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동산은 아름다워라
정각스님 · 원각사 주지
I. 오뉴월 동산을 꿈꾸며
6월이 오면 온 산 천지를 빨갛게 물들였던 철쭉이며 영산홍은 이미 시들고, 소담스런 목단 꽃잎마저 그 잎을 떨구고 난 초여름 그늘 밑에서 엄마는 이따금 익모초(益母草)를 다려 마시곤 하였다.
그리고 쓰디쓴 익모초 한 사발 가득 건네며 달콤한 무지개사탕 아이에게 내 밀은 엄마의 사랑 가득한 얼굴에서 아이는 쉬 익모초의 쓴맛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몸에 이로운 것은 언제나 쓰디쓰며, 그 쓰디쓴 맛을 경험한 후의 달콤한 사탕 맛을 아이는 체득할 수 있기도 하였다.
아마도 아이는 익모초와 무지개사탕과의 상관관계 속에서 삶의 지혜를 얻게 되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아, 오뉴월 동산은 아름다웠다. 토끼풀 가득 심어진 초여름 동산에 누워 산들바람에 스러진 풀꽃으론 꽃시계 만들고, 머리에 풀꽃 리본 동여맨 누이와 함께 마음껏 뒹굴던 초여름의 동산에는 혹에나 쇠똥이 널려 있어도 그것은 문제되지 않았다.
오뉴월 동산에는 희망이 있었다. 어디선가 간혹 눈에 띈 네 잎 클로버는 아이들 가슴에 뜻밖의 행운을 안겨다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무덤 가 고개 숙인 할미꽃에 얽힌 전설 되새기는 아이의 가슴속에는 어렴풋하게나마 삶의 외경의 신비가 싹터나고 있었던 것이다.
II. 그 황토 흙내음 속에는
6월이 오면 새털구름 뭉게구름 사이로 간혹 잠시의 빗줄기 뿌려지는 일도 있었다. 비 내리면 밀려오는 황토의 흙내음, 그 속에는 존재적 근원의 아스라한 향기 또한 숨쉬고 있었다.
존재의 향기, 황토 빛 너울 쓴 바람맞으며 많은 생명들은 자라고 스스로를 꽃피워 또 다른 삶의 잉태를 기다리는 때, 그 삶의 아름다움을 일컬어 천중가절(天中佳節)이라 하였던 것일까?
III. 단오날 이야기
옛부터 음력 5월 5일은 천중가절(天中佳節)이라 하였다. 양의 기수(基數)가 겹친 삼월 삼짇날(음. 3월 3일), 오월 단오(음. 5월 5일), 칠월 칠석(음. 7월 7일), 구월 한로(寒露:음. 9월 9일) 모두를 중양절(重陽節)이라 불렀으나, 그 중 5월 5일은 1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때라 하여 천중가절, 즉 아름다울 가(佳)를 삽입해 넣었던 것이다.
또한 이 날은 단오(端午)라 불리기도 한다. 단(端)이란 처음[初]을 뜻하는 말이다. 오(午)란 다섯[五]과 상통하는 말로서, 여기서 단오라 하면 초닷새를 일컫는 말이 되기도 할 것이다. 한편 이 날은 숫자 5가 겹치는 5월 5일에 해당되어 중오(重午, 重五)라 불리웠고 단양(端陽)이라 불리기도 하였는데, 아마도 이 모두는 우리의 음양철학에 그 연원이 있다고 할 것이다.
또다시 우리는 단오를 '수릿날'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날 만들어 먹는 떡 '수리취 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와 같다 하여 '수레[車] 날[日]'이라 하던 것이 수리날, 수릿날로 변해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수리'라는 말에는 상(上)·고(高)·봉(峰)·신(神)의 의미도 포함되어 단오 즉 수리날, 수릿날은 상일(上日)이며 고일(高日)·봉일(峰日)·신일(神日)의 뜻으로 뭔가 성스러운 느낌조차 우리에게 안겨 주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 날은 성스러운 날이다. 우리의 풍습에도 설날과 추석·동지·단오를 4대 명절이라 부르고 있으며, 여기서 특히 단오는 생명의 탄생의례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단오란 서구의 '5월 축제'와도 일맥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5월, 부활의 축제. 5월의 축제가 다가오면 성스런 나무(우주의 나무, May Pole)가 선정되고 그에 따른 5월의 여왕(May Queen)이 뽑혀지는 것인데, 그 성스런 나무와 5월의 여왕과의 결합은 결국 남녀의 결합을 상징하여 생명의 탄생을 예견하고, 그로 인한 새 생명의 성장을 기원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이 5월의 축제에 사용되는 성스런 나무는 환(桓)을 의미한다. 곧 생명( →且:남근의 상징)의 나무[木]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연관을 맺는 May Queen은 총체적 여성을 상징한다. 한편 우리는 단오날의 풍속인 씨름과 그네뛰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역시 줄다리기와 함께 남·여성의 결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IV. 단오날의 풍속들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
머언 바다로
배를 내어 밀듯이,
향단아‥‥"
미당 서정주의 시(詩) 「추천사(추韆詞)」에 묘사된 춘향이의 그네뛰기 중 한 장면이다. 『송사(宋史)』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고려 때부터 그네뛰기를 즐겼다고 하며, 『고려사열전』 등의 기록을 통하여 볼 때 그네뛰기는 민간뿐만이 아닌 궁중에서까지 성행한 세시놀이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옥색 저고리에 빨간 치마 휘날리며 그네 뛰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모습에 반하여 이몽룡은 드디어 상사병을 앓는다.
그네뛰기는 매혹적이다. 그 모습 바라봄에 어찌 감흥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흐르는 냇물에 발 담그고 창포로 머리감는 여인들. 마치 한 폭의 신윤복 풍속도를 바라보는 듯한 이러한 정경들 모두는 이 단오날에 행해진다.
