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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삼릉
서삼릉 : 사적 제200호 / (희릉, 효를, 예릉)을 합하여 서삼릉이라 한다.
주 소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2,3번지 일대
서삼릉(西三陵)의 역사를 살펴보면, 제일 처음에 종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능인 희릉(禧陵)이 조성되었고 그 후 중종의 정릉(靖陵)이 조성되어 한때 이 능역에 있었다. 그리고 인종과 그 비 인성 왕후 박씨의 효릉(孝陵)이 다음에 조성되어 중종과 인종(仁宗) 2대의 능지(陵地)로 사용 되다가, 1562년(명종 17년)에 중종의 제 2계비 문정왕후(文貞王后)의 주장으로 중종의 능은 지금의 서울 강남구 삼성동으로 천장 되었고, 이후 1864년(고종 1년)에 철종(哲宗)과 철인황후 김씨(哲人王后)의 능인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서삼릉’ 이라는 능칭(陵稱)을 얻게 되었다.
또한 (구)6만 5,970평이고 현재는75,383평에 이르는 서삼릉 능역에는 왕실 묘지가 조성되어 성종의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懷墓 ), 소현세자의 소경원(昭慶園), 장조(莊祖)의 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의령원(懿寧園), 정조(正祖)의 아들 문효세자의 효창원(孝昌園), 고종의 2남 의친왕의 묘와 조선말지까지 역대 후궁을 비롯하여 대군ㆍ 군ㆍ 공주ㆍ 옹주 등의 많은 분묘가 조성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지난 1930년대 초 일제가 전북 금산군 추부면에 있는 태조의 태묘(胎墓)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던 태조부터 순조까지 임금 21위와 대군ㆍ 세자ㆍ 공주 33위 등 모두 54위의 태를 한곳에 모은 태실(胎室)이 있다. 태실은 200여 평의 넓이로 사방에 담을 두르고 있다.
일제는 태실의 형태를 구 중앙청처럼 (日)자 형태로 만들고 태실 묘석 높이도 3미터에서 1미터가량으로 대폭 축소하여 민족정기 말살을 시도했으며, 서삼릉을 신사참배의 장소로 만들기 위해 본래의 형태를 훼손해 공원화 했다. 게다가 서삼릉으로 통합한다는 명분으로 전국의 태실을 파헤치면서 임금의 태를 보관했던 이조백자, 도자기 등 각종 문화재를 모두 빼돌렸다고 한다. 태실의 묘석에는 “昭和 ΟΟ년 Ο월”이라는 표기 중 일본 연호인 昭和가 지워졌을 뿐 나머지는 그대로 방치 되고 있다.
희릉/禧陵 [제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릉]
장경왕후는 1491년 (성종 22년) 7월 6일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윤여필의 딸로 호현방 (好賢坊) 사제(私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종모(外從母)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1506년(중종 원년) 궁중에 들어가 처음에 숙의(淑儀)에 봉해지고, 중종비 단경왕후 신씨가 폐위되어 쫓겨나자 다음해 왕비에 책봉 되었다.
1515년에 원자(인종)를 낳고 산후병을 얻어 7일 만에 경복궁 동궁 별정에서 승하하니 때는 3월 2일, 춘추 25세 였다 처음에는 태종의 능인 헌릉 옆 오른쪽 산줄기,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언덕에 장사지냈으나, 22년 후인 1537년(중종 32년) 9월 9일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다.
그후 중종의 정릉이 희릉 곁에 정해지면서 정자각을 양릉의 중간에 옮겨 설치하고 동원이강의 형식을 취하여 왕의 능호(陵號)를 쓰다가 1562년에 중종의 능이 지금의 삼성동에 있는 선릉(宣陵) 곁으로 옮겨 가자 다시 희릉으로 부르게 되었다. 능이 헌릉 오른쪽 언덕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내력이 있다. 이조판서 김안로(金安老)는 아들 희(禧가) 중종과 장경왕후의 사이에서 태어난 효혜공주와 혼인하여 중종의 부마가 되자 권력을 남용하다가 1524년 영의정 남곤(南袞,) 심정(沈貞), 대사간 이항(李恒 )등의 탄핵을 받고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돌아와 재기용되자 동궁(인종) 보호를 구실로 실권을 장악한 그는 정적이나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들을 축출하는 옥사(獄事)를 여러 차례 일으키는데 왕릉 천장도 그 사건 중의 하나였다.
