합을 자유자재로 추는 것은 재미있지만, 그 자유자재로움에 도달하기까지는 결코 즐거울 수만은 없는 시간과 정력이 소요되는 것과 매우 동일한 이치이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분석의 최종 결론은 이러하다. 힙합을 배우는 과정과 공부를 배우는 과정을 비교하면, 역시 공부를 배우는 과정이 더 어렵고, 더 시간이 많이 걸리며, 더 지루하게 느껴지며, 무엇보다도 인간을 집중하게 만드는 흡인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힙합이나 스케이트 보드는 그 습득과정이 재미없을지라도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컴퓨터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이러한 분석에 있어서 우리가 최종적으로 점검해야 할 사실은 바로 우리가 그냥 공부라고 말해온 내용, 즉 인간의 지식이라고 부르는 이 사태의 본질적인 정당성에 관한 것이다. 과연 지식이 인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인가? 지식의 습득 과정이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스케이트 보드나 힙합만큼도 매력을 지니지 못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러한 지식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느 정도 정당한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인간이 꼭 지식을 추구해야만 훌륭해지는 것일까?
여기 지나온 20세기를 반성해 볼 때, 나는 단언한다. 지식(Knowledge)이 삶(Life)과 대적적(antithetical)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지식이 권위체계로서 삶 위에 군림해왔다는 것이다. 내가 산 세기를 회고해 볼 때, 나는 아무런 생각의 점검도 없이 무조건, 임마누엘 칸트를 모르면 병신취급 받는다는 압박감 속에서 살았다. 다방에서 오바깃털을 세우며 커피향을 후후 불어가며 최소한 사르뜨르나 하이데가 정도는 씹어대야만 가오가 서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의 삶의 모든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나의 삶의 모든 요구를 희생시키더라도 칸트나 하이데가를 알아야만 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강박관념 속에 반세기를 산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의 젊은 아이들에게는 이러한 나의 강박관념이 말소되어 버린 것이다. 삶 앞에 지식이 권위적 존재로서 군림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풍요의 덕분일까?
21세기의 제3 주제로서 내가 말한 이 지식과 삶의 화해라는 문제는 인류문명사의 매우 다양한 측면을 포섭하는 문제이다. 바로 이 지식의 정당성에 관하여 가장 본원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는 고전이 바로 이 노자의 五千言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요청해야 하는 것은 지식과 삶의 화해의 문제다. 과연 나는 이성의 문제를 알기 위해, 그 난해한 언어로 쓰인 임마누엘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이해하느라고 몇년 아니 몇십년의 세월을 투자해야만 하는가? 오는 21세기에도, 앞으로 100년 후의 조선의 대학생들에게도, 순수이성비판이 고전의 자격을 가지고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칸트는 전혀 공부할 필요가 없는가? 오늘날 우리나라 대학의 카리큐럼을 둘러싼 모든 문제들이 이러한 본원적인 질문에 대한 명쾌한 비젼이 없이 우왕좌왕하는데서 생겨나는 과도기적 표류현실이다. 교육부는 암암리 자본주의적 효율성의 기준에 의해 학문 그 자체를 터무니 없이 천박하게 만드는 것만을 개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고 보수적인 인문학이나 자연과학의 주장이 그대로 21세기에도 지속적
인 정당성을 지닐 수 있을 것인지?
우리가 이러한 주제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르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는 지식의 도덕성에 관한 문제다.
최근 "복제 양 돌리"의 문제를 두고, 또 유사한 사태의 무궁한 발전가능성을 전제로 전 세계적으로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과연 인간의 지식이 모든 것을 다 알아낼 수 있고, 모든 꿈을 다 실현시킬 수 있다 해서 우리는 지식의 진보에 따라 되는대로 다 캐내고 다 현실화시키면 되는 것인가? 유전자 조작이 쉽게 가능해진다고 해서, 수십억만년을 통하여 형성되어온 DNA의 배열을 하루아침에 바꾸는 것이 과연 지식의 도덕성인가? 지상의 배추와 지하의 무를 결합시키는 무추의 생산이 마음대로 가능해지고, 미꾸라지 하나도 가물치보다 더 큰 거대종자로 개종하는 것이 마음대로 가능하다고 해서 과연 "생산성"의 이름 아래 그것을 그렇게 조작하는 것이 과연 인간지식의 위대한 진보의 도덕적 결과인가? 무와 배추가 아무 탈 없이 엄존하는데, 왜 구태여 무추를 만들어야 하는가? 미꾸라지는 몇백만년을 우리와 같이 살아온 그 모습대로 얼마든지 진흙 속에 뒹굴고 있거늘, 100마리 분의 고기를 한마리 사육으로 얻기위해 과연 거대 미꾸라지 종자를 만들어야만 하는가? 국가예산을 낭비하면서 그따위 조작이나 하고 앉아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과연 과학자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따위 과학자들을 만드는 것이 과연 우리자녀들을 공부시켜야 하는 소이연일까?
