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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을 보리라
출애굽기 7:8-13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열 재앙을 애굽에 내리시기 전에 있었던 일을 보여 준 서론입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싸움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아래와 같이 세 가지로 살펴본 후에 본문의 기록 목적을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싸움의 대상, 둘째, 싸움의 이유, 셋째, 싸움의 결과
(1) 첫째, 싸움의 대상
오늘 본문은, 뱀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뱀 한 마리와, 다른 여러 마리의 싸움입니다. 그런데 이 뱀들은 모두 처음부터 뱀으로 태어난 뱀들이 아닙니다. 메마른 지팡이가 변해서 된 뱀들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 뱀들은, 생명이 없는 막대기가 살아 움직이는 뱀으로 변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팡이에서 변한 뱀들이 싸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어째서 이런 싸움이 벌어지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2) 둘째, 싸움의 이유
8절과 9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십니다. 어떤 명령입니까? ‘애굽 왕 바로 앞에 가서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이적을 행하라.’라고 하신 명령입니다. 이렇듯 먼저 싸움을 걸게 만드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어째서 하나님은 이런 싸움을 하도록 하시는 것입니까?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 사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내시기 위함입니다. 이 일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사용하십니다.
본문 바로 앞 구절인 7절을 보면, 이때 모세의 나이는 80세 이었고, 그의 형인 아론은 83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째서 이렇게 나이가 꽤 많이 든 노인들을 사용하시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일하신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려면, 매우 힘 있어 보이는 젊은이가 아니라 힘이 없어 보이는 노인을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무려 40년을 왕궁에서 왕자로 살면서 무엇이든지 제 맘것 배우고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자기 능력에 대한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이 자기 동족을 도와 구하겠다고 애굽 사람을 쳐 죽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탄로 나자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목인 족속 가운데서 양을 치는 목자로 40년을 살아갑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사막에서 양 떼들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삽니다. 이렇게 사는 동안 모세는 왕성했던 패기를 잃은 노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죽을 날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노인을 하나님께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내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자 모세는 ‘자신은 할 수 없다.’라고 진심으로 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차례 설득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가르치겠다. 네 할 일도 알려주겠고 네 입에 말도 주겠고 필요한 사람도 붙여 주겠다.’ 그래서 모세는 이 말씀을 믿고 애굽 왕에게 나아갔습니다.
모세는 애굽 왕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내놓으라.’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보기 좋게 거절당합니다. 애굽 왕은 ‘네가 말하는 하나님 여호와는 누구냐? 내가 그의 말을 들을 필요가 있느냐? 너희들이 시간이 남아서 헛된 소리를 하는구나.’라고 답하며, 그 후에 더욱 가혹하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강제 노역을 시킵니다. 모세가 애굽 왕을 찾아간 일은 이른바 ‘긁어 부스럼’입니다.
이처럼 모세가 바로 왕에게 나아갔던 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더욱 힘들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참담합니다. 그래서 ‘다시 바로 앞에 나가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모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입이 둔한 자입니다. 전에 나갔었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애굽 왕에게 나간다고 해서 그가 내 말을 듣겠나이까?’
이 대답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답변하신 말씀의 뒷부분이 오늘 본문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그의 동역자인 동시에 형인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9절입니다. ‘너희가 애굽 왕 바로에게 나가면 그는 너에게 이적을 보이라고 요구할 것이다. 그러면 아론에게 준 네 지팡이를 가지고, 아론에게 명하여 애굽 왕 앞에 던져라.
그러면 그것이 뱀이 되리라.’ 그래서 모세는 다시 애굽 왕 앞에 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 애굽 왕 바로는 이적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요구하는 의미는, ‘네가 정말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보낸 사람이라면 그 증거를 보여라. 그리고 너희 하나님이 그렇게 대단하다면 초자연적인 일을 한번 행해 보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모세가 찾아간 애굽 왕 바로의 이대 나이는 약 22세 정도입니다. 나이가 80이나 된 사람들에게 22세의 청년이면 애송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스물두 살 된 사람한테 물어보면, 그 대답이 다를 것입니다. 사람이 22세이고 왕이면, 아마도 세상을 다 이길 것 같은 자신감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왕에게 팔십이 넘은 노인들이란 그저 별 볼 일 없는 이간에 불과할 것입니다.