중종 32년, 김안로는 정광필(鄭光弼), 남곤 등에게 중죄를 주려고 희릉 광저(壙低)에 큰 돌이 깔린 채 그대로 공사를 감행했다는 설을 들어 천장 론을 주장 했으나 왕이 움직이지 않자 이번에는 풍수지리상 큰 돌이 광저에 깔리면 불길하다고 아뢰어서 드디어 왕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능역 조성 당시 총호사(摠護士)이던 정광필 이하 상지관(相地官) 및 공사에 관계했던 관리드이 대엿죄를 지은 것이 되어 신분이 박탈되거나 추탈되어 그들의 자손까지 옥에 갇히는 변이 일어나고 능은 새로이 길지를 찾아 현재의 자리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언덕에 단릉으로 남게 된 희릉에는 병풍석 없이 12간의 난간석만 두른 야트막한 봉분에 3면의 곡장, 팔각의 장명등 1, 귀가 조각되어있는 망주석 1쌍, 봉분을 호위하는 석양.석호 각 2쌍, 문인석 1쌍과 무인석 1쌍, 석마 2쌍, 상석1, 정자각, 수라청, 망료위, 표석, 홍살문이 있는데, 조선 전기 왕릉의 약식을 충실하게 따르는 상설이다.
장경왕후는 인종과 효혜공주를 낳았는데, 지문(誌文)은 다음과 같이 왕후를 기리고 있다.
“ 왕후는 총혜자유(聰慧慈柔한) 천성을 타고 났고 인효(仁孝)와 더불어 살고 예순(禮順과) 함께 자라났다. ...(생략)... 이미 덕이 후하고 또 공경함을 독실히 하여 성왕의 중흥정치의 복조를 협찬했는데 거의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지만 시보(施報)할 것을 아끼어 세상에 계신 지 겨우 춘추 25세 만에 돌아가셨으니 이 무슨 이치인가? 천명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다. 가혹하고 잔인한가! 아. 애통하도다!”
효릉/孝陵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
서삼릉 능역에 있는 효릉으로 가는 길은 능 안내도가 있는 매표소 옆길로 들어가지 않는다. 서삼릉 매표소 옆에 있는 젖소 개량사업소 옆길로 약 10분 정도 걸어가면 휀스철망으로 만든 담 가운데 철문이 나오면서 홍살문이 그 너머로 보이는데 그곳이 효릉 이다. 일반인에게 공개하지 않는 비공개릉이다. 홍살문을 넘어서면 정자각까지 박석위로 참도(參道)가 이어지고 있다.
이곳 효릉은 조선 제12대 인종과 인성왕후의 유택(幽宅)이다.
인종은 희릉에 안장된 장경왕후를 모후로 하여 1515년(중종10년) 2월 25일 중종의 첫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호(晧), 자는 천윤(天胤)이다. 인종은 여섯 살 때인 1520년(중종 15년)에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3세 때부터 글을 배워 익히고 8세 때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하기를 즐겨했다. 효성이 지극하여 중종을 섬기는 데에는 그 정성과 공경을 다했고 태어난 지 엿새 만에 잃은 모후 장경왕후를 섬기지 못한 일에 스스로 상심하여 대왕대비(성종의 비 정현왕후)에게 더욱 그 효도를 다했다. 또한 검약하고 욕심이 없어서 일찍이 시녀 가운데 고운 옷을 입은 자가 있는 것을 보면 곧 내보내게 했으므로 궁중 안은 엄하게 단속하지 않아도 숙연했다고 한다.
인종은 성품이 착하여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 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일찍 죽었을 때 매우 애석히 여겨 그로 인하여 병까지 얻었으며, 쥐를 잡아 동궁인 자신을 저주한 사건인 ‘작서(灼鼠)의 변(變’)에 복성군(福城君)과 그의 어머니 경빈 박씨(敬嬪朴氏)가 혐의를 쓰고 귀양가자 그 일을 알고는 직접 소(疏)를지어 극진히 아뢰니 중종도 이에 감동하여 그들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주었다고 한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하자 인종은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았으며, 겨울철인데도 목욕하고 분향하며 한데 서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하늘에 빌었다. 그러다가 중종이 승하하자 식음을 전폐한 것이 엿새이고 울음소리를 그치지 않는 것이 다섯 달이나 되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인종은 1544년 11월 20일 즉위했다. 불과 8개월이 지난 1545년 6월 29일 인종은 대신 윤인경(尹仁鏡)등을 불러 “내가 병이 걸려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경인대군에게 정위하니, 경들은 더욱 힘써 도와서 내 뜻에 부응토록 하라”고 분부했다. 그리고 다시 “내가 죽거든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묻고, 모든 내 장사는 소박하게 하여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라”고 분부한 뒤 이튿날인 7월 1일 경복궁의 정침(正寢)에서 승하하니 보령 31세였다.
