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하고 보니 버릴 것도 많고, 내게 이런 것도 있었나 싶을 만큼 기억 저편에 묻혀 있던 묵은 것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저는 성격상 그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또 다른 박스 속에 꾹꾹 눌러 담아 기억의 어딘 가로 이사를 보냅니다.
언제 다시 찾게 될지는 모르지만 버리지 않는 한 그것은 여전히 제게 유효하고, 여전히 저의 일부입니다.
저는 그렇게 사소한 것 하나 쉬이 버리지 못하는 버릇을 평생 지고 갈까 봅니다.
2월은 시작인 듯 끝을 맞이합니다. 새해의 설렘과 새 학기의 준비로 자칫 흘려 지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2월도 우리의 소중한 일부라는 것, 차마 버릴 수 없는...그런 것 말이죠.
1. 루시드 폴 - 그대 손으로
'루시드 폴'에 대한 나의 이 지칠 줄 모르는 애정 행각은 어디쯤에서 그칠 곳인가...
기다리던 새 앨범이 나왔다. 생각보다 빨리 나와 조금 섭섭했다면 이해할 수 있겠나? 이들에 대한 나의 역설적 사랑을...
조금은 당황스럽게도 '버스 정류장'이라는 영화의 OST로 발매가 되었는데 영화의 분위기로 볼 때 '루시드 폴'보다는 '미선이'쪽에 더 가깝다.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루시드 폴'은 조윤석의 솔로 프로젝트고 이 친구가 이전에(아니 지금도) 몸담은 모던 락 밴드가 '미선이'다. 포크가 축을 이룬 '루시드 폴'은 일종의 외도였는데, 의외의 호응에 이번 앨범도 '미선이'가 아닌 '루시드 폴'로 나왔고 이 대목이 날 조금 불편하게 한다는 거다.
사실 '미선이'도 '루시드 폴'도 다 조윤석이라는 인격의 예술적 발현이고 분명 그의 일부일 것이나 내겐 혼란스럽다. 차라리 '미선이- 버스정류장OST- 루시드 폴 1집'의 순서가 자연스럽다. 제자리로의 회귀도 아니고 전작에의 완성적 연장도 아닌 '회색'은 별로다.
이런 식의 '명분 논쟁'은 접어두고서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좋다.
1집은 천 배쯤 더 좋지만...
2. Mercedes Sosa - Mon Amor
남미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이들의 '열정'이 좋단다. 살사나 삼바, 흔히 라틴 음악이라 얘기하는 경쾌하고 정열적인 댄스 음악이 팝 시장을 강타했었다. 리키 마틴이니 제니퍼 로페즈니 하는 류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전면에 내세운 섹시 스타 말고, 우직하게 평생을 노래해 온 노장들의 음악엔 분명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힘이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 역시 죽기 살기로, 아둥바둥 음악 해온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환경이나 천성을 미뤄 볼 때, 놀아가며 제 좋은 맛에 해온 음악이 햇수가 쌓이고 쌓여 고스란히 내공이 되어 버린 것이다.
내가 남미 음악을 즐기는 것은 이들의 '여유'가 좋아서다.
이 아줌마의 노래도 들으면 편안한데 눈물이 날 것 같다. 울컥. 자기도 울면서 노래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표정 아나? 분명 웃고 있는데 눈물이 흐르는 표정...
3. 이병우 - 마리 이야기OST
이병우의 음악을 한 곡 콕 집어 소개하자니 뭔가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 기분이다. 특히 이번 앨범은 어른들을 위한 애니메이션 '마리 이야기'다. 전체를 들어야 한다.
영화 예고편을 먼저 보고 음악을 이병우가 맡았단 걸 들었는데 '이성강 감독 사람 보는 눈 있네'하며 웃었다.
긴 말 않겠다. 작년에 '루시드 폴'이 있다면 올해는 이병우가 있다.
이 두 인간 덕에 요즘 클래식 기타에 빠져 산다.