온 세계를 다스리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애굽 왕이며 자신만만한 청년이 이 노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지난번에 모세를 만난 후 왕은,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고 칭한 이스라엘을 더욱 혹사했지만, 그들의 하나님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그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는 힘 빠진 노인들이 다시 나타나서 ‘내 백성을 내놓으라.’라는 하나님의 말슴을 전합니다. 왕이 그 말을 고분고분하게 듣겠습니까?
그러니 애굽 왕은, ‘이적을 보이라.’라고 요구합니다. 10절입니다. 모세는 아론에게 명하여 지팡이를 애굽 왕 앞에 던지게 합니다. 아론은 왕과 그 신하들이 보는 앞에 지팡이를 던집니다. 던지니까?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이 지팡이는 전에도 뱀이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은 출애굽기 4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모세가 애굽으로 되돌아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계속해서 자신은 그렇게 못하겠노라고 사양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네 손에 잡은 것이 무엇이냐? 그것을 던져라,’ 모세가 손에 잡고 있던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되었습니다. 모세는 깜짝 놀라서 피합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뱀의 꼬리를 잡으라고 말씀합니다. 모세가 그렇게 하자 뱀이 다시 지팡이가 됩니다.
어째서 하나님은 이렇게 지팡이를 뱀으로, 다시 뱀에서 지팡이가 되게 하셨습니까?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능력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을 행하는 자는 과연 하나님께서 보낸 자임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메마른 지팡이를 살아 있는 뱀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불가능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하나님이 과연 너에게 나타났다면 그런 능력을 보이라.’라고 요구할 것을 아시고,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고 다시 뱀이 지팡이로 변하는 일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증거만 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뱀 한 마리만 만들면 족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다릅니다. 이번 경우는 하나님을 아주 의도적으로 모욕하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애굽 왕 앞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보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뱀은 매우 크고 강한 뱀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이것이 어쩌면 작은 악어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왜냐면 본문에 쓰인 원어의 낱말은 악어한테도 쓰이고 바다 괴물에게도 쓰이고 심지어는 용에게도 사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팡이가 변한 매우 큰 뱀을 보고 왕은 당연히 깜짝 놀랐겠지만, 애굽 왕은 내색하지 않고 대응할 방법을 찾습니다. 11절입니다. 왕은 박사들과 박수들을 부릅니다. 박사는 요즘 말로도 박사와 같으나 그때는 왕과 함께 모든 정사를 논의할 수 있을 만한 매우 지혜롭고 노련한 인재나 그런 집단을 의미합니다. 쉽게 말하면, 왕의 자문위원들인 셈입니다.
그리고 박수들은, 우리말의 박수와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말에서는 박수가 남자 무당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 박수는 요술사입니다. 그런데 11절에서는 박사와 박수를 묶어서 애굽의 술객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들은 마술사로서 애굽 신들을 섬기는 제사장들입니다. 지금도 애굽의 마술사들은 뱀들을 잘 다룬다고 합니다. 주문을 외워서 뱀이 나오게 하기도 하고 꼿꼿하게 서게도 하며 순간적으로 딱 서서 움직이지 않게도 한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본문의 박수들이 자기 지팡이를 던져 술법으로 뱀을 만든 것을 다음과 같이 추측하여 설명하기도 합니다. ‘박수들이 미리 큰 뱀을 갖다가 마술을 걸어서 지팡이처럼 들도 나왓고 그 지팡이를 던지면서 주문을 외워 마법을 풀어서 움직이는 뱀이 되게 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힘으로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일을 행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술법 주문을 외워서 신의 도움을 얻어 진짜 뱀을 만듭니다. 이들이 만든 뱀들도 모세의 뱀처럼 진짜 뱀입니다. 각각의 요술사들이 자기 술법으로 뱀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을 도운 자가 누굴까요?
성경의 여러 증거를 보면, 이렇게 요술을 통해서 초능력을 행하게 한 자는 사람이지만, 사람은 그런 능력을 행할 수가 없으므로, 이런 능력을 행할 수 있게 한 이는 둘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시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반대하는 자입니다. 그러기에 사탄은 하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사탄은 교회까지도 적극적으로 지원합니다. 어떤 교회를 지원합니까?
하나님 말씀을 제쳐놓고 그저 어떻게든지 재미있고 사람의 말로만 유익하게 하려는 교회, 그냥 자기들끼리만 살아가는데 힘쓰는 교회입니다. 왜? 그런 교회들은 교우들로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지 않게 하며,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게 하니까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그런 교회들을 돕습니다.
