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와 의식」전 연혁 1
김남진
신체와 의식전은 김남진, 박찬성, 신혜경, 전흥수, 황규범 등 다섯 명의 사진가를 주축으로 1996년에 코닥포토살롱에서 첫 번째 전시회를 열었다. 기존의 누드사진과 대립되는 몸에 대한 새로운 형식과 미의식의 전개를 목적으로 결성된 후 매년 새로운 작가를 영입하면서 몸에 관한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 하였다.
두 번째 전시회에는 신체 일부를 복사기를 이용해 직접 복사하는 제로그래피 작업을 선보인 박진호, 동성애자들을 다큐멘터리한 송창우, 섬세한 여성의 감수성으로 몸을 바라보는 조성연이 가세하였다. 세 번째 전시회에서는 여성의 시선에서 여성의 벗은 몸을 당당하게 촬영한 김옥선과 관처럼 보이는 블랙박스를 이용한 사진 설치를 선보인 김현희 그리고 투명 아크릴 속에 사진을 삽입하여 몸의 한 부분이 확대되어 보이는 시각적 유희 장치를 설치한 노승복이 참가하였다.
전흥수
신혜경
네 번째 전시회를 통해 김정선, 박종성, 장숙, 정영혁이 새롭게 참가하였다. 김정선은 한국의 전통적 소재에서 작품의 소재를 차용하여 셀프 포트레이트를 제작하였고, 장숙은 몸의 일부분을 딥틱(diptych) 혹은 트립틱(triptych) 형식으로 처리하였다. 금속성의 단련된 몸을 연상시키는 박종성의 작품과 관음증(voyeurism)의 시각으로 여성의 방을 농밀하게 그린 정영혁의 사진이 선보였다.
특히 다섯 번째 전시회 때는 전국 사진학과 졸업생들의 작품들과 기존의 사진가들(김남진, 박종성, 박찬성, 조성연, 전흥수)의 작품으로 이원화된 전시회를 개최하여, 젊은 세대의 몸에 관한 관심과 접근법을 엿볼 수 있었다.
김남진
제1회 신체와 의식전(1996) : 김남진 박찬성 신혜경 전흥수 황규범
< 신체와 의식전> 이라는 사진전
「신체와 의식」전에서는 이들이 정면으로 내세운 신체라는 명제만으로도 이들이 만들고 있는 벗은 알몸, 즉 누드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상식적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인간의 ‘신체해설’과 그 의식을 표현의지를 포함한 미학적 입장까지를 실험해 보이겠다는 의도가 보인다.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인체를 사진으로 다루는 경우 사회제도와 그 인식의 일반적 경향, 그리고 그 경직성으로 인해 많은 제약과 한계가 도사리고 있는게 사실일 것이다. 아마도 그런 점에서 이 다섯 사람은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해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
황규범
어떻든 흔히 누드라고 일반적으로 말하여지는 사진들이란 기실은 벗은 여자로 간단히 인식되는 반면, 그것이 수많은 복제로 인해 그만 집합적이며 익명적인 이미지로 확산되는 것이라는 점은 흔히 간과되고 있는 것 같다.
특별한 경우, 그러니까 특정 인사의 벗은 모습이 가십거리로 인쇄되거나 유포되는 경우조차도 어쩌면 인쇄매체의 특질인 사회성에서 벗어나 벗은 몸매 의 또 하나의 익명적 변종이 되고 말 수도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 「신체와 의식」전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작가는 면면이 모두 다른 이미지를 구사하는게 사실이지만 이들에게도 공통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의 사진들에는 표현 양식 자체를 사진의 내용이며 요소’로 보겠다는 면이 강하게 노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면에서의 공통점도 발견된다. 허술한 표현이 될 성싶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적으로 허구의 공간이 연출되고 있으며 그것이 실재하는 피사체를 다루는 경우라도 역시 ‘조형’이라는 축에서 사진에 접근해가는 의지가 전면으로 부각된다는 점에서 또 하나의 공통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엄밀하게 말해볼 것도
없이 기록하거나 참조해야 할 현실세계는 앞에서 기술했듯이 이들의 관심권에서 멀어져 조형세계로 편입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세계의 모사(模寫)와 같은 사진의 일반적 기능 같은 것은 없으며 또한 이들의 표현세계를 지탱하는 미학적 근거일 수도 없다.
