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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학순 다니엘 주교님(1921~1993)과 함께 산 선배들 인터뷰
이번 멍석 나눔 자리는 청년들이 팀을 이루어 지학순 주교님과 함께 지역 사회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을 증거하며 지역 사회를 하느님의 살림터로 가꾸어 갔던 선배들을 인터뷰한 내용으로 구성하였습니다. 이것은 원주교구에서 세대간 믿음의 소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앞으로도 기회가 되는 대로 영역별로 이같은 시도를 지속해 가서 원주교구의 세상에 열린 사도직 실천의 자취를 좀더 역동적으로 찾아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김영주 기획실장님이 만난 지학순 주교님
김영주 선생님 인터뷰
권건환 제노, 황효선 마리아, 장영민 아우구스티노
2010년 3월 21일 일요일
☐ 마술사 지학순 주교님
-지주교님은 해외 국내를 불문하고 이곳 저곳에 편지를 보내어 돈을 잘 벌어오셨습니다. 김선생님은 이러한 지주교님을 ‘마술사’라고 표현하셨습니다. 당시 원주시에서 공공사업에 투자하는 돈보다 지주교님이 벌어오신 돈으로 교구에서 투자하는 돈이 더 많았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지주교님은 김지하 선생님께 기획위원회를 맡기셨는데, 김지하 선생님이 감옥에 계실 때에도 지주교님은 월급을 정확하게 주셨습니다. 이는 김지하 선생님께서 감옥에서도 직업을 물으면 당당하게 “천주교 기획위원회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여 보호하면서 가족들을 돌보시는 방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 어느 날, 김선생님께서 수원교구 평신도로 어떤 모임에 참석하셨을 때입니다. 수원교구 지구장 신부님들이 모두 계신 자리였는데, 김선생님이 자신의 자식들도 신학교를 보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으셨다고 합니다. 그때 수원교구 지구장 신부님들께서 지주교님의 사회활동과 민주화 운동 하는 모습을 보시고 감명을 받아 “나도 저런 신부가 되어야지”란 마음을 갖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부님이 되었다고 하셨답니다. 그때에 지주교님이 참 대단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또 한 번 알 수 있으셨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렇게 대단하신 분이시지만, 큰일을 하시면서도 천주교를 많이 드러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지주교님은 모든 사람이 다 천주교 신자라는 생각을 갖고 계셨습니다.
☐ 지학순 주교님이 신부가 되기까지
-지주교님은 신학교 동기들보다 무려 6년이나 늦게 신부님이 되셨습니다. 하지만 주교는 제일 먼저 되셨습니다. 지주교님이 신학생 시절, 폐결핵으로 학교를 휴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요양을 하면서 사무직, 경리 등을 하다가 다 낫다고 신학교에 복귀하려고 했습니다. 이때도 이미 동기들보다 3년이나 뒤쳐져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서 베네딕또 수도원에서 하는 덕원 신학교로 가라고 해서 그리로 갔더니 가신 지 1년 만에 소련군에 의해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셨는데 3·8선으로 고향길이 막혀있었고, 그 때 인민군에게 잡혔습니다. 인민군들은 지주교님이 똑똑하니까 같이 공산당을 도모하자고 제의했고, 이에 반대하고 도망가다 잡혀서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인민군들은 지주교님을 여자 감옥에 3개월 동안 보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에 들어오라고 끊임없이 회유하였으나 끝까지 거절하셨습니다. 그 즈음에 평양교구에서 북한의 실정과 탄압 등을 알리기로 마음 먹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지주교님은 윤공희 부제와 함께 서울로 가라는 임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평양을 세계에 알리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지주교님과 동기셨던 김수환 추기경님이 신부님이 되던 해입니다. 서울로 오게 된 지주교님은 다시 신학교로 들어가실 수 있으셨습니다. 지주교님은 신학교에 가셔서 가장 먼저 한국군에 입대하셨고, 이런 다양한 일들을 겪어내고 1953년도에 드디어 신부님이 되셨습니다.
☐ 지학순 주교님 로마 유학시절
- 지주교님은 포로수용소 신부님으로 발령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포로가 다 풀려나고 포로수용소가 없어지자, 지주교님은 청주로 거처를 옮기게 되셨습니다. 이 당시 청주에는 한국인 신부가 없고 서양인 신부님들 뿐 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주교님은 청주 성당 곳곳을 다니시면서 강론을 하셨고, 그때 추천을 받아 로마 유학길에 오르게 되셨습니다.
- 지주교님은 신부님이 되어서고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방학 때도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라 유럽 성당 곳곳을 돌아다니시면서 청소 등을 하시면서 일해서 돈을 버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무시하시는 법이 없으셨고, 특히 서양사람들이 한국인을 무시하면 바로 화를 내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서양인들도 감히 한국인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아셨던 지학순 주교님
- 같은 성경구절을 읽고도 상황이나 처지에 따라 다르게 느끼고 생각하듯, 지주교님은 당시 여러 신부님들과 다른 생각들을 갖고 계셨습니다. “제대 위 코너에 태극기를 달아라!”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이는 이곳은 한국이니까 한국에 맞게 그 풍토에 맞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자 라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래서 현재 구곡성당을 비롯한 몇 성당 제대 위 코너에 태극기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 당시에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일반적으로 남자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깡패가 되고, 여자들 역시 공장에서 일하거나 몸을 팔기 일쑤였습니다. 이들을 정부에서는 무조건 제압하기에 급급했는데, 지주교님은 도시에서 무조건 제압할 것이 아니라 농촌에서 도시로 나가지 않게끔 농촌을 살리는 것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다.
