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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효 석 가난한 분녀가 성적(性的)으로 타락해 가는 과정을 통해 상실해 가는 윤리의식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1 우리도 없는 농장에 아닌때 웬일인가들 의아하게 여기고 있는 동안에 집채 같은 도야지는 헛간 앞을 지나 묘포밭으로 달아온다. 풀 뽑던 동무들은 간담이 써늘하여 꽁무니가 빠져라 산지사방으로 달아난다. 허구많은 지향 다 두고 도야지는 굳이 이쪽을 겨누고 욱박아 오는 것이다. 분녀는 기겁을 하고 도망을 하나 아무리 애써도 발이 재게 떨어지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치기로 공칙히 앞에는 넓은 토벽이 막혀 꼼짝 부득이다. 옆으로 빗빼려고 하는 서슬에 도야지는 앞으로 왈칵 덮친다. 손가락 하나 놀릴 여유도 없다. 육중한 바위 밑에서 금시에 육신이 터지고 사지가 떨어지는 것 같다. 팔을 꼼짝달싹할 수 없고 고함을 치려야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분녀(粉女)는 질색하여 눈을 떴다. 허리가 뻐근하며 몸이 통세난다. 문득 놀라서 엉겁결에 소리를 치나 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무엇인지 틀어막히우고 수건으로 자갈을 물려 있지 않은가. 어머니는, 하고 가까스로 고개를 돌리니 윗목에 누웠고 그 너머로 동생의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삼경이 넘었을까, 밤은 막막하다. 열린 문으로는 바람 한숨 없고 방 안이나 문 밖이 일반으로 까마득하다. 먼 하늘에는 별똥 하나 안 흐른다. "원망할 것 없다. 둘만 알고 있으면 그만야. 내가 누구든―---아무에게나 다 마찬가진걸." 더운 날숨이 이마를 덮는다. 부스럭부스럭하더니 저고리 고름을 올가미지어 매어 주는 눈치다. 간단하고 감쪽같다. 도적은 흔적 없이 '훔칠 것'을 훔치고 늠실하고 나가 버렸다. 하늘이 새까맣다. 그 새까만 하늘이 부끄럽고 디딘 땅이 부끄럽고 어두운 밤을 대하기조차 겸연스럽다. 우물에서 물을 두어 드레 퍼올려 얼굴을 씻고 방에 들어가 등잔에 불을 켰다. 어둠 속에서 비밀을 가진 방 안은 밝을 때엔 천연스럽다. 몸뚱이가 한구석 뭉척 이지러진 것 같다. 반쪽 거울을 찾아 들고 얼굴을 비추어 보았다. 코며 입이며 볼이며가 상하지 않고 제대로 있는 것이 도리어 신기하게 여겨졌다. 이튿날은 공교로이 궂은 까닭에 비를 칭탈하고 일을 쉬고 다음날 비로소 묘포로 나갔다.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뱅돌아 사람을 만나기가 여간 겸연쩍지 않다. “뭐여, 분이 왔는가? 오늘따라 더 곱구먼” ‘혹시 이사람인가? 아니면, 거드럼 부리는 들대 밑 저사람한테 당했으면 어쩐다?’ ‘잠자코 풀을 뽑는 명준이, 아닐거야, 새침한 몸집 어느 구석에 그런 부락부락한 힘이 들어 있을꼬’ 명준은 맡은 이랑의 풀을 뽑고 감독의 분부로 이깔 포기에 뿌릴 약재를 풀어 무자위로 치기 시작하였다. 한 손으로 물을 뿜으며 다른 손으로 물줄기를 흔들다가 고무줄이 빗나가는 서슬에 푸른 약물이 옥녀의 낯짝을 쏘았다. ‘어유, 저 녀석 요새 무슨 곡절이 있어!’ “어유, 옥녀 미안해. 좌우간 니가 한 번 해봐‘ 통의 것을 다 쳤을 때 다시 물을 길을 양으로 분녀는 명준의 뒤를 따라 도랑으로 내려갔다. "일하기 싫지 않니." "너 어떤 놈에게로 시집가련. 박추한테라도." "미친 것." "난 이 고장에서 없어지겠다. 살 재미 없어. 계집애들 틈에 끼여 일하기도 낯없다. 일한대야 부모를 살릴 수 없고 잡단 세금도 못 물어 드잡이를 당하는 판이 아니냐. 이까짓 고향 고맙잖어. 만주로 가겠다. 돌아다니며 금광이나 얻어 보련다. "정말 가겠니." "안 가고 무슨 수 있니. 이까짓 쭉쟁이 땅 파야 소용 있나. "저, 분녀야. 금덩이를 지고 올 때까지 나를 기다려 주련." 눈앞에 찰락거리는 명준의 옷고름이 새삼스럽게 눈에 뜨이자 분녀는 번개같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끝을 홀쳐맨 고름이 같은 꼴의 제 옷고름과 함께 나란히 드리운 것이다. "네 짓이었구나." "언제까지든지 나를 기다리고 있으련?" “어이, 거기 두사람 거기서 뭣해?” 박추의 소리가 나자 두 사람은 날쌔게 떨어져 밭으로 갔다. 그뿐 명준은 다시 묘포밭에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며칠 후에 정말 만주로 내뺐다는 소문이 들렸다. 분녀는 마음이 아득하고 산란하여 일을 쉬는 날이 많았다. 2 분녀는 그렇게 눈떴다. 인생의 고패를 겪은 지 이태에 몸은 활짝 피어 지난 비밀의 자취도 어스레하다. 그러나 이제 아닌때 별안간 불풍나게 두 번째 경험을 당하려고 하는 자리에 문득 옛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음..왜이래?” “에이, 가만 있으라니까” 피가 끓으며 세상이 무섭고 가슴이 두근거리며 손가락이 떨린다. ‘거리에 자주 삐쭉거린 것이 잘못일까. 만갑이에게는 어찌 되어 이렇게 허름하게 보였을까. 돈도 없으면서 가게에 들어가서 이것 저것 탐내는 것부터 틀렸다’ 부락스러운 꼴이 사내란 모두 꿈에서 본 도야지요 엉큼한 날도적이다. 훔친 뒤에는 심드렁하다. "가지고 싶은 것 말해 봐―---무엇이든지 소용되는 대로 줄게." "욕을 주어도 분수가 있지. 사람을 어떻게 알고 이 수작이야." "미워 그랬나." "몰라, 녀석." 첫번에는 겁결에 울기란 생각도 안 나던 것이 지금엔 눈물이 솟는 것이다. 그 무엇을 잃은 것 같다. 다시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안타까운 생각에 몸이 떨린다. "울긴 왜, 사람은 다 그런 것이야. 단오에 들 것 한 벌 갖추어 줄게." "삽삽하게만 굴면야 이 가게라도 반 노나 줄걸." "여편네가 중풍으로 마저마저 거꾸러져 가는 판이니 그렇게만 된다면야 나는 분녀를 새로 맞어다 가게를 맡길 작정인데 뜻이 어떤가?" 울면서도 분녀는 은연중 귀를 솔깃하고 있었다. 만갑이가 소매 속에다 뭘 넣어 두었다, "잘 생각해 볼 일이야." "이것 넣어 둬." 집에 돌아와 소매 갈피를 헤치니 지전 한 장이 떨어졌다. 항용 보던 것보다는 훨씬 넓고 푸르다. 과람한 것을 앞에 놓고 분녀는 적이 마음이 누근하였다. 군청 관사에 아침 저녁으로 식모로 가서 버는 한 달 월급보다 많다. ‘오빠가 좀 더 온전하다면 집안이 이처럼 궁색하진 않으련만. 늦게 배운 오입에 공금에까지 손을 대고, 결국 경찰에까지.’ 