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형
일본열도는 북위 20-45。에 걸쳐 약 3,000km에 이르며, 몇 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377,435km²인 전국토의 80%이 산악 지대인 이 나라는 혼슈, 홋카이도, 큐슈, 그리고 시코쿠의 주요한 4개섬과 3,500여 개의 부속 도서로 이루어졌다. 자료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본의 활화산은 40-190개에 이른다.(일본 최고봉인 후지산도 이론적으로는 활화산이라 볼수도 있지만 1707년이후로는 휴식상태에 들어가 있다.) 지난번 고베시를 아비규환의 상태로 빠뜨렸던 경우에서와 같이, 아직 '젊은' 지형의 일본은 언제라도 지진이나 화산의 재앙에 노출되어 있는 셈이다.
●기후
남북으로 길게 뻗은 지형으로 인하여 일본은 다양한 기후대를 나타낸다. 북부의 홋카이도는 긴 겨울과 눈으로 유명하지만, 큐슈로 내려오면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를 띠게 되고, 오키나와에서는 제주도와 비슷한 아열대성 기후를 즐길 수 있다.
연중기후는 우리나라와 거의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여름의 태풍은 일본 속에서 북상하고, 겨울의 시베리아 한랭전선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을 얼어붙게 만드는 까닭에 며칠의 시차만 제외하면 거의 같은 기후를 보인다고 할 것이다.
수도 도쿄는 눈이 많이 내리지는 않지만 아이슬란드의 레이카바크보다 1월 평균기온이 더 낮은 정도의 추운 날씨라고 한다. 여기에는 찌는 듯한 여름날씨를 생각하면 도쿄는 서울과 비슷한 기후조건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여름날씨라도 일본의 더위는 습기가 많아 매우 불쾌(?)한 기분을 갖게 한다. 이 때문에 목욕문화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 인구와 인종
일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몽고족에 속한다. 일본인들 나름대로 신화 전설을 만들어 자신의 출생을 미화하고 있지만, 일본인의 기원은 우리나라에서 약 1만 년전에 건너간 사람들이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에는 현재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약 123,000,000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대부분은 한국계이다.
일본의 외국인 차별은 정평이 나있는 사항으로, 특히 지문날인 강요는 세계적인 웃음거리에 속한다. 일본 자국민은 지문날인을 하지 않으며, 외국인과 범죄자들만 지문날인을 강요당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의 외국인에 대한 인식수준을 알수 있다.
기타 인종은 홋카이도 윈주민인 소수의 아이누족 (약 14,000명)과 기카의 동서양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것은 경지면적당 인구 밀도에 관한한 일본은 세계최고이다.
● 행정구역
도쿄, 쿄토, 오사카와 홋카이도를 제외하고는 일본의 행정구역은 지리적 관계에 따라 나누어져 있다. 홋카이도는 도(道)이며, 도쿄는 토(都), 쿄토와 오사카는 주변의 일대를 포함하여 부(府)로 분류되어 있다. 그 외 지역은 켄(縣) 이라 불리는 43개의 행정단위중 어느 한곳에 속한다.
● 역사
▶나라(奈良)이전
일본은 나라시대 이전의 역사적 기록을 갖지 못한 나라이다. 따라서 이 시기전의 역사에 대해서는 중국이나 한국의 자료에 의해 그들의 문화를 알아볼 수 밖에 없다. 일본에서는 약 10만년 전의 동굴거주 혼적이 발견되기도 했지만 그로부터 기원전 2세기까지의 연속성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형편이다.
기원전 2세기에 출현한 조몽문명의 주인공은 사실은 아이누족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은 폴리네시아나 동남아와도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도 홋카이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소수민족을 형성하고 있는 아이누족은 이 당시 일본전역에 걸쳐 거주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조몽문명 다음의 대표적 생활양식은 야요이( 生)라 불린다. 문명의 뚜렸한 이정표는 조몽문화에서 한 걸음 발전한 토기이다. 이 토기 제작술은 우리나라에서 전수해 준 것이다. 현재의 큐슈지방에서 도쿄에 이르는 주위에서 발견되는 많은 고분들은 당시의 일본역사를 조명해 줄 수 있는 결정적 실마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고분출토를 허용하지 않고 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일본 확실한 뿌리에 대한 비밀이 학문적으로 드러나는(?)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라(奈良)시대(710 - 784년)
이 시기는 일본이 비로소 국가로서의 개념을 형성하기 시작한 때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담징과의 교류로 기억되는 쇼도큐다이시(聖德太子)가 이 시기 직접 대표적인 정치가라 할 수 있다. 그는 국법을 세우고, 불교를 국교로 융흥케하였으며 교육과 문화의 일대 전기가 될 만한 발전을 가져온 장본인이다. 이 시기에 많은 불교사원이 지어졌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가장 도래된 목조건물로 알려진 호류지(法隆寺)사원이 있다. 호류지의 금당에는 고구려의 위대한 화가 담징이 그린 벽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진품은 화재로 소실되고 현재의 것은 복원된 것이다.
