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更若愛聖憎凡 生死海裏浮沈 煩惱因心有故 無心煩惱何居
갱약애성증범 생사해리부침 번뇌인심유고 무심번뇌하거
不勞分別取相 自然得道須臾 夢時夢中造作 覺時覺境都無
불로분별취상 자연득도수유 몽시몽중조작 교시교경도무
翻思覺時與夢 顚倒二見不殊 改迷取覺求利 何異販賣商徒
번사각시여몽 전도이견불수 개미취각구리 하이판매상도
動靜兩亡常寂 自然契合眞如 若言衆生異佛 迢迢與佛常疎
동정양망상적 자연계합진여 약언중생이불 초초여불상소
佛與衆生不二 自然究竟無餘
불여중생불이 자연구경무여
반갑습니다.
오늘 4월 4일 봄비가 아주 촉촉히 내리는 그런 날입니다.
염화실 인터넷 방송 법문 시작하겠습니다.
대승찬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은 교재번호로 16번
16. 또한 성인을 좋아 하고 범부를 싫어하면
생사의 바다속에서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하리라.
更若愛聖憎凡하면은 生死海裏에 浮沈하리라
갱 약 애 성 증 범 생 사 해 리 부 침
갱약애성증범更若愛聖憎凡하면은 생사해리生死海裏 부침浮沈하리라 그랬습니다.
신심명에서 단막증애 但莫憎愛하면 통연명백洞然明白한다
그런 말 있었죠. 미워하거나 사랑하면은 지극한 도 우리가 바라는 바의 그런 삶 그것을 저는 지극한 도 또는 여기서 말한 대도 그렇게 표현합니다. 그런 것은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 이 있으면은 분별이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비교가 생기고 그래서 결국은 그런 삶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막증애 但莫憎愛다만 증애하지만 말라 그러면 툭 터져서 환하게 밝을 것이다. 지극한 도가, 우리가 바라는 바의 삶이 그렇게 환히 펼쳐질 것이다 그렇게 이제 표현을 했는데 여기서도 이제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하느냐 많죠. 여러가집니다.
여기서는 성인을 사랑하고 범부를 미워 할 것 같으면은 종교적인 입장에서 우리가 불교를 공부하고 하다보면은 그 자신의 어떤 범부적인 그런 그 못난 입장이 싫죠.
아이 참 못난 중생이 돼가지고 이렇다 하면서 자책도 하고 싫어도 하고 그렇게 하고 또 부처님이나 조사스님들의 뛰어난 삶을 공부하다가 보면 그런 것이 부럽고 거기에 대한 애착이 가게되고 그럴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성인과 범부를 대표적인 입장으로 내세웠습니다만은 이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우리가 만난 모든 사람들 내가 접하는 모든 생활 환경들 내가 사용하는 모든 물건들 이런 것들 하나하나가 전부 내가 애착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거 또 친구도 그렇고 또 내가 해야할 일도 그렇고 전부 그런 것으로 엉켜 있는데 그런 것이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그렇게만 그것만 할 것 같으면 생사해리에 부침한다. 삶과 죽음의 바다속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떴다 가라앉았다 할 것이다.
뭐 죽은 뒤에 7, 80년 뒤에 죽은 뒤에 다음 생으로 가는 그런 생사가 아니라 바로 이순간 여기저기 끌려다니고 이 환경 저환경 마음에 드는 환경 마음에 들지 않는 환경 또 내가 사랑이 가는 것 내가 미움이 가는 것 이런 것에 마음이 휘둘리는 것 이게 생사해리에生死海裏에 부침浮沈 하는 거죠
그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요. 그런 그 차별심 분별심 간택심 증애심 뭐 선악심 이런 것들이 계속 번갈아 가면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우리들의 삶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원하게 깨달으신 분들은 한결같이 그런 그 어떤 상대적 편견에서 떠나야만 우리가 정말 바라는 바 진정한 행복과 자유로운 그런 삶 그것이 지극한 도고 큰 도라고 할 수 가 있는데 그러한 우리가 바라는 바의 삶은 영원히 우리들의 삶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에서 떠나야만 바로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과 평화가 온다는 것이죠.
치우치고 편벽돼서 잠깐 어떤 애착에 떨어져 있으면은 그 순간은 어쩔지 모르지만은 그것은 곧 어떤 말하자면 거울의 앞면과 뒷면과 같고 하루의 밤과 낮과 같아서 반드시 반대 급부적인 그런 그 미움이 따르게 돼 있고 설사 미움이 따르지 않는다하면은 그만치 애착해서 어떤 그 즐거움 또는 행복을 느끼는 만치 거기에 보상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미움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애착하는 그만치 거기에 보상이 따른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죠.
