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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 13일 예불문 제3강(靈山當時~)
2006년 12월 13일 예불문 제3강(靈山當時~)
반갑습니다. 오늘 예불문(禮佛文) 강의 세 번째 12월 13일 저녁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부처님께 예를 올리는 예불문을 우리가 공부하면서 문득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던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부처님께서 성불하신지 크게 오래지 아니해서 이런 생각을 했다고 경전에서 전하고 있습니다. “존경할만한 자가 없고 또 공경할 자가 없는 것은 괴롭다. 따라서 나는 어떤 사람을 존경하고 그 사람에게 귀의하여 의지하고 싶지만 그러나 나보다도 수승한 계(戒)의 덕, 정(定)의 덕, 혜(慧)의 덕, 해탈(解脫)의 덕, 해탈지견(解脫知見)의 덕을 갖춘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깨달은 법을 존경하고 공경하여 거기에 안주하리라.” 라고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셨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희들이 예불문을 공부하면서 계(戒), 정(定), 혜(慧),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 이런 오분법신을 공부하면서 부처님께서 성불하시고 얼마되지 아니해서 사실 부처님도 누구에게 의지하고 싶고 존경하고싶고 또 예를 올리고 싶고 그런 마음이 왜 없었겠습니까? 성인일수록 오히려 그러한 마음이 더 많을 수가 있겠죠. 그런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스스로 그렇게 존경하고 귀의하고 예배를 드릴만한 그런 마음은 있는데 그럴 대상을 갖춘 사람을 못 보았다. 당신보다도 계, 정, 혜, 해탈, 해탈지견 이러한 오분법신의 덕을 갖춘 사람이 없더라. 그래서 자신의 깨달음에 의지하고 또 그것을 존경하고 공경하며 안주하겠다라고 스스로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들은 공부가 부족하고 학덕이 부족하고 수행이 부족한 관계로 또 어떤 의미에서 보면 좋은 점이 많네요. 위로는 부처님과 보살들과 그리고 많은 역사상에 나타났던 우리들의 스승, 조사스님들을 또 공경하고, 설사 불교 역사에 있어서의 성인이 아니라손 치더라도 수많은 역사 속에서 인류에게 큰 가르침을 내려주신 많은 성인들이 계시고 현인들이 계시고 철인들이 있죠. 이런 분들을 우리 마음에 드는 또 존경할만한 마음이 나는 그런 분들을 마음에 공경하고 존경할 수 있다고 하는 것 이것은 참 큰 행복입니다.
이런 마음이 없는 사람 또 마음에 모시고 존경하고 귀의하고 그리고 때로는 그리워하고 또 그가 있으므로 해서 마음에 어떤 안정을 찾고 마음이 편안해지고 의지가 되고 뭐 한번도 본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는 경전상에서 나타나고 어록상에서 보았던 그런 스승이라손 치더라도 그런 분들로 해서 우리의 마음에 아주 위로를 받고 또 의지가 되고 한다면 그 또한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세상을 살면서 그러한 마음 그러한 대상이 없다고 하는 것. 이것도 불행이라면 큰 불행이 아닐까하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이어서 어제는 4대 보살을 말씀을 드렸죠. 예불문이 짧은 글입니다. 앞에서 서론격으로 다게와 오분향이 있었고 그 다음에 본론으로서 불. 법. 승 삼보가 있고 그 다음에 결론으로서 회향부분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하는 그 부분이 있고 그렇죠. 역시 보살들이라고 하더라도 불. 법. 승 삼보로 나누면 승보에 해당 됩니다. 그 다음에 승보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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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心歸命禮
지심귀명례
靈山當時 受佛付囑 十大弟子 十六聖 五百聖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獨修聖 乃至 千二百諸 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독수성 내지 천이백제 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至心歸命禮
지심귀명례
西乾東震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天下宗師 一切微塵數 諸大善知識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
至心歸命禮
지심귀명례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伽耶衆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
唯願 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冥熏加被力 願共法界諸衆生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自他一時成佛道
자타일시성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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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心歸命禮
지심귀명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드립니다.