불의의 수입을 앞에 놓고 분녀는 엄청나고 대견하였다. 집안일에 보태자니 빛 없고 혼잣일에 쓰자니 끔찍하고 불안스럽다. ‘솔직 계집이 하는 짓이 아닌가? 집안 사람도 집안 사람이려니와 명준이와 상구에게 들 낯이 있는가? 설사 만주에 가 있다 하더라도 첫 몸을 준 명준이 아닌가? 그야말로 불시에 금덩이나 짊어지고 오면 어떻게 하노?’ 그러나 명준이보다도 당장 날마다 만나게 되는 상구에게 대하여서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상구가 지금 학교를 마치고 서울까지 가서 학교를 마치면 취직도 한결 높아지겠지? 하지만, 세월이 너무 장구하고 지루하다’ 몸까지 허락하면 일이 틀어질 것 같아서 언약만 하여 놓고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게 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이 꼴이 되고 말았다. ‘허랑한 몸으로 상구를 어찌 대하노.’ 3 분녀는 밤이 이슥하기를 기다려 조심스레 집을 나갔다. 만갑이 가게에 물건을 잊어 둔 것이다. 행길에는 사람들이 듬성듬성하다. 전과는 달라 한결 조물거리는 마음에 사방을 엿보며 가게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듯이 만갑이는 성큼 뛰어나온다. "분녀 왔어? 이제 뭐, 더 올 사람도 없을 듯하군." 밀창을 드르렁드르렁 밀고 휘장을 치고 가게를 닫는 것이다. "곧 갈 텐데." "눈어림만 했더니 맞을까." 골방문을 냉큼 열더니 만갑이는 상자를 집어낸다. 덮개를 여니 뾰족한 구두다. 새까만 광채에 분녀는 눈이 어립다. '그까짓 구두쯤. 팔을 나꾸어 쪽마루로 이끈다. 분녀는 반갑기보다도 무섭다. 불 하나를 끄니 가게 안은 어둑스레하다. 어두운 속에서 분녀는 씨름꾼같이 왈칵 쓰러졌다. 더운 날숨이 목덜미를 엄습한다. 굵은 바로 얽어매인 것같이 몸이 가쁘다. '미친것.' 즐겨서 들어온 것은 아니나 굳이 거역할 것이 없는 것은 몸이 떨리기는 하나 거듭하는 동안에 마음이 한결 유하여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둠에는 눈이 없는 까닭에 부끄러운 생각이 덜하다. 별안간 밀창을 흔드는 인기척에 달팽이같이 몸이 움츠러들었다. 시침을 떼려던 만갑이는 요란한 소리에 잠자코 있을 수 없어 소리를 친다. "천수냐." "야단났어요." "병환이 더해서 댁에서 곧 들어오시라구요." "더하다니." "풍이 나서 사람을 몰라봐요." "곧 갈게, 어서 들어가." “근데, 왜 이리 어두워요?” 천수가 약빠르게 불을 켜는 바람에 분녀는 별수없이 어지러운 꼴을 등불 아래 드러냈다. 움츠러들며 외면하였으나 천수의 눈이 등에 와 붙은 것 같다. "녀석 방정맞게." 만갑이의 호통에보다도 천수는 분녀의 꼴에 더 놀랐다. 이튿날 상구가 왔다. 그를 만나기는 퍽도 오래간만이다. 얼굴이 좀 그을었고 눈망울이 그 무슨 먼 생각에 멀뚱하다. "시골학교 재미 적다. 서울로나 갈까 생각하는 중이다." “뚱딴지같이 다따가 서울은 왜." "조사가 심해서 책도 맘대로 읽을 수 없어. 서울 가면 책도 소원대로 읽을 거, 동무도 흔할 거." "책 책 하니 학교책이나 보면 됐지 밤낮 무슨 책이야." 책보를 끌러 활짝 헤치니 교과서 아닌 몇 권의 책이 굴러 나왔다. 