그렇게 되면은 이건 이제 정말 우리가 바랐든 그런 행복은 아니라고 우리가 바랐든 그런 평화 그런 자유는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할 때 한번도 미움이 없었으면 싶고 한 번도 갈등이 없었으면 싶지만은 그렇지만 곧 그 미움과 갈등은 따라 오게 되어 있고 설사 미움과 갈등은 요행히 없다 하더라도 그만치 내가 애착하는 만치 거기에 보상이 따른다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보다 몇 배 심지어 몇 십 배 몇 백 배의 또 갚음이 따를지 모릅니다. 보상이 따를지 모르지요.
그래서 그런 것은 결국 바람직한 행복 바람직한 평화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제대로 진리에 눈을 뜨신 분들은 그런 것을 멀리하라. 그래서 단막증애但莫憎愛 만약에 증애만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진정 바라는 삶 대도大道 지극한 도가 툭 터져서 앞에 훤하게 나타날 것이다 여기도 이제 내면에 그런 뜻이죠.
그런 것을 하게 되면은 증애심이 있게 되면은 생사해리에 부침한다. 여기 기울고 저기 기울고 싫은 마음에 또 좋아하는 마음에 계속 윤회죠 싫어하는 마음 좋아하는 마음이 계속 윤회합니다. 그것이 생사해리에 부침한다 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7. 번뇌는 마음을 말미암아 있기 때문에
마음이 없다면 번뇌가 어디 있겠는가.
煩惱는 因心하야 有故로 無心하면 煩惱가 何居리오
번 뇌 인심 유 고 무 심 번 뇌 하거
번뇌煩惱 인심因心하야 유고有故로 무심 無心라면 번뇌煩惱가 하거何居리오
번뇌라고 하는 것 저 앞에서 이제 번뇌는 본래 공하다 그런 말을 했었죠 번뇌는 본래 있는 것이 아닌데 괜히 망령된 정情으로 망령된 생각으로 서로 서로 얽혀가지고 있다 그랬어요.
그래 이 번뇌라고 하는 것은 명암明暗의 상대적인 어둠을 뜻하는 것인데 그 어둠이라고 하는 것 우리 마음의 어둠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의 마음을 인因해서 있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번뇌라고 볼 때 그때 비로소 있는 거예요.
그래 심생즉종종법생心生卽種種法生이라 그런 말이 있잖습니까 마음이 생기면 가지가지 법이 생긴다 라고 했듯이 번뇌라고 하는 것, 뭐 번뇌 많죠 팔만사천 번뇌라고도 할 수 있는데 그런 그 번뇌들은 결국은 우리 한 생각이 일어남으로 해서 심생즉心生卽 마음이 생김으로 해서 비로소 그런 번뇌가 있다 마음이 없을 것 같으면 무심無心할 것 같으면은 번뇌가 어디에 거하겠는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 뜻입니다. 거할 거자나 있을 거자나 같은 의미죠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
무심無心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분별심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분별심 또는 망심 망정 이런 것들이 없다면은 번뇌가 어디에 있겠는가 저 앞에 나왔던 그 내용하고 같습니다. 뜻은 그러니
18.애써 분별하여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
저절로 도를 얻음이 잠깐 사이리라.
不勞分別取相하면은 自然得道須臾리라
불로 분 별 취 상 자 연 득 도 수 유
불로분별不勞分別 취상取相하면은 자연득도自然得道수유須臾리라 수고로이 분별해서 상을 취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은 자연히 도를 얻는 것이 수유간일 것이다 잠깐 사이에 도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도라고 하는 게 앞에서도 지극한 도 또는 대도를 우리가 바라는 바의 삶이라는 거죠
우리가 바라는 바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한번도 고생이 없고 불행도 없고 가슴 아픈 일도 없고 늘 즐겁고 늘 편안하고 늘 평화로운 것 조그마한 마음에 안드는 일도 없는 그런거죠. 그야말로 완전한 행복 완전한 자유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바의 어떤 삶인데 그것이 도道죠.