이병우가 누군지 잘 모른다고? 인터넷 나뒀다 뭐하나. 찾아보시라. 그리고 아...내가 이런 인물을 몰랐다니 하며 스스로를 책망하시라. 마치 뒤늦게 '소망의 바다'를 첨 알게 되었던 그 날처럼...^^ 하하하!!!
4. 꿈이 있는 자유 - 소원
작년 한해 가장 많이 불렀던 찬양이기도 하고 성격이 나오려 할 때마다 "...삶의 한 절이라도 그 분을 닮기 원하네..."를 부르며 스스로를 추스렸었다.
새로 이사가서 나가게 된 교회에서(예전에 다니던 나눔과 섬김의 교회) 이번 주일 예배 때 특송을 부탁 받았는데 뭘 할까 고민하다 '소망의 바다' 노래 대신 이 곡을 부르기로 했다.
사역자로서의 삶의 지표가 되어 주는 고마운 노래.
2절 마지막 부분을 부르며 "..삶의 한 절이라도 주님을 닮기 원하네..."라고 '그 분'을 '주님'으로 바꾸는 순간....눈물이 솟았다.
그 분의 이름을 부를 때 내 안에 들어와 나를 다스리는 나의 주님.
5. FourPlay - Why can't it Wait till Morning
환상의 팀웍, 최고의 밴드 진용이 뭉쳤다. 건반 Bob James, 기타 Lee
Ritenour, 베이스 Nathan East, 드럼 Harvey Mason, 이름만 들어도 숨이 막히는 퓨전 재즈 계의 거장들이 모여 자기 목소리를 조금씩 낮추는 대신에 상대방의 소리에 귀기울인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훌륭하다.
TOTO의 비인간적이리만큼 정교한 연주와는 뭔가 다른 차원의 따뜻함이, 인간미가 느껴진다.
이 곡은 Phil Collins의 작곡과 노래로 'Phil에게도 이런 면이?' 싶으리만큼 감미로운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6. 박학기 - 날 사랑했다면
요즘 중견 가수들은 진검 승부를 피한다. 정공법으론 아무래도 승부가 어렵나보다. 거의가 베스트 앨범을 들고 나오는데, 신곡 한 두 개를 집어넣는 게 고작이고, 리마스터링이라는 것도 왜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수준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면에서 학기 형님의 새 앨범은 신곡 3곡에, 전곡을 새롭게 편곡하고 연주했다는 점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물론 원 곡의 오리지날 편곡들이 워낙에 훌륭한 탓에, 그리고 전체의 편곡과 프로듀싱을 맡은 함춘호 형님의 포크 락 색깔이 지나치게 많이 묻어난 탓에 아쉬움이 남긴 한다.
그래도 좋다. 요즘에 흔치않은 인간적인 목소리, 인간의 손때가 묻은 연주가 듣기 좋다.
아- 함께 한 동료들 역시 인간적이다. 한동준, 유리상자, 조규찬, 윤종신...
이 곡만 5번 돌려듣고 잤다.
7. Cindy Morgan - Make us One
평소에 싱어송라이터가 아니면 일단 무시하고 들어가는 경향이 내겐 있어 여자 가수들의 음반을 잘 안 듣게 된다고 전에도 한번 얘기했었다. 자기 음악, 자기 얘기가 아닌 건 기본적으로 싫다.
Cindy Morgan은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송라이팅 능력을 더 높이 살 만하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EXODUS"라는 Michael W. Smith의 레이블 RocketTown에서 만든 멋진 워십 앨범이다. 이 앨범을 필두로 모던 워십에 대한 열풍이 몰아 닥쳤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흠잡을 데 없는 명반이다.
현재 힘즈뮤직에서 준비중인 한수지 씨에게 어울릴 노래를 찾다가 발견한 것이 이 곡이고 가수 본인을 비롯한 모든 스텝들을 감동시켰다.
명확한 주제에 비해 은유적 표현이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아 번역의 문제가 쉽지 않다는 단점만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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