나라시대에는 위정자가 교체되어도 그의 승계자가 계속해서 이 곳을 도읍으로 하기 시작한 점이 눈에 띈다. 그전에는 정복자의 거주지에 따라 수도가 바뀌었던데 비해, 대단한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시 나라(奈良)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지금보다 더 큰 도시로 발전하였다.
이 시기의 불교는 악역을 수행하게 되는데, 사원이 막강한 금력과 권력으로 세상를 어지럽히기 시작하지 실권자였던 카무는 도읍을 헤이안으로 지금의 쿄토로 옮겨버린다. 794년의 일인데 쿄토는 이때부터 1868년까지 일본의 천년도읍으로 기능을 하게 된다.
▶헤이안(平安)시대(794-1192년)
문화의 융성기였던 이 시기는 일본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기를 부여한 때이다. 즉, '가나'라는 그들의 문자를 갖게 되었다는 점인데, 주지하다시피 문자의 탄생은 구비전승의 갖가지 이야기들을 기록으로 남기게 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그들만의 독특한 민족신화를 정립하게 되어 정신적인 통일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은 이 시기에 중국과의 빈번한 문화적 교류를 할 기회를 가졌고, 불교 교리와 고유의 신도(神道)를 합성하여 그들 역사의 기원을 치장하게 된다. 12세기에 접어들면서 실권자였던 후지와라(藤原)가문과 다이라(平)가문의 방탕과 부패로 호족의 반란이 빈발해졌다. 결국 1185년에 와서는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단노우아(壇の浦)- 지금의 시모노세키(下關)전투를 마지막으로 다이라를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른바 막부정치라는 정치형태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가마쿠라(鎌倉)시대(1192-1333년)
미나모토(源)는 가마쿠라(지금의 도쿄 근방)에 본거지를 두고 막부정치를 시사했다. 막부정치란 허수아비격인 왕을 뒷전에 물리고 쇼군을 중심으로 한 무사들이 실권을 행사하는 정치형태를 말한다. 쇼군은 이때부터 약 700년간이나 일본 정치으 모양을 결정짓는 물론 작용하다가 1867년 도쿠가와(德川)시대의 마지막 쇼군(將軍)이었던 케이키의 몰락과 함께 종막을 고하게 되었다. 서양의 기사와 흡사한 사무라이도 이 시대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가마쿠라 시대의 대표적인 사건은 쿠빌라이 칸 치하의 몽골군이 일본을 침략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쿠빌라이는 1274년과 1281년의 두 차례에 걸쳐 일본정벌을 휘책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특히 두 번째 침공에선 10만의 병력을 실은 쿠빌라이의 함대가 태풍으로 퇴각해 보낸 바람 (가미가제)이라는 것인데, 태풍이 몽골의 배들을 덮치듯, 2차대전 당시 미군함대위로 자폭해간 자살특공대 역시 가미가제라 불렀다. 몽공의 침입으로부터 화를 면한 후 막부의 힘은 더욱 강대해지게 된다.
▶무로마치(室町)와 아즈차모모야마(安土桃山)시대(1336-1603년)
외적으로 강대한 힘을 발산했던 가마쿠라 막부시대도 내부에서 발생한 분열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자, 왕을 지원하는 세력과 반란군인 무사계급과의 다툼이 계속되는 남북조시대가 뒤따랐다. 1336년부터 1573년까지는 무로마치 시대라 불리는데 일본의 풍물소개에서 자주 보게되는 킨카쿠지(金閣寺)가 이 시대의 대표적 건축물이다. 킨카쿠지는 무로마치 막부의 8대 수장이었던 아시카가 요시히사(足利義政)의 별장이 었던 곳이다.