그 도道는 어떤 그 눈에 보이는 어떤 그 현상 또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어떤 그 우리가 정의 내려놓고 있는 옳다 그르다 하는 것 맞다 틀리다고 하는 것 이런 것들을 우리가 딱 설정을 해 놓고 그것을 취하기 시작하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로이 분별 해가지고 상을 취할 것 같으면 상을 취하지 아니하면 이렇게 했는데 그 상을 취한다는 말이 결국 우리 나름대로 틀을 짜고 우리 나름대로 선을 긋고 우리 나름대로 어떤 기준을 설정해놓고 그 기준에 맞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취상取相이죠 상을 취하는 거죠 그것만 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은 자연히 정말 행복한 삶이라고 할까요 도를 얻는 것이 수유須臾간일 것이다 순식간에 도를 얻게 될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삶은 바로 그 순간 목전에 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참 깨달으신 분의 말씀이라서 너무 좋긴 합니다. 그런데 이게 우리의 살림살이가 되고 내 공부가 되기까지는 그렇게 쉽지는 않겠죠. 그러나 이제 우리가 이러한 이치를 깨달은 분들을 통해서 이렇게 듣고 마음에 자꾸 새기고 깊이 사유함으로 해서 이러한 경지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뭐 한걸음 한걸음 다가간다니까 무슨 점차漸次가 또 있는 것처럼 그렇게 여겨질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말하자면 이러한 이치가 내 살림살이가 된다는 그런 의미가 되는 거죠.
19. 꿈꿀 때에는 꿈속에서 조작하지만
깨어난 때에는 깨어난 경계가 전혀 없다.
夢時에는 夢中에 造作이나 覺時에는 覺境이 都無니라
몽시 몽중 조작 교시 교경 도무
몽시夢時에는 몽중夢中에 조작造作이나 우리가 꿈이야기 이게 불교에서는 참 자주 하는데요 꿈 꿀 때는 꿈속에서 뭔가 잘 지어가죠 조작 사람도 만나고 뭐 앞날도 설계도 하고 온갖 일도 하고 사업하는 사람 사업도 하고 뭐 이야기도 나누고 공부하기도 하고 그런 것들이 조작입니다. 몽중에서 그걸 다 하지요.
그런데 교시覺時에는 교경覺境이 도무都無라 여기 저 각이라고 하지 않고 교, 꿈깬다 할 때는 교라고 발음합니다.교시覺時에는 교경覺境 꿈을 깼을 때는 그 꿈 깬 경계가 도무都無니라 그래요. 모두 없다 그래요 전혀 없다 이런 이야긴데 지금 우리가 꿈꾸고 있지 않잖습니까 꿈꾸고 있지 않을 때 지금 우리가 꿈꾸고 있지 않다 하는 것이 굳이 내세우지 않잖아요.
꿈꾸고 있지 않는 경계를 따로 우리가 꿈꾸고 있지 않은 거 이게 꿈꾸고 있지 않은 거다 뭐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잖습니까 드러내놓고 이것이 우리가 꿈 안 꿀 때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는 경우는 없거든요 그 말입니다.
교시覺時에는 교경覺境이 도무都無라 꿈을 깼을 때는 꿈 깬 경계가 없다 말을 이렇게 해서 그렇지 사실은 이런 말도 필요치가 않습니다. 뭐 꿈에 대해서는 불교에서 꿈에 대한 책은 월찬 거사가 쓰신 순몽체현이라고 하는 게 참 유명한 책이고 그건 이제 불교용어는 쓰지 않으면서 불교 이치를 아주 제대로 드러내서 꿈이라고 하는 말을 통해서 이제 드러낸 그런 그 좋은 책이죠
그리고 뭐 유명하잖습니까 장자壯子의 호접胡蝶 장자에 나오는 그 나비꿈을 장자가 나비꿈을 꾸었는데 내가 나비꿈을 꾸었는데 아주 그 뭐 아주 시원스럽게 잘 날아다니는 나비의 꿈을 꾸었다. 꿈을 깨고 나니까 이게 지금 나비가 지금 사람 꿈을 꾸고 있는가 아니면 사람이 나비꿈을 꾸었던가 이런 표현을 했는데 여기에 보면은
20.깨어난 때와 꿈꿀 때를 뒤집어 생각해 보니
뒤바뀐 두 견해가 다르지 않구나.
翻思覺時與夢하니 顚倒二見不殊
번 사 교 시 여 몽 전 도 이 견 불 수
번사교시여몽翻思覺時與夢하니 깨어있을 때와 꿈 꿀 때를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뒤집어서 생각해 보니까 그게 다 잘못된 거지요. 전도된 두 가지 견해가 다르지 않더라 이거예요. 결국 하나더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그 장주의 몽접 호접 꿈을 꾼 것 나비꿈을 꾼 이야기가 딱 들어맞는 거죠.