-원조를 줄 때에도 공짜는 10원 한 장도 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짜로 주는 것은 거지근성을 키운다고 말씀하셨고, 따라서 자발적으로 생활할 수 있도록 사용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협동조합을 만들어 그들 스스로 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또한 이자는 받지 않으나 원금은 받게끔 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장 먹을 것이 없으면 가서 일해서 품값으로 쓰라고 말씀하셨고, 수해를 입었더라도 일을 함으로써 다시 태어나서 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8월 15일 지주교님이 광복절 축사를 하실 때 일입니다. 당시 상황은 북한사람은 무조건 나쁘고 무찔러야 한다고 하던 세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주교님은 이북 김일성 세력은 나쁘다고 비난하시면서 하지만 일부가 나쁜 것이지 일반 사람들이 나쁜 것은 아니다, 우리랑 다 똑같은 사람들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당시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 지학순 주교님의 추진력
- 김선생님은 지학순 주교님이 돈, 명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않는 분이시라는 믿음을 갖고 계셨기에 그분의 말씀에 따라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주교님은 당시 38세 셨던 장화순 선생님을 진광고 교장선생님으로 신뢰하고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당시 30대로 젊은 나이의 장일순 선생님은 지주교님 아래에서 2대 사도 회장으로 임명되셨습니다. 지주교님은 장일순 선생님에게 돈을 뒷받침해 줄테니 청년들을 교육하라고 하셨고, 이러한 뒷바라지의 영향으로 민주화를 위해 청년들이 발 벗고 나섰습니다.
- 지주교님은 또한 노동문제와 농촌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여기셔서 이 부분에 있어 청년들에게 올바른 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양심적인 교수들을 초빙하여 강의케 하셨습니다.
-지주교님은 단순한 교육이 아니라 성경이 뒷받침된 흔들림 없는 교육을 하셨고, 3원칙-‘배우고, 뭉치고, 활동하고’를 강조하셨습니다.
☐ 인간적이시고 소탈하신 지학순 주교님
-지주교님은 안으로 감추시기보다 겉으로 드러내는 성격이셨습니다. 그래서 버럭 하시기도 잘하셨습니다. 그리고 소탈하신 성격이셨습니다. 강원도 도지사와 주지사, 검사장들이 1년에 몇 번씩 지주교님을 방문해서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곤 했는데 이때마다 지주교님은 도리어 그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셨습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지주교님께 짓궂은 질문들을 하면 소탈하게 대답해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단히 인간적이셨습니다. 김선생님은 지주교님이 우시는 것을 많이 보셨습니다. 불쌍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오셔서 김선생님께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보이신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광산에서 진폐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법으로 보살펴 주어야 한다는 것도 지주교님이 주도 하신 일이었습니다.
-지주교님의 가장 큰 힘은 진솔함에 있습니다. 노동자들의 문제가 거론될 때 기자들은 성모병원 등을 가리키자 지주교님은 그 자리에서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며 죄를 시인하셨습니다.
-일화입니다. 원주시에서 수고한 사람들의 가족들과 함께 피크닉을 갔던 날이었습니다. 지주교님은 남자들은 빈손으로 편히 오고, 여자들은 가족들이 먹을 것을 두 손 가득 들고 오는 것을 보시고는 멈춰 서셨습니다. 그리고는 손에 있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으라 하시면서, 여자들은 저기 가면 할 일이 있으니 빨리 가보라고 하시고, 남자들보고 그 짐들을 들고 오라고 하신 일이 있습니다.
-전두환을 만날 때였습니다. 편안한 셔츠 차림으로 가셨는데, 보안에서 할아버지는 못 들어가신다고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윤공희 주교님은 정장차림으로 통과하셨습니다. 그런데 안에서 중요한 사람이 오기로 했다면서, 다시 나와서 지주교님을 모시고 들어간 적도 있습니다. 늘 수수한 옷차림과 털털한 성격의 지주교님이십니다.
☐ 확고한 가치관과 신념을 갖고 계셨던 지학순 주교님
-민주화 운동에 철학적인 배경을 지주교님은 다르게 생각하셨습니다. 당시 지식인들은 민주화를 인간의 자유권에만 초점을 두고 자유권에 치중해서 이 측면을 중시했습니다. 하지만 지주교님은 인간의 자유권은 50% 정도이고, 생존권이 보장되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먹고 살아야 자유도 필요한 것이고 자유만 찾는 것은 겉만 핥는 것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실을 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내가 심었을지라도 배고픈 사람, 필요한 사람이 먹으면 된다고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 권력에 대해 바른말을 하시는 분
-지주교님이 독일의 원조방식에 대해 비난 하신 적이 있습니다. 독일 국민들이 모은 돈을 가지고 독일 정부에서 마치 자신의 돈인 양 생색을 냈기 때문입니다. 그때에 지주교님께서 독밀 문화부 기자들을 모아 기자회견을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독일 정부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원조를 해주었고, 그 돈은 재해본부에서 좋은 일에 쓰일 수 있었습니다.
☐ 지주교님이 가장 좋아하던 사람들
-지주교님은 농민과 노동청년을 가장 좋아했고, 늘 감싸주셨습니다.
-또한 생명이란 단어가 지주교님을 통해 원주 교회에서 제일 먼저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서울 교구의 사목방침이 생명입니다.