인간의 지식은 시대에 따라 그 양태가 달라진 것이다. 20세기에 우리가 콤플렉스를 느낀 지식의 양태는 모두 이 "과학"이라는 한 마디로 집약되는 것이다.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과학... 과학 아닌 지식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우리의 지식이라고 하는 것, 즉 독서를 한다고 하는 것은 모두 오늘의 개념으로 말한다면 "고전학"에 불과했다. 그것은 전혀 과학(사이언스)이 아닌, 십삼경이라고 하는 유가경전의 습득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의 체계만으로도 우리는 우리의 문명을 충분히 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 과연 과학이라고 하는 지식체계가 20세기와 같은 권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 우리가 과학이라고 하는 지식체계에 대해 강박관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과학이 생산하고 있는 현실적인 문명의 힘 때문인 것이다. 그것의 도덕적 가치때문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 과학이라고 하는 정보체계가 점점 보편화되어 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연 과학이라고 하는 지식의 한계는 설정되지 않아도 좋은 것인가? 이러한 모든 문제에 관하여 나는 독자들의 현명한 판단을 갈구한다. 결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없을지라도 우리의 먼 훗날의 자녀들을 위하여 사려깊은 생각을 한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노자 도덕경"이라고 하는 책
노자 도덕경이라는 것이 이 책의 원래의 이름은 아니다. 노자라는 사람이 지었다고 해서 옛날에는 그냥 노자라고 불렀다. 그러니 노자라는 이름이 아마도 가장 오래된 이름일 것이다. 그런데 이 『노자는 두 篇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 편은 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쓰여졌고, 한 편은 덕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해서 쓰여졌다. 그러니 도편, 덕편의 이름이 가능하다. 傳本에 따라 도편이 앞에 오기도 하고, 덕편이 앞에 오기도 한다. 그러니 노자라는 책의 별명으로 도덕도 가능하고, 덕도도 가능하다. 그런데 후대에 내려오면서 이 도덕에 "經"의 권위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덕경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중국의 당나라는 이 노자의 본명이 이씨라고 생각했고, 당나라 황실과 종친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자를 매우 존중했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때 이미 당나라 황실로부터 노자 도덕경을 전해 받았던 것이다.
노자라는 책의 저자인 노자는 누구인가? 노자는 "늙은 선생",(Old Maaster)이라는 뜻이며 그것이 곧 그 저자의 정확한 이름은 아닐 것이다. 이 노자라는 인물에 관하여, 사마천이라는 유명한 역사학자는 자신이 지은 사기라는 역사책 속에 역사적 인물의 전기를 모은 列傳이라는 부분에서 "노자열전"(Biographices of Lao Tzu)을 지어 남기었는데, 그 열전에서 조차 노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히 말하지는 못했다. 노자에 관하여 내려오는 여러 이야기들을 있는 그대로 다 실어 놓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사마천의 시대(한나라 무제때 사람,BC 2세기)에 이미 노자라는 인물은 오리무중의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노자라는 책이 존재한다면, 분명 노자라는 책의 저자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와같이 간단치 않다. 우선 노자라는 책 자체의 존재가 역사적으로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전을 대할 때, 불경이든, 기독교 성경이든, 유가경전이든, 춘추제가 경전이든, 우리가 현재 시중에서 사볼 수 있는 책의 모습이 곧 그 옛날의 책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유치한 생각이다. 기독교 성경만 해도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신약성경과 로마시대의 사람이 보았던 신약성경은 그 문자내용이 매우 다르다. 모든 고전이 옛날 어느 정확한 시점에 정확히 한사람에 의하여 쓰여져서 그 모습대로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온 예는 거의 없다. 우선 옛날에는 요새와 같이 "인쇄"라고 하는 책의 유포방식이 없었다. 모두 가죽이나 비단이나 대나무나 파피루스 같은 데에, 펜이나 붓으로 쓰거나, 칼이나 인두로 판 것이다. 그러니까 쓰는 사람마다 몇글자씩 달라지는 것은 물론, 착간, 누락, 첨가, 삭제, 유실 등등의 변화가 반드시 일어나게 마련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고전은, 모두가 근세에 와서(송대 이후) 인쇄술이 발달한 이후에 하나의 판본을 정해 정본으로 악속한 것이다. 