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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릿하다. 생각해보면 가장 잘 기억해야할 순간이었지만,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비오는 밤 기차의 창밖으로 보는 풍경처
럼 모든 것이 흐릿하다.
아이스크림이 목숨이라 말했던 초희는 어느 날부터인가 아이스크림을 원하지 않았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보다 조
금 빠르긴 하지만, 나도 초등학교 때부터 단 것보단 고소한 것을 좋아했던 기억이 나서였다. 사람의 입맛은 나이를 먹으면서 바뀌
는 법이니까.
그러던 것이 조금 있자 간식거리를 아예 원하지 않게 되었고, 점점 밥을 먹는 양도 줄어갔다. 그래도 건강에 위험할거라 생각되
진 않았다. 가정부 아주머니가 아들이 사업에 다시 성공했다며 일을 홀연히 관두었을땐 좋은 일이니 방해하고 싶지도 않고해서 몇
주일동안 다른 가정부를 구할때까지 내가 요리를 했으나, 그것의 맛은 정말이지 천년 묵은 우유같았으므로 나 역시도 많이 먹
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가정부 아주머니가 올때쯤 초희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뭐 사실 나도 그랬으니 별거 아니라 넘어갔다. 새로 맛있
는 음식이 나올때도 우리는 많은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저 많이 먹지 않는것이 습관이 되어 위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만 안이
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초희는 예전처럼 팔딱대고 뛰어다니지도 않았고, 매일매일 자잘한 질문들을 묻지도 않았다. 다만 서서히 철이 들어가고, 유치원과
는 달라도 많이 다를 초등학교에서 이제 규칙과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조금 배워가나 싶었다. 피곤해서 그러냐고 물어보면 초희
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부정했기에 안심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초희는 애늙은이였다. 나만 바보같이 눈치
채지 못했을 뿐, 날 걱정시킬만한 말은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초희가 작은 새같이 몸을 떨어대길래 가까이 갔더니 숨 쉬기 힘든 것을 내게 숨기려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전구
가 머리에서 번뜩 켜진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질 때까지 머리를 굴려댔다. 이 증세들이 어디서 많이 본 거였더라? 지나치게 많
은 볼트가 일순간 스치고 지나가 전구는 터져버렸다.
초희를 조수석에 내려놓고 속도위반 따위는 껌으로 여기며 엑셀레이터를 밟아댔다. 클락션이 울리고 운전석 쪽 창문을 내린채 가
운데 손가락을 들어대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깡그리 무시했다. 나중에 신고하라면 신고하라지. 다행히 도중에 경찰은 만나지 않았
다.
초희를 처음 만났던 때와 똑같은 색의 흰 병원에서 나는 이제 복도에서 기다리는 역할이 아닌 초희의 보호자로서 초조히 거닐었
다. 손톱을 물어뜯고 싶었지만 큐빅까지 완벽히 박혀있는 네일아트가 된 그것들은 왠만한 압력엔 저항하기로 마음먹은듯 딱딱함
을 유지했다. 누가 연해질때까지 몽둥이로 두들긴듯 뛰는 심장과는 너무 대비되어 손톱을 짓찧고 싶어졌다.
“백혈병입니다.”
의사는 표정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석고상보다도 차가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마치 ‘아, 당신은 키가 크시군요.’ 라고 말
하는 것과 똑같은 말투였다. 내 세상인 초희가 백혈병에 걸렸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말할수가 있지? 초희가 죽는다면 내게 ‘아, 초
희가 죽었군요. 저런.’ 하며 무관심하게 커피를 들이킬 놈이었다.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 커다란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내 목소리라는 것을 눈치챘을땐 난 이미 그 완벽히 딱딱함을 유
지한, 네일아트가 된 손톱을 치켜든채 의사에게 덤벼들고 있었다. 옆에 있던 간호사가 기겁하며 불필요하게 나를 밀쳐냈다. 그 전
에 이미 내 몸은 기절상태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한없이, 한없이, 초희를 기다리던 복도에서 교복을 입은 내 초조함으로.