교코(京都)의 황금시대와 함께 꽃피운 문화형태는 일본식 정원문화나 상류사회의 차예절 등으로 나타나는데, 그 당시의 대표적인 정원으로는 료안지(童安寺)의 돌과 모래를 이용한 정원등이 남아 있다. 상류층의 문화적 여유와 풍류는 보통 서민의 생활고를 근간으로 하는데 이 시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일본 전역은 계속되는 혼란의 와중이었다.
1568년 오타노부나가(織田信長)가 세력다툼을 끝장내고, 세력을 잡게되지만 1582년 암살당한다. 그를 이은자가 바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이다. 토요토미는 1583년 저 유명한 오사카성을 축조한다. 현재의 것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재건된 것이지만 토요토미는 내분의 수습책 명분으로 두번에 걸쳐 조선 침략을 도발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만다.
▶에도(江戶)시대(1603-1867년)
에도시대의 창시자가 되는 도쿠가와는 토요토미를 계승한 인물이다. 그의 막강한 영향력에 따라 일본 역사는 에도시대를 도쿠가와 시대라 부르기도 한다. 그는 허수아비왕을 교토에 살게 하고 에도(지금의 됴쿄)에 막부의 본산을 두었다. 당시 일본 전역은 봉건영수인 다이묘(大名)에 의해 관할 되는 270여개의 봉건영지로 나뉘어 있었고 모두 쇼군(將軍)인 도쿠가와에게 예속된 처지였다.
이 시기에는 서양과의 문물교류가 시작되었고, 카톨릭이 전파되었다. 기독교가 점점 세력을 얻어가지 무사정권은 쇄국정책을 실시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에서도 수천의 순교자가 양산된다. 외국문물과의 접촉을 피하기 위해 외국에 나갔다 귀국한 사람들이 처형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의 계급은 신분에 따라 귀족, 무사, 농민 상인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막부시대인 만큼 실질적인 권력은 무사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부를 축척한 상인들에 의해 가부키(歌舞伎)와 목판화, 의복문화가 발달하였다. 결국 외국과의 폐쇄적인 관계는 에도시대에 말기까지 이어졌다.
19세기로 접어들면서 민생고는 더욱 가중되었고 이에 따라 도쿠가와 막부의 위상도 추락해 갔다. 외국세력으로 부터 점증하는 문호개방 압력을 받던 일본은 1853년 미국의 매튜페리(Matthew Perry)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교역의 요구에 응하고만다. 도쿠가와 막부가 외국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하지 못했다는 힐난의 목소리가 커지고 혼란이 가중되자 1867년에 마지막 쇼군이었던 게이키가 축출되고 메이지 왕이 실권을 갖게 된다.
▶메이지(明治)왕정복고시대(1868-1912년)
메이지가 실권을 장악하고 난 뒤에도 처음 얼마간은 혼란의 나날이 계속되었다. 에도가 일본의 수도로 정해지고 도쿄로 개칭되었다.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일본은 봉건적 농촌국가의 폐쇄성을 떨쳐버리고 세계역사의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다. 권력이 중앙집권화되고 서구식 면모로 일신한 정부의 주도하에 산업화가 착수되었다. 이 시기에는 사이고 폭동으로 대표되는 사무라이의 마지막 발악이 있었지만 곧 제거되었다.
부국강병의 기치아래 서구화를 진척시킨 일본은 1889년에 와서는 서구식 헌법의 공표를 보게 된다. 여세를 몰아붙여 일본은 중일전쟁(1894-1895년)과 노일전쟁(1904-1905년)을 승리로 장식한다. 특히 노일전쟁의 승리는 황인종인 일본이 아시아를 벗어나 백인과 경쟁하겠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대표적인 사건이 된다. 비로소 군국주의 일본이 등장하는 것이다.
▶다이쇼(大正)시대(1912-1926년)
메이지 왕이 죽고 그의 아들 요시히토가 대를 이었으나 병약한 요시히로는 근대일본사에서 별로 두드러지지 못한 인물이다. 여하튼 그가 권좌에 있었던 이 시기를 다이쇼 시대라 부른다. 일본은 1차대전에서 연합군측에 한다리를 걸친 덕택에 경제적으로 신장할 절호의 찬스를 맞게 된다. 분출하는 사회적 요구로 투표권이 확대되고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쇼와(昭和)시대(1926-1988년)
우리는 결코 있을 수 없는 히로히토(裕仁)가 재위한 시대를 말한다. 일본은 언제나 그랬듯이 확대된 군부의 세력과 불만을 만주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잠재우려 했다. 만주침략을 감행한 1931년, 민주국을 세우고 1933년에는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독일, 이탈리아 등과 더불어 파멸로의 행진에 가속이 붙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1940년 이들 두나라와 동맹을 체결하고 대동아공영권을 허울 좋은 슬로건을 내걸고 결국 진주만 습격을 감행한다. 이 후 일본은 온갖 방법을 동원 세력확장(?)을 위해 혈안이 되어보이지만 원자탄을 맞고 항복하는 신세가 된다.
