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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젖은 빵
거제중학교 2학년 3반
최 현 승
차 례
아빠의 눈물 젖은 빵
농사짓는 것이 꿈 이다
새로운 삶의 시작
아빠의 또 다른 삶
나와 동생의 탄생
할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북도 김천이다.
당시는 6.25전쟁 직후라 먹고살기 힘들었고, 돈을 벌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가 고철(전쟁후 남긴 탄피등)을 주워 파는 것 이었고, 할아버지도 고철을 줍기위해 김천에서 강원도까지 올라 가셨다.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강원도 양구란 곳에서 67년 2월에 나으셨고, 7남매 중 넷째로 태어 나셨다.
아빠의 눈물 젖은 빵
아빠가 태어나서 살던 곳은 산골짜기(가래골) 였고, 전기불도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고 사셨다. 촛불이 호롱불 보다 밝았단다. 동네에는 함께 사는 이웃도 없었고, 말 그대로 산골짜기 외딴집 이었다. 보릿고개가 다가오면 먹을 것이 없어 풀뿌리를 삶아서 드셨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풀뿌리는 모두가 ‘약초’였다고 너털 웃음을 짓기도 하신다.
입는 옷이나 양말같은 것은 몸을 가리고 따뜻하게 하는 것이 전부 였고, 초등하교 들어가지 전부터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농사일을 하셨고(나는 이해할 순 없지만) 초등하교 다닐때는 농사일이 바쁘면 학교도 못가고 일을 하셨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바로 논으로 밭으로 가서 일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장 먼저 하는 것이 가마 솥뚜껑을 열어보는 것 이었고, 감자라도 몇 개 있으면 그렇게 행복 하셨다고 한다. 그나마 감자가 없으면 우물가에서 물을 한바가지 드시는 것이 전부 였다고 한다.
아빠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할아버지가 사고로 병원에 40여일 간 입원한 적이 있었다.
학교 에서는 빵과 우유를 나눠 줄 때가 있었다고 한다. 빵을 다 나눠 주고 몇 개가 남았는데 선생님 께서 “빵을 더 먹을 사람”하고 물으셨고, 아빠는 손을 번쩍 들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왜 배고프니?” 하고 물으셨다 아빠는 “형이 밥을 잘 안줘요!”라고 대답하셨다 선생님은 빵을 한 개 더 주셨고, 같은 반에 있던 친구는 자기 몫의 빵을 아빠한테 주셨다고 한다.
아빠는 집으로 가면서(산길로 40분정도)빵을 먹었는데 엄청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번씩 “눈물 젖은 빵”이야기를 하시곤 한다.
초등학교 때 아빠의 성격이 매우 내성적인 성격이라 빵 하나 더 먹겠다고 손을 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농사짓는 것이 꿈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 하고서 아빠가 살던 가래골에 전기불이 들어 왔고 아빠는 무척이나 행복 했다고 한다 밤에 밝아서 좋았던 것이 아니라 호야(호롱불에 쒸우는 유리)를 닦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란다. 호야는 얇고 쉽게 깨지며, 이것을 닦다가 깨면 할머니 한테 엄청 혼나야 했고,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닦아 줘야 했단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갔지만 집안형편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아빠의 샐활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아빠의 꿈은 정원이 있는 집에 연못을 파고 연못에 오리며, 닭등을 키우면서 농사일을 하는 것 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가끔씩 엄마하고 다툼(?)이 있는 것이 아빠는 이곳 생활을 정리하고 강원도에 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자는 것이고 엄마는 “그 촌구석에 뭔 해먹을 것이 있다고 가냐?”고 하신다.
중학교 졸업 무렵에 고등학교를 가려면 ‘체력장’을 받았었다고 한다.
아빠는 고등학교를 갈 생각이 없었고, 마약에 고등학교에 가면 집안의 농사일도 문제지만 7형제가 모두 2년 터울이라 학비를 대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 했고, 할아버지께도 말씀을 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또 농사짓는 것이 꿈이었기 때문에 굳이 고등학교를 나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 하셨다고 한다.