<후기>
황효선 마리아
왜 이처럼 지주교님에 대해 공부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분명 훌륭한 분이고 민주화를 위해 온 힘을 기울였던 분. 하지만 이런 분은 지학순 주교님뿐만 아닐 텐데, 이토록 지학순 주교님에 대해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원주에서 일어난 일들이니까?...
이러한 물음을 품고, 3월 21일 인터뷰를 위해 김영주 선생님을 만났다. 따뜻한 봄 햇살아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김영주 선생님을 통해 만난 지학순 주교님은 참 인간적이셨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으셨던 지학순 주교님이셨기에, 하느님 말씀처럼 사셨던 분이기에 우리가 이렇게 만나야 했구나 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영주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지학순 주교님에 관한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괜시리 코끝이 시큰거리기도 하고, 어리석은 물음을 던졌던 내 자신이 부끄럽기도 했다. 이야기 듣는 시간 내내 마치 지학순 주교님과 함께 있었던 것 같은 그 생생함을 집에 와서 문서로 적어내려 가면서 나 혼자만 그 생생함을 느끼고 그것을 온전히 함께 공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웠다.
하지만 3월 24일 모임에서 다른 이들의 인터뷰 내용을 듣고, 그들이 말할 때 그들에게서 내가 느꼈던 그 생생함을 볼 수 있었고, 나또한 다시 그 시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다른 발표자들에게서 내가 본 지학순 주교님을 바라볼 수 있었던... 참 같으신 분, 참 예수님 같으신 분.
모임의 끝자락, 박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내 물음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 되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멍석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멍석이 있다. 지학순 주교님이 우리의 멍석이 되어주시고, 그 밑에 땅이 멍석이 되어주고 있다. 또 그 밑에는 지구의 핵 이라는 것이 있고, 지구를 창조하신 하느님이 우리의 멍석이 되어주신다. 하느님이 없는 지주교님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나는 지주교님을 그렇게 멍석으로 만났고, 하느님을 지주교님과 나의 멍석으로 만났다.
옮기긴 했는데, 수정할 부분이 있으실 것 같아요~ 항목도 제대로 못 넣은 것 같고요... 이런 게 열린 교육인가 봐요 박사님~ 백번 앉아서 듣고 읽고 하는 것보다 훨씬 마음에 와닿았어요~ 건강하세요.
권건환 제노
검은색 - 김영주 선생님 말씀 (주관적인 생각이 들어갈 수 있으나 최대한 말씀 그 데로를 옮기려고 노력하였음)
파란색 - 나의 주관적인 생각
[질문] 김영주 선생님은 원주교구 기획실장을 처음 되셨을 때에 신자 아니었다는데 어떻게 교구 기획실장이 되셨습니까?
-김영주 선생님 어머니가 신자 이셨고 선생님은 신자가 아니셨는데 6.25사변이 나서 남쪽으로 피난을 가다가 칠곡에서 낙동강을 건너야 하셨다. 당시 공산당 들이 처 들어 내려오고 있는 상황이라 낙동강을 건너야 살 수 있었다. 미군이 낙동강을 건너는 다리를 지키고 서서 피난민들이 무언가를 보여주면 다리를 건널 수 있게 통과시켜주고 아니면 통과를 못하였다고 한다. 김영주 선생님 어머니께서는 살아야겠다는 일념에 미군들에게 멀 보여줘야 다리를 건널 수 있는지 수소문 끝에 그게 묵주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분에게 부탁 부탁해서 묵주를 구해 낙동강 이남으로 무사히 피난을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께서는 당시 그 묵주가 우리의 생명이었고 그 이후부터 묵주가 무엇인가, 천주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호기심과 호감을 가졌다고 하신다.
그 이후 김영주 선생님은 결혼해 춘천에서 살고 있었는데 장일순 선생님을 통해 지학순 주교님을 만나게 되었고, 당시 지학순 주교님이 원주시청에 주교관을 지으려고 건물 신축 허가를 신청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 허가가 나지 않고 있는 상황이었다. 주교님이 그런 상황을 이야기하자 김영주 선생님께서는 당시 원주시장과 친분이 있던 사이어서 허가를 쉽게 받아 드렸던 일이 있다. 나의 생각에 그 일이 있고 난 이후 지주교님께서 김영주 선생님과 원주교구 발전을 함께 꾀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이 후 트럭으로 강제로 이사시킨 사건~~이야기 하셨음.) 강제로 이사시킨 당시 김영주 선생님께서는 서울 시청에 일하기로 이미 이야기가 다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강제로 이사를 시켰다고 한들 원주로 순순히 내려오신 것은 아마 지주교님, 장일순 선생님과 함께하면 돈과 권력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그렇게 선택 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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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거의 끝나 갈 때 쯤 미리 준비한 질문은 아니지만 선생님 이야기를 듣다 궁금점이 생겨 드린 질문
[질문] 지주교님이 계실 당시엔 원주교구가 천주교에서 민주화의 성지이고 소위 최고의 교구였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현재의 원주교구는 예전의 명성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데 왜 그렇게 되셨다 보시나요?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 신부고 신자고 원주교구 사람들이 공부를 안 해서 그렇다. 이번 주 주보에 4대강 관련에서 주교회의에서 공식 입장을 발표했는데, 천주교의 대표격인 주교회의에서 이런 성명을 내면 최소 4대강 사업이 뭔지, 무엇이 문제라고 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청년회에서 공부도 하고 사도회에서도 공부를 하고 해야 되는데 원주교구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적다. 4대강 문제뿐만 아니라 천주교 내적인 거 외적인 거 우리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 공부하고 이야기하고 해야 서로 발전할 수 있는데 다들 공부를 안 하니 지금 원주교구가 이렇게 된 게 아니냐.