전후, '경제적 동물'이라는 닉네임을 가지고 일본은 다시 한 번 세계최대의 경제강국으로 부흥할 찬스를 놓치지 않는다. 1989년 전범 히로히토의 사망에 뒤이어 그의 아들 아키히토(明仁)가 왕위를 세습하여 헤이세이(平成)시대가 시작된다.
●일본 경제
2차대전의 상흔으로 초토화되다시피한 일본 경제의 부흥은 역사적으로 유래없는 것이었다. 패전 직후인 1946년 17불에 지나지 않던 GNP 수준이 지금은 세계 최고수준에 이르렀으니 저들의 잠재력이 엄청난 것만은 틀림없다. 소니 텔레비젼으로 대표되는 일본은 컴퓨터를 제외한 거의 전분야에서 현재 세계시장 리더국의 면모를 과시하고 있다. 달러화의 빈번한 가치 변동으로 일본경제가 흔들릴 것으로 예상했던 미국의 기대는 헛된(?)것 이었다. 엄청난 무역수지 흑자국 일본의 경제는 의외의 탄력성을 보여 다시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이제는 아예 미국을 사들이기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구매력을 자랑한다.
다른 나라의 질서와 경탄에 아랑곳하지 않고 일인자의 자리를 굳건히 지켜가는 일본 경제는 정보화 사회에 접어든 현시범에서는 더욱 빛을 발할 전망이다. 문제는 일본이 가진 병적인 선민의식과 접어들줄 모르는 오만함이 나온 살림살이로 인해 더욱 고조될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종교
일본의 종교는 크게 신도(神道)와 불교, 기독교로 나뉜다.
▶신도(神道)
2차대전과 함께 국교로서의 운명을 다한 종교이지만 여전히 일본인의 의식을 하나로 엮어주는 다분히 일본적인 믿음이다. 기독교가 유럽의 많은 신화나 토속적 믿음을 흡수해서 발전하였듯이 신도 역시 샤머니즘이나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에 산재한 신도 사원은 등급에 따라 진자, 다이샤, 진구 등으로 불린다. 신사(神社)는 입구의 도리이(鳥置)로 불리는 문으로 특징지워진다.
불교와 신도가 무리없이 어울려 일본인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특이할지 모르지만 현실이다. 불교가 정교한 구석을 장악하고 있는 대신 신도는 접근이 쉬운 단순함으로 그들의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참조 : 신도(神道)일본의 왕실가계가 태양의 여신인 아마테라쓰 오미가미로부터 유래되었다는 믿음에 근거를 둔 일본의 재래종교, 신도는 불교의 교리와 방식을 많이 받아들였는데, 핵심은 모든 만물에 가미(신 또는 신력(神力))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소한 일에서라도 집중을 통하여 사물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 곳곳에는 신도 사원신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왕에 대한 숭배와 일본 무술에 배어있는 선(禪)적 요소가 합해져 신도와 일본군국주의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불교
6세기경 우리나라를 통해 일본에 전파된 불교는 신도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진 종교이다. 쿄토나 도쿄를 위시한 곳곳에 불교 사원과 불상, 불교 미술이 산재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기독교
일본 인구의 약1%정도가 기독교라 한다. 특정종교를 국교로 강제하고 있지않는 문명국에서 기독교가 가장 약세한 곳이 일본이다.
▶기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만, 일본에도 종교의 형식을 한 갖가지 유형의 믿음이 자리한다. 이들 중에는 집단 자살극이나 살인극으로 치닫는 경우도 있는데 여하튼 그 뿌리는 모두 위에 열거한 주요 종교에서 나름대로 파생해 나간 것이다.
특히 얼마 전부터 일본 국민을 공포에 떨게 하고 있는 독가스의 주범(?) 오옴교도 신흥 종교의 한가지로 추정되는데, 빛이 밝을수록 어두움이 짙다는 진리가 새삼 재확인된 경우이다.