정신을 차렸을땐 이미 뇌가 한번 죽은 사람처럼 주변의 일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강해서 초희에
게 희망을 주었어야 할텐데, 나는 한없이 약했다. 어찌보면 정작 아픈 초희보다도 훨씬 더.
삼류 드라마에서 좀 사랑할까 싶으면 백혈병으로 하늘하늘 죽어버리는 여주인공을 언제나 비웃었는데, 정작 그 상황에 처하자 눈
물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래, 비현실적이었다. 아직도 드라마를 보고 있는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평평한 드라마. 나
도 이제 좀 사랑할까 싶었는데. 초희가 온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내게서 앗아갈 생각을 하는걸까. 늦둥이라서인지는 몰라도 유난
히 잔병치레가 많아 응급실도 수없이 다녀오고 감기 하나에도 몸살을 앓는 아이긴 했지만, 이렇게 커다란 병이 걸려버릴 줄은 몰
랐다. 급성이라고는 해도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은 몰랐다.
내가 지난번 의사에게 스프링 튀듯 덤벼드는 바람에 기겁한 의사는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놓았고, 젊긴 하지만 저번 의사보다는 자
기가 뭘 하고 있는지 좀 알아보이는 새 의사는 그 청천벽력같은 말이 떨어지고나서 몇 달 후, 나에게 진심이 담긴 눈으로 사과
의 말을 전했다. 골수가 맞지 않는단다.
아, 그런가요? 무감각하게 말했다. 왠지 이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날이 갈수록 인형처럼 창백해져가는 초희
를 바라보면서 나 역시 생명의 힘을 잃어갔다. 죽어가는 사람이 초희가 아니라 사실은 나인것마냥.
의사는 발악할줄 알았던 내가 조용히 대답하자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프로정신은 어디갔는지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으려 했
다. 나는 정중히, 그러나 단호히 내 몸을 만지지 못하게 손을 빼었다. 그에게는 여러모로 감사하고 있었지만 인간관계나 사회생활
에 자신이 없었다. 아니, 자신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연기처럼 사라질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연기가 내 몸 속으로 사
라져 나를 질식시킬것만 같았다. 초희에게만 웃어주었다.
뭐 당연한 일이지만 블로그 포스팅 따위나 육아일기의 추가적인 사인회 따위는 펑크낸지 오래였다. 숨쉬는 것도 이렇게 목에 바늘
뭉치를 넣은 것처럼 쓰라리고 아픈데, 그 무엇을 더 할 수 있을까.
자꾸만 초희의 병 말고도 뭔가 더 허전히 비어있는 느낌이었다. 초희만이 내 심장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맞는 말이
다. 그러나 마치 내가 모르는 곳에 또 하나의 심장이 있는 것처럼, 늦게 생기긴 했지만 원래의 심장만큼 크고 세차게 뛰는 심장
이 있는 것처럼, 마음이 두배로 더 아려왔다. 왜일까.
그 이유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곧 알게 되었다.
“언니, 왕자님 보고싶어.”
어느 날 초희가 내게 말을 건넸다. 그 귀엽던 초콜릿빛 머리카락은 오간데 없고 작은 비구니마냥 한올도 남기지 않고 깎인 민둥맨
둥한 머리는 뱀파이어마냥 창백해진 피부색 때문에 더 눈에 띄었다.
“의사 선생님이 언니 좋아해. 그런데 초희는 왕자님이 더 좋아! 의사 선생님도 왕자님이지만 휘연오빠가 언니의 왕자님이니까.”