‘신자 비신자가 어디 있느냐? 우리 인간은 모두 하느님이 만드신 사람이다. 우리 성당 건물 안 만이 교회냐? 하느님은 우주 만물을 만드셨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전체가 우리의 교회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 모두를 사랑해야한다.’
지주교님 말씀을 조금 인용해 보았다. 제2차 바티간 공의회 정신에 부합하려고 노력하면서 가져 보는 생각이다. 지주교님과 뜻있는 신부님들, 장일순 성생님과 김영주 선생님, 예전에 원주교구를 이끌어가셨던 모든 분들은 제2차 바티탄 공의회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하셨고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시다. 김영주 선생님을 통해서, 그리고 멍석을 통해서 본 지주교님은 인간의 것으로 만들려는(인간의 생각대로 교회를 바꾸고 그 교회를 인간이 가지려고 하는) 갇혀 있는 교회가 아닌, 우리 모두와 세상 만물이 우리의 교회다 라는 생각으로 사목을 하시고 그렇게 살아가신 분 같다.
[질문] 예전의 지학순 주교님처럼 현재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 들이 예전에 지학순 주교님과 같이 뜻을 같이 하고 모실 수 있는 분을 추천해 주신다면?
그런 분들은 너희들이 알아서 찾아라~
[질문] 마지막으로 지금 2010년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할말 없어~허허허^^ 그냥 열심히 공부해~”
나는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가진 것이 많아지고 기득권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보수적이고 사 회를 바꾸기 싫어하고 현재 가진 것만을 유지하고 싶어진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이가 많이 든 분들을 공경은 하지만 존경하지는 않는다. 사실 마음속으론 공경조차 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김영주 선생님은 그런 나의 고정관념을 확 깨시는 분이셨다. 70대의 백발 할아버지가 이렇게 진보적이다니. 세대 차이가 아니라 지혜의 차이가 느껴지는 거 같았다. 무위당 사무실에 김영주 선생님 외에 여러분들이 계시다고 들었는데 한번 찾아가 이야기들 많이 듣고 싶다.
인터뷰가 끝나고 내 차로 집 앞까지 모셔다드렸는데 차안에서 선생님께 ‘이런 이야기들은 혼자만 알고 계시지 말고 책으로 후대에 남겨주세요’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냥 대답이 없으셨 으나 표정에서 내가 할 일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예전에 지학순, 장일순 성생님과 일하셨던 많은 분들이 생존해 계실 때 좀더 많은 연구를 해서 한국 천주교 근대사의 밝고 의미 있는 많은 이야기들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근하 요셉 형제님을 만나 뵙고 와서
원주교구 일산동 성당 조원형(요셉), 오수미(율리아나)
1. 인연의 계기
김근하 요셉 형제(이하 요셉)님께서 지학순 주교님(이하 지주교님)을 처음으로 만나신 건 1965년 3월 22일 지주교님께서 교황청으로부터 원주교구 주교로 임명되시고 교구장으로 부임하신 날입니다. 당시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셨던 요셉님은 원동성당에서 착좌식 미사의 복사활동을 하게 되며 주교님과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후에 교구청에 취직을 하여 직원으로 주교님과 함께 일하게 된 이래 1993년 병환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수십년 간 인연을 이어 나가셨다고 합니다.
2. 주교님의 성격 스타일
성격이 굉장히 불같은, 다혈질 스타일이셨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업무처리 때 눈에 보이는 즉시 바로바로 그 자리에서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리셨다고 합니다. 불같은 성격이셨기 때문에 오히려 앞에서 나무라시고 화내시다가도 자리에서 돌아서시면 콧노래를 흥얼거리실 정도셨다고 합니다. 요즘 흔히들 이야기 하는 쿨~~~하다라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 분이셨다고 합니다. 주교님께선 늘 검소한 성격을 갖고 계셨기 때문에 업무 중 이면지를 사용하지 않으면 일부러 따끔하게 혼을 내곤 하셨다고 합니다. 또한 인정이 많으셔서 언제나 어려운 사람들을 쉽게 지나치지 못하셨고, 그런 사람들 한명 한명에 대해 귀 기울이고 사려와 깊은 관심을 보이셨다고 합니다. 가끔 걸인들을 홀대하는 사람들을 보시면 "같은 인간인데 약간의 흠을 가지고 홀대하면 안 된다." 고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소외된 사람들을 보시면 함께 걸으시면서 이야기도 자주 나누셨다고 합니다. 지주교님께서는 사람들과 어울리시는 걸 좋아하신 만큼 술도 즐기셨다고 합니다. 단, 당뇨가 있으셔서 늘 많이 드시지는 않으셨지만, 연강춘 중화요리점에 가시면 좋은 음식과 술을 드셨다고 합니다.
3. 행적 (요셉 형제님이 말씀해주신 대표적인 행적)
1965년 3월 22일 주교 임명
1965년 6월 29일 원주 교구장 착좌 (베드로, 바오로 대축일)
교구장 착좌 후 현재 문화원 아래쪽에 있던 여관을 구입하셔서 주교관으로 만드시고 그곳에서 약 2년간 지내시다가 현재 학성동에 위치한 주교관 신축 후 이사하셨습니다.