영어책도 아니요 수학책도 아니요 그렇다고 소설책도 아닌 불그칙칙한 껍질의 두터운 책들이다. "집에 두면 귀찮겠기에 몇 권 추려 가져왔다. 소용될 때까지 간직했다 주렴." "주제넘게 엉큼한 수작 하다 망할 장본인야. 까딱하다 건수, 윤패 꼴 되려구." "함부로 지껄이지 말아. 쥐뿔도 모르거든." "너 요새 수상하더라. 태도가 틀렸지." "어떻게 알고 그런 주제넘은 대꾸야." 상구는 돌리는 얼굴을 또 한번 갈기다가 문득 고름 끝에 옭아매인 반지를 보았다. "웬 것야." "어느 놈팽이를 웃어 붙였니. 개차반. 천보." 볼이 얼얼하고 이빨이 솟는 듯하나 분녀는 아무 대답 없다. 차라리 죽지가 꺾이게 실컷 맞고 싶다. 미안한 심사가 약간이라도 풀려질 것 같다. "숫제 그 손으로 죽여 주었으면." "큰 것 죽이지 네까짓 것 죽이러 생겨났겐." 결착을 내려는 듯이 몸째 차 박지르고 상구는 훌쩍 나가 버렸다. 저녁때 밭에서 돌아오기가 바쁘게 어머니는 황당하게 설렌다. "들었니. 상구 말이다." "요새 더러 만나 봤니. 이상한 눈치 보이지 않든―--- 감옥에 들어갔단다." "네, 언제요." "망간 거리에서 소문 듣고 오는 길이다. 윤패, 건수 들과 한 줄에 달릴 모양이다. 사람 일 모르겠다." "눈치가 이상은 하였으나 그렇게까지 되다니요." “그랑께 사람은 겉볼일이 아니구먼, 초라니 같은 것. 사람 잘못 가렸어." "사람과 생각이 다른 거야 하는 수 없지요." "너희들 그간 아무 일 없었니." “일은 무슨..” "있었다면 탈이다." 상구의 두고 간 책이 유난스럽게 눈에 띈다. 그립기보다도 도리어 책망하는 원혼같이 보여서 쓸어 들고 아궁 앞으로 내려갔다. '차라리 태워 버리는 것이 글거리가 남잖아 피차에 낫지.' 먹과 종이 냄새가 나며 두터운 책이 삽시간에 불덩이가 된다. 어두운 부엌 안이 불길에 환하다. 상구와는 영영 작별 같다. 4 어느 날 저녁 느직하게 도야지물을 주고 우리에 의지하여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을 때 문득 은근한 목소리에 돌아서니 홀태 양복을 입고 철 잃은 맥고를 쓴 것이 갈데없는 만갑이다. "동문밖까지 와줄 텐가. 성밑에 기다리고 있을게." “무슨 일인데?” "의논할 일이 있어. 안 오면 낭패야." 대답할 여지도 없게 다짐하고는 얼굴도 똑똑히 보이지 않고 사람의 눈을 피하는 듯이 휙 가버린다. ‘여편네 병이 위중한가?’. 방에 돌아와 망설이다가 행티가 이상한 까닭에 담보를 내서 가보기로 하였다. 동문을 나서니 들판이 까마아득하고 늪이 우중충하다. 달 없는 그믐밤이 금시에 사람을 호릴 듯하다. 사내는 성큼 뛰어와 날쌔게 몸을 끌었다. 무서운 판에 분녀는 뿌듯한 힘이 믿음직하여 애써 겨루려고도 하지 않고 두 팔에 몸을 맡겨 버렸다. "분녀." "다짜고짜로 개처럼 무어야, 원." "말이 소용 있나." "녀석 누구야." "만갑인 줄만 알았니. 어수룩하다." "못된 것. 각다귀." "듣지 않을 듯해서 감쪽같이 만갑이로 변해 보았다. 계집을 속이기란 여반장이야. 맥고 쓰고 홀태 양복만 입으면 그만이니." “천수 너!” "딴은 만갑이와 좋긴 좋구나. 여기까지 나오는 것 보니.“ 기운도 욕심도 감동도 사내란 다 일반이다. 마치 코가 하나요 팔이 둘인 것같이. 정신이 산란하여 몸이 노곤하다. 살림은 나아지는 법 없고 일반인데다가 어느 날 또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이웃 고을 재판소에서 검사국으로 넘어갔던 오빠의 재판이 열리는 것이다. 