靈山當時 受佛付囑 十大弟子 十六聖 五百聖
영산당시 수불부촉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영산당시(靈山當時), 부처님의 교화가 한참 성황을 이루었을 때. 가장 절정에 달했을 때 그때를 영산당시, 영산회상 그렇게 합니다. 불교의 어떤 큰 행사가 펼쳐지고 거기에 아주 아름다운 여러 가지 불교적인 그런 모습들을 보고 높은 법문을 듣고 이렇게 해서 환희심이 넘칠 때 우리는 흔히 표현하기를 아! 이게 바로 영산회상이다. 이런 표현을 하죠. 영산당시고 바로 영산회상이다. 부처님의 교화가 한참 참으로 절정에 달했을 때 바로 부처님이 교리상으로 꼭 맞는 건 아니지만은 흔히 배대하기를 영축산에서 법화경을 설하실 그런 때를 영산회상 또는 영산당시 이렇게 표현을 하죠. 왜냐하면 그때가 전통불교에서 교학적으로 과판을 하면은 부처님의 연세가 칠십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그때는 훌륭한 제자들이 아주 많았었구요. 또 부처님을 따르는 신도들도 무수하게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도 얼마인지 모를 정도이고 일반 신도들도 수없이 많고 그래서 정말 불교가 인도에 널리 퍼져서 부처님의 교화가 크게 성하던 때를 영산당시라고 그렇게 하죠. 사실 부처님이 홀로 출가하셔서 깨달아가지고 겨우 다섯 비구를 앉혀놓고 녹야원에서 당신의 깨달음을 이야기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영산당시는 아주 뭐 그런 급속 성장이 없죠. 어떤 종교지도자가 그렇게 많은 제자들을 둘 수 있었겠습니까?
또 지금 2600년, 2700년에 가까운 세월이 물론 지났습니다만 지금 동. 서양 어디 없이 불교가 들어가 있지 않은 데가 없고 또 세상이 밝아지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욱더 빛을 보고 과학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아직도 미쳐 오르려면 까마득하게 많이 남아 있고 과학이 발달할수록 부처님의 가르침은 더욱더 분명하고 또 이치에 맞다고 하는 것이 증명되어가고 있는 그런 실정입니다.
참으로 어떤 사업을 우리가 보더라도 이 세상에서 이렇게 부처님의 교화 사업같이 이렇게 승승장구로 발전해 나온 그런 일은 없습니다. 어찌 부처님의 교화사업같이 크게 발전했겠습니까? 역사상에 그 면열해간 그 많고 많은 훌륭한 조사스님들 또 훌륭한 제자들 그런 그분들까지 생각한다면 참 대단한 교화사업으로 날로 번창해가고 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영산당시에 여기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이라고 했는데
獨修聖 乃至 千二百諸 大阿羅漢 無量慈悲聖衆
독수성 내지 천이백제 대아라한 무량자비성중
이 분들은 수불부촉(受佛付囑)이라고 그랬어요.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영산당시에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사람으로써 십대제자 십육성 이렇게 나가는데 이건 법화경을 근거로한 예불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 부촉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당부, 부처님의 지시,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일 그 자체가 부처님의 지시와 가르침과 당부를 다 받은 것이죠. 특히 부촉이라고 할 때는 수기의 의미를 많이 담고 있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어떻게 수행해서 언제쯤 성불할 것이고 그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교화하게 되겠는데 성불하면 부처의 이름은 무엇이고 국토의 이름은 무엇이고 또 세세하게 부촉하고 수기하는 데는 제자들 이름까지도 열거한 그러한 부분들이 있죠. 그래서 여기에 십대제자가 다 법화경에서 수기를 받았고 또 수많은 그 아라한들이 수기를 받고 그러죠. 여기 십육성 오백성은 말할 것도 없고 모두가 수기를 받고 나중에 상불경보살(常不經菩薩)의 입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을 다 수기하는 그런 내용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법화경입니다.
상불경보살은 어떻습니까? 아무리 참 우리가 기억해 내고 그것을 다시 생각하고 또 이야기를 해도 참으로 감동적인 그런 가르침이 상불경보살의 이야기인데요. 항상 상(常)자 아니 불(不)자 가벼울 경(經)자 항상 상대를 가벼히 여기지 않고 존경하노라. 부처님으로 존경한다. 왜냐? 모두가 부처님이기 때문에 이런 뜻이죠. 이분은 경을 읽거나 참선을 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하지 않고 모든 사람. 만나는 사람마다 전부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예배하고 또 수기를 줍니다. 나는 당신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깁니다.