그런 말을 초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두꺼운 비닐의 세로틈 사이로 말했다. 항균력이 약하다며 잔뜩 소독해놓은 손을 비닐에 올리
자 초희 역시 그 너머로 자신의 한없이 작은 손을 내 손의 모양에 맞춰 올려놓았다. 무너지고, 조각나고. 초희가 여자아이 답지 않
게 인형놀이보다 더 좋아했던 레고처럼, 그 사이즈로 잘리고 잘려 바닥에 놓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초희의 온기가 매
정한 저 작은 벽들 안에 갇혀 내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디에 박혀있는지 몰랐던 또 다른 심장이 세차게 뛴다. 휘연. 그래, 그는 왜 요새 보이지 않았던걸까. 말도 안되는 소리지
만 그가 여기 있었더라면 이 상황을 더 잘 이겨냈을거라고 생각했다. 허튼 소리야, 하고 고개를 저어봐도 감정을 감추는 법을 아
직 배우지 못한 초희의 눈동자에 비치는 내 모습은 영락없는 기둥이었다.
나머지 건물이 모두 부서져버리고 그 폐허의 한 가운데 서있는 기둥 하나. 그렇구나, 그 때문에 더 아팠던 거구나. 그는 지금 어
디 있을까?
“보고싶어.”
초희가 반복했다. 말하기 힘든지 한마디마다 질질 끌면서도, 또박또박 발음하려 애쓰면서.
“보고싶어? 언니가 여기 있는데도?”
일부러 장난스레 웃자 초희는 진지하게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찌나 단호했던지 그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아픈 아이 같지 않았다.
“언니, 안녕.”
작별인사를 잘 하지 않는 초희가 그날따라 최대한 비닐에 붙어 말했다. 그 연약한 손을 들어 안녕이라는 동작으로 흔들기까지 했
다. 바람에 부는 낙엽같은 움직임, 시드는 낙엽. 너는 언제서야 다시 푸르게 필까?
“금방 다시 보자.”
왠지 나 또한 초희의 예견치 못한 인사에 애절해져, 비닐 너머에 있는 초희를 안고 싶은 마음에 얇지만 그 순간만큼은 세상
의 그 무엇보다도 더 두껍고 차가웠던 그 벽 너머로 자꾸만 손을 뻗었다.
“응, 다시 봐.”
초희가 살며시 미소지었다. 뒤를 도는데 곁눈질로 초희가 뭐라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입모양새가 보였다.
‘꿈을 꿨어.’
병원에 나와서도 초희의 쓰러질듯 종이만큼 얇고 하얀 몸과 골수가 맞지 않는다는 의사의 말이 자꾸만 겹쳤다. 그리고 초희가 항
암치료를 하면서도 잊지 않은, 두 번밖에 만나지 못했음에도 묘하게 보고싶어하던 그가 생각났다.
짙은 안개에 쌓이고 쌓여 감각만으로 도달하는 곳이 있다면 그 곳은 어디일까? 문득 정신을 차리니 카페 ‘네프’가 있던 장소에 도
착해있었다. 이 곳이 무의식 속에서 내가 기억하는 그와의 장소일까?
건물을 살피는데, 그 카페는 온데간데 없었다. 간판도 사라졌고, 혹시나해서 들어가본 건물엔 긴 복도조차 없었다. 상가마다 문의
를 해 보아도 이 건물에는 그런 카페 따위는 있지 않았다고 저마다 입을 모았다. 몽롱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때 방명록을 뒤져 연락하거나 출판사 혹은 하물며 매니저에게라도 전화해서 그의 번호를 물어보지 않았는
지 모르겠다. 그가 그렇게 내 행방을 알기 위해 그들을 괴롭혔었다면 누군가는 그의 번호를 아직도 저장하고 있었을텐데. 하물
며 통화기록이라도 보면 됐을텐데. 그러나 그 당시 나는 똑바른 생각을 한 적이 없었고, 그런것을 생각해낼리 만무했다. 끌리는 대
로 이끌렸고, 흐르는 대로 떠다녔다.
그 날은 꿈을 꾸었다.