내가 나비가 꿈을 사람꿈을 꾸고 있는가 사람이 나비꿈을 꾸고 있는가 그래서 꿈과 현실을 둘 다 전도顚倒 된 것 잘못 보는 것이라고 그렇게 이제 여기서 표현하고 있는 것하고 똑같은 말입니다. 그거 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이제 보는 거죠 실재하지 않는 것 공한 것이다 그렇게 봐도 좋습니다.
우리가 그 꿈 꿀 때와 깨어있을 때 이걸 뒤집어 생각해본다하는 것이 그대로 장자가 나비 꿈 꾼 이야기과 똑같은 거예요. 이거 정말 촌부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뒤집어 생각해 본다는 게 무엇입니까. 나비가 사람꿈을꾸는가 사람이 나비꿈을 꾸는가 그런 이치죠. 그러니까 결국 전도顚倒된 두가지 견해가 다르지 않더라 그랬어요.
이런 내용을 밑받침해서 우리가 좀 한 번 생각해 본다면은 서산대사 청허스님, 청허스님의 꿈이야기가 아주 꿈에 대한 시가 아주 유명하죠.
주인몽설객 主人夢說客하고
객몽설주인 客夢說主人하니
금설이몽객 今說二夢客이
역시몽중인 亦是夢中人이라
주인이 아침에 일어나서 객인데다가 자기 꿈 이야기를 하는거예요. 지난 번 꿈 이야기를 하고 또 나그네는 나그네 대로 꿈을 꾸었으니까 이제 주인하고 마주 앉아서 이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둘 다 꿈이야기를 하는데 금설이몽객今說二夢客 지금 이야기 하고 있는 두 사람의 그 꿈속 나그네 역시몽중인 亦是夢中人이라 또한 몽중사람이더라 그랬습니다.
아주 이런 말이 아주 여기 대승찬을 설명하는데 밑받침으로 아주 그만이네요. 깨었을 때나 꿈 꿀 때나 이것을 이제 바꾸어서 생각해보니까 결국 그게 그거더라 꿈 깬 것이나 꿈속에 것이나 그게 같은 것이더라 그랬습니다.
저 앞에서 거울에다 우리가 영상을 우리 육신을 비춰봤을 때 거울에 비친 영상하고 내 육신이라고 하는 것 결국 이게 사실은 알고 보면 같은 거다. 거울에 비친 것만 헛것이 아니라 사실은 신본동허身本同虛라 그랬죠 몸의 근본도 또한 저 거울에 있는 것 헛것인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 이런 표현이 어제 강의에 있었는데 여기 이 이야기와 같은 것입니다.
몸뚱이를 가지고 또 나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보느냐 요 견해만 제대로 이해가 되고 요 문제만 풀려버리면 여타 다른 문제는 다 풀려버리죠. 이것이 이제 하나의 벽인데 벽에 가서 자꾸 우리가 이렇게 부딪칩니다. 이렇게 부딪치는데 이러다가 어느 날 은산철벽 같은 아주 두꺼운 벽도 무너지는 순간이 오긴 올 거예요. 틀림없이. 하다못해 그 벽이 자꾸 가서 부딪치다 보면 얇아지기라도 할 것입니다. 얇아지면 뚫리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할 수 있겠죠.
참 꿰뚫어보고 우리 인생의 실상을 꿰뚫어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과 세상을 정말 잘 꿰뚫어 본 그런 말씀이고 이런 그 안목은요 깨달은 분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뭐 부처님의 설인 경전의 이야기나 다른 그 도인들의 이야기나 여기 대승찬의 이야기나 한결같죠.
그 다음에 이제
21.어리석음을 바꾸어 깨달음을 취해 이익을 구하면
장사하는 무리들과 뭐가 다르랴.
改迷取覺求利하면 何異販賣商徒리요
개 미 취 각 구 리 하 이 판 매 상 도
개미취각구리改迷取覺求利하면 하이판매상도何異販賣商徒리요 그랬습니다. 참 이 무서운 말인데 우리가 이제 좀 모릅니다. 모르는 것을 이렇게 고쳐가지고서 미迷라는 것을 확철히 깨닫는 확철대오하는 그런 입장으로 개미취각이라고 하지를 않고 그것도 이제 크게 보면 그것이겠습니다만은 우리가 작은 가르침이지만 요 작은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씩 하나씩 나아가는 것 이것도 개미취각改迷取覺이예요.