당신은 반드시 부처님이 되시기 때문에 나는 부처님으로 이렇게 받들어 섬깁니다. 이렇게 하니까 어떤 사람들은 잘 듣지만 혹 어떤 사람들은 되지도 않은 비구가 쓸데없는 허망한 수기를 나에게 주느냐 너같이 도(道)도 높지 않고 법력도 없는 사람이 주는 수기 믿지도 않는다 하면서 욕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막대기나 돌로 때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분은 저만치 도망을 가서 또 그 사람을 향해서, 돌을 던지고 막대기로 때린 그 사람을 위해서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하죠. 나는 그래도 당신을 부처님으로 받들어 섬기고 존중합니다. 당신을 부처님이 되실 분입니다. 그런 말씀을 합니다.
숱한 고초를 받아가면서 그런 모든 사람들에게 부처라고 하는 사실을 일깨우는 거죠. 그게 인불사상의 극치입니다. 법화경이 수기품이 많은데 수기품 말고도 그냥 수기품이 있고 오백제자 수기품이 있고 그 외에도 수기가 간간히 이어지는데 그 수기의 절정이 바로 상불경보살품에서 그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모든 사람은 다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법화경이 회삼귀일(會三歸一)아닙니까? 삼(三)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다종다양한 삶의 형태와 모습과 수행의 차제들이다 라고 볼 수가 있고 그것은 궁극에 가서는 하나인 부처의 삶으로 귀결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삼승(三乘)을 모아서 일승(一乘)으로 귀결한다하는 것이 회삼귀일의 법화경의 그 내용이죠. 그 속뜻은 그렇습니다.
모든 사람! 지금 어떠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부처님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존재의 실상을 꿰뚫어 보면 모두가 부처님이다. 제대로 못 보아서 중생으로 보이고 도둑놈으로 보이고 나쁜 놈 사기꾼 뭐 온갖 흉악한 그런 사람으로 보이지만은 보다 더 전문가적인 그런 존재의 실상의 꿰뚫는 안목으로 본다면 그대로 참 부처님이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바로 법화경이죠. 마치 옛날에 연성지벽(連城之壁)라고 하는 그런 유명한 구슬이 있었죠. 어떤 사람이 그걸 왕에게 바쳤는데 왕이 겉에는 돌로 되어 있고 안에는 아주 뛰어난 구슬인데 돌을 가지고 뛰어난 구슬이라고 속였다고 쫓아냈죠.
그 다음에 또 왕에게 바쳤는데 또 이제 알아주지 않고 쫓아냅니다. 처음에 한번 그랬을 때 다리하나를 잘라요. 그 다음에 두 번째도 다리하나 잘립니다. 그런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또 세 번째까지 바치게 되는데 그럴 때 산에서 아주 슬피 울어요. 엉엉 아주 슬피 우는데 그 슬피 우는 울음소리가 워낙 애절해서 왕의 귀에까지 들렸고 왕이 그 사람을 불러서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아이~ 왕을 속이고 국가형벌을 받아 다리 둘 잘린 사람이 너 뿐이더냐? 어찌하여 그렇게 서글프게 우느냐 하니까
내가 다리 잘린 것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천하의 명옥을 몰라주는 것이 슬플 뿐입니다. 그래서 웁니다. 라고해서 그래 세계적으로 유명한 옥 감정사를 불러가지고 감정을 해보니까 정말 천하에 둘도 없는 훌륭한 옥이더라. 하는 그런 이야기죠. 그래서 성(城)을 하나, 지금 땅으로 치면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나 뭐 이렇게 큰 땅을 잘라서 줬다 해서 그래서 연성지벽이라 이런 말도 있죠. 그와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돌이지만 그 속 내용을 전문가의 안목으로 자세히 보면 아주 세상에 둘도 없는 그런 값비싼 옥(玉)이듯이 우리 중생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사기꾼이고 도둑놈이고 뭐 남자. 여자. 늙었다. 병들었다. 저 사람은 성격이 영 형편없는 편협한 사람. 외곬수. 고집불통 등등 온갖 좋지 아니한 형용사를 다 동원해서 사람을 낮춰서 보지만은 그러나 부처님이나 보살이나 조사님 같은 그런 사람을 보는 전문가의 안목을 가진 사람의 눈에는 참으로 소중한 생명이요. 소중한 부처님이요. 그 사람 그대로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을 보시고서 그렇게 눈에 들어오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부처님도 결국은 최후로 내가 사람들에게 일러줄 말은 “그대들이 그대로 부처님이다.”하는 이 사실을 일깨워주고 싶다하는 것. 이것뿐이죠. 달리 다른 것 있겠습니까? 그래서 법화경이 불교의 결론으로서 최후의 열반을 앞두고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노라고 하는 그런 이야기도 법화경에 있지 않습니까?