그 날 그렇게 문의하고 다녔음에도 찾지 못했던 카페 ‘네프’의 입구에 서 있었다. 안에서는 서글픈 내 맘과는 달리 낯이 익은 조용
하고 기분 좋은 선율이 흐른다. 꿈에서도 초희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나로서는 나도 모르게 편안해지는 이 기
분이 고맙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카페의 주인 커플은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 없지만, 저 멀리 어떤 남자의 윤곽이 보인다. 처음 방문했을때보다 훨씬 어두운데
도 불구하고 그 남자는 스스로 빛을 발하는 것처럼 굉장히 눈에 띈다.
위험한 인물! 그의 모습을 보자마자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윙윙거리는 고막 사이에 자리한 뇌에서는 경보의 색이 깜빡깜
빡 울린다.
그는 딱 보면 척 하고 일초만에 알아맞출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사냥하는 자입니다, 를 온 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그것 뿐이었다
면 괜찮았을텐데, 당신이 바로 내가 사냥하는 상대입니다, 까지 발산하고 있었다. 얼핏 보면 카페 주인들과 굉장히 비슷한 모습이
었지만 그저 장난을 치고 있는 사자들의 이미지인 그들과는 달리 사냥감을 눈 앞에 두고 포효하는 모습. 그들과 같은 탠 색깔의 그
을린 피부에 상반되는 빛나는 금빛의 머리카락과 같은 색의 눈동자.
눈동자는 절대 사람의 눈이라 말할 수 없는, 야행성 동물과 같은 색으로 발광하며 내 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남자가 눈을 살짝 찌
푸리며 고개를 한쪽으로 갸웃거린다. 그러나 갑작스레 표정이 바뀌고, 그는 뾰족한 이가 드러나는 새하얗고 가지런한 치아를 내보
이며 한쪽으로 기울어진, 잔인한 웃음을 짓는다. 그의 혀가 눈 앞에 놓여진 음식을 음미하듯 입술을 훑고 지나간다.
“엄마!”
도망칠수도 없어 한 자리에서 붙박혀 서있는 나를 분명히 ‘언니’가 아닌 ‘엄마’라고 나를 부르며 남자보다도 더 뒤쪽에서 작은 아
이 하나가 달려온다. 살결이 하도 하얀데다 하얀 원피스가 눈부신 아이, 초콜릿빛의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내게 달려오는 아이..
“초희야!”
진짜 초희는 지금 저 머리카락이 모두 밀린 채로 하얀 원피스 대신 병원복만을 입어야한다는 사실을 잊고, 초희의 이름을 외치
며 마주 달려간다. 남자를 향해서.
내게 오기 위해서 저 위험한 남자를 지나쳐야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초희는 자꾸만 내게 오기 위해 남자에게로 향한다. 그
런 초희를 안타깝게 부르며 초희에게 닿기 위해, 남자에게서 초희를, 내 동생을,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있는 힘껏 달린다. 초희
는 나보다 남자에게 가까운 거리에 있고,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할거라는 불길한 생각에 뛰고, 또 뛴다. 그렇게 먼 거리가 아닌데
도 마라톤 같기만 하다.
보호본능에 눈이 멀어 맹수에게의 거리를 자진해서 좁히고, 좁혀간다. 그리고 다행히 초희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고 안도하는 찰
나, 맹수가 사자의 앞발과도 같은 놀라운 힘으로 내 팔을 세게 낚아채며 으르렁거린다.
“내 이름은 ‘네프’, 너에게서 멀어지지 않아.”
뼈가 부러질 것 같은 압박과 그의 날카로운 송곳니, 왠지 모르게 흔들리는 그의 금빛 눈동자가 뒤섞이고, 사냥당하기 바로 직전
의 동물처럼 몸부림쳐보아도 전혀 소용이 없다. 흔들리고, 흔들리며 옆을 잠깐 보았을때 초희는 경계의 눈초리 따위는 하나도 없
이 우리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다. 그녀의 입이 병원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모양을 짓는다.