인종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는 1514년(중종 9년) 9월 1일 본관이 나주인 금성부원군 박용의 딸로 태어났다. 세자빈으로 책봉된 것은 11세 때인 1524(중종 19년)인종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다.
왕세자빈으로 봉책될 때의 책문(冊文)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대 박씨는 명문에서 아름다움을 길러 공경을 갖추고 숙덕(淑德)하여 아름답고 순한 덕을 지녔음에 깊고 조용한 경지에 이르고, 예를 지켜 어그러지지 않으며 온순하여 웃사람의 명을 잘 따르니 어찌 번거롭히랴? 지아비가 창도하고 지어미가 따르는 것을 징험하는 것은 바로 혼인의 처음에 달렸으니 이제 사신 영의정 남곤(南袞)과 병조판서 홍숙(洪淑)을 보내어 그대를 세자빈으로 책명한다”
인성왕후는 1577년(선조 10년) 11월 29일 경복궁에서 후사(後嗣) 없이 승하하니, 춘추 64세였다. 효릉은 간좌곤향(艮坐坤向북동에서남서방향)의 언덕 위에 있는 쌍릉으로, 인종의 능은 병풍석을 두른 모습인데 비해 난간석으로 연결된 인성왕후 릉은 병풍석이 없이 봉분만 있다. 인종의 봉분을 두른 병풍석에는 돌이끼가 끼어 군데 붉은 빛이 돌고 면석에는 십이지신상이, 그 양쪽 우석에는 운채(雲彩)가 조각되어 있다. 능에는 이 밖에도 3면의 곡장과 상석 2, 장명등 1, 문. 무인석 각 1쌍, 석마 2쌍, 석양2쌍 석호 2쌍 등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선조 10년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인종 곁에 장사지내면서 왕릉의 개수를 명해서 병풍석을 두른 것이라고 한다. 인종 승하 당시의 봉분은 병풍석 등의 석물을 설치하지 않았다. 인종이 승하한 후 을사사화로 인종의 외가, 처가 및 가까운 신하들이 큰 희생과 탄압을 겪어야 했던 시대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왕에 대한 종순관념(尊崇觀念)도 크게 엷어져서 왕릉조성을 소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릉/睿陵 〔제25대 철종과 철인왕후〕
서삼릉에 있는 예릉은 제 25대 철종(哲宗)과 철인황후 김씨(哲人王后金氏)의 능이다. 철종은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요 전계군(全溪君)의 둘째 아들로 강화도에 살던 중 1848년 6월 6일 헌종(憲宗)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헌종의 뒤를 이어 순조의 후사가 되어 왕위에 올랐다.당시 영조(英祖)의 현손으로는 헌종과 원범(元範,) 두 사람이 남았는데 헌종이 승하하니 남은 사람은 하나, 강화도에서 농사짓던 19세의 청년 원범뿐이었다.
이래서 강화청년 원범은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하고 대왕대비의 명으로 6월 8일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이튿날인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왕으로 즉위했다.
제 25대 철종은 이렁게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 원범이다. 철종의 이름은 변이며 원범은 초명이다. 철종은 1831년(순조 31년) 6월 17일 정조의 서제(庶弟)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며, 전계대원(全溪大院君) 광(曠)과 용성부대부인 염씨(龍城府大夫人廉氏)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의 조부 은언군의 그 아들 상계군(常溪君) 담이 반역을 꾀했다고 하여 1786년(정조 10년)에 강화도에 유배 되었다. 1801년(순조 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로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처형될 때 그의 처 송씨와 며느리 신씨도 세례를 받은 천주교인이라 하여 사사되니 은언군도 강화도 유배지에서 사사되었다.
게다가 철종의 형 원경(元慶)은 헌종 10년, 평소 아버지와 자신의 신임을 받던 거사(居士) 이원덕(李遠德)과 민진용(閔晉鏞)등이 자신을 받들어 왕으로 옹립하려는 모반을 꾸미다 발각되어 사사되었다. 이 일로 인해 가족들이 강화로 유배가서 살게 되니 이때 원범의 나이 열네 살이었다.