기차로 불과 몇 시간이 안 걸리는 곳인데도 노자가 없는 것이다. 만갑이밖엔 생각나는 것이 없다. 횡덩한 가게에는 그러나, 만갑이 꼴은 보이지 않는다. 구석에 있던 천수가 빈정거리며 나올 뿐이다. "만갑이 보러 왔니? 온천으로 놀러 갔다." "무슨 일인지 내게 말하렴. 났으니 말이지 만갑이에게 말해도 소용 없을 줄이나 알아라. 네게서 벌써 맘뜬 지 오래야. 요새는 남돗집 월선이와 좋아 지내는 모양이더라. 분녀는 불시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다. 눈앞이 아득하다. "가게라도 반 떼어 주겠다고 꼬이지 않든? 여편네가 죽으면 후실로 들여 가게를 맡기겠다고 하지 않든? 누구에게든지 하는 소리. 그게 수란다." 기둥을 잃은 것 같다. 몸이 떨린다. 그를 장래까지 믿었던 것은 아니나 너무도 간특스럽게 속힌 셈이다. "만갑이처럼 능청스럽지는 못하나 네게 무엇을 속이겠니. 무슨 일이든 말하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나 돈이라면 여기 잔돈푼이나 있다. 어떻게 여기지 말고 소용되는 대로 쓰려무나." 천수는 지갑을 내서 통째로 손에 쥐어 준다. 분녀는 알 수 없이 눈물이 솟는다. 5 거리 앞 장대에서는 매년같이 시민운동회가 성대하게 열린다. 씨름이 있고 그네가 있고 활이 있고 자전거 경주가 있다. 분녀는 정황은 못 되었으나 그대로 명절이 은근히 기다려진다. 올에는 그네를 뛰어 상에 들 가망이 있는 것이다. "자전거 경주에 또 나가 보겠다." 천수가 뽐내는 것을 들으면 분녀도 마음이 뛰놀았다. "을손이를 이길 만하냐?" "올에야 설마 짓구땡이지 어디 갈랴구. 우승기 타들고 거리를 돌게 되면 나와 살겠니?" "밤낮 살 공론이야." 못을 박은 듯이 빽빽히 선 사람 틈으로 자전거 경주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앞장서서 달아나던 천수는 꽁무니를 쫓는 을손과 마주 스치더니 급작스런 모서리를 돌 때 기어코 왈칵 쓰러져 일어나는 동안에는 벌써 맨 뒤에 떨어져 버렸다. 분녀는 그네에 올랐다. 나갈 때에는 눈앞이 휘연하고 치맛자락이 나부낀다. 하늘에 오를 것 같고 땅을 차지한 것도 같다. 땅 위의 걱정은 어디로 날아간 듯싶다. “우와, 분녀가 1등이다” 마지막 힘을 불끈 내어 강물같이 후렷이 솟아나갈 때 벌판으로 달리는 눈동자 속에 문득 맞은편 수풀 속의 요절할 한 점의 광경이 들어왔다. 순간 눈이 새까매지고 허리가 휘친 꺾이며 힘이 푹 스러지는 것이었다. '왕가일까.' 재차 솟구며 나가 내려다보니 움직이지도 않고 그대로 서 있는 꼴이 개울 옆 수풀 그늘 아래 완연하다. 그 불측한 녀석은 참다못해 그 자리에 선 것이 아니요, 확실히 일부러 그 꼴을 하고 서서 이쪽을 정신없이 쳐다보는 것이다. '음칙한 것.' 속으로는 혀를 차면서도 이상하게도 한눈이 팔려 그네가 줄기 시작하였다. 허리가 꺾이고 다리가 허전하여지더니 다시 힘을 주려야 줄 수 없다. 일등은 날아갔다. “아깝다. 분녀가 1등이었는데” 분녀는 줄어드는 그네 위에서 담대스럽게 녀석을 노려서 물리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노리는 동안에 그를 물리치기는커녕 이쪽의 자세가 어지러워질 뿐이다. 오금에 맥이 빠지고 나부끼는 치마폭이 부끄럽다. 