杏林書院
건립시기/일시 1867년 조선/조선 후기
소재지 주소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육곡리 420-1 [육곡길 31]
소유자 부여서씨 종중
문화재 지정번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
문화재 지정일 1984년 5월 17일
![](https://t1.daumcdn.net/cfile/cafe/1857014B4EF40C520A)
[개설]![](https://t1.daumcdn.net/cfile/cafe/196F4F474EF40C4F18)
행림서원은 1867년(고종 4)에 세워진 부여서씨의 문중 서원으로, 육곡리를 중심으로 세거하는 부여서씨들의 상징적 유물이기도 하다.
[위치]
논산시내에서 은진사거리 쪽으로 가다가 왼쪽 가야곡면 방향으로 약 5㎞ 직진하면 노래골 삼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다시 야촌리사거리 방면으로 지방도 68호선을 타고 약 2㎞ 직진하면 육곡리 입구가 나오는데, 행림서원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다.
[변천]
행림서원의 전신은 강응정(姜應貞)이 독향되어 있던 갈산사(葛山祠)였다. 갈산사는 현 가야곡면 두월리에 있던 사우로 임진왜란 당시 소실된 것을 1713년(숙종 39) 우암 송시열이 중건을 주창해 산노리로 이전, 다시 중건한 건물이다. 이후 효암서원으로 이름을 변경하였으며, 1734년(영조 10)에 서익이 효암서원에 제향된 것으로 추측된다. 효암서원에 제향되어 있던 서익은 1856년 효암서원에 김성휘가 추배되면서 위차(位次)로 인한 갈등을 겪게 되었고, 이런 갈등 속에 부여서씨 집안에서 육곡리에 행림서원을 건립하고 위패를 가져오게 된다.
현재 행림서원의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행림서원에서는 서원지를 근거로 1856년(철종 7) 김성휘가 효암서원에 추배되던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위차 문제로 인한 서원 건립은 결코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1867년(고종 4)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근래 발견된 자료들이 대부분 1867년으로 적고 있어 이 해로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그러나 행림서원은 건립된 지 얼마 있지 않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다. 이후 육곡리에 세거하는 서익 후손들의 공론으로 1926년 복설되었으며, 1932년부터 본격적인 위엄을 갖추었다. 1976년에 도애 이소를 추배하였다.
[형태]
거의 평지나 다름없는 대지에 두 개의 큰 공간을 조성하여 앞면에 강학 공간인 강륜당을 두고 뒷면에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식이다. 강륜당과 사당은 일직선이 아닌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외삼문·내삼문·사당만이 일직선상에 있다. 현재는 사묘를 비롯한 강학 공간인 강륜당과 외삼문, 묘문이 남아 있다.
현재 행림서원 경내에는 만죽선생 묘정비와 행림서원 기적비가 건립되어 있는데, 만죽선생 묘정비는 1867년(고종 4)에 건립된 것이다. 송내희가 찬(撰)하였으며 이호준이 전(篆)하였다. 만죽선생 묘정비의 앞면에는 ‘만죽서선생묘정비(萬竹徐先生廟庭碑)’라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부여서씨의 육곡리 입향 과정 및 효암서원에서 서익이 분봉되는 과정을 적은 글이 음각되어 있다.
[현황]
행림서원에서는 매년 3월 그믐과 9월 그믐 논산 지역에 사는 유림들이 참여해 만죽헌 서익(徐益)을 주향하고 도애 이소(李韶)를 배향하고 있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부여서씨 종중에서 관리∙보호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행림서원이 자리한 육곡리는 부여서씨의 동족마을이다. 이러한 부여서씨가 자신들의 입지와 양반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하기 위해 문중서원을 건립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부여서씨가 주변 지역에서 양반가로서의 위치와 영향력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