그래서 고전이라고 부르는 많은 것들이 후대에 날조된 것도 많다. 조선말기에 성립한 책들을 가지고, 단군시대의 책이라고 주장하는 어리석은 이야기들이 이러한 날조의 대표적 사례이지만, 이러한 날조는 이미 漢代를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노자는 단행본으로 존재한 것이 매우 오래된, 그 정확한 추적이 가능한 희귀한 책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아주 확실하게 말하면 오늘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노자와 거의 유사한 책이 신약성서가 쓰여진 시대보다. 최소한 300년을 앞서 실재했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1973년 11월부터 1974년 초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湖南省 馬王堆(마왕뛔이)라는 곳에서 漢墓를 발굴했는데 그 3호 분묘에서 대량의 帛書가 나왔다. 백서라는 것은 비단에 먹과 붓으로 쓴 책을 말한다. 이 백서 중에 바로 오늘날의 노자책과 그 내용이 거의 비슷한 노자백서가 2종이 나왔는데 小篆체로 쓰인 한 종을 보통 갑본이라 하고, 隸書체로 쓰인 한 종을 을본이라 한다. 갑.을본이 모두 오늘날의 "도덕경"이 아닌 "덕도경"의 체제로 되어 있으나 그 내용은 오늘날 우리가 볼수 있는 도덕경과 큰 차이가 없다. 한 80퍼센트 이상이 대강 일치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3호 분묘에 묻힌 연대를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B.C 168년이다. 이 노자 비단책은 여기 묻힌 X侯利蒼의 아들이 생전에 보았던 抄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백서의 출현으로도 노자라는 사람을 아는데는 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이 백서의 출현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노자의 권위를 추락시키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전이 얼마나 그 傳寫의 역사가 정확한 전승을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입증하여 주었다. 그런데 최근에 더윽 놀랄 일이 하나 생겼다.
1993년 10월, 湖北省 荊門市 沙洋區 四方鄕 郭店村에 자리 잡고 있는 전국시대의 분묘 하나를 발굴했는데, 그곳에서 804개나 되는 竹簡(문자가 새겨진 대나무 쪽)에 쓰여진 일만삼천여 글자의 문헌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이 모두가 매우 심각한 개념성의 학술 저작인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 분묘 주인 자신의 라이브러리가 같이 묻힌 듯 한데, 그렇다면 이 분묘의 주인은 대단한 사상가였을 것이다. 부장품중에 "東宮之師"라는 銘文이 새겨져 있는 컵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분묘의 주인은 楚나라의 태자의 선생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맹자와 동시대며 맹자보다 약간 나이가 많은 초나라의 사상가 陳良의 묘로 비정하는 설까지도 제기되었다.(진량은 맹자 X文公上에 나온다) 대부분의 문헌이 유가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죽간 중에 도가저작으로서 노자 三篇과 太一生水 一篇의 2종이 포함되어 있다는 획기적인 사실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다. 이 분묘는 下葬시기의 하한선이 B.C. 300년 경이므로, 이 분묘 속의 죽간은 모두 B.C.300년 이전의 통용연대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왕퇴의 백서보다 연대가 근 두세기까지를 소급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郭店楚墓竹簡"이라고 부르는 이 문헌들은 중국의 전국시대의 사상사를 재구성하는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아주 생생한 근거를 제시한다고 본다. 전국시대 중엽의 제1차 자료를 지금 우리가 우리의 육안으로 볼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닌 사람들에게 그 감홍이 전달될 수 없겠지만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이 문헌에 비정하여 많은 다른 문헌의 문제점을 비교 검토함으로써 중국고대사상에 관하여 보다 정확한 추측이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실 郭店의 출토로 요즈음 중국 철학계는 구설에 안주할 수 없도록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노자의 문제만 하더라도 이 郭店(꾸어띠엔)의 竹簡本이 馬王堆(마왕뛔이)의 帛書本보다 문헌학적으로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마왕뛔이의 백서본은 기본적으로 현존하는 今本의 정당성을 강화시켜 주며, 판본의 많은 문제점을 해결하여 주는 서지학적 보조자료의 역할이 주효용이었다. 그러나 곽점의 죽간본은 금본의 정당성 자체를 회의케하며,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경이라는 문헌의 성립과정에 대해 매우 결정적인 새로운 가설을 가능케한다.