일종의 유혹이었다. 이 괴변을 누구에게 말하면 좋은가.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옳을까 생각하며 천수를 찾았다. "개울가로 나올련. 요절할 이야기 들려 줄게." "분해 못 견디겠다. 을손이 녀석." 분녀는 혼자 먼저 나갔으나 시납시납 거닐어도 천수의 나오는 꼴이 보이지 않았다. 할일없이 왕가의 생각에 잠겨 본다―-- ‘왕가가 초라한 꼴로 거리에 온 지 오륙 년이나 될까. 처음에는 마병장사를 하던 것이 차차 늘어 지금에는 드팀전으로도 제일 크다지. 실속으로는 거리에서 첫째 부자라는 소리도 있으니 말이야. 가끔 술집에 가서는 지전을 물쓰듯 뿌린다고 하는데.’ 수풀 그늘 속으로 들어가려던 분녀는 기겁을 하고 머물렀다. . 왕가는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같이 벙글벙글 웃으며 앞에 막아 선다. 쭈뼛 솟았던 머리끝이 가라앉기도 전에 몸이 왕가의 팔 안에 있다. '평생이 이다지도 기구할까.' 수풀 속에서 왕가에게 경박을 당하였을 때 악을 다하여 결었다면 겯지 못하였을까. 가령 팔을 물어뜯는다든지 돌을 집어 얼굴을 찧는다든지 하였으면 당장을 모면할 수는 있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그는 그것을 할 수 없었고 이상한 감동에 몸이 주저들자 기운도 의사도 사라져 버려 그뿐이었다. ‘몸이란 나루에서 나루로 멋대로 흘러가는 한 척의 배 같다. 하기는 만약 그날 저녁 약속한 천수가 개울가로 나와 주었더면 그렇게 신세가 빗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수를 한할까, 왕가를 원망할까’. 생각하기도 부끄러운 일이나 사실 왕가는 특별한 인간이었다. 사내 이상의 것이라고 할까. 그로 말미암아 분녀는 완전히 눈을 뜨게 된 것이다. 하룻밤은 성밖까지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거리를 거쳤다. 눈치를 보아 왕가와 만날 수가 있지나 않을까 하는 속심도 없는 바 아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에 남문을 지날 때 돌연히 천수를 만났다. "요새 꼴이 틀렸군." "꼴이 틀렸다니 눈이 뒤집혔단 말이냐." "눈도 뒤집혔는지 모르지." "무슨 소리냐." "요새 환장할 지경이지." "또 술취했구나. 을손이한테 지더니 밤낮 술이야." "사람이 그렇게 헤프면 못쓴다. 아무리 너기로서니 천덕구니가 되면 마지막이야." "무엇 말이냐?" "그래도 시침을 떼니? 왕가와의 짓 말야." 분녀는 뜨끔하여 입이 막혀 버렸다. "수풀 속에서 본 사람이 있어. 하늘은 속여도 사람의 눈은 못 속인다." "다시 그러면 왕가를 찔러라도 눕힐 테야. 치가 떨려 못살겠다." "너 옷섶이 얼마나 넓으냐? 내가 네게 매였단 말이냐. 왕가와 너와 못하고 나은 것이 무엇 있니?" 6 그 후로 천수와의 사이가 뜬 것은 물론이거니와 분녀에게는 여러 가지 궁리가 많아서 얼마간 거리와 일절 발을 끊었다. 관사에서 일하는 이외의 여가는 전부 집에서 보냈다. 명준, 만갑, 천수, 왕가. 머릿속에 차례로 떠오르는 환영을 힘써 지워 버리려고 애쓰면서 날을 보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처럼 조화 많은 것은 없는 듯하다. 