1972년 8월 남한강 대홍수로 460여 세대가 침수
재해대책본부 설립 (이후 사회개발부: 사회 의식을 개발하기 위함을 의미)
독일 '카리타스' 네덜란드 '세베모'에 원조를 부탁하러 다니셨다고 합니다.
첫 사업으로 밀가루 원조를 하셨습니다. 이때 일하지 않고 빈둥거리는 사람들에게는 집에 가라는 말씀을 하실 정도로 자발적인 의지를 갖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업으로 한우 분양 사업을 하셨습니다. 어려운 집집마다 한우 송아지를 보내 주시고 이 송아지들이 커서 다시 새끼를 낳으면 어린 송아지를 바로 상환하는 방식으로 농촌 부흥의 붐을 일으키셨습니다.
1971년 원주MBC 부정부패 문제(정부 측 인물인 사장단의 비리)발생 후 주교님의 사회정의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KBS사거리에서 여러 사제, 수녀, 신자들과 함께 부정부패 추방운동을 하셨습니다. 이후 김지하 시인이 '오적'으로 구속(긴급조치4호)되었고 지주교님께선 활동자금조달 혐의로 연행되어 가셨습니다. 조사받고 나오시면서 양심선언을 하셔서 바로 구속되셨습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정의구현사제단이 발족하게 됩니다. 이후 전남 고흥군의 지붕개량사업과 간척 사업 등을 도우셨습니다.
4. 사제들과 평신도(일반인)들을 대하심에 있어서 다른 모습
지주교님께서는 활동이나 여러 일을 함에 있어서 사제와 평신도의 차이를 두셨다고 합니다. 지주교님께서 행하신 운동들의 주역을 모으신 건 장일순 선생님이셨습니다. 장일순 선생님께서는 경기고 친구분들을 초청해 지주교님의 운동을 물심양면으로 도우셨습니다. 현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의 회장님이신 김영주 회장님께서 재해대책본부 실장님으로 오셨던 것도 이 때입니다. 지주교님께서는 사제들과 재해대책위원들을 대함에 있어 차이를 두셨습니다. 이때 일부 사제들은 반발을 하였고 그럼에도 그런 차이를 두셨던 것은 사업을 벌이기 위해 초청한 손님들에 대한 예우였던 것 같습니다. 지주교님께서 사제들을 자식으로 생각하셨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5. 지주교님께서 사제가 안 되셨다면 무엇을 하셨을까?
지주교님께서 사제가 안 되셨다면 사업가가 되셨을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유인즉 큰 스케일과 추진력, 뒤돌아보지 않는 거침없는 모습들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80년대에 평신도들과 함께 시작하셨던 생명운동은 시대를 앞서가는 관찰력과 추친력을 보여주신 모습의 한 예로 들 수 있겠습니다.
6. 지주교님과 관련된 에피소드 이야기들
1) 주교님은 노래도 잘하셨다고 합니다. 노래를 하실 적엔 항상 자신의 18번인 오기택의 '고향무정'을 부르곤 하셨다고 합니다.
2) 6.25 전쟁 당시 주교님께선 부상으로 군병원에서 동생(지학삼)과 상봉하셨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이산가족 상봉 때 친누이와 사촌남매를 만나시고 이후 북한에서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국에 오신 후부터 사회적 발언을 안하셨다는데, 이 시기가 북한 방문 후라서 많은 오해와 비난을 받게 되셨지만, 벌써 지병과 고령으로 인한 노환으로 활동이 많이 불편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3) 주교님께선 대다수의 한국 신학생들이 주로 입학하는 로마 울바노 대학이 아닌 푸로파간다 대학으로 유학을 가셨습니다. 유학시절 동안 이영섭신부님과 함께 지내셨다고 합니다. 조용하고 얌전했던 이영섭신부님과는 달리 지주교님께서는 상당히 활동적이셨다고 합니다. 활동적이셔서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고 술도 한잔씩 하시며 다니시다보니 주머니는 항상 빈곤하셨고, 이영섭 신부님께 "돈 좀 꿔줘"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합니다. 지주교님께서는 환갑 때, "이신부에게 갚을 돈이 많은데" 하고 한마디 하시며 그때의 추억을 되새기셨다고 합니다.
4) 주교님께선 김근하 요셉 형제님의 장남인 김동일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를 무척 예뻐하셨답니다. 김군이 태어나자마자 "본당에서 세례받지 말고 나한테 데리고 와 내가 직접 세례 줄 거니까" 하고 말씀하셨답니다. 세례받는 당일 주교님 품에 안기자마자 크게 엉엉 울고 다시 부모님 품에 안기자마자 울음을 그쳐서 주교님께서 허허 웃으며 머쓱해 하셨다고 합니다.
5) 주교님께서 1984년에 정선본당 25주년 기념미사에 참석 차 정선에 가셨을 때입니다. 주교님께서 열차에서 내리니 경찰 서장 군수 등 각 기관장들이 모두 모여 주교님을 맞이하셨다고 합니다. 주교님께선 인사 받으시고 기관장들을 성당으로 데리고 가 차 한잔 하시며 "할 일들이 없어요? 뭐 대단한 거 있다고 다들 나와 있어?" 하고 한마디 하셨다고 합니다.
7.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
김근하 요셉 형제님께 들은 지주교님은 인본주의인 지금 사회에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는 교회의 수장으로서 너무나도 인간적인 사상을 갖고 그렇게 살아왔던 한없이 인간적인 분이셨던 것 같습니다.
장화순 선생님을 뵙고 나서...