이런 것은 참으로 차원이 높은 경전을 우리가 잘 공부해서 정말 불교에도 여러 차원의 가르침이 있는데 이왕이면 우리에게 큰 소득이 있는 높은 차원의 가르침을 마음에 잘 새겨듣고 그것을 느끼고 깨달아야 할 줄 압니다. 영산당시(靈山當時) 수불부촉(受佛付囑)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앞서 간단하게 말씀드린 그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십대제자(十大弟子)! 십대제자는 우리가 다른 기회에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십대제자는 첫째 지혜제일 사리불. 신통제일 목건련. 또 흔히 선종에서는 두타제일 가섭존자를 치고 그 다음에 뭡니까? 다문제일 아난타를 칩니다만은 사실 부처님 당시나 경전상에 많이 나타난 그런 인물로 볼 때는 사리불. 목건련을 치지요. 두타제일 가섭존자. 천안제일 아나율. 혜공제일 수보리. 금강경의 주인공이죠. 수보리. 설법제일 부루나. 논의제일 가전련. 지계제일 우바리. 밀행제일 부처님의 아들 라후라. 다문제일 아난타 이렇게 십대제자가 주축이 되죠. 너무나도 유명한 그런 제자들입니다.
이런 분들이 다 법화경에서 수기를 받지요. 구체적으로 이름을 거론해 가면서 수기를 받는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십육성이라고 해서 우리가 영산전이라고 큰 절에 가면 십육나한을 모셔놓은 전각이 있죠. 그 십육성이 바로 많은 나한아라한과를 증득한 부처님의 제자들이 많은데 그중에서 특히 십육아라한을 열거합니다. 십육나한 또 오백나한 천이백나한 이렇게 분류를 하죠.
여기에 이름만 조금 소개를 하면 빈도라발라타사(賓度羅跋惰) 가락가벌차(迦諾迦伐蹉), 가락가발리타사(迦諾迦跋釐墮), 소빈타(蘇頻陀), 낙거라(諾距羅), 발타라(跋陀羅), 가리가(迦理迦) 벌사라불다라(伐闍羅弗多羅), 수박가(戌博迦), 반탁가(半託迦), 나호라(囉怙羅), 나가서나(那迦犀那), 인게타(因揭陀), 벌나파사(伐那婆斯), 아시다(阿氏多), 주다반탁가(注茶半託迦)존자 이렇게 열여섯 명의 그 이름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이분들은 당시에 현존했던 역사적인 인물이다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나한 신앙이 우리나라에도 십육나한은 큰절에는 거의 다 모시고요. 그 다음에 오백나한을 모신 사찰도 꽤 있죠. 우리나라에도 나한신앙이 상당한데 특히 나한 신앙은 중국에서 아주 성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성하죠. 나한! 그 실물, 보통 사람의 크기만 한 그런 형상을 오백명을 법당에다 모셔놨는데 그 법당 크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그런 모습들을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십육나한은 말할 것도 없고 오백나한을 모두 조성을 해서 그렇게 모신 사찰이 많죠. 그만치 나한 신앙이 성합니다. 우리나라에도 나한 기도가 영험이 있다 그런 이야기도 있어서 기도 좋아하시는 분들은 특히 나한전에서 기도하는 경우가 있죠.
제가 어릴 때 해인사에서 강원 학인으로 있을 때 나한전부전을 봤어요. 대개 삼배(三拜) 정도 합니다. 각 법당은 거의 삼배로써 끝내는데 그 십육나한이 모셔져있고 거기에 마침 어떤 분이 기도를 하면서 십육나한 사시는 곳. 그 다음에 이름을 쭉 적어서 걸어 놓았길래 마침 잘되었다 싶어서 내가 부전 보는 동안 십육나한 이름을 거론하면서 예배를 드렸던 기억도 새삼 납니다. 그리고 여기 오백성이라고 되어있죠. 여기 오백성도 역시 오백나한 아라한과를 증득했다하는 그런 뜻이죠. 그 다음에 독수성은 홀로 수행한 성인, 이런 말인데 독성각이라고 잘 알려져 있죠.