미혹을 고쳐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 깨달음을 취하는 것 이것을 가지고 이익을 구한다면은 그랬습니다. 미혹을 고쳐서 깨달음을 취하는 이 일로써 이익을 구한다면은 불교공부라고 해도 좋아요 불교공부를 한 것으로써 이 불교공부가 결국은 개미취각이니까요. 미혹을 고쳐가지고 각을 취하려고 하는 그런 일이니까 이런 일을 가지고서 이익을 구한다고 한다면은 이건 이제 이익이라고 하는 것은 세속적인 이익이예요.
세속적인 이익을 구하려고 한다면 아니면 자기 의식주에 보탬이 되도록 한다면은 말하자면 그런 것을 목적으로 명예를 목적으로 부를 목적으로 자기의 어떤 공을 자랑하는 것을 목적으로 아니면 의식주에 보탬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이런 그 어줍잖은 생각이 만약에 깔려있다면은
하이판매상도何異販賣商徒리요 어찌 장사치들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장사하는 무리들과 무엇이 다르랴. 그랬습니다.
다른 것을 가지고 다 장사해도 불교가지고 장사해서는 안된다는 뜻이죠. 물론 뭐 그 최소한의 생활을 하는 그 필요한 것은 있어야겠죠 그러나 정말 속마음으로 이익을 구하기 위한 또는 명예를 구하기 위한 공명을 구하기 위한 그런 그 마음이 깔려있다면 이건 장사치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러니까 장사하는 사람이야 아예 장사꾼이니까
어떤 사업가를 한 번씩 보면은 뭐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를 하다가 나는 장사꾼이니까 이런 표현을 잘 쓰더라구요. 내가 보기에는 장사꾼은 아닌데 스스로 그렇게 나는 장사꾼이니까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고는 참 그거 의미심장한 말을 한다 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마는 불교가지고 장사해서는 안된다는 그런 그 뜻입니다. 사실은 지금 뭐 사찰의 어떤 세태라든지 불교의 여러가지 현황들을 볼 때 장사속이 너무 많긴 합니다.
능엄경에 지금 우리 염화실에 능엄경이 이제 올라오고 있는데 능엄경에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저 뒤에 가면은 말세중생들이 가의복하야 비판여래라 말세중생들이 내 옷을 빌려 입고 여래를 판다. 여래를 팔아가지고 의식주를 말하자면 구한다. 이런 말이 있어요.
참 그 옛날에도 그런 일이 없진 않았겠지만 말세적인 현상이 이제 짙어지면은 그런 것이 더 심해진다는 거죠.
정말 진실하게 불법공부하는이는 차츰차츰 줄어들고 여래를 파는 부처님을 팔아서 자기 생활을 영위하려고 하는 그런 그 일들이 더욱더 성하고 많아진다 하는 그런 것이 능엄경에 이미 있습니다.
그래 불교로써 어떤 명예나 아니면은 물질적 이익을 노린다고 하는 것은 이건 이제 장사꾼이다. 장사꾼이야 당연히 그것이 목적이죠 이익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건 뭐 당연한 것이죠. 장사하는 사람이 이익을 노리지 않는다면 그건 또 이상한거죠. 그건 또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자신의 미혹을 고쳐가지고 하나하나 깨달음을 취하려고 하는 그런 그 마음이라면은 거기서 어떤 그 명예나 이익같은 것을 노린다고 하는 것은 그건 있을 수 없다.아주 그 대승찬에서 지공스님께서 참 아주 멋진 경고를 하셨습니다.
22.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 없어 늘 고요하면
저절로 진여에 계합하리라.
動靜兩亡常寂하면 自然契合眞如리라
동 정 양 망 상 적 자 연 계 합 진 여
동정양망상적動靜兩亡常寂하면 자연계합진여自然契合眞如리라 뭐 내용은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저기에 뭐 하나는 있게 하고 하나는 없게 하지 말라 그랬고 또 하나를 두고 하나를 버리려고 한다 할 것 같으면 길이 진리하고는 서로 멀어지리라 이런 표현을 했는데 여기 이제 같은 뜻이죠.
동정양망상적動靜兩亡常寂하면 그래 이제 동과 정이 어느 것을 취하고 어느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두가지 다 상대적인 두가지 다 없어져서 항상 고요할 것 같으면 자연히 진여眞如에 계합契合할 것이다 그랬습니다.