체력장을 받는 당일 날 아빠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밭에 일 하러 가셨고, 할아버지가 “너는 왜 학교 안갔니?”하고 물으셨다.
아빠는 그때서야 “고등학교를 안 갈래요!”라고 말씀 하셨고, 할아버지는 쟁기를 내 팽겨 치시고 나가셔서 술을 엄천 드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김천에서 중학교 까지 졸업을 했고, 열 아홉 살에 ‘면서기’를 하실 정도로 똑똑하셨고, 자식들의 공부에는 엄하게 하셨다고 한다. 그 날 술을 드신 할아버지께 아빠는 엄청 많이 맞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처음으로 할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봤다고 한다.
새로운 삶의 시작
할아버지는 아빠를 농사일 하면서 살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하시고, 기술이라도 배워야 한다며, 춘천에 있는 직업훈련소에 갈 것을 권유 하셨고, 아빠는 돈이라도 벌어서 집에 보태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춘천직업 훈련소’에 가셨다고 한다.
열 여섯 살의 나이에 할아버지께 큰 절을 올리고 춘천 직업훈련소에 입소를 했다. 할머니는 어린 식을 떠나보내는 것이 가슴이 아파 눈물 훔치시는 것을 뒤로하고 춘천 직업 훈련소에서 용접기술을 배웠다. 84년 12월 14일 이름도 처음 듣고 거제도 하면 포로수용소가 있는 곳 이란 것만 알고 버스를 탓는데 12시간동안 달린 버스가 도착한 곳이 이곳 거제도 였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는데 이곳 거제도가 바닷바람 때문에 강원도 보다 더 춥게 느껴 지셨다고 한다.
이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 했는데 기숙사 한 방에 40여명이 생활했고, 마치 수용소 같았다고 한다. 양말 뿐만 아니라 속옷까지 잃어버리고,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 이다보니 걸핏하면 싸우고, 이런 생활을 못 견디는 사람들은 결국 짐을 싸서 돌아갔다고 한다.
아빠와 함께 내려온 사람들 중에서도 1/3정도는 그해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대우조선 훈련소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틀 동안 버스를 갈아타
시며 이곳까지 찾아 오신적도 있었다고 한다.
3개월의 훈련소 일정을 마치고 현장에서 일을 하는데 아침 출근하면 퇴근시간은 밤 아홉시 30분에 마치고, 토요일 일요일도 없이 출근을 해야 했다고 한다.
특근(휴일에 출근하는 것)이나 잔업을 못 하겠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했다고 한다. 못한다는 말이 나오면 상사들한테 욕듣는 것은 둘째치고 안전화 발에 조인트를 까이고 주먹으로 맞아야 했기 때문이란다.
뿐만 아니라 작업 조건도 열악해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다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다쳐도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다치면 오히려 직장 상사들 한테 욕을 들어야 했단다.
그리고 높은 곳에서 작업하다가 떨어져 죽는 사람도 많았지만, 변변한 보상은 커녕 그냥 “ 또 한사람 죽었네!”로 끝내 버리고, 지금까지도 초창기 때 회사에서 죽은 사람들의 명단조차도 없다고 한다.
그래도 아빠는 어려서부터 농사일로 단련된 몸이라 힘든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렇게 쉬는 시간도 없이 한달 일 하면 받는 월급이 20만원도 채 안 됐단다.
아빠가 대우조선을 선택하고 이곳으로 내려온 이유는 특례(군대에 가는 것 대신 대우조선에서 5년간 근무하면 군대 갔다 온 것으로 간주 하는 것)만 끝나면 고향으로 가겠다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군대 가는 시간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란다. 그러나 특례가 끝나고도 지금까지 이곳 거제에서 살고 계신다.
아빠의 또 다른 삶
86년은 전국에서 민주화의 바람이 불고 학생을 비롯한 노동자들의 데모가 끊이지 않았고, 노동자87년 부터는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우조선도 87년 8월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전국 뉴스에 매일같이 보도 될 정도록 데모를 크게 했다고 한다.