송창우
「신체와 의식」전에서 다섯 사람이 보여주는 신체는 어디까지나 조형이었다. 그것은 익명화된 누드 브로마이드 따위라든가 외설로 말해지는 수준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 이 다섯 삶이 찍어내는, 또한 만들어내는 이미지들이란 사진가 내부가 빚어내는 스타일과 미의식 혹은 감성의 형식이라든지 개인적인 이야기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다루고 있는 누드의 형식은 처음부터 알몸이라는 소재의 커뮤니케이션의 형식이 아니며 또한 객관성의 확보가 목적이 될 수도 없다.
김 장 섭(사진가)
제2회 신체와 의식전(1997) : 김남진 박진호 박찬성 송창우
전흥수 조성연 황규범
관념화된 신체, 본능적인 의식
현대 사회가 허락해 준 관념화된 신체를 소재로 해서 만들어 낸 사진들은 신체에 대한 매우 다양하고 개성 있는 접근과 풍부한 표현력을 보여준다.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장르의 해체라든가 사진의 새로운 비전 또는 포스트모더니즘 등등의 수식어를 사용하여 설명을 하여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개별적이고 세부적이며 사진의 형식에만 집착하여 접근하는 태도는 전체 사진을 관통하는 맥을 정확히 포착하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앞서 내비친 갈등이라는 단어는, 사실 이 사진들이 갖는 이중성에서 나왔다.
사진 속의 신체는 이미 관념화될 대로 관념화되어 버렸다. 사진 속에는 분명 인간의 고깃덩어리가 들어 있지만, 사진 자체가 감상자들에게 몸 대 몸으로 그 느낌을 전달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감각은 많이 탈락된다. 이보다도 머리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것 같고, 그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사진들을 좀 더 천천히 들여다보자. 여섯 명의 사진들이 신체를, 아니 인간의 고기 덩어리들을 무척 세련되고 정교한 언설(言說)로 포장하여 사진 속에 견고히 가두어 놓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완전한 것 같지는 않다. 이상하게도 사진가들은 어디서부터 인가 갈라지기 시작한 틈새를 알면서도 메우려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있다. 그리고 그 틈새에서는 분명 인간의 ‘살 냄새’
가 풍겨 나오고 있다.
노승복
박진호
신체를 표현한 이 사진들의 실제 위치는 관념적인 곳에도 아니면 관념적이지 않은, 즉 원래의 의미대로 본능적인 곳에도 있지 않고, 사실 그 사이 어디 선가에서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산업혁명 후 근대의 기술 문명 시대가 도래하였을 때, 인간은 인간의 신체가 해야 할 많은 일들을 기계가 대신 해 주는 것을 하나의 축복처럼 생각했다. 그런데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고도로 지능화된 현대 사회에 들어서는 인간의 신체는 물론 정신이 해야 할 많은 일들까지 기계가 대신 해주고 있다. 우리는 지금, 과연 이것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NO‘에 가깝다. 오히려 극단적이고 비정상적인 성도착 행위 같은 인간의 ‘몸뚱이’를 더 강렬하게 확인하고 증명하려는 처절한 몸부림만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뿐이다.
신체와 의식」전을 통해서, 일곱 명의 사진가들이 이미 철저하게 관념화되어 버린 신체를 기꺼이 인정하고 그것을 충분히 활용하면서도 과거에 보여주었던 패러다임을 향한 의미있는 곁눈질을 하고 있음을 본다. 관념화된 신체와 본능적인 의식-아마도 생략한 듯 보이는 단어들을 채워 넣으면 뒤바뀐 =수식어에 낯선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애매하고 어중간한 상황이 바로 지금 우리들이 갖고 있는 신체에 대한 사고라는 생각에 망설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 한 조(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