진여眞如는 진眞은 어디에서나 참된 것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든지 아니면 다른 나라에서든지 어느 장소에서도 참된 것이라야 되고 또 어느 시간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니면 미래나 항상 같아야 된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항상 참되고 같아야 되는 것 이것이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진리 또 불교적 용어로는 진여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진여를 우리의 정말 번뇌없는 순수한 마음이라고도 표현을 하고 이것은 이제 마음하니까 어느 뭐 한정된 그런 곳에 어떤 한정된 존재로 그렇게 떠올리기가 쉬운데 이럴 때의 그 마음 진여를 마음이라고 할 때는 전우주를 다 감싸고 있는 그런 의미입니다. 법계와 같은 그런 의미예요. 그래서 그러면서 그것은 곧 참되고 여여한 그런 당체자리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내 것으로 하고 그것을 볼려고 하고 그것을 내 손에 잡으려면은 어떤 동動이나 정靜 이런 그 상대적인 것에 끄달려서는 안된다는 것이고 그 상대적인 것은 다 사라져야 된다 초월해야 된다.
선악도 동정에 해당되는 거고 시비도 동정에 해당되는 거고 모든 상대적相對的인 것은 동정動靜에 다 포함되겠습니다. 그런 상대적인 것은 다 사라지고 초월했을 때 비로소 진여에 계합한다.
상대적인 것이 남아있으면 자꾸 치우치게 되고 편협되게 되고요 그러자면 자꾸 비교하게 되고 비교하면 갈등이 생기게 되고 갈등이라고 하는 것은 곧 괴로움이죠. 고통이죠 그래서 인간의 삶이 이렇게 복잡하게 벌어지게 된 원인인데 그래서 이제 끊임없이 우리가 사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서로 상대적 관계를 같이 더불어서 관계 속에서 살지만은 그러나 어디에고 치우치지 말라 그게 중도다 이런 표현을 하죠
저번에도 내가 이야기 했는데 중도를 뭐 꼭 같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면은 배를 타고 강을 지나가는데 양쪽 언덕이 물을 막아주는 양쪽 언덕이 있음으로 해서 강이 형성되고 그래서 이제 언덕이 참 필요한 것인데 그렇다고 해도 배가 어느 언덕에든지 가서 닿으면은 그것은 이제 배가 진행이 더이상 진행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닿는다는 것은 동이나 정이나 시나 비나 어디에든지 치우치고 집착하는 것이고 거기에 떨어지는 것이다 라고 이렇게 이제 볼 수가 있는 거죠. 그러나 그 두가지가 다 필요해 이쪽 언덕도 필요하고 저쪽 언덕도 필요해 필요하면서도 어느 언덕에도 내가 가서 닿으면은 그만 그것은 이제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되는 거죠 못가게 더이상 진행이 안되는 거죠.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전부 상대적인 관계속에서 우리가 살기 때문에 그것을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정해 버리면 우리의 삶이 더 이상 형성되지가 않고 또 이것저것 상대적인 관계를 다 긍정하게 되면 낱낱이 가서 부딪치게 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고 거기에 이제 끄달리게 되고 편협하게 되고 그다음에 갈등이 생기게 되고 고통이 되고 그런 거죠
그러니까 깨달으신 분들의 안목은 한결같습니다. 이세상은 제대로 보셨어요 봤는데 우리 같이 똑같이 봤지만 거기에 미혹하지 않고 끄달리지 아니하고 집착하지 아니했을 때 비로소 우리가 바라는 바의 삶이 거기에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바라는 바의 삶은 대도大道 또는 지도至道 그다음에 도道 뭐 성불成佛 열반涅槃 보리菩提 이런 모든 낱말들이 다 거기에 해당되겠죠. 동정양망상적動靜兩亡常寂하면은 자연계합진여自然契合眞如하리라. 진여의 삶이 우리가 바라는 바의 삶이고 대도의 삶이고 지극한 도의 삶이고 진정한 행복과 그리고 평화와 자유라는 뜻이죠.
23. 만약 중생이 부처와 다르다고 말하면
까마득하여 부처와는 항상 멀리라.
若言衆生異佛하면 迢迢與佛常疎리라
약 언 중 생 이 불 초 초 여 불 상 소
약언중생이불若言衆生異佛하면 초초여불상소迢迢與佛常疎리라 만약 중생이 부처와 다르다고 말할 것 같으면은 까마득하게 멀어서 부처와 더불어 항상 멀어지리라 그랬습니다.
이건 우리가 들어서 잘 아는 내용이죠.