‘엄마, 꿈을 꿨어.’
파르르, 제자리에서 일초에 몇천번은 흔들릴듯 자리를 위해 싸우던 그의 동공들이 가라앉는다. 팔에서 밀려들어오던, 돌에 짓눌린
듯 온몸을 샅샅이 훑고 지나가던 통증들도 그가 압력을 제어하면서 서서히 사라져가고, 그가 맹수와 같은 포효를 멈추자 카페 안
은 우주의 참된 진공상태처럼 가라앉는다. 하나의 음악을 제외하고.
맹수는 내 팔을 살며시 잡은채로 내게 마지막 한걸음을 다가와 귀를 기울인다. 그제서야 나는 그가 듣는 것을 나도 듣고 있다는 사
실을 깨닫는다. 이 선율은 그냥 낯익은 선율이 아니라, 화음이다. 맹수가 자신의 금빛 갈기를 내 옆 얼굴에 문지른다. 그것은 놀랍
게 부드럽다. 맹수의 목에서 제어되지 않는 힘이 잠재된 그르릉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지만, 이번에는 고양이를 쓰다듬어 주었
을 때와 비슷한, 기분좋음을 표시하는 종류의 소리다.
내게서 흘러나오는 화음의 반쪽짜리 선율을 맹수는 공기 중에서 맛 볼 수 있기라도 하듯 고개를 살며시 흔든다. 차가웠던 그의 몸
에서 문득 사람의 온기가 전해져오고, 갈기라고 생각했던 금빛의 색이 다시 남자의 머리카락으로 인식된다. 그가 부드러운 금
빛 눈동자로 내 귓가에 조심스레 다시 한번 속삭인다.
“내 이름은 ‘네프’, 너에게서 멀어지지 않아.”
그러나 아무리 부드러운 음악과 홀릴것만 같은 그의 모습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 있었다. 그것은 그 상황에서 그는 내 고통과 피
를 갈구하는 또 다른 자신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다는 것.
따르릉.
맹수의 목에서 나오는 소리로는 걸맞지 않네, 하고 생각하다, 문득 나를 자신의 품안에 가둬놓고 속삭이던 그가 사라져있다는 사
실을 깨닫는다. 배경도 더 이상 카페가 아닌, 이제는 휑하게밖에 느껴지지 않는 집이다. 초희가 없는 집.
따르릉.
떼쓰는 아이처럼 울부짖는 전화기를 들자마자 젊은 의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원래 의사들이 환자의 보호자에게 직접 전화거
는 것이 통상적인 의례였던가?
“초아씨, 정말,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낮에 내 손을 은근슬쩍 잡아보려 했을때의 긴장된 거친 숨결보다도 더 지그재그로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네?”
“초희가. . . .”
그 다음 말들은 말이라기보다는 망치가 되어 내 마음을, 듣고 그것을 인식하길 거부하는 뇌의 문을, 두드리고 부수었다. 덜덜
덜, 예전에 초희와 함께 여행을 갔던 일본에서 지진이 났을때보다도 더 심각하게 손이 떨리고, 전화기를 놓친다. 기절할 힘조차 없
다.
“초아씨? 초아씨! 괜찮으세요? 초아씨! 지금 갈게요!”
수화기에서 고함치는 의사의 목소리를 뒷전으로, 나를 안정시킬 그 무언가를 위해 다급하게, 절실하게, 둘러보고 또 찾는다. 그리
고 내 눈에 들어온 물체.
탁자 위에 넘어져있는 쇼핑백에서 삐져나온 하얀색 원피스. 초희에게 그리고 나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초희가 퇴원하자마
자 그 지긋지긋한 병원복을 벗어 던져버리고 입혀주기 위해 샀던 하얀색 원피스. 꿈에서 초희가 내게 반갑게 달려오며 입고 있
던 바로 그 원피스. 실제로는 절대 입을 수 없게 된 원피스.