문학
일본 문학을 언급할 때 맨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마 헤이안 시대의 여류문인이었던 무라사키 시키부의 소설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일 것이다. 서양에도 정평이 나있는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라 한다. 시대상 중세문학으로 분류되는 이 시기에는 히라가나(平假名)와 카타가나(片假名)가 만들어져 문학이 대중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근세문학은 에도시대에 주로 형성되는데 대표작가로는 하이쿠로(俳句)로 유명한 뱌쇼(芭蕉)의 소설쪽의 모리오가이(森鷗外)가 있다.
현대문학으로 넘어오면서 일본은 점차 세계문화의 한 축으로 등장한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설국>의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와 최근의 오에 겐자부로 등이 낯설지 않은 이름들이다.
미술
고대 일본의 미술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영향을 받은 뒤 급속도로 신장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불교가 전수된 6세기 이래 일본 미술은 불교신앙 생활의 매개적 예술로 가능하기도 하였다. 헤이안(平安)시대에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영향이 퇴색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독자적 미술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했으며,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와서는 중국 선(禪)의 분위기가 물씬한 묵화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모모야마(桃山)시대에 오면 쇼군을 비롯한 막부지배계급의 위세를 과시하는 그림이 화려한 그려지고 자연과 인물을 소재로하는 기법이 도입되었다.
16세기에 이르러 세수아트 선교사들을 통한 유화기법이 전수되면서 일본 미술은 비교적 빠른 시간에 근대적 화풍을 가진다. 에도시대에는 각기 화풍을 달리하는 가노, 토사, 림파와 같은 화가가 생겨나 일본 미술의 발전을 가져온다.
메이지(明治) 왕정복고는 다른 모든 분야에서와 마찬가지로 일본 미술이 완전히 서양미술의 영향권에 진입한 시대가 된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화가들은 근대화에 있어 ----을 담당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네델란드의 고호 같은 화가는 일본 미술의 자연스러움에 반하여 그림을 수집하고, 자신이 직접 일본화의 --- 제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도 일본을 방문한 적이 없다.) 몸에 문신을 그려넣는 것 역시 일본 그림의 특색이라 할 수 있겠다.
현재의 미술은 서양화와 일본화로 양분되어 있다. 여기에 세계 최고의 --- 사랑하는 만화 문화를 덧붙여 기억할 수 있다.
♬음악
국악과 서양음악으로 대변되는 일본 음악은 중국과 우리나라 음악을 자양분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여 그들 나름대로 독창성을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일본 최초의 음악다운 음악은 중국 음악의 색채가 짙은 가기쿠라 불리는 것으로, 8세기 이래 4백년 동안 궁정음악으로 번성한 바 있다.
일본 음악의 초기 형성기에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악기와 같은 것을 사용하였으나 에도시대에 들어오면서 기타 모양을 한 3줄로 된 현을 가진 샤미센(三味線)이나 쇼(笙), 샤쿠하치(尺八) 등의 독자적인 악기를 이용한 연주가 시작되기도 했다. 리듬은 대개 2박자와 4박자이고 3박자는 거의 없다. 매우 간드리지고 달콤하며 가무곡으로서의 독특한 맛을 풍기는데, 민요도 많은 편이다.
메이지 왕 집권기 이래 보급된 서양음악은 주로 대도시의 중산층 사이에 보급되었다. 재즈를 비롯한 거의 모든 장르가 연주되는 오늘날의 일본 음악은 특히 대중음악에서 엄청난 시장성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연극
일본의 연극의 크게 노(能), 교켄(狂言), 가부키(歌舞伎), 분라쿠(文樂)와 같은 전통연극과 신파, 신국극, 신희극, 뮤지컬등 근대 이후에 선을 보인 대중연극, 마지막으로 2차대전 이후 신극단체에 의해 공연되고 있는 연극 등 크게 셋으로 나뉜다.
신도를 섬기는 종교적 차원에서 11세기경부터 시작한 노(能)는 궁정예술로 채택되어 대단히 세련된 모습으로 발전하였다. 화려한 동작의 가부키와는 달리 노는 참선적 요소가 강한 연극이라 할 수 있다. 주연 광대가 얼굴에 멘(面:가면)을 쓰고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노가쿠도(能樂堂)와 국립 노가쿠도에서 매달 정기공연이 있다.