화엄경의 종지가 심불급중생 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 是三無差別 이죠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다
그리고 또 염화실의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할 때 인불사상人佛思想이다 그러지요. 사람이 곧 부처님이다. 화엄경은 이야기 그대로고 모든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이 전부 요약하면은 그겁니다. 인불사상人佛思想입니다. 사람이 곧 부처님이다 하는 것이고 거기서 한걸음도 벗어나는 게 없죠.
여기서 뭡니까 약언중생이불若言衆生異佛하면은 만약 중생이 부처와 다르다고 한다면 중생이란 말을 사람이라고 해도 좋구요 범부라고 해도 좋고 우리 모두 중생이면서 사람이고 사람이면서 중생이죠. 그게 만약 부처와 다르다고 한다면은 그건 이제 부처님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거죠.
다르니까 부처는 부처고 사람은 사람일 거 아니겠습니까 부처는 부처고 사람은 사람이면 영원히 이거는 서로 만날 수 없는 그런 길을 평행선을 유지하면서 가게 되는 거죠. 그래서 깨달은 분들의 이런 그 가르침은 참 아주 촌철살인과 같은 뛰어난 말씀인데 많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고 아주 숨이 막힐 정도의 그런 그 더이상은 설명이 필요치 않는 그런 말이죠.
참 그래서 이제 화엄경에 한마디를 선택을 한다면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 是三無差別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는 것이다 같은 것이다 하는 말
뭐 이 말하고 똑같은 뜻이죠.
24.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며
그대로 구경에서 다름이 없다.
佛與衆生不二하니 自然究竟無餘니라
불 여 중 생 불 이 자 연 구 경 무 여
불여중생불이佛與衆生不二니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니 자연구경무여自然究竟無餘니라 자연히 결국에 구경에 가서는 다른 것이 없나니라
부처와 중생이 다름이 없다. 우리는 지금 입장에서 항상 다르게 생각이 들고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도 이게 다르게 여겨집니다.
다르게 여겨지는 그게 중생이라면 중생인 이유가 거기에 있는 거예요. 다르게 안 여겨져야 하는데 이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도 그래도 아니야 부처하고 중생은 다른 거야 부처하고 중생은 다른 거야
내가 타이틀을 뭐 사람이 부처님이다 백날 그래 해놔봐야 그게 언제 마음에 와 닿을지 그렇습니다.
불여중생불이佛與衆生不二니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니 자연히 구경究竟에 다름이 없다.
저절로 이건 이제 결국 가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그 기대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지공스님의 기대에 우리가 빨리 영합하려면은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깊이 사유해서 이런 말씀들의 타당성을 우리가 거기서 찾아내야죠.
아 맞는 말이야! 아무리 생각해보고 아무리 따져봐도 사람이 부처가 아닐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사람 외에 달리 뭐가 있어서 또 부처가 있겠나! 이런 것들이 이제 염화실 법우님들은 충분히 이해가 가야되요.
설사 깊이 마음속 깊이 까지는 느끼지 못하더래도 최소한대로 이론적으로는 무장이 되어 있어야 하고 누가 물으면은 아주 지체없이 이런 대답이 나와야 됩니다.
그렇게 할려면은 자꾸 이런 걸 많이 접하고 또 접한 만치 우리가 깊이 사유하고 그렇게 함으로 해서 이런 것들이 이제 우리마음에 젖어들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대승찬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 이렇게 많은 분들이 참석하셔서 법석을 빛내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리:꽃물들다)
첫댓글 이렇게 빨리 띄워 주시니 항상 감사 드립니다.
성인을 사랑하고 범부를 미워할것 같으면 삶과 죽음의 바다 속에서 떴다 가라앉았다 할것이다.但 莫 憎 愛하면 지극한 도가 툭 터져서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번뇌는 본래 있는것이 아닌데 망령된 생각으로 서로서로 얽혀 있다.번뇌는 상대적인 어둠울 뜻하는데 그 어둠은 마음으로 인해서 있다.심생즉종종법(心生則 種種法)
분별심,망심이 없다면 번뇌가 있겠는가? 수고로이 분별해서 상을 취하지 않을것 같으면 잠깐 사이 道를 얻을 것이다.이것이 지극한 道를 바라는 바의 삶이다.꿈을 깼을때는 꿈꾼 경계가 전혀 없다.깨어난 때나 꿈 꿀때를 뒤집어 생각해 보니 전도된 두 견해가 다르지 않다.결국 하나다.미혹을 고쳐서 깨달음을 취하는 것을
가지고 이익을 구한다면 장사하는 무리들과 무엇이 다르랴? 動과靜이 다 없어져서 항상 고요할 것 같으면 자연히 眞如(참되고 여여한 당체 자리)에 계합 할 것이다.만약 중생이 부처와 다르다고 말 할것 같으면 까마득하게 멀어서 부처와 더불어 항상 멀어지리라.깨달은 분의 가르침은 촌철살인과 같은 가르침이다.