곽점죽간본(약칭하여 간본이라 한다.)은 갑.을.병. 三組로 나누어져 있다. 갑조본의 것은 길이 32.3센티미터짜리 39매로 되어있고, 을조의 것은 30.6센티미터짜리 18매, 병조의 것은 26.5센티미터짜리 14매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백서가 오늘날 우리의 한문지식으로도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소전체와 예서체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우리의 눈으로 보아 쉽게 식별하기 어려운 초나라의 독특한 字體로 되어있다.(전국중기의 고체의 특징을 보여준다) 그리고 백서의 경우 갑.을본이 동일한 내용의 중복되는 두 세트의 문헌임에 반하여 이 간서의 경우는 갑.을.병의 내용이 거의 중복되지 않으며 그것을 다 합치면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도덕경 문헌의 5분의 2 정도의 분량을 형성한다. 그리고 간본의 내용이 대부분 오늘날 금본에 있는 내용이지만, 그 章節의 체계가 금본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이 묘소가 이미 도굴된 사실이 있으며, 노자 간본이 完整하지 못한 것은 일부가 도둑맞았기 때문이라고도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고증가들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바로 금본의 5분의 2를 형성하는 간본의 내용이야말로 성서문헌학에서 말하는 복음서의 "Q자료"처럼, 도덕경의 가장 오리지날한 고층대를 형성하는 문헌일 것이라고 우리는 비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간본의 문제는 간단치가 않다. 갑본과 병본간에 금본의 64장 하반부분이 중복되어 나오고 있으며 그 문자의 표현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역시 갑.을.병본이 합쳐져서 하나의 완정한 텍스트를 이룬다기 보다는 제각기 다른 전승의 초사본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갑.을.병의 어떤 프로토 텍스트가 있다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갑본과 병본 두 텍스트 간의 문자를 비교해보면 갑본이 병본보다 오래된 초본임을 알수 있다. 양본은 그 전승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갑.을.병을 합친 내용이 노자라는 프로토 텍스트의 모습에 가까운 것일 것이라는 가설은 유용하다 그러나 갑.을.병본이 모두 다른 전승의 소산이라고 한다면 노자 연구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띠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본 강의는 대중강연이다. 노자라는 문헌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이미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진행되는 학술 세미나가 아니다. 그리고 본 강의의 취지 자제가 노자의 생각을 전달하려는 것이지, 노자라는 문헌의 전문적 분석결과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서지학적 논쟁이 매우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전문적인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며 여기 소개되어야 할 하등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곽점초간본 노자를 살펴 본 나의 소감 중에 가장 의미있는 사실은 그것이 노자라는 책의 형성과정에 대해 매우 설득력있는 새로운 가설을 가능케 한다는 젓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대만대학에서 석사논문을 쓸 때부터 주장해 왔던 학설들과 대강 일치하는 것이다.
공자와 동시대 쯤에, 노자라고 하는 어떤 X의 역사적 인물이 있었고, 그 인물이 단일 저작물로서 노자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노자와는 다른 모습이면서도, 그 배태를 형성하는 매우 질박한 사상형태였을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현묘한 형이상학적 인식론의 체계나, 지나친 정치철학적 주장이나 유가철학이나 타 제가에 대한 명백한 비판의식을 수반하는 것이 아닌 질박한 내용의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 이 삼백년 동안의 첨삭을 거치면서 발전하여 전국 말기쯤에는, 오늘 우리가 보는 금본과 상응되는 새로운 프로토타입으로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전국말기의 사상가며 노자의 최초의 주석가인 한비자가 보았다고 하는 노자는 바로 백서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며, 내가 말하는 프로토타입의 문헌에 상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도덕경이 아닌 덕도경이었다.