교켄(狂言)은 노에서 파생되어 발전한 희극이다. 처음에는 딱딱한 주제를 싣고 있는 노의 가벼운 막간극으로 상연되던 것이 지금은 두 개의 시로 다른 노 사이에서 독립적인 영역을 확보한 채 공연된다. 노가 상징적인 주제의 연극이라면 교켄은 다분히 현실성이 강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두 장르 사이의 가장 뚜렸한 차이이다.
일본의 전통연극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가부키(歌舞伎)이다. 가부키는 귀족들의 연극인 노에 대한 반발로 17세기에 생겨난 것이다. 주로 음악과 노래, 율동이 어우러진다. 오늘날의 가부키는 특유의 현란한 복장과 더불어 전통적인 소재뿐 아니라 최신의 사건들마저 표현해 내고 있다. 가부키에서 특징적인 것은 여자배역을 비롯한 모든 배역을 반드시 남자가 한다는 것이다. 일본 문화가 주로 남의 것을 빌려 자기화 시킨 것으로 유명하지만 가부키만은 오히려 서양의 연극 조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일본의 음식
일본의 음식은 소니 텔러비젼이나 니콘 카메라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세계의 주요도시에서는 어김없이 일식집을 찾아 볼수 있을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메이지유신이래 아시아에서 벗어나서 세계속으로 나가자는 脫亞入歐의 기치아래 저들의 식생활도 많이 달라졌다. 서양인들과 같이 고기를 먹어야 대성할 수 있다는 발상이 작용한 것이다. 섬나라 일본은 세계 일류의 어업국이다. 따라서 해산물과 관련된 요리가 많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와쇼쿠(和食)이라 불리는 일본의 요리는 에도 시대 이후에 대중화되었는데 덴푸라, 소바등이 그것이다. 일본의 전통요리 중 하나인 가이세키(懷石)요리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한가지식의 요리가 나온다. 특기할 만한 것은 음식 조리술이 세련되어감에 따라 회를 비롯한 생선요리에서 비린내는 거의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음식은 서양의 영향을 받기도 했는데 돈까스나 고로케니 하는 것들은 서양음식의 일본식 변용이다. 외국인들이 일본음식을 점차 좋아하게 되는데 반해 일본의 신세대들은 햄버거를 비롯한 미국식 패스트푸드에 맛을 들여 고유 음식을 못먹겠다고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일본에는 우리 교포가 많이 거주하고 있으므로 한국식당을 차린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식당의 주인도 대부분 한국인이어서 편리하다. 음식으로 치면 강렬한(?) 기운이 넘쳐 아직도 세계적이라고 할수는 없지만 우리 음식도 어지간히 알려져 있다. 특히 지구상 어딜 가도 한국식 불고기 정도는 최고로 통한다. 어느 파리지앵은 쇠고기의 요리방식에 관한한 한국의 불고기만한 요리가 없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쓰키다시(付き出し)
본격적인 요리가 나오기 전에 식욕을 돋우기 위한 음식이다. 계절에 따라 생선류나 미역, 해삼, 두부류 등이 제공된다. 우리식으로 치자면 안주에 곁들이는 가벼운 술안주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젠사이(前菜)
정식요리의 경우 맨 처음 등장하는 요리. 예쁜 모양으로 주로 3가지의 재료를 쓴다.
△야키모노(燒き物)
일본의 특징적인 요리라 할 수 있다. 야키라는 말이 붙는 음식은 구이쯤으로 생각하면 쉽다. 굽는 방법도 다양하여 석쇠를 이용한 직접구이와 그릴을 이용하는 간접구이 둥이 있다. 꼬치로 굽는 경우도 있다. 시라야키(불에 구운후 간장을 곁들임), 데리야키(간장을 발라 구움), 시오야키(소금을 뿌리 구움), 미소야키(된장을 발라 구움) 등도 모두 구이이며, 요리방법만 조금씩 다를 뿐이다.
△니모노(煮物)
다시마나 가랭이포 국물을 이용하여 육류, 어패류, 야채류 등을 넣고 연하게 조린 음식이다. 일본식 조림으로 일본인 식단에 단골로 등장한다. 반찬이나. 술안주로 제격.
△스이모노(吸物)
국물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장국과 된장을 이용한다. 일본에서는 숟가락을 이용하지않고 그릇을 들여 마신다.
△스노모노(작の物)
설탕, 식초, 간장 등을 넣어 버무린 초무침을 말한다. 서양요리의 셀러드에 해당하는 것으로 일본요리에서는 필수이다. 입안이 개운해지는 음식이다.