그 다음에 천이백제대아라한 그랬습니다. 부처님을 모시고 다니는 부처님의 제자가 그걸 상수중 , 항상 따라 다니는 대중. 그러죠. 천이백오십인. 사실 천이백오십이라 그러는데 큰 숫자만 들어서 천이백명 그렇게 합니다. 금강경에서 천이백오십인으로 더불어 계셨다. 이런 표현이 있죠. 이들은 여러 큰 아라한이다 그랬습니다. 보통수행의 계의를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 이렇게 해서 제일 수행이 높아진 단계를 아라한이라 그렇게 하죠. 부처님도 아라한이라고 표현한 예가 있습니다.
응공! 공양 받을만하다. 학덕이 높고 수행이 높아서 공양 받을 만 하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말 떳떳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공양 받을 만한 인물이 되는 것. 그것도 쉬운 게 아니죠. 참으로 어려운 경지입니다. 이분들이 다 그런 경지에 올랐다하는 것입니다. 이분들은 한량없는 숫자이고 그리고 모두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분들이기에 자비하신분이다. 그리고 성스러운 대중들이다. 이것을 다시 정리하면 영산당시에 부처님의 부촉을 받은 십대제자 그리고 십육아라한 오백아라한 독수성 그리고 천이백 여러 큰 아라한들 그리고 그 외 한량없는 자비스러운 성인대중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드리옵니다. 그 다음에 두 번째
至心歸命禮
지심귀명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드립니다.
西乾東震 及我海東 歷代傳燈 諸大祖師
서건동진 급아해동 역대전등 제대조사
서건(西乾)은 서양, 여기서 서쪽하면 인도를 말합니다. 동진은 중국을 말하는 것이고요. 그리고 급아해동(及我海東)하면 우리나라. 우리나라는 해동! 옛날에는 다 우리나라를 해동이라 그랬죠. 바다 동쪽이다. 원효스님도 해동사문 원효! 이렇게 표현을 하고 신라 고려 때는 거의 해동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습니다. 인도와 중국과 우리나라에까지 불교가 전해 내려오면서 대를 거쳐 오면서 부처님의 법의 등불! 진리의 등불을 전해오신 여러 큰 조사스님들. 조사들 그리고
天下宗師 一切微塵數 諸大善知識
천하종사 일체미진수 제대선지식
천하의 종사들 그 조사 외에 그 다음의 도 그 다음으로 또 학덕이 높고 도를 이루시고 수행이 깊은 그런 큰 스님들을 종사라고 그러죠. 종사라는 말 요즈음도 많이 씁니다. 종사! 대종사라는 말까지 씁니다. 그런 종사님들 그런 일체미진수! 모든 그야말로 먼지 숫자와 같이 많고 많은 그런 큰 선지식들 그런 분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이 목숨 다하여 귀의하고 예배드립니다. 이런 뜻이죠. 그러니까 이 말속에는 부처님 당시의 십대제자, 십육성, 오백성, 독수성, 천이백아라한은 앞에서 끝났고
그 외에 인도에 있었던 많은 도인들 큰스님들 덕이 높은 이들. 수행이 깊은 이들. 그리고 중국에 역시 아주 덕이 높고 아주 도가 높은 그런 이들 그리고 그 다음에 우리나라에 역시 덕이 높고 도가 높고 수행이 깊은 모든 조사스님들. 종사스님들 그리고 수없이 많고 많은 선지식들 이 선지식이라는 말 속에는 정말 눈을 뜨고 보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선지식이 될 수 있겠죠. 그런 많은 선지식들께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드린다하는 그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행여 빠진 분이 있을까 싶어서 모두 모아서 한꺼번에
至心歸命禮
지심귀명례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드립니다.
十方三世 帝網刹海 常住一切 僧伽耶衆
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승가야중
승가라고 하는 말은 앞에서도 얼핏 언급했듯이 대승불교적인 입장에 있어서는 출가중, 재가중을 함께 일컫는 말입니다. 심지어 출가승 재가승이라는 말도 있듯이 사부대중이 모두 승가중입니다. 크게 보고 넓게 보면 그래요. 또 그것을 나누어서 출가대중만을 승가라고 부르는 그런 경우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 모든 분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고 예배드리옵니다. 여기까지 승보에게 예배드리는 사정례가 끝나고 그 다음에
唯願 無盡三寶 大慈大悲 受我頂禮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수아정례
유원 무진(唯願 無盡), 회향문인데요. 여기에는 예불문을 삼단으로 나누면 여기는 결론에 해당되겠습니다. 회향문인데 유원 무진삼보 대자대비, 오직 원 하옵나니 여기서 다 거론을 한 것 같지만 또 이제 빠진 삼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무진삼보, 다함이 없는 삼보! 삼보란 다함이 없죠. 또 따지고 보면 대자대비 삼보께서는 대자대비로 저희 정례를 받으십시오.