그날 저녁 무렵은 유난히도 무더웠다. 분녀는 일찍이 부엌일을 마치고는 목욕물을 가늠보러 목욕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체 주인 양주는 이때껏 무엇을 하고 있나 하고 문틈에 눈을 대었다. 이 괴망스러운 짓이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문틈으로는 맞은편 건넌방이 또렷이 보인다. 수돗물이 쏟아질 대로 쏟아져 목욕통이 넘쳐나는 것도 잊어버리고 분녀는 어느 때까지나 정신없이 빈지에 붙어 앉았다. 더운 김에 서리어서인지 눈에 불이 붙어서인지 몸이 불덩이같이 덥다. 그날, 뜻밖에 상구가 찾아왔다. 들어간 지 거의 달포 만이다. "몸이 부은 것 같구나. 거북하지 않으냐." "넌 내 생각 안 했니." 다짜고짜로 몸을 끌어당긴다. 분녀는 굳이 몸을 빼지 않았다. "이번같이 그리운 때 없다." "별안간 싼들한 것 같구나." 분녀는 방문을 닫았다. 상구에 대한 지금까지의 불만도 뉘우침도 다 잊어버리고 상구가 하는 대로 몸을 맡겼다. 누구보다도 지금에는 상구가 가장 그리운 것이다. 다음날 관사에 나갔을 때에 분녀는 천연스런 양주의 얼굴을 속으로 우습게 여기는 한편 천연스런 자신의 꼴을 한층더 사특하게 여겼다. 다음날 밤도 상구가 오기는 왔으나 간밤같이 기쁜 낯으로가 아니었다. "너를 잘못 알았다." "네까짓것한테 첫몸을 준 것이 아까워." "짐승 같은 것, 너를 또 찾은 내가 잘못이었지. 그렇게까지 된 줄이야 알았니." "소문 다 들었다. 난 떠나겠다" 7 상구의 실종보다도 더 큰 변이 생기고야 말았다. 마을 갔던 어머니는 화급한 성질에 펄펄 뛰어들더니 손에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분녀야, 정말이냐." "일일이 대봐라, 행실머릴. 이 자리에서." "이년아! 만갑이, 천수, 또 누구냐, 대라. 치가 떨려 견딜 수 있나. 몸치장이 수상하더니 기어코 이 꼴이야." "이 고장에 살 수 없다. 차라리 죽어라." 모진 매에 등줄기가 주저내리는 것 같다. 분녀는 하는 수 없이 매를 벗어나서 집을 뛰어나왔다. ‘바다에라도 빠질까. 목이라도 맬까’. 정신없이 벌판을 달렸다. 허전거리다가 밭두덕에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진 채 밤을 새웠다. 큰일이나 치르고 난 것 같다. 몸도 가다듬고 마음도 죄어졌다. 딴 사람으로라도 태어난 것 같다. 여름이 짙어지자 벌써 가을 기색이었다. 들에는 곡식 냄새에 섞여 들깨 향기가 넘쳤다. 그런 하룻날 돌연히 낯선 청년이 찾아왔다. "날 모르겠어?" "명준이야, 명준이. 야, 3년만인가?" "금광은 찾았누." 명준은 빙그레 웃는다. 고생을 했건만 그다지 축나지도 않았다. "고향은 그저 그 모양이군." "어떻게 할 작정인구." "밭뙈기나 얻어 갈아 볼까. 수틀리면 또 내빼구." 말투가 허황하면서도 듬직하다. 귀찮은 금덩이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차라리 개운하다. ‘이사람만 허락만 한다면 그와 나 마음잡고 평생을 같이 하여 볼까’ ★ 이 소설을 읽고 난 느낌을 자유롭게 적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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