△사시미(刺身)
수산업이 발달한 일본에 가장 어울리는 음식으로 생선회를 말한다. 회를 뜨는 방법과 요리법에 따라 가도쓰쿠리(角作り), 히키쓰쿠리(引き作り), 다시마시메쓰쿠리, 하라이(洗し), 유비키쓰쿠리(湯 引き作り)등으로 구분한다. 일본에서 사시미 문화가 얼마나 발달했는가는 회 뜨는 솜씨만 보아도 짐작이 간다. 횟집을 몇 대째 기업으로 하고 있는 한 일본은 살아있는 생선의 신경을 전혀 건드리지 않고 회를 떠서 더욱 감칠 맛을 낸다. 그 증거로 뼈와 머리만 남은 생선을 물속에 놓아주면 다시 살아나서 돌아다닌다고 한다.
△스시(司)
사시미와 함께 가정 널리 알려진 일본식 초밥을 말한다. 생선과 야채, 소금 식초, 미림(조미료로 사용하는 쌀술)을 이용해 만든다. 보통 간장에 찍어서 먹는다. 간단한 음식처럼 보이지만 맛도 만만치 않고 가격도 그다지 싸지 않다.
△ 미소시루( 汁)
된장국, 주로 아침식사를 할 때 곁들인다. 일본인들은 집안마다 특이한 된장조리법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오뎅 (おでん)
어묵을 주원료로 해서 오랜시간 요리한 음식이다. 부재료는 무, 곤약, 유부등이 들어가며 장국에 넣어 익힌다. 일본식 술안주나 반찬으로 대용되며 꼬치라고도 한다.
△우동과 소바(うどん, そば)
둘 다 국수의 일종이지만 오사카 태생의 우동(우리말은 가락국수)은 밀가루로 만든것이고 도쿄의 전통음식인 소바는 메밀로 만든 것이다. 우동은 우리와 거의차이가 없고 소바는 시중에서 파는 메밀국수와 꼭 같다. 소바는 면을 잘게 썬 파와 무를 섞은 장에 찍어 먹는다.
△ 덴동(天井)
새우덴푸라를 얹고 양념간장에 찍어 먹는 튀김 덮밥이다. 식성에 따라 소스를 사용하기도 한다.
△ 돈부리(どんぶり)
밥 위에 소고기, 닭고기, 새우 달걀 등을 얹고 양념해서 먹는다. 깊고 큰 그릇이 사용되면 인기 있는 음식이다.
△라멘(ラ-メン)
우리의 라면과 비슷한 음식이다. 단 인스턴트 식품이 아니고 직접 양념을 넣고 끓인 것이다. 중국식 밀가루 국수와 간장이나 된장, 콩나물, 중국 죽순, 구운 돼지고기 등이 첨가 되기도 한다. 라멘만 해도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신요코하마에는 라멘박물관도 있다. 본래는 중국음식인데 일본화 된 것으로 한 그릇에 약 400엔 이상은 필요하다. 고급 일본 요리에 비한다면 맛은 그다지 기대할 만 한 것은 아니지만 싸고 양이 많아서 가난한 여행자들에게 맛있는 음식중 하나이다.
△오코노미야키( 好み燒き)
스낵 타입으로 가루 반죽과 함께 고기 오징어, 양배추 등을 넣어 튀킨다. 일본식 피자 같은 것이다.
△스키야키(すき燒き)
손님의 앞에서 요리하는 경우가 많은 전골, 소고기를 얇게 썰어 각종 야채와 두부, 설탕, 간장을 넣어 끓인다.
△샤부샤부(しゃぶしゃぶ)
각종 야채와 두부 등을 육수에 넣고 끓인 다음, 아주 얇게 썰은 소고기를 그 끓는 물에 살짝 익힌 야채류와 함께 찍어 먹는다. 음식을 먹을 때는 큰 용기에 담아 낸 뒤 적당량을 들어 먹는다.
△덴푸라(天ぶら)
국적이 불분명한 튀김요리 (원산지가 포르투갈이라는 설도 있다.) 해산물과 각종 야채를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뒤 기름에 튀겨 먹는다.
△야키도리(燒き馬)
닭고기 구이, 닭의 각부위를 꼬챙이에 꽂아 숯불에 굽는다. 양파를 같이 끼우는 경우도 있다. 술안주로 이용되는 것이 대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