하윤호 대건 안드레아, 변동욱 베드로
2010년 3월 20일 토요일
지학순 주교님을 모시게 된 동기
장화순 선생님의 형 장일순 선생님이 대성고등학교를 설립하여 교감으로 부임하여 일을 하다가 지학순 주교님이 진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주교님을 부름을 받고 교장으로 부임하며 모시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님이 원주교구를 위해 힘쓰신 일이 어떤 것이 있는지
1. 원주교구의 재정적 독립을 1차적으로 하셨다. 지학순주교님이 부임하기 전에는 해외원조, 신부님의 지인, 신부님의 고향 등에서 재정을 얻어 각 교회 및 교구의 살림을 하셨다고 한다. 그렇기에 재정적 독립을 1차 목표로 삼으시고 자치위원회(1년 후 사목위원회로 바뀜)를 구성하셔서 1차 목표를 100만원으로 하셨으나 처음부터 150만원의 재정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로 점점 재정이 증가해 원주교구 독립절차의 초석을 놓으셨다.
2. 뒤쳐진 원주의 교육에 힘쓰심
육민관중학교가 흥업에 있을 당시 민족청년단의 홍범희 선생님이 육민관중학교를 법문중학교로 바꾸시고 시내 단구동에 육민관 중학교를 다시 설립하셨다. 그때 재정상황이 좋지 않아 뜨거운 감자가 되어 버린 육민관 중학교를 지학순 주교님이 인수하시어 1년 후 육민관중학교를 진광중학교로 학교법인을 바꾸시어 진광고등학교 설립자 및 이사장이 되셨다. 이때 교구 내에서 반발이 심했다. 다른 곳에서 설립한 곳을 교구에서 받는 것을 싫어하셨지만 지학순주교님께서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으시고 학생들의 교육만 생각하자고 주변 반대세력을 설득하셨다.
3. 각종 원조를 많이 받아오심
원조를 받아오되 절대 구걸이 아니라고 생각하셨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뒤쳐지게 된 것이 역사적으로 사회적으로 부를 쌓으려는 강대국이 있었기에 상대적 약소국이 생긴 것이라고 역설하시며 우리가 원조를 받는 것이 정당한 권리행사라고 주장하셨다. 주교님은 요한 23세 교황님의 지상의 평화라든가 바오로 6세 교황님의 민족들의 발전과 같은 사회 회칙들의 사상을 실천하고 계셨던 것이다.
4.낙후된 원주의 발전의 위해 힘쓰심
초기 주교님이 부임당시 원주교구는 농촌 어촌 광산촌을 합한 오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교님께서는 원주교구에 오시는 것을 흔쾌히 수락하셨다고 한다. 낙후된 원주교구를 위해 수해복구 사업 및 각종사업을 주관하시어 원주의 부흥에 초석을 마련하셨다고 한다.
특히 남한강 홍수로 인한 수해복구 사업 때에도 필요한 재정을 외국에서 가져와서 정당하게 얻은 돈이니 정당하게 써야 하신다며 회계부문에 있어서도 투명하게 집행하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때 일했던 사람들이 하시는 말씀이 지주교님과 함께 할 때는 얼굴이 부끄럽지 않았다고 하였다. 부패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회복지 사업을 하실 때에도 절대 무료 봉사의 개념이 아니라 자활하여 갚도록 하는 것을 전제로 돈을 주셨다. 돈을 꿔주는 형식으로 하고 돈을 벌게 되면 갚게 하셔서 노동의 건전성을 향상시키신 것이다.
지학순 주교님은 어떤 분?
1.검소한 분이셨다.
어떤 날은 젖은 와이셔츠를 입고 외출을 하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평신도 분이 왜 젖은 와이셔츠를 입고 외출을 하냐고 물으니 와이셔츠가 덜 말라서 할 수 없이 입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와이셔츠가 2벌밖에 없어서 젖은 와이셔츠를 입으셨던 것이다.
2.항상 자신보다 주변사람을 많이 생각하셨음
1974년 중앙정보부에 납치당한 후에 구치소에 들어가게 된 때에도 교구에서 속옷을 보내드리면 속옷이 나온 적이 없었다. 주변 재소자들에게 나누어주셨기 때문이다.
선물로 우표 같은 것이 들어오면 우표를 수집하는 사람들에게 우표를 팔아 그 돈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셨다.
평소에 각종 양주들이 선물로 들어오면 차곡차곡 모아 두었다가 연말에 연말계로 원주의 각종인사들(선생님, 장성, 공무원...등)을 초대해서 항상 수고하신다고 격려를 하시면서 밥을 사주시고 모아두었던 양주를 대접하셨다고 한다. (장화순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그런 면에서 장성,관,민 모두 홀딱 반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3. 뒷얘기를 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양심선언을 할 당시에도 유신헌법과 긴급조치에 대해서는 반대를 하였지만 박정희대통령 개인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하지 않으셨다. 어떤 이유에서도 사람을 미워하지 않으려 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인터뷰와 나눔을 마치고...
지학순 주교님과 함께 사셨던 분(장화순 선생님)을 직접 만나서 주교님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경험은 특별했다. 자칫 지학순 주교님에 대해서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우리의 시각으로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에도 더욱 그러하였다. 왜곡시킬 수 있었던 지학순 주교님을 우리는 그분과 함께 사시며 원주교구 안에서 깊이 하느님을 닮으려 했던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서 주교 지학순을... 인간 지학순을 만나며 그 분이 사시며 가지셨던 깊은 신앙과 사랑을 느껴 볼 수 있었다. 이 특별한 체험 속에서 너무나 기쁜 3월, 그리고 사순시기를 마무리해 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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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23일 화요일
이학근 베네딕토 신부님과의 인터뷰
(최재도 바오로 신부님, 홍나리 아네스, 공시네 스텔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이란...