그것이 이성의 마지막이었다. 정신을 차렸을때 나는 이미 식칼을 들고 있었다. 지난번 가정부 아주머니가 계시지 않았을때 오랜만
에 제대로 된 음식을 해보려다, 살짝 베였는데도 굉장히 깊게 파이고나서는 초희가 다시는 내게 사용하지 말라며 차라리 외식
을 권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칼이었다.
그것으로 그어졌다기보다는 잘려진 것에 가까운 왼쪽 손목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다. 초희와 함께 보았던 분수에서처럼 뿜어져
나오는 피의 향연, 사람이 많아서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바람에 너를 실망시켰던 그때와는 다른 너만을 위한 분수.
찢어진 마음만큼이나 이젠 몸까지 함께 아프다. 칼을 눈에 박아넣은 것처럼, 뼈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노출된 손목은 늪같은 고통
을 선사하고, 나는 비명을 지른다.
이성이 있는 부분들은 모두 숨어서 관찰만 하고 있기라도 한듯, 머리 저편에서는 그만, 그만, 그만!을 외치고 있었지만, 내 의지와
는 관계없이 내 손톱은 잘려진 살갗을 붙들고 가죽을 찢으려 하기라도 하려는 듯 잡아당기고, 할퀴고, 네일아트가 피에 물들어 보
이지 않을때까지 혈관을 찾아 헤매였다.
“초희야, 백혈구가 너무 많아? 그래서 그렇게 된거야? 언니가 언니 피 다 줄게, 받아가, 언니는 건강하니까 이 정도로는 괜찮아.
얼른 가져가, 초희야, 정상적인 피가 있으면 건강해진다잖아. 응? 초희야!”
울컥, 울컥, 피가 쏟아져 웅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앉아 허우적거리며 중얼거리는 나는, 이미 집의 핏물 한 가운데에 서 있는 한초
아가 아니었다. 슬픔의 바다에, 그 물에, 그 소금에, 한없이 가라앉고 죽어가는 한초아였다. 눈이 감기고, 더 이상 뜰 수 있을거
라 생각하지 않았다.
“얼른 가져가란 말이야!”
마지막 힘을 그러모아 발악하는 목소리 위로, 부드러운 음악 하나가 겹친다. 죽으면 원래 빛이 보인댔는데 난 음악이 들리나봐. 초
희야, 언니가 금방 가서 이것 다 직접 줄게. 언니한테는 많으니까..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아.”
무엇을 억누르고 있는 듯, 반이 맹수의 소리에 잠식되어버린 비인간적인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며 다가온다. 스스로의 싸움을 하
는 듯 흔들리는 그 존재는 자기 자신의 통제력을 잃지 않으려는 듯 머뭇거리다가,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잠시나마 되찾
은 듯, 좀 더 인간적인 목소리로 그 말을 다시 반복한다. 그리고는 솟아오르는 내 피보다도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왼
쪽 손목을 핥기 시작하고, 강인한 손이 내 오른손에서 칼을 빼앗아 내동댕이친다.
“너에게서 멀어지지 않아.”
슬프게 번복하는 그 어떤 존재가 재생이 불가능하도록 망가져버린 손목을 포기하지 않고 붙든다. 뼈가 드러나고 근육이 시뻘겋
게 벌어져버린 그 끔찍한 것이 소중한 것이라도 되는마냥 다치지 않게 살며시 물은 채 핥는다. 넌 누구지? 초희가 아닌데도 나
를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해주는 존재가? 징그럽지도 않아?
할짝거린다기보다는 액체를 들이키는 소리에 가까운 그 어떤 행위, 흡혈이라고 보기엔 무언가 슬프고 어색한 부분이 있는 그 행위
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선율을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넥타르라도 마신 것처럼 흐려지던 의식이 조금씩 돌아오고,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던 몸에 힘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눈을 뜨려 나
는 애쓰고, 또 애쓴다. 내가 자신의 우주라도 되는것 마냥, 초희처럼 내 가장 부서진 부분을 감싸는 그 존재를 보기 위해.