석자(昔者) 장주(莊周)몽위호접(夢爲蝴蝶)에-어젯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후후연호접야(珝珝然蝴蝶也)-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자유적지여(自喩適志歟)인저-스스로 뜻에 맞다해서,부지주야(不知周也)러니-장주인 줄은 전혀 몰랐더니 아연각(我然覺)에-아까 꿈을 깨고 보니 즉거거연주야(則 蘧蘧
然周也)러라-분명히 장주더라.부지주지몽(不知周之夢)에 위호접여(爲蝴蝶歟)아-그렇다면 과연 "장주"의 꿈에나비가 된 것이냐 호접지몽(蝴蝶之夢)에 위주여(爲周歟)아라-나비의 꿈에 "장주"간 된 것이냐,주여호접(周與蝴蝶)은 즉필유분의(則必有分矣)니- 장주와 나비라는 것은 분명히 구분이 있어서
차지위물화(此之謂物化)니라-모두 잊어 버린 것을 물(物化-우주 만물이 한 덩어리가 된것을 말함)이라 한다.그러니까 장주가 나비가 된것인지 나비가 장주가 된것인지 다 잊어버렸다.다 잊어버린 그 자리를 통(通)했다.각(覺)했다고 하는데 생사(生死) 끊어진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생사일여(生死一如)의 진리다.
動 靜 상대적인 것이 사라져야 한다. 미륵골님 감사합니다._()()()_
心佛及衆生 三無差別_()()()_ 감사합니다_()_
動靜兩亡常寂하면 自然契合眞如리라...참되고 여여한 당체자리...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_()()()_
佛與衆生不二...오늘은 법계에 충만된 부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내일도... 감사합니다.큰스님.꽃물들다님.그리고 법우님들 _()()()_
動靜兩亡常寂하면 自然契合眞如하리라....감사합니다..._()()()_
'사람이 부처님이다'라는 무비스님의 책 정말 잘 읽었습니다. 그래서 제 아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선물하곤 합니다. 감사하다는 말씀외에 달리 전할 말이 없습니다.
動靜兩亡常寂(동정양망상적)하면 自然契合眞如(자연계합진여)리라 : 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 없어 늘 고요하면 저절로 진여에 계합하리라. 若言衆生異佛(약언중생이불)하면 ??與佛常疎(초초여불상소)리라 : 만약 중생이 부처와 다르다고 말하면 까마득하여 부처와는 항상 멀리라..... 큰스님 감사드립니다._()()()_ 미륵골님! 꽃물들다님! 감사드립니다._()()()_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다' 라는 말이 이제서야 깊~이 새겨집니다. 그래서 그렇게 상불경보살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돌맹이를 맞아 가면서까지 합장하며 '당신이 부처님이십니다' 하셨군요. 그 깊은 마음을 알것 같습니다. 스님, 법문 감사합니다. _()()()_
^^ _()()()_
不與衆生不二..._()()()_
감사합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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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人夢說客하고 客夢說主人하니 今說二夢客이 亦是夢中人이라 수리수미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수리수리마하수리수수리사바하...
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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夢과 覺(二邊)은 不殊(不二)다
나무아미타불{-!-}
煩惱本來空寂이요 生死涅槃相共和니 번뇌가 많음을 번뇌할 필요가 있겠는가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 是三無差別 )ㅡ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이 차별이 없는 것이다. 고맙습니다._()()()_
佛與衆生不二 自然究竟不餘 人卽是佛 당신은 부처님! 당신은 부처님! 당신은 부처님!
병원 입원실에서 환자 보호자 간호사 의사 청소부..... 唯有治病의 무차별함을 보았습니다.
결국은 모든 경전이나 어록의 내용들이 서로 부합해서 합일점인 인불사상을 강조하고 있는듯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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動靜兩亡常寂하면 自然契合眞如리라.
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 없어 늘 고요하면 저절로 진여에 계합하리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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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勞分別取相하면은 自然得道須臾리라...
애써 분별하여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 저절로 도를 얻음이 잠깐 사이리라...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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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고맙습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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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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