지식은 있으나, 마음은 있으나 그것을 과연 얼마만큼 행동으로 사는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읽고 난 뒤 내 것으로 만들어서 신자들에게 전할 때 중요시 여겼던 점은 서투르게 전달해도 그 안에 진실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공의회 문헌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맛이 난다. 마치 성경처럼.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 안에서도 일정하게 계급적이고 보수적이었다.
공의회 이후 계급적인 관료주의가 허물어지고 각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평등적인 구조가 형성되었다.
*밑에서 위를 공격하여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사람이 자발적으로 밑으로 내려와야 한다.
지학순 주교님와 원주교구...
지주교님께서 모든 것의 앞자리에서 사회의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주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선구자의 역할을 담당하시고 원주교구 시위를 이끄셨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더 용기를 갖게 되셨다.
그러던 중 1972년 당시 수해로 인해 원주교구가 더 어려워지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독일로 가셨는데, 1974년에 김지하가 감옥으로 끌려갔다. 이를 전해들은 지주교님은 한국으로 귀국하였으나 공항에서 바로 중앙정보부로 납치되신다. 그러자 바로 명동성당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김수환 추기경님까지 안기부에 들어가셔서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신다. 그리고 며칠 후 명동성당에서 지교님의 양심선언이 일어나고 지주교님은 몇 달 동안 감옥살이를 하신다.
가까이에서 본 지주교님...
아무리 어렵고 무서워도 주님이 이끄시는 길에 순종하시는 자세를 늘 보이셨다.
‘나는 미워해도 교구청을 위해 일해 다오’라고 인사하시며 이학근 신부님과 교구청에서 함께 일하셨는데, 그 대화 이후 7년 반 동안 한 번도 불화 없이 지내셨는데 지주교님이 항상 양보하셨다고 이 신부님은 전하셨다.
1. 돈에 깨끗하셨다.
매년 말에 가지고 계신 통장을 모두 꺼내어 그 잔금을 다 털어 가까이 있는 어려운 이웃부터 도울 수 있는 곳에 기부하시고 통장을 0원으로 만드시면서 가난하게 살라고 한 말씀을 직접 실천하려고 노력하셨다.
2. 생활이 검소하셨다.
함부로 휴지를 쓰는 것을 보시고 호통하시며, 가난한 나라에서 물건은 되도록 재활용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종이와 그 밖의 재활용품들을 분리수거하시며 자원을 아끼셨다.
3. 야단도 잘 치셨으나 정이 많으셨다.
한 신체장애자가 지주교님에게 끊임없이 돈을 꾸어가도 빌려주고 빌려주고 또 빌려주시면서 사랑을 보여주셨다.
전두환 전대통령과 지학순 주교님...
전두환 전대통령은 지학순 주교님의 말이 듣기 싫었으나 일 년에 두 번 정도 초청해 함께 식사자리를 하며 가장 친하면서 미운 관계를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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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1. 바티칸 공의회 정신 중 가장 빛을 발한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공의회의 전반적인 가르침은 “하느님은 사랑의 공동체”라는 것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3위가 하나 되어 하느님을 가리키는데, 세상은 사랑으로 하나 될 때 구원받을 수 있다. 돈은 수단이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 목적이라는 것은 참된 행복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을 얻고 하느님의 사랑을 얻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
ex) 예수님 : 무조건 사랑하셨다.
계산할 줄 모르셨다. (수학을 공부했더라면 빵점을 매번 얻을 만큼)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대답하시며 매번 용서하셨다.
예수님의 머릿속에는 우리의 죄는 없다.
Q 2. 교회 안에서 하느님의 권위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A. 권위라는 것은 자기의 직분을 충실히 성실히 할 때 자연스럽게 따르게 된다. 신자들이 신부님을 세워줘야 신부님의 권위도 서게 되는 것이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진심으로 품어줄 때 사랑해줄 때 권위는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ex) 베로니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
간음을 했던 죄인 베로니카였지만 그녀를 용서해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 안에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얼굴을 닦아드릴 수 있는 사랑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용기 있게 드러내었다.
Q 3. 지주교님과 신부님들 사이에서 중재자로서 신부님들에게 지주교님의 정신이 스며들게 하기위해 하신 특별한 노력이 있으셨다면 어떤 것이 있으셨는지요?
A. 내가 특별히 노력하였다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지주교님을 중심으로 거의 100% 원주교구신부님들이 별 이견 없이 잘 모였다. 일 년에 두 번 정도 버스를 대절하여 모두 함께 소풍을 갔다. 고기를 잘 먹지 못했던 그 시절 고기 파티를 열고 신부님들 영양을 보충해 주셨다. 할 수 있으면 밑에 사람들을 잘 사랑해주셨다. 나는 다른 신부님들을 야단치는 일을 되도록 하지 않았다. 신부의 삶이란 순명, 정결, 청빈이 아니던가. 형제를 야단치는 것은 정결에서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Q 4. 다른 교구에서 ‘공의회 문헌’을 강의하실 때 어떤 점을 집중적으로 전하셨는지요?