눈을 뜨고 그 존재가 누군지 물어보려는 찰나, 서서히 돌아오기 시작한 청각에 요란한 앰뷸런스의 소리가 잡힌다. 그 찢어지는 소
리는 듣기 좋았던, 내가 한 자락 매달릴 수 있었던 그 선율을 잠식해버린다.
“누구. . .”
원래 느껴져야할 고통과 상반되는 부드러운 감촉이 손목에서 떨어진다. 그와 함께 서서히 그 어떤 힘에 의해 억눌러졌던 고통
이 돌아와, 눈을 떼기는 커녕 말을 이을 수조차 없다. 점점 가까워지는 앰뷸런스의 비명과는 또 다른 포효가 피를 머금은, 방
금 내 손목에서 뗀 입으로 쇳소리 어린 대답아닌 대답을 한다. 다시 자신과의 싸움을 시작한 목소리, 그러나 아까와는 다르게 이
젠 인간이 잠식 당하고 맹수의 목소리가 이기기 직전이다. 그 존재는 힘겹게 말을 이어간다.
“나. . .는 ‘Ne.F’.”
앰뷸런스 소리를 능가하는 위협적인 맹수의 목소리와 함께, 결국은 그가 내게서 멀어지는 순간부터 돌아오기 시작한 무기력함
과 고통의 파편들에 묻혀 정신을 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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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말]
제가 잘 하지 않는 '작품설명'과 '작품 속 작가 수다'가 되겠습니다. 2주 스타트라고 생각하니 센티멘탈해져서 그만.ㅋㅋ
드디어 많은 분들이 문의하던 "로맨스에서 호러로의 전환점"이 나타났습니다!
Ne.F는 이미 3편에서도 언급되었던 약자이지요.
혹시 잊어버리셔서 '쟤는 왜 자꾸 같은 말만 반복해?' 하시던 분들을 위해 "자신을 잃지 말라"와 "너에게서 멀어지지 않아"를 뜻함을 알려드립니다.
Ne.F 즉, 네프는 카페의 이름이자 아직 밝혀지지 않은 저 존재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초희를 귀여워하셨던 분들께는 이번 편이 최악의 줄거리 중 하나였을거라 짐작해봅니다.
그러나 라인업때부터 이미 있었던 줄거리니 초희의 살인마라며 저를 너무 질책하진 말아주세요 ;ㅁ;
초희가 죽기 직전의 설명이 적은 것은 정신적인 충격을 많이 받은 초아가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게 지냈기 때문입니다.
사실 소아에서의 백혈병은 치료되는 확률이 성인보다 높다지만, 초희는 늦둥이인데다 원래 몸도 약했지요.
여기서 나타난 것은 무려! 몇달치를 초아가 두서없이 나열하는 내용입니다.
그 동안 휘연은 어디있었냐하는 분들, 맞추어보세요 :) 좀 늦게서야 설명이 나온답니다.
이 소설에서는 스쳐가는 대화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나중에 다 짜맞춰지고 설명되게 되니 디테일이라고 무시하지말고 꼼꼼히 읽어두시면
나중에 완결에 가까워질때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흐뭇해지실수 있을거예요.
그리고 카페에서 만난 것은 정말 사자가 아닌, 공포에 질린 초아가 맹수로 '인식'하는 것 뿐입니다. 남자가 변신한게 아니구요.
제 소설에 나오는 이름들은 다 이유가 있답니다. '연인들의 호수'에 나왔던 사린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살인'을 해서 그렇게 지어졌고,
초연과 사초의 이야기도 마찬가지구요. 이번에 나온 주인공들의 이름도 마찬가지예요. 휘연의 한자는 이미 언급이 되었죠.
무슨 뜻인지 알아내신 분 계신가요? 네, '아름다운 인연' 이라는 뜻이죠. 뭐 한동안 "휘연"이라는 존재는 직접적으로 작품에 등장하지 않지만요.