여인들이 이 날 창포로 머리 감으면 머리에 윤기가 흘러 소담스런 머리칼을 간직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창포 이슬을 받아 화장한 여인들은 창포 뿌리로는 비녀를 만들고 수(壽)·복(福)의 글자 새긴 그 끝에는 주사(朱砂)를 발라 머리에 꽂는다. 그렇게 하여 모든 재액을 물리친다. 혹 이른 아침, 쑥을 베어 그 다발을 문 옆에 세워 두기도 한다. 이렇듯 양기 왕성한 단오날에 베어진 양(陽)의 생명 놓여진 곳에 어찌 사악하고 음습한 기운 스며들 수 있겠는가.(『동국세시기』에 의하면 단오날에는 악귀를 쫓는 부적을 붙이기도 하였다. 적당한 글귀를 써넣거나 처용의 그림을 그린다거나 도부<桃符:복숭아 그림의 부적>를 그린 그림 등이 적격이었다. 이를 흔히 '단오부적'이라 한다.)
이렇듯 음습한 기운이라고는 전혀 생겨날 수 없는 단오날의 해거름. 이날 마을 한켠에서는 힘센 젊은이들이 모여 씨름을 한다.
서로 버티고 선 채 힘을 견줌을 '씨룬다'라고 말한다. 씨룬다→씨루다→씨룸→씨름, 팔씨름, 입씨름 등.
여하튼 이날의 마지막 승자에게는 장사며 용사, 판막음이란 칭호가 주어지며, 한 마리 황소가 상품으로 주어진다. 이 날의 씨름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리고 내려 쬐는 햇빛, 무더위 때문인지 벌써 사람들 손에는 부채가 하나씩 들려 있기도 하다.
V. 부채에 삶의 지혜 드리우고
옛부터 하선동력(夏扇冬曆)이라 하였다. 동지(冬至)에는 달력을 그리고 단오날에 임금이 재상들 및 시종들에게 부채를 나누어줌을 말하는데, 이 날의 부채는 흔히 단오선(端午扇)이라 불리웠다.
승두선이며 어두선 · 사두선 · 합죽선 · 반죽선 등 전주와 남평 등지에서 만들어진 부채에 사람들은 각각의 그림을 그려 넣곤 하였다. 금강산 1만 2천 봉이며‥‥ 혹 기생이나 무당들은 버들가지며 복사꽃·연꽃·나비·흰 붕어·해오라기 등을 그려 넣기도 하였다.
이들 부채의 용도는 다양하다. 바람을 일게 하며 햇볕도 가리고, 파리를 쫓기도 하는 한편 음식을 덮어두기도, 또한 방석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불 피울 때나 혹 얼굴을 가리기도, 그리고 가려운 등을 긁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이렇듯 왕골이나 풀로서 둥그렇게 짜 만든 이 부채는 8가지 덕(용도, 쓰임새)이 있다 하여 팔덕선(八德扇)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지금도 우리는 남아 있는 이 팔덕선을 간혹 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옛 고인들의 놀라운 지혜를 발견하기도 한다.
VI. 6월의 남은 이야기들
"5월은 중하(仲夏)이니 망종(亡種), 하지(夏至) 절기로다." 이렇게 「농가월령가」는 적고 있다. 중하(仲夏), 곧 여름[夏]에 버금가는[仲] 계절이 다가왔다는 말이다. 이에 '보리는 익어서 먹게 되고, 볏모는 자라서 심게 되니 망종이요, 햇보리를 먹게 될 수 있다'는 망종.
망종일이 되면 농가에서는 보리타작이 시작된다. 베고, 떨고, 개상질이며 도리깨질, 뭉글으기, 디디기, 말리기 등의 보리추수.
으슥한 저녁의 보리밭을 생각하노라면 문병란의 시(詩)가 떠오른다. 보리문둥이,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 생각나고, 보리밭에 얽힌 으슥한 문둥이 전설이 회상되기도 한다. 그곳 보리밭에는 서글픈 전설이 있다. 서글픈 바람 연연이 타고서 전하여지는 인간성 자체에 대한 슬픔이 있다.
이윽고 보리타작이 끝난 밭에는 콩·팥·조·밀·배추·무 등을 심는다. 그리고 이내 하지(夏至)가 찾아오면 밭에서는 감자를 캔다. 감자는 하지에 캐어야 적격이다. 이렇듯 제때에 모든 농작물을 캐고 심고 하느라 농부들은 바쁘다. 그래서 이때의 농촌 풍경을 '바빠서 발등에 오줌눈다'고 하였던 것일까?
이제 하지가 지나 낮은 점점 짧아지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연인들을 위한 어둔 밤, 저녁이 한치씩이나 길어지는 것이다. 이 길어지는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는 내면에 몽상의 시간을 간직해야 한다. 그리고 긴긴 밤 저녁을 준비키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갖기도 해야 할 일이다. 이미 어둠에 익숙해 있는 인간들, 그들에게 어둠은 새 삶을 위한 보금자리가 되어야 할 것이기에‥‥
- 1990년 통도사 월간지 <등불>에 실었던 글임.
첫댓글 _()()()_
_()()()_
_()()()_
스님께서 쓰신 글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1990년의 것으로...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양의 글을 올리시는 걸 보니...^^ _()()()_
_()()()_
_()()()_
_()()()_
_()()()_
_()()()_
_()()()_
_()()()_
_()()()_
아름다운 6월.. _()()()_
_()()()_
지금 갖고 싶은게 있다면 그 때, 그 동산에 6월의 푸른 잎 한장 갖고 싶다!
감사합니다.
_()()()_
_()()()_
감사합니다..._()_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