그럼 오늘 우리가 보는 노자 금본은 무엇을 기준으로 하는가? 그것이 바로 왕필(왕삐)이라고 하는 천재적 사상가가 주석을 단 판본을 말하며 보통 왕본이라고 지칭한다. 왕필이라는 사람은 A.D 226년에 낳아서 A.D. 249년에 죽은 魏나라의 천재적 사상가였다. 그런데 여기 연대를 한번 잘 계산해 보라! 몇살에 죽었는가? 만 23살에 죽었다.
23살? 모차르트는 몇살에 죽었는가? 그래도 모차르트는 결혼도 했고 35살까지 살다 죽었다. 그럼 23살에 죽은 청년이 언제 무슨 사상을 구축할 수 있었던 말인가? 왕필이 노자를 주석한 것은 16살의 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까 요즈음 나이로 중학교 3학년 정도의 소년이다. 그러나 이 소년 왕필의 노자 주석은 거의 중국 전 역사를 통털어 가장 탁월하고 가장 심오하고 가장 널리 읽히는 주석으로 꼽히고 있다.
왕필이 활약한 시대는 삼국지의 조조, 유현덕같은 사람들이 활약하던 시대와 비슷하다. 왕필이 태어난 다음 해 3월에 제갈량이 그 유명한 출사표를 올리고 위를 쳤으니까. 우리나라로 치면 신라.고구려.백제가. 흥기하면서 서로 충돌을 일으키던 삼국시대에 해당되는 시기다. 모차르트와 같이 10대에 이미 탁월한 음악가가 된다는 것은 요즈음 우리나라의 음악 천재들을 보아도 이해가 갈 수 있다. 그리고 10대에 세계적인 수학자들이 배출된다는 것도 쉽게 이해가 간다. 그러나 10대에 인생에 대해 쓴맛 단맛을 다 겪고 인간과 우주에 대한 모든 통찰을 거쳐야 나올 수 있는 심오한 철리의 대가가 된다는 것, 그것도 당대의 인간들에게도 쉽게 접근이 될수 없었던 난해한 문헌이었던 고경의 대가가 된다는 것, 그것도 보통 대가의 수준이 아니라 그 수천억의 인구가 살고 죽고 했던 중국 땅덩어리의 역사 전체를 통하여 가장 위대한 사상가가 된다는 것, 그것도 10대에,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풀리지 않는다.
신비를 좋아하는 사람들, UFO를 좋아하는 사람들, 에집트의 피라밋을 놓고, 나즈카의 지오글립스를 놓고 스페이스 커넥션을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뭔가 고대사의 신비가 인간적 상식에 의해 풀리는 것을 공포스러위한다. 그리고 자기들의 희한한 가설에 인류가 호기심을 기울여 주는 것을 자기들의 종교로 삼는다. 그러나 왕필은 조금도 그러한 신비의 인물이 아니다. 왕필을 보면 인간의 가능성의 위대함에 고개가 숙여진다. 왕필의 성장과정은 정확하게 추정가능하며. 그는 당대의 최고의 라이브러리였던 "蔡邕의 萬卷之書"를 물려받은 書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당대의 석학들과 高談淸論을 일삼았다. 무엇보다도 왕필이라는 존재를 가능케 했던 것은 삼국시대라고 하는 변혁기. 혼돈기의 창조적 자유의 분위기였다. 나이를 불문하고 실력자를 실력자로서 대접하는 비권위주의적 분방함이 확보되지 않은 시대였더라면 왕필은 태어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 그 어느 권문세가, 이 사회의 리더들이 열살짜리 석학을 모셔다 그의 강론을 듣고 심복을 할 것인가? 그의 시대는 곧 완적, 혜강과 같은 죽림칠현의 기괴발랄하고 자유분방한 행동들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시대였고, 그러한 로맨스의 시대였고, 그러한 로맨스는 智巧에 찬 俗塵을 부정하고 자연의 순박을 영탄하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같은 詩境으로 이어지고 있는 그러한 시대였다.