A. 그때 당시 강의를 한번 나가서 말을 하면 듣는 사람들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나혼자서 오전 10시부터 밤 11시까지 강의를 했는데 무척 힘들었다. 내가 집중적으로 전달했던 부분은 사회적인 문제 안에서 그 해결 방안을 찾으려면 하느님의 모습을 구현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느님의 모습, 즉 사랑이다. 그것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다. 그것은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활 안에서, 곧 은총, 성사생활, 기도, 희생, 봉사...등 사랑을 위한 노력을 해야 선물받을 수 있는 것이다.
최재도 신부의 복음과 인터뷰 통합: 2010년 3월 24일 사순 5주간 수요일 강론
복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요한복음 8, 31-4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순차적으로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말씀을 듣고, 머무르고, 제자가 되고,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에 의해 자유롭게 되는 상태. 예수님은 이 모습을 자세하게 순차적으로 제시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에 의해 자유로워진 상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머무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만 유다인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이 들은 곳은 세상 안이었습니다. 그러하니 당연히 결과는 딱딱하고, 틀에 박히고, 자유가 없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억압의 삶 인 것이지요. 이처럼 결과를 바라보게 되면 그 시작점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악한 세상의 것에서 출발 했는지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여기서 진리에 의한 자유로운 삶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진리에 의한 자유로운 삶은 하느님에게서 시작한 삶이기에 세상의 그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은 하느님 안에서의 중심을 잡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어제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았고 또한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지정면 월송리의 공소에 계시는 ‘이학근’신부님을 찾아뵐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월송 공소는 참으로 그림같은 장소에 아담한 시골 마을에 자리잡은 곳이었습니다. 함께 간 일행들을 반겨 주시는 신부님의 모습은 참으로 ‘시골 할아버지’그 자체였습니다. 1965년도에 사제서품을 받았으니 저에겐 너무나 어려운 대 선배님이셨지요. 그렇지만 삶의 연륜에서 묻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 원로 신부님이라는 어려움을 덮어주기에 충분했습니다.
신부님은 조용히 옛날 이야기를 들려 주셨습니다. 신부님은 특히 지학순 주교님을 모시고 총대리신부를 하던 때를 기억하시며 저희에게 지학순 주교님의 인간적인 면모를 많이 증언해 주셨습니다.
서슬 퍼런 국가 정보부원의 감시 아래에서도 한 사람의 지성인이 죽어가는 상황을 보시고 자신이 가면 잡혀갈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내가 가지 않으면 그들이 죽는다!”라는 말씀을 하시며 당당히 입국하시어 바로 정보부로 끌려가신 사건, 감옥에서 나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양심선언’으로 또다시 바로 끌려 들어가시어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형을 받으신 이야기. 주교님의 모습은 그 앞에 두려운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자유로운 영혼’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그동안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모습으로 물질에 있어서도 참으로 자유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다니엘 주교님은 연말이 되면 자신의 개인 통장을 모두 확인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에 있던 돈을 모두 찾아서 가난한 사람들, 진정 필요한 이들에게 모두 나눠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연말에 통장 잔고를 ‘0’원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물질에 집착하지 않는 참으로 가난한 한 사람의 사제로서 자유로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지학순 주교님을 회고하는 신부님의 모습에서 주교님에 대한 참으로 깊은 그리움이 신부님 마음에 배어 있음을 저는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7년 가까이 오랜 시간 격동의 시기를 함께 지냈으면 그 안에서 감정의 깊은 골이 생겼을 법도 하지만 오히려 신부님께서는 “주교님이 나한테 많이 양보 하셨지..”라고 하시며 오히려 감사해 하는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불의 앞에서는 불과 같은 단호함을 지니시고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낌없는 눈물을 보이셨던 다니엘 주교님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러한 모습이 진정 하느님의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의 표본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삶. 그것은 하느님에게서 시작되어야 함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세상에 대해 차가운 시선이 아닌 따스한 심장으로 보듬어 줄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루카 8,15참조)
리모컨 바위
노동과 생태영성
원주청년 그리스도인
공시네 스텔라
2010년 3월
'얼 no.3'
오늘은 티비에서 무엇을 보셨나요?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다시 아침에도-
세상에는 참으로 볼 것도 많고 들을 것도 많은 채널들이
하루가 다르게 우리들의 눈을 노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파도치는 네모난 검정바다 뒤에
창문 하나가 불현듯 눈에 들어옵니다.
이 창문은 광고라는 것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지
화려한 장면도 현란한 소리도 내고 있지 않아
하마터면 못보고 그냥 지나칠 뻔 했습니다.
이 창문에 가만히 귀기우려 보았더니
이곳으로부터 아주 작은 손님 한분이 성큼 방문하셨네요?
어떤 사연이 있기에 손에는 낚싯대 하나를 쥐고서
바위처럼 그 바다 앞에 묵묵히 서 있기로 결심하신 걸까요?
그 손님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허름한 낚싯대를 이용해서
아주 작은 물고기부터 커다란 물고기까지 그 바다에서 건져내
창문을 향해 거침없이 옮겨 나르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드라마처럼 때로는 뉴스처럼 때로는 코미디처럼 때로는 다큐멘터리처럼
이 손님은 한결같이 창문이 알려주는 채널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은 손님 뒤에 이 모든 것을 총감독하고 계시는 분을
애타게 그리워하고 영원히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리모콘은 어떤 채널에 고정되어 있는지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바위처럼 바닥에서
우리를 서게 하고 건너게 하여
우리를 생명의 문으로 이끄시는 원바닥의
마름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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