冥熏加被力 願共法界諸衆生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그리고 가피력을 가만히 내려주십시오. 명훈가피력! 이 명훈가피력(冥熏加被力)이라고 하는 말에 우리가 좀 유의를 해야 됩니다. 예불한번 드리고 무슨 큰 가피를 받으려고 하겠습니까 만은 이 가피라고 하는 문제는 우리가 기도를 한다든지 불공을 드린다든지 천도를 지낸다든지 뭐 예불을 한다든지 아니면 독경을 한다든지 주문을 외운다든지 등등 이런 일을 할 때
이 중생의 마음이 꼭 어떤 댓가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어떤 부처님이나 성인의 가피를 받고 싶어 해요. 은근히 그런 걸 바라죠. 오로지 가피력을 생각하고 하는 이들도 물론 있고 상을 내면 안 된다 하는 것을 알고 보다 더 높은 차원의 불교를 잘 아시는 분들은 특히 이런 가피에 대한 생각을 좀 송구스런 마음이 생겨서 잘 떠올리지는 않습니다만은 그러나 가피가 또 없을 수가 없는 것이 이 일입니다.
그런데 가피에는 현훈가피(顯熏加被)가 있고 명훈가피가 있어요. 명훈은 어두울 명(冥) 훈습할 훈(熏), 나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그 인격이 달라지고 내 삶의 태도가 달라지고 내 행동이 달라지고 마음 씀씀이가 달라지고 말씨가 달라져. 그래서 내 가정도 달라지고 내 주변이 달라지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여러 해 기도하고 불교 공부하고 절에 다니고 또 이렇게 불교와 가까이 접하고 좋은 도반들 만나서 좋은 말씀을 배우고 내 마음 쓰는 것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져서 자기도 모르게 옛날보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죠. 그리고 또 하는 일도 순리대로 인연의 이치를 알고 이치를 알게 되면 순리대로 잘 풀립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 명훈가피예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변화해 있는 것. 조금씩 조금씩 변화해서 나중에 가서는 크게 변화되어있는 이러한 일들이 사실 명훈가피력입니다. 현훈가피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드문 일인데요. 현실적으로 바로 이렇게 드러나게 어떤 가피를 내리고 가피를 받는 그런 예들도 있습니다. 또 몽중가피(夢中加被)라고 하는 것이 있죠. 몽중, 꿈에 예를 들어서 아픈 사람이 어떤 불보살로부터 약을 받아 먹었더니 자고 나니까 씻은 듯이 나았다. 하는 그런 몽중가피도 또 있습니다. 그래 명훈가피, 현훈가피, 몽중가피 이런 것들을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는데 그러나 99.9%는 명훈가피라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그게 편안해요. 또 그게 정상적인 것이고, 그게 이치에 맞는 것이고 순리적인 것입니다.
뭐 꿈에 어떻게 했다. 그것 다 사람 이상하게 되기 딱 좋은 그런 이야기들이죠. 또 현훈가피라고해서 당장에 눈앞에 보는데 예를 들어서 자동차운전을 잘못해 가지고 낭떠러지에 떨어지는데 갑자기 뭐가 나타나 가지고 그것 뭐 차를 덜렁 들어가지고 다른 곳에다 이렇게 갖다놓았다. 이런 일이 만약에 있다고 합시다.
그런 것이 현훈가피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무슨 그런 일이 있다고 하는 건 좀 그렇죠 아무래도. 99%가 아니라 99.99%입니다. 그게 명훈가피예요. 99.99%가. 그걸 생각하시고 우리가 정말 불교공부라고 하는 것. 불교를 믿는 일이라고 하는 것. 이것은 부처님이 깨달으신 세상과 인생사의 바른 이치를 깨달은 것이고 당신이 깨달으신 바른 이치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서 알면 더욱 좋지만은 우리가 스스로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불보살이나 조사스님들의 그런 깨달으신 분들의 가르침대로 우리가 살고 그분들의 지혜를 빌려서 생활에 활용하면 무리가 없죠. 그것이 말하자면 불교인으로써 살아가는 바람직한 길입니다. 부처님이 진리를 깨달았다. 그러잖습니까? 참진(眞)자 이치 리(理)자 참다운 이치를 깨달았다는 거죠. 그럼 우리가 부처님께 참다운 이치를 배우는 것입니다. 배워서 그것을 우리가 우리인생에 우리 삶에 우리생활에 적용하는 거죠.