이제 휘연이 나타나지 않으니 로맨스 없이 호러를 즐길 수 있겠다고 좋아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실망이 따를 것입니다 ;ㅁ;
앞으로는 로맨스가 호러에 좀 짓눌리긴 해도 있긴 있거든요.
저 프로정신 없는 의사 기억하시나요? ㅋㅋ
초아를 좋아하는것 같죠? 다음 편에서 그들은 또 어떻게 되나 살펴봐주세요. 그럼 기나긴 작가말 마치겠습니다.
읽어주시는 분들 모두 감사드리고, 또 한주를 시작하신 작가분들, 힘내서 건필하세요 :D
첫댓글 헉.. 초희가..;ㅁ; 흐엉~ 둔감한 저로서는 예상도 안되지만 정말 기대하고 있을게요^^)/
은안님 댓글 감사드립니다 :) 초희를 죽이면서 저도 줄거리대로긴 하지만 ㅜㅜ 그동안 애착이 생겨서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요. 다음편도 기대해주세요 *ㅁ*
초희는 예정대로 죽었구요. 설명을 열심히 읽었으나 아둔한 저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꺄호. 내일 또 뵈요.^^
벌써 일주일 연참을 넘기고 이주째로 접어들었네요. 아진유씨님 참 수고하십니다. 건필하세요 :)
동맥에서 처음 피를 뽑아본 날, 혈관이 생각보다 얼마나 더 깊숙한 곳에 있었는지 새삼 손목을 긋고 자살하는 사람들이 독하다는 생각이 들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불쌍한 초아가 힘든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그리고 귀여운 초희... 잘 가, 안녕. 온새미로님, 작가의 말도 잘 읽었습니다.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이 내가 바라는대로 생각해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이해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보다 그냥 나름대로 상상할 여지를 주는 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건필하세요~! ^^*
손을 긋는다기보다는 자르듯 해야 죽는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습니다. 대단하지요, 손목이 너덜거릴 정도로 삶에 대한 허무함을 느끼고 있다니. 사실은 마지막에 모조리 싹 다 모아서 밝히려고 비축하고 있어요 *-_-* 이제 차마 죽일 수 없는 너도 은근히 많이 진도가 나갔고, [엄마. .]도 종점을 눈 앞에 두고있네요. super21s님 건필하세요 :)
어디까지가 환각일까요? 아~ 어지러~~~ ㅠㅠ
이 다음편에서 금방 밝혀지게 된답니다 :) 하얀코끼리님 댓글 감사드려요.
야근 하고 자기 전에 읽는건데 오늘 잠은 다 잤네요 ㅜ_ㅜ ㅎㅎ 이제 게임 스타트라 너무 기대 되는데요? 작가님 드디어 본디 호러의 기운이 나타나는건가요?^^ ㅎ 네프의 의미 그리고 그 의미가 화신이 된듯한 초현상.. 작가님의 4차원(?) 세계관이 펼쳐질 다음 기대하죠 ^^
호래이타고님 오랜만입니다 :) 야근까지 하셨다니 힘드셨겠어요. 이제부터는 호러와 로맨스가 반반 정도 될 예정이랍니다. 힘이 되는 댓글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많은 응원 주세요 XD
결국 초희에게...ㅠ 초아가 손목을 긋고 절규하는 장면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툭 떨어지고 마네요ㅠ 이제 호러물의 세계로 빠져들게 되겠군요. 마지막까지 건필하세요^^
초희는 초아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했는데, 사라져버렸으니 자살시도를 하게 되었지요 ㅜ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D
너무 탄탄한 스토리인것같아요. 회사에서 보고있는데 덕분에 시간이 너무 잘가네요. 잘 읽고 있습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세바라기님 *_* 재미있게 봐주세요.
우아아... 디게 꼼꼼하다..... 재밌어요!!!!