아빠도 그때부터 고단한 노동자들의 삶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혼자가 아닌 많은 사람이 뭉쳐서 싸워야 한다고 생각 하면서 노동조합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 회사의 관리자 들이 탄압을 심하게 하게 되고, 아빠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한다. 91년 초에는 골리앗 투쟁 이란 것을 했고, 아빠는 골리앗에 올라가지도 않았고, 부서에서 작은 직책을 맏고있을 뿐 이었는데 회사에서 촌에 계시는 할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당신의 아들이 ‘빨갱이’가 됐고 감옥에 갈 수도 있으니 말리거나 집으로 데리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깜짝 놀래 셨고 바쁜 농사일을 내 팽겨 치시고 이곳 거제도 까니 내려오셔서 아빠를 데리고 가려고 하셨다고한다.
아빠와 동료들은 3일 동안 “노동자가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회사의 분열 공작일 뿐이다”며 할아버지를 설득 하셨고, 할아버지를 돌려 보내셨다고 한다.
아빠는 87년부터 시작한 노동조합 활동을 지금까지 20년 넘게 활동하고 계시고 지금은 ‘노동조합 편집국장’을 하고 계신다.
매일같이 늦게 들어오시고, 때로는 집에도 들어오지 못하면서도 꼭 노동조합 활동을 해야하냐?고 물으면, 이제는 “이것이 아빠의 삶의 일부”라고 말씀 하신다.
나와 동생의 탄생
아빠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서울에 한 번씩 가게 됐고, 부천에서 노동조합 부위원장을 하다가 회사가 문을 닫는 바람에 부천지역에서 작은 공장에서 일 하시면서 노동단체에 가입되어 활동을 해오고 있었다. 94년 아빠는 그 단체를 방문하게 됐고, 그곳에 계시는 분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한분이 계셨다고 한다.
아빠는 한 달이 지난 후에 수소문을 했고, 그 여인(?)을 찾게 됐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해 12월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고 한다.
거제와 서울지역이란 지역저인 거리 때문에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만큼 전화 통화를 많이 하게 됐고, 아빠의 언변(?)에 엄마가 반했을까? 열 번도 만나지 못하고 결혼 했다고 한다.
엄마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곳 거제에서 생활을 시작 할 무렵 아빠는 노동조합 활동 한다고 집에를 일주일에 한번정도 들어오곤 했다고 한다. 나중에 엄만한테 들은 이야기 그때는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95년 10월 내가 태어났고, 2년 후 동생이 태어났다.
아빠는 자식들에게 특별하게 강요 하거나 요구 하는 것은 없다.
단지, 착하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을 요구 하시고, 최근에는 자식들의 자립심과 앞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라고 말씀 하신다.
그래서 내가 열 아홉 살이 되면 학비 외에는 지원해 주실 생각이 없고, 집에서도 나가서 혼자 살ㅇ야 한다고 말씀 하신다.
아빠의 전기문을 쓰고
아빠의 삶을 좀더 자세히 듣고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지만,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들이 많다. 그리고 나도 아빠처럼 중학교를 졸업하면 혼자서 살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첫댓글 뻥이 엄청나네. 언제 풀뿌리로 연명을 했으며, 호롱불을 사용하였고, 형이 밥을 잘 않줬다고?(맨날 지가 형을 업어서 키웠다고 함시롱, 또한 누구는 안주구 누구는 주고한 적이 없으며, 혼자 먹어본 적도 전혀 없음)
오빠는 빵을먹었네ㅠㅠ 난 구경도 못했는데, 라면땅, 꽈배기는 좀먹었지^^
뻥한번 제대로날리셨어요....빵은 사실,,,풀뿌리는 뻥 ㅠㅠ꽈배기맛은 기가막혔지 어디서도 그맛은 찿을수가없더라,,,,그리움과사무침이교차하는 어린시절추억....그래도 옛날이 그리운것은왜일까?????
난왜눈물이앞을가려서읽지못하고쉬어야할까????/??????
눈물이 앞을 가리는 사람은 아마 그시절 부뚜막에 올라 앉아 수제비 떠넣느라 눈물을 많이 흘려서 그러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