왕필이 노자를 주석했다 하는 것은, 요새 우리가 고전을 주해하는 책을 쓰는 것과는 좀 개념이 다르다. 우리는 기존의 텍스트가 대부분 이미 정본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텍스트를 전제로 해서 주해를 단다. 그러나 왕필이 노자나 주역을 주해했다 하는 것은, 그때까지 내려오던 다양한 전승의 텍스트 그 자체를, 자기의 주석적 견해의 일관성의 틀 속에서 정비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을 포함한다. 왕필은 물론 이러한 작업을 텍스트의 "왜곡"이라고 생각치 않았다. 왕필의 손에서 일어난 텍스트의 변형 내지 왜곡에 관하여 나는 매우 새로운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견해들을 여기 피력할 생각은 없다. 그 또한 너무도 충격적이고 너무도 전문적인 논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현재 노자 도덕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단 왕필이라는 어린, 그렇지만 만고의 걸출한 사상가의 손에서 변형된 텍스트이며, 대강 우리의 노자 도덕경의 이해의 틀도 왕필의 현학적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는 대전제를 확실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여기 피력하는 것으로 우리의 논의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왕본의 가치는 근 두 밀레니엄 동안 인류의 노자 이해의 다양한 틀을 형성해온 것이며, 어떠한 타 판본의 재해석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가치가 인정된다는 것을 밝혀둔다. 그리고 왕본의 텍스트는 백서나 간본과는 또 다른 또하나의 전승의 소산일 가능성이 높다. 왕본 텍스트의 독립적 가치는 마치 산스크리트 원본의 '바즈라 쩨디까 수뜨라'가 엄존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금강경하면, 꾸마라지바(鳩摩羅한)의 漢譯本 텍스트가 더 총체적인 금강의 지혜의 이해의 틀을 형성해온 것과도 같다. 우리의 노자 강해는 바로 이 왕본의 해석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적인 학도들은 백서나 간본에서 제기된 많은 문제들을 비교적으로 검토.파악하는 자세를 잃어서는 아니될 것이다 나 역시 왕본을 해석해가는 과정에서 백서와 간본의 연구성과를 도입할 필요가 있을 때는 그를 충분히 반영하도록 할 것이다. 왕본에 문제점이 발생할 때, 백서나 간본의 기준이 더 진실하다고 판명되면 물론 새 자료에 의하여 왕본 텍스트의 의미를 정확히 형량해야 할 것이며, 왕본 텍스트의 정정이 요구될 때는 그를 정정하는 것이 당연한 학문적 자세일 것이다. 나의 요번 노자 강해는 1999년까지의 세계적으로 노출된 모든 정보를 종합하는 가장 새로운 노자 강해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나는 四部集要 子部에 수록된 가장 흔한 청대의 華亭張氏本 왕필注 노자 도덕경을 나의 강해의 저본으로 삼는다.
노자는 한마디로 지혜의 서이다. 그것은 어떤 종교의 교리를 말하거나, 어떤 물리적 사태의 규명을 목적으로 하거나 우리에게 특정한 교훈이나 가치규범을 강요하거나 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서양의 전통에 있어서 "지혜"란,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무엇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혜란 근원적으로 "무당의 지껄임"이다. 동양에서 말하는 지혜란 그런 것이 아니다. 신이란 전제도, 인간이란 전제도, 지혜 앞에선 성립하지 않는다.
지혜란 우리 삶의 과정적 행위의 지혜이다. 그런데 지혜의 특징은 일체의 권위적 실체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혜는 어떠한 경우에도 "무전제"인 것이다. 지혜는 개념적 분석의 소산이 아니다. 이것은 분별적 지식을 뛰어 넘어 우리의 몸으로 궁극적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노자는 따라 공부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공연히 선입견만 불어넣을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노자는 공부하는 책이 아니라, 그냥 부담없이 정직하게 느끼는 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자에게서 무엇을 구하려 하지 말 것이며, 노자에게서 무엇을 배우려 하지 말 것인다. 그냥 그가 말하는 것을 빈 마음으로 따라가다 보면, 그것이 곧바로 나의 삶의 바른 가치의 한 측면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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