이렇게 모반에 연루되어 몰락한 왕족으로서, 강화도에서 농사짓고 살던 청년원범은 나이가 어릴 뿐만 아니라 농사를 짓다가 왕이 되었으므로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했고 1851년에는 대왕대비의 근친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이후 김문근이 국구(國舅) 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고, 다음해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어도 정치는 여전히 안동 김씨 이족에 의해 좌우되었디.
철종은 친정을 하면서 1853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 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說) 6만 냥을 진대(賑貸)하게 했고 그해 여름에 한재가 심하자 재곡이 없어 구황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깝게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의 징벌을 엄명하기도 했다. 1856년 봉에는 화재를 입은 여주의 민가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주어 구황하게 했고,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했으며 영남의 수해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초(胡椒)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게 하는 등 빈민구제에 적극성을 보였다.
하지만 삼정(三政)이 문란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횡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자, 마침내 진주민란을 시발로 많은 민란이 일어났다. 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이라는 특별기구를 두고 삼정구폐(三政救弊)를 위한 정책을 수립, 시행하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진력했다. 하지만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를 벗어나 제대로 정치를 펴나갈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여 사상운동을 일으키자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 는 죄를 씌워 처형하기도 했다.
철종은 1863년 12월 8일 승하하니 보령 33세였다.
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 했을 뿐 후사가 없다. 1865년 4월 7일 희릉(禧陵) 오른쪽 산줄기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예릉(睿陵)이라 했다. 시호는 문현무성헌인영효(們顯武成獻仁英孝)이고 1908년(융희 2년) 7월 30일에 황제로 추존되어 장황제(章皇帝)가 되었다. 철인황후는 1837년(고종 15년) 5월 12일에 창경원 양화당(養和堂)에서 춘추 42세로 승하하여 9월 16일 철종의 능인 예릉의 동원에 안장되었다. 예릉은 이러한 철종과 철인황후의 쌍릉으로 조선왕조의 상설제도(象設制度)를 따른 마지막 능이다.
홍살문 바로 앞에서부터 정자각까지 곧게 뻗은 참도는 임금이 다니는 1단 높은 곳과 그 밑의 구분이 뚜렷하다. 왼편 아래쪽으로는 수복방의 초석들인 듯한 것들이 미처 복원되지 않은 채 남아 있고, 참도 끝에는 정자각이 있다. 자좌오향(子坐午向:정북에서 정남향)의 언덕 위에 있는 봉분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을 두르고 있는데, 왕과 왕비의 쌍릉이 난간석으로 연결되어 있다. 봉분 앞에 각각 상석이 하나씩 있고, 좌우에 망주석이 있으며, 봉분 주위에는 호위하는 석수가, 앞에는 문인석 1쌍과 무인석 1쌍이 시립하고, 그 뒤에 각각 석마 1쌍씩이 있다. 팔각지붕의 장명등은 두 상석 앞, 가운데에 있되 멀찌감치 앞으로 나와 있어 특이하다. 지붕 끝을 뾰족하게 올리지 않고 둥그렇게 하여 변형을 주었으나 융릉에서 본 장명등의 조각수법에 다리에 구름을 조각한 숙족, 영조때의 사각 장명등이 한 데 결합된 모양이다.
두 봉분 모두 난간석주에 동그란 원을 그려넣고 그 안에 문자를 새겨 넣어 방위를 표시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능은 3단으로 설계되어 1단에는 봉분과 난간석, 석양과 석호, 귀면을 새긴 고석이 받치고 있는 상석이 있으며, 그 아래 2단에는 홀(笏)을 쥔 문인석과 장명등이, 마지막 3단에 무인석이 장검을 빼서 두 손으로 짚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서 있는데, 예릉은 동구릉의 경릉에서와 마찬가지로 2단으로 줄여서 문, 무인석이 같은 단에 있다. 현재 강화도 관청리 내수골에는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생가가 있다.
원래는 민가였던 것을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1853년이 강화유수 정기세(鄭其世)가 건물을 세우고 용흥궁(龍興宮)이라고 이름 지었으며, 1903년에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했다고 한다. 팔작지붕에 흩 처마, 주심포의 구조로 된 내전 1동, 외전 1동, 별전 1동, 잠저구 기비간 1동이 있는데 지방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서삼릉복원추진위원장 안 재 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