이게 불교 공부하는 길이고 불교를 믿는 정상적인 마음 자세입니다. 불교 믿고 부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그래가지고 얼토당토 안 한 그런 기상천외한 횡재를 노린다든지 정말 어떤 특이한 일을 염두에 둔다고 하면 그건 참 아무래도 곤란한 일이 되겠죠. 그래서 명훈가피력에 대해서 제가 좀 역설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가피력을 가만히 내려주십시오.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그리고 또 원하옵나니 원할 원(願)자가 두 번이나 있죠. 다같이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自他一時成佛道
자타일시성불도
나도 그리고 남들도 일시(一時)에 불도를 이루어지이다. 이루어지기를 원하옵니다. 이 불도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도. 깨달음의 도. 그게 뭡니까? 세상과 인생에 대한 올바른 이치에 대한 길 그것을 불도라고 하는 거죠. 그것을 다같이 이루기를 원한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무슨 횡재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무슨 큰 보따리가 떨어져서 내 앞에 굴러오는 것도 아니고 내가 지어놓지도 않는데 무슨 큰 덕을 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이치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죠.
불교의 가르침이 수없이 많습니다 만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연기법을 우리가 잘 이해해서 인연의 이치를 수순하고 인연의 이치에 맞게 우리가 사는 것. 모든 것을 인연의 이치대로 돌아간다 라고 하는 그것 하나만 이해하고 살더라도 상당히 공부가 된 사람이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오직 원 하옵나니 다함이 없는 삼보께서는 대자대비로 저희 예배를 받아 주시고 가피력을 가만히 내려주십시오. 그리고 또 원 하옵나니 법계의 모든 중생들 저도 그리고 다른 이들도 일시에 깨달음의 길, 인생과 세상의 깨달음의 길을 이루게 하여 지이다. 이게 이제 유원 무진 삼보대자대비 수아정례 명훈가피력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라고 이렇게 말씀 드릴수가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예불문 서론이 다게 내지 오분향까지가 서론에 해당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칠정례가 본론이고 그 다음에 회향이 결론으로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그 다음은 아침 예불을 마치면 행선축원(行禪祝願)이라는 게 있고 또 이산혜연선사발원문(怡山慧然禪師發願文)을 외우는 그런 사찰도 있고 합니다. 내일은 행선축원 내지 이산혜연선사발원문을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늘도 많은 분들이 이렇게 동참을 하셨습니다.
71명이 지금 창에 계시는데 반가운 이름들 한번 부르겠습니다.
(초연화님, 미래님, 수경심님, 화엄법해스님, 원행님, 캔들댄스님, 도류님, 심우행님, 무량화님, 정안행님, 대원성님, 진각화님, 환희지님, 심우파님, 날마다좋은날님, 소리님, 대원혜님, 전산님, 국화꽃향기님, 마니주님, 중현스님, 묘하님, 있는그대로님, 미륵골님, 청비님, 항상님, 청정안님, 관음도님, 불퇴지님, 선법행님, 발심화님, 저기 호주에서 오신 원일님, 최 교수님 잘 계시죠? 엊그저께 친불회 회원들 법회 같이 했습니다. 무아심님, 무영수님, 현우님, 대해월님, 나무님, 정각행님, 유화의님, 니드라님, 연기의도리님, 보현님, 제법실상님, 일광명조님, 이상한 글자가 떴네요. 여울님, 우담화님, 선재행님, 인희님, 승원님, 하늘자인님, 한홍님, 만월님, 뚱이아빠님, 묘현님, 고불심님, 묘운행님)
이렇게 많은 분들이 동참하셔서 비록 수월도량, 가상공간 전법도량이지만 이렇게 자리를 빛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예불문 제3강 녹취: 인터넷 전법도량 염화실 녹취전법행자 一輪月]
처음 법문을 하게 되었는데 초심자들이라 예불문을 하려고 했더니
무비큰스님의 좋은 법문이 있어 많은 도움받아갑니다
이차인연공덕으로 행복하여지이다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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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좋은 가르침 깊이 새기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_()()()_
감사드립니다.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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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드립니다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