(3) 셋째, 싸움의 결과
이렇게 사탄의 도움으로 요술사들이 뱀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희귀하고 진귀한 싸움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12절입니다. “아론의 지찰이가 그들의 지팡이를 삼켰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이 말씀의 의미는, 지팡이가 여러 지팡이를 삼켰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아론의 지팡이로 만든 뱀 한 마리가 술객들이 자신들의 지팡이로 던져서 만든 여러 뱀을 다 잡아먹었다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누가 이겼는지 그 승패가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상황을 직접 목격한 애굽 왕 바로는 어떤 태도를 보입니까? 13절입니다.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였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강퍅하였다는 말은 완고하였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애굽 왕 바로는 모세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13절 마지막 말씀은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입니다. 애굽 왕이 이렇게 강퍅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리라고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과연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말씀하신 바대로 애굽 왕은 순종하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조금 설명이 필요합니다. 앞의 3절과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겠다. 따라서 내가 나의 능력을 보이는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행할 것이지만 바로가 말을 듣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성경 말씀을 잘못 이해하면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애굽 왕 자신은 하나님의 능력을 보고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순종하고 싶었으나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듦으로써 어쩔 수 없이 그가 강퍅해진 것이구나.’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은 성경 말씀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표현은, 바로는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표현은, ‘애굽 왕이 자신이 행하고 싶은 대로 자기 원하는 만큼 제 고집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여 표현하기에 ‘하나님께서 강퍅케하셨다.’라고 표현합니다. 설명하자면, 바로는 자기 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기 전에도 강퍅하였고 보고난 후에도 여전히 강퍅하였던 것입니다. 모든 인간의 마음이란 애굽 왕처럼 이렇게 악합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놀랄 수는 있으나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의 마음이 변화하려면 하나님의 은혜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조그만 능력을 사용하셔도 인간의 모든 능력을 압도하시는 분입니다. 이러하므로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맞설 수 없음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아주 보일 듯 말 듯 한 능력으로 행하시는 것을, 인간이 온갖 능력을 쥐어짜서, 또는 사탄의 힘을 빌려 초능력을 행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물론 사탄도 하나님과 같은 초능력을 행할 수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흉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아주 미미한 정도로밖에 흉내를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보기에는 사탄의 미미한 능력도 엄청난 것이기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과 같은 급으로 착각합니다. 애굽 왕은 어째서 이런 능력의 차이를 보지 못했습니까? 왕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간은 자기 육신의 눈에 보이는 것만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해서 열적으로 소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나 이 세상에서 모두 똑같이 살아가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하나님이 능력이요, 믿지 않는 사람이 살아가는 힘은 자신의 힘입니다.
이 진정한 차이를 우리가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보지 못하면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모든 상황의 파도에 요동치며 불안해하며 걱정하며 불평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우리 개인의 삶을 한번 생각해봅시다. 누가 우리를 먹이십니까?
사실 내 것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능력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가 좀 잘 되면 자기 힘으로 살아간다고 착각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어째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어째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까요? 한마디로 교만 때문입니다. 교만이 무엇입니까?
자기 힘으로 자기 지혜로 자기 재주로 심지어 자신의 검소한 생활 습관으로 내가 이만큼 살아갈 수 있으며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는 것, 한마디로 자기 능력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교만입니다. 이러한 교만 때문에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마저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의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교만은 주로 미련함과 함께 갑니다. 교만하기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그래서 결국은 인생에 실패하고 망하는데도 끝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려 하기에 교만은 미련한 것입니다. 마치 자기 능력에 한계가 있음을 알면서도 ‘하면 된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식의 주문을 외워서 모든 것을 극복하여 성공할 것 같이 착각하고 고집을 부리는 때문에, 사람은 교만하고 미련합니다.
애굽 왕을 보십시오. 진정 현명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보았으니 하나님 말씀대로 그분의 백성들을 내보내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를 않아서 이후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그 나라는 쑥대밭이 되어 망해 버립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애굽 왕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시 힘으로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을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순종할 때까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압박하십니다. 섭리로써 어려움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주변의 좀 더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충고하게도 하십니다. 그러나 그래도 계속 교만하고 미련한 짓을 하면, 때로는 완고하도록 내버려 두시기도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성경에서 수없이 말씀합니다.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네 소위를, 네 생각을 내 행동을 살펴봐라.’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능력을 맛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의 능력이 참되고 위대하다고 믿는다면 나를 버려야 합니다. 나를 잊어야 합니다. ‘스펄전’이라는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조금도 자기를 의지하는 않는 것이다. 전적으로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3장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오늘날 너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조상들처럼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여러분,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